무더위와 아버지
우리가 어릴 적 원동국민학교 시절에는 해마다 홍수요, 연연이 가뭄이었다. 불볕더위 속에 진행되는 교실수업은 땀이 이마에 솟았고 목 줄기를 타고 내려왔으며 등줄기로도 흘러 러닝셔츠를 적셨다. 삼복 무더위에 지쳐선지 간밤 잠 못 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찜통 와중에 조는 아이도 있었다. 선생님은 아예 책상에 엎드려 한잠씩 자도록 권유하셨다.
뉴스에는 매번, 가뭄에 지하수를 개발하는 소식을 알렸고 홍수가 난 피해지역 소식과 그에 따른 수재민과 이재민 돕기 운동이 매년매번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우린 해당이 아니 되겠지만 그 시절도 남의 이야기 같은 피서객들이 있었다. 이웃에 사는 젊은 아주머니는 한 철을 벌면 일 년을 산다는 여름 장사를 하러 돈을 빌려서 대천해수욕장엘 갔다고 말하는 걸 듣고 아, 피서라는 게 있구나 하고 알게 됐다. 여름이 지날 무렵 대천에서 돌아온 아줌마는 해수욕장의 인파와 짧은 수영복을 입은 여인들이 등장한 흑백 사진들을 늘어놓고 동네 아주머니들과 이야기 잔치가 벌어졌다. 어려서 그게 피서라는 건지는 몰랐었다.
다만 집안 식구들이 그 뜨거운 여름날 보문산엘 갔었고 어느 절의 어두운 굴에 들어가 호수 같은 곳을 배를 타고 돌아나온 적이 있어 그 것도 피서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곳이 이후에 보문산 개발로 아쿠아 수족관인지로 바뀌었다 들었다.
무더운 여름날로 기억된다. 아버지는 삼베로 지은 상하의를 착용하시고 당시 보사부장관이 실시하여 면허증을 주는 시험에 합격하여 한약방을 개업하셨다. 응시생들은 위한 강습회에는 강사로 초빙되어 가셔서 동의보감 원본, 방약합편, 변증합편, 본초강목 등의 해석이 어려운 부문을 강의하셨다. 당시는 번역본이 없었고 모두 원문 강의였다.
때로는 유명한 역술인 백명기 선생이 가져온 중국의 역서(易書)를 번역해주셨다. 지금과는 다르게 예전의 한약방은 진맥을 하였고 침도 시술하였고 약첩도 처방 조제하였다.
무더운 여름 날 이른 아침 보문산 아래, 부사동 수인당한약방은 문을 죄다 활짝 열면 동네사람들이 먼저 들어와 자릴 잡고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에 택시 한 대가 약방 앞에 멈췄다. 건장한 청년 등에 업히어 환자가 들어왔다. 그는 침을 맞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 일어나 걸어서 나갔다.
구안와사(口眼喎斜)로 입이 돌아간 얼굴에 침을 꽂은 환자가 거울을 보며 " 어어, 입이 돌아오네, 돌아와 " 하고 외쳤다. 잠시 후에 네다섯의 청년들이 발버둥 치는 한 젊은이를 팔다리 따로따로 잡고 약방으로 들이닥쳤다. 하도 저항이 거세 기둥에 묶도록 하고 침을 놓으셨다. 잠시 후에 제정신이 돌아온 청년은 나가서 소주와 오징어를 사가지고 들어와 인사를 하고 갔다. 아버지는 받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굳이 놓고 갔다. 의례이 침은 인술(仁術) 이라 하여 돈을 받지 않았다.
약도 오늘날처럼 한 제에서 두 제씩 무리하게 안기듯이 하지 않았다. 모든 약은 독성을 가졌으므로 반드시 해독제 감초를 넣어서 신중하게 꼼꼼이 점검하였다. 따라서 빠질 수 없는 ' 약방의 감초 ' 라는 말이 생겨 나왔다. 그래서 1첩, 3 첩, 5 첩 정도를 홀수로 복용하여 보고 그 반응과 경과를 분석해 보고 기처방에 약재를 가감하기도 하고 처방을 바꾸기도 하셨다.
한동네에 사는 손형식이는 경주 수학여행에 가서 배가 아픈 반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 가 맹장 수술 하는 장면을 보고 왔다.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형식이가 배가 아팠다. 그 시절의 병원 시설에서는 오늘날처럼 무균수술실로 차폐된 엄격한 시설이 아니고 좀 개방된 더구나 한밤중이거나 새벽녁 긴급환자이였기에 커튼 하나 사이로 수술장면을 우연히 보았나 보다. 병원에는 죽어도 안 간다고 우기다 정택이네 약방에는 간다고 해서 왔다. 아버지는 약을 두 첩을 지어주셨다. 정확히 충수염증 약을 먹고 나았다.
그러나 물론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왔지만 대부분 돈 대신 감자나 보리쌀을 가져왔고 혹은 무료로 약을 지어주셨다. 어느 환자는 손목만 내밀고 “ 내가 왜 왔는지 알아맞혀 보라”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웃으시다가 잠시 후에 팔목을 잡고 진맥을 하셨다. 아버지께서 진맥 결과를 해설해 주자 감동하여 " 맥에는 참 귀신이시라"라고 환자는 말하고 치료를 받고 돌아갔다.
이런 장면들이 동네 사람들에게는 참 신기하기도 하고 흥미로운 일이 자주 벌어지는 약방이 그 나름의 의미 있는 눈요기의 목격 현장이 되었다.
삼복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 날 충남대학교 강총장과 농대 황봉선 학장과 박정희의 한글전용화를 반대하다 파면된 유정기 교수, 이렇게 세 사람이 수원고농 동창 및 교직동료였던 아버지가 약방을 하신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고 방문하였다. 갑작스러운 방문객에게 아버지는 매우 반가워하셨고 막걸리를 받아 오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술상을 준비하셨고 나는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 도가에 뛰어가 사들고 왔다.
이때 육각모를 쓰고 회색 가사를 입고 염주를 목에 길게 걸쳐 늘어뜨린 수염이 긴 도인이 오셨다. 지나다 자주 약방에 들려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등을 화제로 담소를 나누고 가시던 분이었다.
“ 오늘은 권 선생님에게 얼마나 돈이 들어오는지 알아봐드리지요 ” 하고 육효가 들어있는 원통형 통을 손에 쥐고 흔들어 작은 구멍에서 육효괘(六爻卦)가 그려진 가는 대나무 살이 위로 솟구치도록 했다.
그 중에 한 개씩 세 개를 아버지는 뽑으셨다. 대나무에 그려진 주역(周易)의 괘를 읽으신 팔각모의 노인은
" 오늘은 돈이 오(五)자로 들어오겠다"라고 말하셨다. 이윽고 약방문을 닫을 때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 그 노인 점괘가 참 신기하다. 1500원, 2500원, 5000원 딱 맞는구나. 안 되겠다. 도둑질만 빼고 다 배우라는 말이 있다 ”
그리고는 주역해설이 되어 있는 낡은 책을 꺼내시고 아버지의 설명과 지시에 따라 육효점을 반복 연습하였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 이상하구나. 나는 뭐든지 한 번만 보면 되는데 너는 어제 봤던 데를 또 들춰 본다 ” 고 그러셨다. 우리는 열심히 주판을 놓고 아버지는 암산으로 하셨는데 더 정확하셨다.
이때 어머니가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 아니 어린 아이를 주역의 점술을 가리켜서 제갈량 이를 만들려고 그러시오 ”
어머니의 항의와 반대로 나의 주역 수업은 그걸로 중단되었다. 훗날 길을 가다 노점상 책 진열 속에서 눈에 띈 손자병법과 주역책을 싸게 사다 홀로 독학도 하였다. 길가에서 산 싸구려 책 손자병법은 간혹 오타, 오자가 있어 정자로 고쳐가며 읽고 독파하였다.
이 육각모 노인은 복장 차림새가 특이하셔서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가끔 원동국민학교 교장실을 방문하시고 나오시다 나와 마주쳐 인사를 드리자 반갑게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가시던 분이셨다. 문화동 엄기섭이 집에서 돌아오던 충남대 긴 뒷길에서도 마주쳐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는 약방문을 흘려서 쓴 글씨체 초서(草書)로 쓰셨지만 약장의 서랍들은 모두 정자인 예서체(隸書體)로 표기되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약 처방을 써주시면 약장에서 약서랍을 빼어다가 약재를 저울로 달아 약첩을 지었다, 그리고 약첩을 안정되게 이쁘게 접고 잘 싸야 20첩 약 전체를 신문지로 포장하고 끈으로 묶기가 쉬웠다.
아버지는 문왕과 태공망(太公望)이 부국강병책을 논하기 위해 만나는 첫장면의 문왕왈 제어천 하실 제로 시작하여 문왕이 태공망에게 묻는다. 어떻게 해야 나라가 부국이 되고 강병이 되겠냐고 묻고 태공망이 답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육도삼략(六韜三略) 중 육도(六韜)를 읽고 해설하도록 반복 지도하셨다. 육도에는 가장 감동적인 말이 나온다.
非一人之天下(비일인지천하), 乃天下之天下(내 천하지천하)
천하는 군주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고 천하 만민의 천하라는 인상 깊은 잊을 수 없는 말이 나온다.
ㅡ 第 二篇 武韜 ㅡ
육도 책 읽는 소리에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유리창너머 약방 안을 흥미롭게 들여다보았다.
훗날 손형식이와 옛이야기를 할 때 " 야, 저 거대한 병원들이 맹장염에 약 두 첩을 먹고 나으면 어떻게 운영이 되겠냐? 그리고 수술이 발전하겠냐. " 하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