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시 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온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커 럿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거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신동엽 시인
1930~1969.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전주사범학교와 단국대 사학과,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했다. 1959년 장시「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였다. 1963년 시집 『아사녀(阿斯女)』를 냈으며, 1967년 서사시 「금강」을 발표했다. 1975년 『신동엽 전집』, 1979년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가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왔다. 1970년 부여읍 동남리 백마강 기슭에 시비가 세워졌고, 1982년부터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는 ‘신동엽창작기금’이 수여되고 있다.
.........................감상............
신동엽 시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우리 역사에 대한 설움, 분노, 부끄러움, 비장함을 느끼게 된다.
그가 역사를 공부하면서 지니게 된 정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조금만 가늠해 보면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내가 신동엽 시인을 시를 통해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 비장함이 제일 먼저 다가왔다.
제목에서부터 “껍데기는 가라”고 버럭 소리치는 기백이 맘에 들었던 것이다.
그는 ‘종로 5가’에서 갈 길 잃은 소년을 맞닥뜨리고는 오늘의 우리 삶과 옛날을 포개어 보거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되물으며 맑은 하늘을 갈망하기도 했다.
그러다 만난 시가 「산문시 1」이다. 처음 느낀 설렘을 꾸준히 느끼게 하는 시란 드물다.
그 드문 경우에 이 작품을 주저 없이 꼽는다. 신동엽 시인의 비장함이 걷히고, 마치 ‘맑은 하늘’을 보는 듯한 느낌.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암송해도 좋을 시이다.
이 작품은 현실에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없는 어떤 나라의 다양한 모습을 부드러운 호흡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그 나라는 마치 우리나라인 것도 같다. 그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칫솔 사러 걸어 다니고,
휴가 가는 국무총리가 뙤약볕에 줄 서서 기차표를 끊고, 그 모습을 보고 서울역장은 자기 볼 일만 본다.
마침내 대통령은 자전거에 막걸리 싣고 삼십 리 길을 놀러 간다.
‘통치’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권위’나 ‘억압’ 따위는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나와 많은 사람들은 그런 대통령과 총리를 갈망했었다. 잠시 만난 듯도 했지만…….
그러나 이 작품에는 ‘아름다운 석양’ 속에 놀러 가는 대통령만 있는 게 아니다.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어떤 나라’는 “총 쏘는 야만”에 동참하지 않는 나라며,
그 나라를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를 읽는
‘지성(知性)의 국민’이 “미사일 기지”와 “탱크 기지”로부터 지킨 것임을..............류원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