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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오허호텔 찬팅. 2인용 식사를 차려놓았는데 죽, 낭, 삶은 계란, 발효두부, 땅콩자반, 볶음면, 미역줄기무침 등등.
4월 28일 일요일. 아침을 먹고 어제밤에 빨아놓은 런닝셔츠, 팬티, 양말을 배낭에 집어넣고 체크아웃하러 내려왔다.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한주(汉族)로 보이는 기품있는 중년여자를 만났는데 영어로 하이 하고 인사를 한다. 폼세로 보아 어제 저녁에는 못본 주인인 것같다. 큰 장사는 이렇게 굴러온 돌인 한주 차지라 박힌 돌인 위그루인이 앙앙불락한다는 말을 나중에 안과장으로부터 들었다.
아홉시 반에 가오창구청(高昌故城)을 향해 줄발했다.
가는 길목에 석유시추기가 눈에 띄고 사진에서는 희미해서 잘 안보이지만 방아깨비 다리 놀림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는 산유펌크가 줄지어 있다. 투루판에서 하미(哈密)까지 500여km에 산유펌프가 이어진단다. 크라마이(克拉玛依)유전이다. 펌핑 한번 왕복에 5달러 어치 나온다고 5달러짜리 기계란다. 매장량도 공개한 적 없고 번돈은 중앙정부 차지라 열 받은 위그루인은 폭탄 던지고, 체념한 자는? 200년 내로는 독립할 가망이 없다고 말한다는 안과장의 설명이다. 원유가 바닥나야 내놓지 않겠냐는 말이다. 톈산의 硅化木이나 호탄(和阗 허톈)의 옥이 보물이던가? 원유를 위시한 천연개스, 석탄, 그외도 풍부한 광물자원이 진보(眞寶)이거늘 신장을 어찌 내놓으랴.
위그루인의 동네를 지나는데 마침 장날이라 차마가 많은데다 젊은이들의 길거리 농구시합을 구경하느라 길이 꽉 막혔다. 간혹 혼혈도 눈에 띄지만 위그루인은 중국인과 잘 섞이지 않는 것 같다. 사는 동네도 자기네끼리다. 중국속의 이방인 그게 위그루인 것 같다. 아니, 그들은 중국인을 이방인으로, 침입자로 보고 있는 게 아닐까.
길을 잘 아는 자오가 되돌아나와 다른 길로 옛 가오창궈(高昌囯)의 유허지에 닿았다. 여기는 한우디(汉武帝)가 슝늬(匈奴)를 내치고 군대를 배치하여 둔전하던 곳인데 한이 멸망하고 중원이 정신없는 틈을 타 460년에 가오창궈라는 나라가 생긴다. 여러 성씨가 왕자리를 이어가다 640년에 탕(唐)의 침공을 받고 멸망했다. 당시의 인구는 37,000 정도, 승려가 6,000이었단다. 식수는 물론, 농사에 필요한 물이 근처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쟈오허일테지.
입구에 들어서면 나귀가 끄는 마차가 기다린다. 마차는 1km 정도 들어가서 종점에 선다. 여기서부터 도보다. 물론 처음부터 도보가 가능하다.
동화에 나옴직한 황토로 빚은 나라. 황토는 우리도 낯설지는 않은 재료다. 60년대까지 우리가 살았던 집도 대부분 황토로 된 벽이었다. 하지만 기둥과 대들보, 중방이 나무였는데 여기는 모두 황토다. 황토벽돌로 쌓고 황토몰탈을 발랐다. 강우량이 거의 없는 점을 생각하면 지붕은 없어도 그만일 것 같지만 모래바람을 생각하면 아니다. 현재로는 지붕이 모두 뚫려 있어 과거의 모습이 궁금하다.
탕의 솬쟝(玄將)스님이 톈주(天竺) 즉 인도를 오갈 때 여기서 머물고 이 법당에서 설법도 했단다. 오른쪽이 설법장소인데 벽에 나있는 구멍은 나무기둥을 박아 구조물을 설치하는데 흔히 사용되었다.
다음에 들린 곳은 아스타나(阿斯塔那) 구무(古墓). 3~8세기 이 지역 중심부였던 가오창의 관민의 공동묘지다. 아스타나란 말은 위그루말로 수도란다. 몇몇 출토묘를 보니 당대에 돈깨나 있고 힘깨나 쓰던 인물의 무덤이다. 죽음을 삶과 떼어 놓지않고 삶의 연장선에 놓은 옛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우루무치보우관에서 본 唐대의 기골이 장대한 장군의 미이라도 여기서 나왔다. 강우량이 연간 16mm 밖에 안된다니 미이라가 될 수 밖에. 그의 묘실벽화는 인생의 다섯 단계를 채색으로 그렸는데 독, 옥인, 금인, 석인, ?(나머지 한개는 기억나지 않는다)으로 형상화했다. 독은 탄생으로 채움을, 옥인은 유년기에 받은 사랑을, 금인은 청장년기의 존귀함을, 석인은 노년인생의 중(重)함을 표한단다. 또 하나의 출토묘는 부부합장인데 전실벽화는 6폭병풍 형식이다. 멀리 있는 산, 둥실 뜬 구름과 날아다니는 제비, 난과 백합 그리고 오리, 원앙, 꿩 등의 새종류. 모두 일상생활의 여유와 풍요의 상징이다. 특이한 것은 묘실 작업인부의 명부가 함께 있었다고 한다.
(좌, 중)상체는 여자이고 하체는 뱀인 상징물, 우루무치보우관에서 그림으로도 보았다. 이런, 죽음과 관련된 상징 같은데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우) 5m 이상의 땅속에 32m 길이의 묘실을 땅굴을 파서 조성했다. 굳은 황토라 단단해 무너지지 않는다.
이어서 훠옌산(火焰山)으로 향했다. 삼장법사와 손오공, 사오정의 톈주 여정에 등장하지 않던가. 아니나 다를까, 맞은 편에서 삼장법사 일행이 훠옌산을 바라보고 있다. 한무리의 사람들이 웨딩촬영에 열심이라 그냥 지나쳤다. 삼장법사의 시선을 따라 산만 바라보면서...
아무리 똑딱이 카메라지만 촬영솜씨가 좀...규석을 다루는 회사에 오래 근무한 덕분에 아는 척 좀 해보자. 다이아먼드 다음 가는 강도를 가진 것이 규소라 규석(SiO2)질의 암석이 풍화가 가장 더디다. 거기에 철분(FeO2)이 많이 섞이면 산화되어 붉은 색을 띈다. 햇빛을 받는 시각과 각도에 따라 색상이 다르다. 석양을 수평으로 받으면 가장 붉어보인다. 미국의 아리조나, 유타에는 기기묘묘한 형상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유타의 브라이스 캐년(Bryce Canyon Natl. Park)이 내눈에는 가장 압권이 아닌가 싶다. 이런 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한다지 아마.
길의 막장에 바이즈커리커(柏孜克里克) 천불동(千佛洞)이 있다. 그리 유명한 굴은 아니지만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수목이 있어 사막을 건너온 여행객의 안온한 휴식처가 되기에는 충분한 오아시스다. 부처님의 가호에 감사하며 하나, 둘, 부처님을 모신 굴을 조성한 것이 83개에 달한다. 이 경우 천불동은 千기의 부처가 아니라 중국인 특유의 많다는 표현일뿐이다. 그중 40여개의 굴에 벽화가 있단다. 굳이 굴이라고 하는 이유는 석굴이 아니라 단단하게 굳은 황토를 파내서 굴을 조성하고 부처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토굴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가장 훼손이 심하다. 이슬람의 영역이다 보니 고의적으로 불상의 눈을 파내고 칠해놓은 흙을 떼어냈다. 주민들은 후광에 장식된 금을 떼어 가고 한때 러시아인들도 금사냥을 했단다.
천불동 전경. 굴속은 촬영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고 네개의 굴만 공개하고 있다.
복원,보수공사중이라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도 막혀있다. 계곡에서 물흐르는 소리만 들렸다.
알캄(艾力开木 아이리카이무)라는 위그루(维吾尔 웨이우얼) 식당에서 점심으로 양고기 비빔밥을 먹었다. 이집 양꼬치는 살점도 두둑하고 육류를 별로 즐기지 않는 나로서도 맛이 환상적이다. 왕푸징 샤오츠지에의 양꼬치는 정말 아니다.
미국이 독립전쟁하던 시기에 중국대륙에서는 乾隆이 통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신장을 淸의 수중에 넣었다. 투루판의 위그루 지도자 어민허줘(额敏和卓)를 郡王으로 봉하여 그의 충성과 협력을 이끌어낸 췐룽의 수완이 대단하다 할 수 밖에 없다. 그의 가문은 6대 9인의 세습으로 淸末까지 왕의 자리를 이어갔다. 그는 83세의 나이에 淸王朝의 은혜에 보답하고 알라신의 뜻에 따라 자신의 업적을 후세에 전하기위해 37m 높이의 수공타(苏公塔)를 세웠다. 가문의 왕권과 종교권의 상징이다. 신장내의 이슬람 옛 건축물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탑이란다.
수공타(혹은 额敏塔 어민타)를 한바퀴 휙 둘러보고 대운하, 만리장성과 더불어 중국고대3대토목공사의 하나인 카레즈(Karez)를 구경하러 보우관에 들렸다. 수천년동안 5,000여km의 지하수로를 파서 톈산의 눈녹은 물을 끌어와 식수와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투루판을 번성시킨 끈기와 지혜가 놀랍다. 지하수로를 판 이유는 증발을 막기 위해서다. 67만의 투루판 인구가 지금도 이 물을 쓰고 있다.
이렇게 지하수로를 팔 수 있는 것은 이 지역의 토질과 기후 때문이다.
공사 모형
투루판에서는 어디나 포도나무 천지다. 일조량이 많아 당도가 다른 어느 지역도 따라오지 못한단다. 여분의 포도는 말려서 건포도를 만든다. 이슬람이라 포도주는 만들지 않는 것 같다. 건조장은 벽을 오른쪽 사진처럼 통풍이 되게 벽돌을 쌓아 포도가 서서이 건조되도록 한단다. 농원 근처에는 이런 건조장이 줄지어 서 있었다.
쟈오허구청(交河故城) 관람이 오늘 투루판 여정의 종점이다. 쟈오허는 우리 식으로 하면 두물머리다. 쟈오허가 여기에 이르러 갈라져 이곳을 감싸며 흐르다가 다시 만난다. 주위보다 높은 지대에 앉아 사방이 바라보이는 섬인 셈이다. 길이 1,650m, 폭이 300m. 唐대에 인구 7,000 정도의 쳰궈(前囯)라는 나라가 있었단다. 가오창처럼 황토로 빚은 건물이다. 가오창궈의 침공으로 멸망했단다. 오순도순 사이좋은 이웃으로 살 수는 없었을까? 비슷한 처지에 무얼 더 챙기겠다고 쳐들어와서 아이와 여자들을 비명 지르게 했을까?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다지만 그런 이야기속에서는 참담함을 느낀다. 위에 올라가서 탁 트인 풍치를 바라보면서도 마음이 무거움은 그 때문인 것 같다.
입구에서 경사진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규모가 자그마하나마 하이랜드다. 오른쪽 사진은 왕의 거처, 왕궁인 셈이다.
1,700평 정도의 터를 차지한 大佛寺라는 절도 있었다. 오른쪽에 부처가 있던 자리의 흔적은 있지만 부처는 간데 없다. 부처의 법력도 이 자그마한 왕국을 지키는데는 도움이 안된 모양이다.
위그루 아주머니의 가게에 앉아 수박 하나를 50위안에 사서 나눠먹으며 갈증을 풀었다. 시간이 이르지만 투루판역 가까운 식당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했다. 자오광룽은 집에 가서 식사하겠단다. 사흘간 함께 해서 고맙다는 인사와 악수로 헤어졌다.
안과장도 우리를 류위안(柳园) 가는 기차에 태우고 우루무치로 돌아간다. 우리는 둔황(敦煌)이 목적지인데 류위안에 내려 육로로 이동해야 한다. 안과장이 건네준 차표를 꺼내보니 우루무치-류위안으로 되어 있고 가격은 315위안이다. 서울역 차표로 광명역에서 타는 셈. 차표 사기가 만만치 않단다. 베이징에서 여권사본을 팩스로 보냈고 여권번호가 차표에 찍혀있다.
밤 열시반 기차라 시간이 널널해 식당에서 중국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안과장도 베이징의 민박주인처럼 무단장(牧丹江) 출신이고 결혼해서 광시(光西)에 산단다. 그나마 조선족이 모두들 동북지방을 떠나버리면 통일후에 우리가 만주를 어떻게 되찾겠느냐고 물으니 피식 웃기만 한다.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는 뜻이렷다.
역사로 들어가자면 차표와 신분증을 보이고 짐은 엑스레이투시기를 통과해야 한다. 대합실은 대기승객으로 만원이다.
기다림에 지친 승객들이 카드놀이를 한다. 침대칸의 4인실.
예정시간보다 15분 늦어진 K1352 열차를 탔다. 좌석을 찾아가니 아들 자리에 다른 남자승객이 차지하고 누어있다. 이런, 자리를 두고 시비라도 생기려나 하고 상황을 보니 그게 아니다. 발목부터 발끝까지 캐스팅을 해서 상단으로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며 아들을 상단으로 올려보내고 그와 통성을 했다. 런(任)이다.
내친 김에, "怎么到伤了你足 (발 어떡하다 다쳤소)?"하고 물으니 대답이 장황하여 听不懂(못알아듣는다). 할 수 없이 한국인임을 고백하고 볼펜과 수첩을 꺼내든다. 그리고 18번, "你说多, 我听不懂, 可是 你说少还有慢一点儿,我听得懂(당신이 길게 말하면 못알아듣지만, 짧게 그리고 좀 천천히 하면 알아들어요)."을 읊는다. 우루무치에서 강철공장을 1년 다녔는데 쇠뭉치가 떨어져 발을 다쳤단다. 나이를 직접 묻기 뭣해서, "你属什么(무슨 띠지요)?" 하고 물으니, "老虎(호랑이)." 이란다. 호랑이띠면 만으로 서른 아홉이다. 나와 동갑인 아버지, 부인, 세 아이와 허난(河南)에 산단다. 집에 가는데는 이 기차로 40시간 걸린단다. 만 서른 여덟에 아직 장가갈 생각도 안하는 아들 들으라고, "어이, 너보다 한살 위인데 열일곱 큰딸이랑 아이가 셋이래." 했지만 자는 건지 자는 척 하는 건지 기척이 없다.
하기야 밤은 깊었고, 하루종일 걷고 지루하게 기다린 시간의 피곤이 몰려와 나도 하품이 나서 실내등을 끄고 침대 시트속을 파고 들었다.
첫댓글 고창고성,화염산---예전 뜨거운 햇볕을 가리려고 우산 쓰고 여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부딪치며 하는 중국어로 실력 많이 늘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