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 쌓인 남한산성 병자호란 당시, 수많은 군졸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희생되었다 | |
ⓒ 이정근 |
"8년 전 동지섣달 추운 밤. 칼바람이 불어오는 그 겨울밤. 입은 얼얼하고 손가락이 곱아오는 살을 에는 밤. 죽어가던 군졸들이 뭐라 하고 죽어갔을까? 국가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죽어간다고? 아니야, 아니었을 거야. 그럼 나랏님을 위하여 죽어간다고? 것도 아니었을거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미어져 왔다. 배고픔에 쓰러지던 군졸과 추위에 죽어가던 병사들의 환영이 몰려와 '한 치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대신들과 용렬한 임금 때문에 우리가 죽었다'라고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청나라와 화친해야 한다."
"청나라는 배척해야 한다."
산성의 고함소리가 메아리 되어 가까이 왔다가 바람에 부셔졌다.
"백성들은 춥고 배고프고 고달픈데 화친하자고 큰 소리쳤던 놈들은 청나라에 아부떨기 바쁘고, 배척하자고 목청을 돋웠던 놈은 낙향하여 큰소리 떵떵 치고, 아무도 책임지는 놈이 없잖아. 이 나라는 참 엿 같은 나라고 이 세상은 지랄 같은 세상이야. 결국 지놈들 잘 먹고 잘살기 위한 개소리였어. 쳐 죽일 놈들..."
얼마 후, 제법 큰 개천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숯내다. 좌우를 살펴봤다. 징검다리가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너 둑방에 오르니 눈앞에 삼전들이 펼쳐졌다. 세종시대 세 구역으로 나눠 목장으로 사용했던 삼전들은 황량했고 말 한 마리 없었다.
▲ 삼전도비 용 두 마리가 조각된 머릿돌 아래 '대청황제공덕비' 라고 새겨져 있다 | |
ⓒ 이정근 |
왼쪽으로 발길을 돌려 목멱산에 방향을 맞췄다. 길동무도 없고 목이 마르다. 주위에 인가도 없다. 얼마를 걸었을까? 길에서 약간 비켜선 허허벌판에 비각이 우뚝 솟아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모임지붕에 돌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다. 출입문에는 자물통이 채워져 있고 비각 안에는 거북이 받침돌 위에 커다란 비석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이것이 북한강에서 끌어 오는데 두 달이 걸렸다는 장대석이구나."
놀라웠다.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자세히 살펴봤다.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는 머리 돌 아래 처음 보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해독할 수가 없었다. 옆에도 역시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뒤로 돌아갔다. 전면과 같이 용 두 마리가 섬세하게 조각된 머리 돌 아래 '대청황제공덕비'라 새겨져 있었다. 순간, 꺽쇠의 심장이 멎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내 나라 내 강토를 짓밟은 적 괴수를 공덕으로 칭송하다니? 이런 쳐 죽일 놈들이 있나? 그것도 청나라의 요구가 있기 전에 공덕비를 세우겠다고 자청한 조정의 대신들. 공사를 지연시켜 청나라의 독촉을 유발케 하여 청국의 강요에 마지못해 공덕비를 세웠다는 모양새를 취하려는 임금. 알아서 기는 대신들과 잔머리 굴리는 임금. 모두 쓸어버려야 할 대상이지 살려둘 이유가 없는 쓰레기들이다."
주먹을 불끈 쥔 꺽쇠가 입술을 부르르 떨렸다. 정축출성이란 미명 아래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는 삼전도 수항단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하고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청나라의 우월적 지위에서 체결된 조약문 어디에도 비(碑)를 세운다는 조항이 없다. 비변사의 주청을 받아들인 인조가 청나라에 제의했다. 스스로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우겠다고.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인조는 청국에 잘 보이고 싶었다.
알아서 길테니 예쁘게 봐주세요
청나라는 환영했다. 멋진 제안이지 않은가. 자신들이 짓밟은 조선 땅에 전승기념비를 세운다는 것 환상적이지 않은가. 조약 체결 당시, 황제가 수도를 비워놓고 조선 정벌에 나섰기에 심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황망한 상황에서 자신들이 놓친 것을 찾아주고 스스로 세우겠다니 기특하고 갸륵했다.
'대청(大淸) 숭덕 원년 겨울 12월, 황제가 우리나라 정벌에 나서 동쪽으로 향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우리 임금은 남한산성에 피신하였으나 황제는 신민을 죽이지 않고 덕을 폈다'로 시작되는 비문을 읽어내려 가던 꺽쇠는 비문을 짓고 '글을 배운 것이 한이로다'라고 탄식했다던 이경석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았다.
"이경전, 조희일, 장유. 당대의 문장이라는 이놈들. 좋은 일은 지놈들이 앞장서고 궂은일은 아랫사람에게 전가시키는 비열한 놈들. 퇴, 퇴, 퇴."
비각에 침을 뱉은 꺽쇠가 발걸음을 돌렸다. 나루터 가는 길이다. 민회빈이 끌려갈 때 목 없는 시신이 나딩굴고 타다 만 주검이 너부러져 있던 길이다. 그 때와 같은 참혹한 광경은 없었지만 난리에 불타고 부서진 집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 송파나루터 한양과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나루터다. | |
ⓒ 이정근 |
나루에 도착했다. 강가에는 빈 배 한척이 매어있고 사공은 없었다. 한 때, 광진을 산하에 둔 진(鎭)으로 도승관이 있는 한양 동남부의 군사 요충이었지만 군졸하나 보이지 않았다. 송파진은 폐쇄되었고 나루터만 있었다. 이는 군비를 갖추지 못하게 하는 청나라의 간섭도 있었지만 조선은 군대를 조직하고 운영할 능력이 없었으며 장정들은 대명전투에 청나라가 징발해가고 없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동재기 나루터-동작나루터
널다리-판교
달래내 고개-달아와 달오 두 남매의 슬픈 전설이 서려있는 고개. 월아천 고개.
새말나루터-사평리 나루터. 오늘날 강남구 신사동
숯내-탄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번 땅에 찧는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