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정선 이야기14
살가운 정선 사람들의 인정 넘치는 정월대보름 풍속
<흥겨운 농악대를 따라>
하얀 눈이 덮인 마을은 설국이었습니다. 초가집에도 장독대에도 나뭇가리도 온통 동그랗게 하얀 눈이 내려 버섯모양을 이뤘습니다. 종만이네도 기순이네도 화순이네도 똑같이 크고 하얀 집 버섯을 이뤘지요. 다만 마실 길은 뻥 뚫려 이곳저곳 사람들이 다니고 있었습니다. 마당에 내린 눈보다 마실길을 먼저 치웠던 정선 사람들의 인정이랄 수 있습니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그 길로 늙은 부모님들이 다치지 말고 다니기를 바란 예쁜 마음이 마실길에 쌓인 눈을 집 마당보다 먼저 치웠습니다.
오늘은 정월대보름입니다. 동산에서 크고 둥근 붉은 달이 떠오르는 날입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사람들은 모두 들뜬 마음입니다. 일 년 중에 가장 신나는 날이라 할 수 있지요. 달처럼 풍요로운 날입니다.
“챙챙챙 칭~”
저 멀리서부터 하얀 눈 위로 지신밟기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마을 농악대이지요. 상쇠가 치는 꽹과리 소리에 맞춰 징, 북, 장구 소리가 이어지고, 상고를 돌리는 멋진 몸놀림도 보입니다. 아마도 마실길은 농악대를 맞이하는 길인가 봅니다. 농악대의 사물놀이가 들리자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나와 농악대 뒤를 따릅니다. 신났습니다. 다들 두 손을 들어 이쪽저쪽으로 저으며 어깨춤도 춥니다. 농악대를 따르는 행렬이 정말 보기 좋습니다. 농악대는 걸립패라고도 하는데요.
“정월에 드는 액은 이월 영동으로 막아내고~.”
고사반 소리를 하면서 지신밟기를 한참 합니다. 마당 주변을 돌면서 온갖 부정을 씻어내는 일이지요. 새해를 맞아 그 집안에 든 액운을 쫓아냅니다. 정말 농악대의 신나는 소리에 액운이 붙어 있을 수 없지요. 그야말로 신명이 납니다. 그렇게 한참을 돌면 주인은 쌀이나 돈을 내어 걸립패인 농악대에 건넵니다. 그러면 또 한 번 신나게 농악대는 놉니다. 재주를 넘고, 상고를 돌리고, 온 동네 아이들까지 마당에서 한바탕 놀지요. 일 년 내내 이 집안에는 어떤 액운도 들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한참 놀다가 대문을 나와 옆집으로 가 지신밟기는 이어집니다. 온 마을을 다 돌면 하루가 다 가고도 모자라지요. 이때 걸립한 돈은 마을 자금으로 쓰였습니다. 정말 신나는 하루였습니다.
<풍년을 바라는 염원>
“개똥아!”
“왜”
“내 더위 사라.”
더위팔기를 해보지 않은 정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재미있어서 하기도 하고, 정말 여름철 더위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절실하게 팔기도 했습니다. 이때 누가 부르면 입을 꾹 닫고는 눈만 껌벅껌벅하기도 했지요. 그렇게 더위를 사면 정말 여름철 더위를 혼자 탈 것만 같았습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요.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더위를 팔지는 않았습니다. 어른들이나 사돈에게는 삼갔지요. 사실 이 더위팔기도 아이들의 놀이입니다.
그리고 뭐니 뭐니해도 이날 기다려지는 일은 오곡밥입니다. 오곡밥의 유래는 『삼국유사』 사금갑(射琴匣) 조에 나옵니다. 소지왕(재위 479~500) 때 이야기입니다. 소지왕이 488년 정월대보름에 궁 밖으로 산책을 나왔습니다. 그때 쥐와 까마귀가 나타나 있다가 쥐가 까마귀를 따라가라고 했지요. 왕은 괴이하여 병사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습니다. 까마귀가 연못에 이르자 한 노인이 나타나서 금갑을 화살로 쏘라고 하면서 금갑을 쏘면 두 사람이 죽고 쏘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합니다. 일관이 아뢰기를 한 사람은 왕이고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라 합니다. 그래 화살로 쏘았더니 궁주와 승려가 화살을 맞고 죽었지요. 궁주와 승려가 왕을 해치고 자신이 왕이 되려 한 것이지요. 이에 연못은 편지가 나온 못이라 하여 서출지(書出池)라 하고요. 까마귀가 좋아하는 밥이 오곡밥이어서 그 은혜를 갚고자 매년 정월대보름이 되면 오곡밥을 해 먹었다고 합니다. 또 이날은 까마귀가 꺼려하는 날이라 해서 까마귀 오(烏)자에 꺼릴 기(忌)자를 써서 오기일(烏忌日)이라고도 합니다.
정선에서도 오곡밥은 꼭 해 먹는데요. 보통 14일 여름날에 해 먹습니다. 오곡밥에는 꿀도 넣어서 달콤하게 해 먹는 집도 있습니다. ‘오곡밥 얻어먹기’라는 재미있는 아이들 풍속도 있었습니다. 각설이 타령을 하면서 밥을 얻어서 모여 노는 놀이였습니다. 아이들이 떨어진 옷에 얼굴에는 검정으로 환을 그리고 거지 모양을 합니다. 그리고 깡통을 들고 나뭇가지로 치면서 동네에 있는 집집이 마당에 가서 놉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그렇게 두어 순배 놀고 나면 그 집의 어머니가 오곡밥을 떠서 각설이 타령을 하는 아이들 바가지에 담아 줍니다. 어떤 집은 나물무침 반찬도 주지요. 그렇게 몇 집 돌고 나면 오곡밥이 바가지에 가득 찹니다. 그러면 놀이를 그만하고 모여서 밥을 먹으면서 놀다가 각자 집으로 가지요.
“와! 당첨됐어요.”
14일 여름날 저녁에는 만두를 빚어 먹는데요. 이를 복만두 먹기 또는 섬만두 먹기라고 합니다. 만두를 빚어 먹으면 그해 가을에 풍년이 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섬은 가마니를 뜻하는데요. 한 섬 두 섬 했던 사실을 알 겁니다. 만두가 곡식이 가득 든 가마니로 생각했습니다. 비유이지요. 이때 동전을 넣은 만두와 고춧가루만 가득 넣은 만두를 빚어서 점을 쳤습니다.
“따라오냐?”
“따라온다.”
물할머니 모셔오기라는 의식입니다. 물은 사람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용물 뜨기, 복물 뜨기, 물할머니 모셔오기 등이 대보름 새벽에 행해졌습니다. 용물이나 복물은 먼저 떠와야 좋다고 하는데요. 달이 우물에 비치면 그달을 가장 먼저 떠오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먼저 물을 떠 갔다는 표시로 볏짚 하나를 물에 띄웁니다. 그러면 그해 농사가 잘된다고 합니다. 물할머니 모셔오기는 물을 관장하는 할머니가 있는데 할머니를 모셔오면 잘 나오지 않던 우물이나 샘이 잘 나온다고 해서 행했습니다. 주전자에 물을 받아서 조금씩 흘리면서 가져옵니다. 물할머니 모셔오기는 보름날 하면 더 좋고, 보름이 아니어도 행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월대보름에는 참 많은 행사를 했습니다. 몸에 부스럼 나지 말라고 하는 부럼 깨물기, 좋은 소식만 들으라고 먹는 귀밝이술 마시기, 복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복 쌈 싸 먹기, 청소년들이 마을 대항으로 행하던 횃불싸움, 액을 날려 보내는 액연 날리기, 상품 걸고 하는 윷놀이[척사대회], 저릅을 나이 수만큼 묶어서 달이 뜰 때 태우며 비는 달맞이, 깡통에 관솔을 넣어 돌리면서 소원을 비는 망우리 돌리기, 마을회관 앞에서 소원지 걸고 태우는 달집 태우기 등등이 마을 곳곳에서 행해졌습니다. 정말 신나는 날이었습니다.
이처럼 정월 대보름은 14일부터 15일까지 이어집니다. 14일은 보통 여름날이라 표현합니다. 15일은 가을날이고요. 사실 이날은 일 년 중 여름과 가을을 미리 상정하여 점치고 예방하는 날로 봅니다. 옛날에는 이 시기가 겨울철이라 농한기(農閑期)였습니다. 그리고 먹을 식재료가 가장 풍부한 시기였지요. 정말 농촌에서 가장 한가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만들어서 먹고 놀고 농사철을 대비해서 준비해야 하는 시기이지요.
<항상 조심하며 살아야>
가을 풍년이 지나면 이제 조심하는 날입니다. 귀신달개날입니다.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는 말이 있잖아요. 1월 16일은 귀신날, 또는 귀신 달개 날이라 합니다. 귀신을 달래서 보낸다는 뜻으로 하룻동안 조심했습니다.
체를 집 안으로 들어오는 문 위에 걸어놓았던 기억이 있을 겁니다. 신발을 방안으로 들여놓고요. 귀신이 들어오다가 체의 구멍을 세다가 자꾸 잊어서 또 세다가 닭이 울어 도망간다고 했고요. 귀신이 신발을 신어보면 죽는다는 속설이 있었지요. 또 일 년 동안 머리를 빗다가 나온 머리카락을 태우기도 하고 고춧가루나 목화씨를 태워서 귀신을 쫓기도 했습니다.
올 한해는 정선 사람 모두 복 많이 받고요. 아무 탈 없이 지냈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