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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원문 글과 사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십시요.ㅠㅠ
https://blog.naver.com/ktusjye/221395601479
갑작스런 사유로 일정이 취소되었다.
주위는 분주한데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좀이 쑤신다.
이러저런 궁리를 하던 중
지난 주 올랐던 계양산 넘어 뻗어있는 산줄기를 떠올린다.
봉우리 한 곳에 정자가 눈에 들어왔었다.
거리를 가늠할 수 없어 계양산 산림욕장에서
발길을 돌렸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았었다.
조금 일찍 길을 나선다.
서울역에서 공항철도로 환승하여
검암역에서 다시 인천지하철 2호선으로 환승,
가정역에 하차한다.
3번 출구로 나와 건널목에서
오른쪽을 보니 녹빛 산이 누워있다.
드넓은 지역에 휀스가 둘러쳐졌다.
주거, 상업, 행정 복합타운 건설을 추진중인
루원시티가 들어설 지역에 본격적인 부지조성 공사가 시작될 예정이다.
기반시설인 도로가 어지럽다.
임시보행로를 따라 봉수초등학교 근처에서 시작되는
들며리를 찾아가는 기분이 불안하다.
산쪽으로 둘러쳐진 휀스 벽면에
등산로입구 표지를 확인하니 안도가 된다.
휀스를 뚫어 산에 오르는 길을 만들어놓았다.
입구를 들어서자 곧바로 등산로가 시작된다.
10월도 어느새 마지막 날,
쌀쌀한 기운에 말라 죽어가는 풀숲이 수의를 입은듯 갈빛을 띄었다.
루원시티 사업부지가 정지작업을 마치고
본격적인 공사를 기다리며 한숨을 돌리고있다.
밑에서 올려다보며 가파른 오르막을 예상했는데
역시 급한 경사가 이어진다.
이 백 여미터 오르막을 빡세게 오르니
나무 사이로 파란하늘이 언뜻 비치기 시작한다.
능선에 올라서자 통신탑이 높이 솟아있다.
능선길은 완만하게 이어진다.
어디에선가 출발한 길이 합류한다.
실타래같은 길이 봉우리로 향한다.
봉우리에 닿기 전
길가 쌓아놓은 돌무덤이 바다넘어 먼 곳을 오매불망한다.
아래 훤한 곳이 루원시티부지다.
그 뒤 아파트단지,
그 너머 보이는 산 사이로 서해바다가 보인다.
산봉우리에 닿는다.
천마바위 안내문이 보인다.
하늘을 향해 비상한 듯한
말발굽이 자연적 현상으로 새겨진 바위가 있다.
하늘을 향해 힘차게 달려 도약하는 듯한
발자국이 허공을 향해 방향을 잡고 있다.
그래서 이 산에 天馬山 이라는 지명이 붙여졌고
그런 전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이 천마바위다.
이곳에 천마가 살았다는 전설,
이 산 남쪽아래 아기장수가 태어났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이 중 아기장수와 관련된 전설이다.
조선 중기 이곳 산기슭 합천 이씨 문중에
아기가 태어났다.
이 아기는 태어난지 일주일 만에 걷고,
얼마 후 양 어깨에 날개가 돋아 천장을 날아 다녔다고 한다.
그 당시엔 이런 장수가 위인이 되면
후일 반역을 염려해 나라에서
그 집안 일족을 모두 없앴기 때문에
아기의 부모들은 후환이두려웠다.
부모들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 아기를 붙잡아 다듬이돌로 눌러 죽이려 했다.
그 때 천마가 날아올라 큰 소리로 울며
아기와 집 주위를 맴돌며 구슬프게 울어대다가
아기장수의 숨이 끊어지자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마땅한 바위가 보이질 않는다.
주위를 더듬는데 맞은편에서 부부가 오고있다.
혹시나싶어 물어보았지만 알지 못한다.
내 물음에 궁금증이 더해진듯
부부도 주위를 둘러보며 오래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멀리 보이던 정자를 찾아 능선길을 걷는다.
멀리 계양산 통신중계탑과 계양정이
닿을수 없을 듯 아스라하다.
그 앞산 봉우리에도 정자가 보인다.
천마산 정상이다.
조금 더 올라선 봉우리에
올려다보이던 사각 정자가 나타난다.
인천 종주길 연두색 이정표가 싱그럽다.
인천항, 청라지구,영종도, 강화가
한눈에 펼쳐진다.
넓게 많이 담으려니 오히려 답답한 느낌이다.
마침 등산객이 있어 사진을 부탁해 담는데
많이 어색한 포즈다.
군부대사격장이 오른쪽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듯
우회경고문이 붙어있다.
'사격 중(적색깃발 게양 시)에는
피탄의 위험이 있으므로
등산객의 안전을 위하여 우회하시기 바랍니다.'
능선길 왼쪽, 화살표방향 바로 옆으로
능선을 내려서 우회하는 계단이 있다.
능선쪽으로는 차단봉이 설치되어있다.
오늘은 훈련이 없는듯
차단봉이 열려있어 능선을 따라간다.
오른쪽 계곡 기슭에 군부대가 보인다.
잠시 후 닿은 봉우리에 게양대가 보인다.
아마도 훈련 중 접근을 막는
붉은깃발을 게양하는 것 같다.
어디에서 부턴지
오른쪽으로 철조망이 쳐져 따라오고 있다.
능선 봉우리 몇 곳에 헬기장이 설치되어있다.
급하지 않은 경사가 길게 오르내리니
길은 다소 편안하다.
서북쪽 먼곳에서 들려오는 사격소리가
위험지역에 서있는듯 가까이 선명하게 울린다.
능선따라 완만한 길이 이어진다.
헬기장이다.
갈빛 물이 들며 처음이자 마지막,
생애 단 한 번 비행을 기다리며 떨고있는 나뭇잎새로
천마산 정상 팔각정자가 건너다 보인다.
능선길이 계속 이어진다.
뒷배경을 흐리게
돌탑 상층부를 잡아봤다.
무엇인가 어색한 느낌에
스마트폰 카메라 한계를 느낀다.
사격장 우회로를 가끔 만난다.
역시 별다른 통제표시가 없어
주 등산로를 따라간다.
천마산 정상이 가까이 다가왔다.
천마산 정상으로 오르는 마지막 계단이다.
해발 226미터 정상에
2층 팔각정자 새벌정이 자리잡고있다.
산악자전거를 이용해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보인다.
위험한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부러운 한편 어리석어 보이기도한다.
주변을 돌아보아도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아쉬운 마음에
새벌정을 뒤로 두고 셀카를 담는다.
계양산을 오른쪽에 두고
북쪽, 검단과 뒷편이 김포 방향이다
애써 올라온 산등성이가 보이고
그 너머가 서해바다 방향이다.
서해바다가 햇살을 받아 빛을 머금는다.
다음 목적지를 향해 내려간다.
잘다듬어진 등산로가
경사는 있지만 그리 급하지는 않다.
아랫쪽으로 길마재 고개마루가 보인다.
남쪽방향에서
천마산 정상과 중구봉을 올려다보면
봉우리 두 개가 마치 길마처럼 보인다 하여
길마재 또는 길마재고개라고 부른다.
길마란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기위해
소나 말의 등에 얹는 안장을 말한다.
다시 능선을 따라 올라간다.
능선에서 뒤돌아 보니
정상 팔각정자 기와지붕이 보인다.
능선을 따라간다.
들머리에서 정상까지 오면서
마주치는 사람이 손꼽을 정도였는데
징매이고개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은 꽤 많은듯
자주 오가는 사람들을 지나친다.
이번에는 왼쪽으로 철조망이 쳐져있다.
몇 곳에 일부러인듯
출입이 가능하도록 기둥사이 한 면을 잘라놓았다.
봉우리가 보인다.
해발 276미터 중구봉 정상이다.
그 앞에는 규모가 꽤 큰 돌탑이 쌓여있다.
고려시대에 불교의 중구절(9월 9일) 행사를 치룬 산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라 전하고 있다.
또 크고 작은 봉우리가 아홉 개가 있어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징맹이고개[景明峴]’가 있어 일명 경명산이라고도 한다.
<출처 : 산들투어 카페>
중구봉을 뒤에 두고 흔적을 남긴다.
징매이고개 방향으로 산을 내려간다.
철조망을 뚫어 출입이 가능하도록 만들어놓았다.
능선을 따라 내려간다.
참나무 밑둥에서
가지가 예닐곱갈래로 갈라져 뻗어오른다.
나무난간을 두른 계단이 가파르다.
징매이고개로 닿는 능선 하단부에서
계양산 정상을 올려다 본다.
울긋불긋 가을색으로 물든 단풍이
이제는 돌이킬수 없는 계절을 대변한다.
징매이고개 생태 통로다.
1990년대 인구와 교통량의 급증하면서
서구와 계양구를 잇는 왕복 8차선 경명대로가 1995년 개통된다.
당시 터널을 뚫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도로로 건설하면서 계양산과 천마산이 단절된다.
2007년 기공하여 2009년 완공,
사람과 동식물이 오갈수 있는 생태통로를 복원하였다.
사람길과 동식물 이동통로가
철조망으로 분리되어있다.
이전에 본 무악재하늘다리
휑한 모습과는 다른 형태다.
동식물통로쪽 녹지공간도 넓직하고 잘 들여다 보이지 않아
동식물이 안심하고 이동할수 있을듯 하다.
고려 25대 충렬왕은 취미가 매사냥이었는데
매의 사육과 사냥을 담당하는 국영매방을 설치하고
송도에서는 물론 도라산에서도 즐겼다.
이 때 궁녀들을 동행시켜 여색도 즐기니
왕비가 질색을 하였다.
그래서 송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계양산 고개에 국영매방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 때 매를 징발해 징매(徵鷹)고개가 됐고,
그 뒤 ‘징맹이고개’로 불렸다고 전한다.
현재의 정식 명칭은 景明峴(경명고개)이다.
<출처 : [인천 바로알기]>
지금은 잔해만 남은 중심성지 표지석이
징매이고개 생태통로 계양산쪽 끝에 세워져있다.
경명현(속칭 징맹이고개)을 중심으로
동서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던 산성으로
현재는 완전히 없어지고 잔해만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고종3년(1866) 8월에 일어난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양호사건 등, 이양선의 침입에 위협을 느끼자
왕의 칙령으로 부평부사 박희방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1883년 축조하여
성문은 지명을 따라 공해루라 하였다.
성의 이름을 민중들의 마음(心)을 모아 축조하였다하여
중심성지 즉 중심성이라 전한다.
<출처 : 산들투어 카페>
계양산으로 바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이번에는 피고개를 따라
거리를 늘여 다른 길로 계양산에 오를 작정이다.
징매이고개에서 피고개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피고개를 따라가는 초입,
계양산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이 몇 곳 보인다.
계양산 이름 유래 중 하나인
회양목 자생군락지 복원사업을 위해
회양목을 식재하였다는 안내표지판이다.
직진방향이 경명대로를 따라 가는 길이고
피고개는 오른쪽방향으로 올라간다.
걷기에 제법 완만한 길이 이어진다.
오가는 사람들을 더 많이 지나친다.
어느 해, 거센 태풍에 넘어진것 같은데
끈질긴 생명력으로 올해도 잎을 틔었다.
식수로는 이용이 불가능한듯
관리상태가 엉망인 샘터다.
바닥에 물이 고여있는데
이곳에서 솟아난 물이 계양산 물웅덩이에 모여
야생 동식물에게는 중요한 수원이 되겠다.
모퉁이 안쪽으로 돌탑이 수 십 기 서있다.
절박한 누군가가
간절한 바램을 하늘에 전하려는 원력이리라.
완만한 오르내림이 계속 이어진다.
계양구와 서구 경계지점 이정표가 보이고
그 너머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쉬거나 오가고 있다.
피고개다.
피고개는 옛날 서구 검암동에 살던 해주 정씨 형제가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억울하게 관직을 삭탈당하고
이 고개를 넘어오다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 [인천 바로알기]>
스마트폰 지도를 보니 바로 인근에
피고개산이 보인다.
스마트폰 현재위치가 피고개산에
도착했슴을 표시하고 있다.
표지는 없지만 기념사진을 담는다.
다시 피고개로 내려온다.
내려온 방향 전방 계단을 오르면 계양산 정상에 닿고
왼쪽 산허리를 따라가면 둘레길을 돌아
게양산 야외공연장, 연무정 방향으로 갈 수 있다.
몇 일 전 계양산 정상을 밟았지만
예까지 와서 산허리를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계단을 올라 계양산 정상으로 향한다.
바위군이 꽤 우람하다.
대체적으로 급한 경사가 계속 이어진다.
지나온 중구봉, 천마산 너머
서해로 기운 해가 뿌린 빛살이 바다에 부딪혀
상채기같은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정상 아래 헬기장에 올라선다.
영종대교와 너머 강화가 보인다.
통신중계탑 아래 둘러진 철조망 뒤 벽에
소나무그림이 그려져있다.
다행히 날아가는 새가 착각하여
부딪지는 않을듯 하다.
계단끝 나무난간이 계양산 정상부다.
정상에 자리잡은 계양정,
전방이 시원하게 트인 곳에 자리잡고있다.
올라선만큼 더 넓어진 서해바다가
제가 내뿜는양 빛을 발하고있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사진안에 인천대교와 영종대교가 보인다.
계양산 정상 표지석이다.
하느재방향으로 하산한다.
지난 주 산행때보다 짙어진 단풍들이겠지만
기억에 떠오르질 않으니 비교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럴것이라고 느낄뿐이다.
하느재에 닿아 갈림길에서
연무정방향, 지난 번 길보다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무당골약수터 방향으로
계단을 따라 한동안 내려간다.
완만하게 오르내리는 둘레길이
산봉우리를 오르내리며 쌓인 육체를 위무한다.
고성산 못미친 고개에서
임학공원, 야외공연장 방향으로 넘어간다.
인천계양고등학교로 나서는 날머리로
산행을 마무리한다.
날머리를 돌아다본다.
지난 25일 계양산행과 여정을 비교해본다.
비록 시야가 휜한 날은 아니었지만
높지않은 천마산, 중구봉, 계양산으로 이어지는 산세가 좋았다.
많이 힘들지 않으면서
산행의 묘미와 경치가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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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 좀 쑤시지 마세요
천마산 아기 장수 일주일 만에 걷고 날고 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그 생명이 애석합니다
중간에 파르라님 키가 왜그케 큰거예요..ㅎㅎ
우리 부모님도 키가 크신 편이 아닌데
왜 저는 키가 큰지 오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