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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플레비언나비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남산
처음엔 바이올라대학교의 신학에 대해 잘 몰랐다. 보수적이고 실천적이라는 것 외에는. 더욱이 기독교교육학과는 신학적인 과목도 있었으나 성경에 관한 과목 10개를 필수로 택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신구약 성경을 골고루 5개씩 택하는 수업은 어차피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에 관심이 깊었던 나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같은 과에는 한국 학생이 몇 명 더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영어가 편하지 않았다. 물론 강의는 알아들었지만 원활하게 토론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어서 수업이 끝나면 함께 식사하며 공부 잘하는 원어민에게 확인하며 보충하곤 하였다. 그때 같이 즐겨 먹던 메뉴가 고기덮밥이었는데 내 기억에 2불 50전 정도 했던 것 같다. 아주 간단한 식사였지만 한 끼로는 충분했다.
가장 어려운 점은 시간이 몹시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학생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청소부로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바이올라대학교가 위치한 라미라다라는 작은 시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사셨는데, 그들의 절대적인 필요는 집을 가꿔주고 청소를 해 줄 사람이었다. 그래서 용돈과 학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나는 여러 집을 다니면서 청소할 수 있었고, 일상의 모자란 돈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오후 늦게는 여전히 부족한 학비를 채우기 위해 가정교사 자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조금 더 넓고 깊게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왔으나 영어가 들리지 않아 공부에 취미를 잃은 한인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나는 하루에 거의 150킬로미터 이상을 운전하며 과외선생으로도 뛰었다.
아무리 젊었어도 체력이 바닥나는 거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너무 힘이 들어 과외공부를 지도하다가도 잠깐씩 조는 경우가 생겼다. 가르치는 학생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한 친구는 미국에 중학교 때부터 와서 미식축구반에 들어가 온몸에 멍이 생기면서까지 운동하고 끙끙 앓으면서도 나와 공부하고 싶어 했다. 거의 매일 울면서 숙제만 간신히 해내곤 하던 그가 훗날 학교를 제때 무난히 졸업하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보람되고 감사한 일이었다.
열심히 땀 흘려 청소하고 나서 할머니 할아버지들로부터 받는 20불짜리 돈과 바닥난 체력으로 힘겹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받은 돈은, 세상에서 돈을 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해준 매우 유익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한국이나 미국이나 노인들은 외롭고 힘들며 친구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새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에 유학을 와서 공부하는 한인 청소년들의 공부와 적응에 대한 애환도 몸으로 깊이 경험할 수 있었다.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며 사랑의 돌봄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확인하는 기회가 된 것이다.
바이올라대학교는 BIOLA라고 쓰는데 본래 Bible Institute Of Los Angeles 의 첫 자만을 따서 만든 교명이라는 사실을 졸업을 앞두고서야 알게 되었을 때, 왜 모교가 그토록 성경공부를 강조하였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기독교교육학은 나와 매우 잘 맞는 공부였다. 수업 자체에는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내가 학습에 투자한 시간에 비하여 교수님들의 만족도가 높았으며 내가 발견하지 못한 나의 성장을 주목하고 기뻐해 주셔서 행복했다. 그로 인해 대학원 과정도 별 고민 없이 지속하게 되었다.
바이올라대학교의 학사 석사과정은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었고, 성적도 아주 좋게 나왔다. 교수님들은 나에게 시카고의 트리니티 신학교에 가서 박사학위를 하고 돌아와 같이 교수로 봉사하자고 권하셨던 것도 기억난다. 그러나 나는 장로교에서 평생 자랐기에 개혁신학이라는 옷이 더 맞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동부의 프린스턴신학교나 유니온신학교, 아니면 나성의 풀러신학교로 가야 하는 게 아닌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바이올라에서 만난 스탠 레너드 교수님과 마이클 앤소니 교수님 그리고 딕 라이더 교수님은 나에게 기독교교육적 삶과 학문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셨고 학생을 무엇보다 우선으로 생각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주신 인생의 스승들이다. 선교사적인 삶을 사는 교수님들의 눈물과 사랑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섬기던 교회에서 새 담임목사와 원로목사님를 따르는 이들 간의 분쟁은 나로 하여금 고민만 하고 있던 신학적 점프를 실행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교수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추천서를 받아 동부 뉴저지의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서류를 보낸 것이다. 당시에는 이것이 엄청난 신학적 점프라는 것을 미처 알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나는 추천서를 받기 위해 성서신학 교수님이셨던 닉 커태닉(Nick Kurtaneck) 교수를 찾아가 부탁을 드렸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 프린스턴을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한사코 사양하셨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교수님께 장로교에서 자라난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내게 있어서 장로교신학교에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니 기쁜 마음으로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나의 신앙 여정과 그 토대를 이해한 그는 결국 흔쾌히 프린스턴으로 추천서를 보내주었다. 아마 기독교교육학과에서는 마이클 앤소니(Miachel Anthony) 교수님이 두말없이 추천서를 써 주었던 것 같다.
나중에 보수와 진보 신학을 다 접한 후 생각해 보니 커태닉 교수님의 저항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바이올라에서는 프린스턴
신학을 좋게 보지 않았고 매우 위험한 신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걱정들이 현실에서 드러나고야 말았다.
프린스턴대학이 나의 입학을 거부한 것이다. 바이올라대학교와 대학원에서 거의 수석(특히 대학원, Higher Honor)에 가까울 정도의 성적표를 받았던 나였지만, 프린스턴은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당시 미국에서 합격 편지를 받으면 장학금 신청서와 같이 오기 때문에 큰 봉투의 소포가 오기 마련인데, 내가 받은 편지는 몹시 얇았다. “귀하의 지원을 감사합니다만, 아쉽게도 불합격입니다.”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는데 이런 결과라니.
낙방의 연유가 무척 궁금했던 나는 열 달 후에 로스앤젤레스 공항 근처 호텔에서 열리는 프린스턴 신학교 리쿠르팅 팀(우수 지원자 모집 모임)의 광고를 보고 직접 찾아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왜 저를 받아들이지 않았나요?” 그때 책임자 교수님은 “김도일 Douil Kim을 기억한다. 당신이 바로 지원하기 전 크리스천 잡지에서 바이올라대학원의 두 교수가 프린스턴신학을 비판하였고 심지어는 사단적인 요소가 있다며 고발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말에 나는 무척 당황했다. “저는 그런 신학적 논쟁이 격화된 사실에 대하여 알지 못했고 실로 유감입니다. 저는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했고 이제 신학대학원에 처음 들어가 공부하려는 신학도인데 참으로 난감합니다. 다른 것은 모르지만 저는 젊은 시절부터 개혁신학적 입장을 가진 신학도이고 세대주의적 신학에 대하여 다 동조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장로교인으로 3대째 살아온 저에게 입학도 하기 전에 그 책임이 온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나의 말을 차분히 듣던 책임자 교수님은, 그러면 자신에게 그동안 어떤 책들을 읽었으며 장로교회에서의 신앙훈련 과정을 얘기해 보라고 했다.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서울에서 다니던 교회에서의 신앙 여정과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해 읽은 칼뱅, 루터, 그리고 몰트만 이야기, 라브리 공동체의 프란시스 쉐퍼 박사에 대하여 말할 수 있었다. 장로교에서 어떻게 훈련 받았는지 그리고 특히 미국 나성영락교회를 통해 훈련받은 이야기 등을 두서없이 나누었다.
그는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해주었고, 잠시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그리고는 “잘 알았다. 가을에 만납시다”(Well said. See you in the fall)라고 말하며 악수를 청해왔다. 더듬거리는 영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다했다는 심정으로 호텔을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6월 즈음 프린스턴으로부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두꺼운 소포가 날라왔다. 정말로 어렵사리 합격한 것이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간단하게 짐을 꾸려 타던 차를 끌고 3,500킬로미터를 운전해 프린스턴대학이 있는 뉴저지로 향했다. 그야말로 신학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점프였다.
김도일은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다음 세대를 세우고, 가정교회마을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며 이끌어 오신 그분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cnews197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