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코는 사랑을 싣고 / 양선례
이제 6개월이 된 아들까지 아이 셋을 여동생에게 맡기고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하필 5년마다 한 번씩 의무로 받는 과학 실험 연수 기간이었다. 낮에는 교육지원청(당시는 교육청)에 가서 종일토록 공부하고 퇴근 무렵에야 학원에 갈 수 있었다. 70점이 합격선인 필기시험에 턱걸이로 통과했다. 그것도 점수냐고 뭐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혼자 부끄러웠다. 그게 약이 되어서 실기시험은 거의 만점을 받았다. 몹시 추웠고 가만히 서 있어도 몸이 덜덜 떨렸다. 단순히 바깥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필기와 실기를 단번에 합격하여, 면허증을 손에 쥔 건 겨울방학이 끝나 가던 2월 말이었다.
당장이라도 차를 끌고 거리에 나서고 싶었다. 그런데 차를 또 하나 살 여유가 없었다. 새 아파트에 입주한 지 일 년 남짓이라 융자금 갚느라고 허덕였다. 승용차로 가면 30분이 채 안 되는 근무지까지 시내버스를 두 번 바꿔 타야 했다. 시간은 두 배가 걸렸다. 아이들 병원 갈 일도 잦았다. 옆 아파트에 사는 선생님의 차를 얻어타기도 미안했다. 나 혼자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큰딸까지 내가 근무하던 학교로 데리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공짜로 타는 것도 아니었건만 눈치가 보였다.
면허증을 따고 6개월 만에 차를 장만했다. 남편은 아이를 태우고 다니는 나를 배려하여 차를 나에게 주고, 본인은 새로 산 중고차를 탔다. 이년 반쯤 탔을까. 지역 만기라서 도서 지역으로 가야 했다. 물론 육지 끝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아이들까지 달고 매일 통근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처럼 방과후 학교나 돌봄교실이 없던 시절이라 학교가 끝나면 돌봐 줄 사람이 없었다. 남편은 늘 나보다 먼저 나가고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섬으로 지원했다. 아들이 다닐 유치원도 있고, 점심시간에 급식이 되는 곳을 희망했다.
여수 화정면의 초등학교로 배정되었다. 배가 닿는 부두에서 학교까지 어른 걸음으로도 15분이 걸렸다. 다섯 살이 된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은 막내는 걷기 힘든 거리였다. 그런 교직원의 사정을 헤아려 학교 운영위원장이 자신의 용달차로 매주 월요일마다 태우러 왔다. 초등학교, 중학교, 농협, 우체국, 보건소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짐칸에 올랐다. 초등학교 1학년, 3학년의 두 딸과 아들은 스스로 오르내리기 힘들었다. 그때마다 중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를 안아 주었다. 일주일 치의 식량을 올망졸망 배낭에 둘러맨 아이들이 용달 뒷자리에서 걀걀거리고 웃었다.
하필 그해에는 월요일 아침마다 비가 내렸다. 달리는 트럭 위에서 비는 사선으로 들이쳤다. 부산하게 관사에 들러 아이들 옷을 갈아입혔다. 방바닥은 냉골이다. 발이 시렸다. 운영위원장은 올해 들어온 선생님 중 비의 여신이 있는 거 아니냐며 놀렸다. 거의 두 달간 매주 월요일마다 그랬다. 나갈 때도 문제였다. 토요휴업일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12시 반에 부두에서 육지인 돌산 끝으로 가는 사선(개인 배)을 타려면 서둘러야 했다. 속이 타는 내 맘도 모르고, 아이의 걸음은 한없이 느렸다. 운 좋게 트럭을 얻어탈 때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할 때도 많았다. 학부모에게 부탁할 배짱도 없을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남편이 타던 중고차를 섬에 가져왔다. 학교 주변만 맴돌던 행동반경이 넓어졌다. 달이 뜨는 풍경이 아름다워 이름 붙여진 월항리, ‘차르르차르르’ 몽돌 구르는 소리가 일품인 모전리, 방파제에서 낚시하던 사람이 늘상 끊이지 않던 여석리까지 갈 수 있었다. 우리 식구 넷에다 언니처럼 친하게 지내던 동료 선생님, 그의 아이들까지 함께 다녔다. 타이어에 껌이 붙으면 움직이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던 그 작은 차에 무려 일곱이 탔다. 기름을 넣거나 엔진오일이라도 갈려면 다른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차가 있어서 섬은 살 만한 곳이 되었다.
수요일 오후가 되면 부두에 나갔다. 우리 학교 분교인 자봉분교에는 선생님 두 명이 근무했다. 상시전원이 아니라 저녁 7시부터 밤 12시까지만 전기가 들어왔다. 냉장고도, 전기장판도 그림의 떡이었다. 여름에도 시원한 음료수를 마실 없었다. 담아간 김치는 하루가 지나면 시었다. 겨울이면 연탄을 때서 난방했다. 교실 두 칸에다 작은 운동장이 전부였다. 교실 반 칸에서 두 명, 그 옆 교실에서 또 두서너 명이 복식 수업을 했다. 남은 한 칸은 교무실과 창고가 차지했다. 삼각형 모양의 섬이 바다 위에 솟은 모양이라 평지가 없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조금만 멀리 차도, 바다에 빠졌다. 한 계단을 오르면 양쪽으로 집이 한 채씩 있고, 또 한 칸을 오르면 집이 있는 계단식 집이 층층으로 이어졌다. 섬을 한 바퀴 도는데 채 한 시간도 안 걸리는 작은 섬이었다. 분교에 근무하는 선생님의 유일한 낙이 수요일마다 본교에 운동하러 오는 거였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주무관 소유의, 두셋이 앉으면 가득 차는 배를 타고 본섬으로 건너왔다. 선생님 중 한 분은 한 학년에 여덟 반이나 있는 학교에서 나와 동학년이었다. 그러니 부두로 마중 가고, 배웅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열악한 환경에서 몇 년을 생활하는 선생님이 측은하기 짝이 없었다. 멀어지는 배를 보면서 그래도 차가 다니는 섬에 살아서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한번은 전교생이 학교에서 꽤 떨어진 바닷가로 소풍 갔다. 갈 때는 어찌 갔는데 걸어서 오기에는 먼 길이었다. 트럭은 있는데 운전할 사람이 없었다. 운전기사가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교장 선생님은 유일하게 수동 기어로 운전을 배운 나에게 트럭을 몰라고 권했다. 지금이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20년 전인 데다, 섬이어서 가능했다. 몸무게가 70kg이 넘는 6학년 주영이는 4학년 때부터 아버지 트럭을 몰고 다닌다고 했다. 섬은 그런 곳이었다. 교장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트럭 짐칸에 아이를 몽땅 태우고 거북이가 되어 학교까지 왔었다.
수동 기어로 12년을 운전하고 자동기어가 있는 차로 바꿨다. 오르막이 보이면 미리부터 긴장하지 않아도 되었다. 28년째 운전대를 잡고 있지만, 어렵다. 종종 “운전 잘하시네요.”라는 말을 듣는다. 잘하는 운전은 없다. 그저 늘 조심하는 수밖에.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큰 사고로 이어진다. 아슬아슬하게 그 순간을 피한 적도 여러 번이다. 그사이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여 이제는 운전자를 보조하던 걸 넘어서서 비교적 변수가 적은 고속도로나 일반 국도 등에서 자율 주행이 가능한 단계까지 와 있다. 머잖아 사고의 책임이 운전자가 아니라 자동차 제조사가 지는 시대가 온단다. 이때쯤이면 내가 차를 운전하는 게 아니라 차가 나를 데려다준다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자동차의 진화가 어디까지일지 기대된다.
오늘도 나는 차를 끌고 도로로 나선다.
첫댓글 섬마을에서 생활하시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그곳에서 트럭도 운전해 보시고요.
그래요 가장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사고를 내지 않는 사람이지요.
그러게요.
편리하면서도 흉기가 되기도 하는 게 자동차지요.
사고가 안 나는 게 최곱니다.
농촌에서도 경운기 뒤나 트럭 뒤에 많이 타고 다녀요. 트럭 모는 모습이 잘 상상은 안됩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타 봤습니다.
이후로도 탈 일은 없었구요.
2단으로 기어를 넣고 출발하는 게 신기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트럭 모는 걸 상상하니 웃음이 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런 것도 가능한 곳이 바로 섬입니다.
고맙습니다.
세세한 묘사나 선생님의 감정을 잘 표현한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재밌게 읽었다니 보람입니다.
섬 이야기는 해도해도 무궁무진합니다.
떠나온 지 이십 년이 넘었는데도 말이지요.
그만큼 신기하고, 어렵고, 재미있었던 곳입니다.
직장 생활하는 사람의 애환이 공감갑니다. 그래도 지금은 힘들었던 시절이 추억으로 남습니다.
추억은 방울방울.
세상 일이 다 나쁜 것은 아니라는 걸 섬에서 느꼈습니다.
지금은 그조차 그리운 추억입니다.
건강했던 나와, 품 안에서 몽글거리던 아이 셋이 있었거든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옛일을 회상합니다. 웃음이 절로 피는 향기로운 추억입니다.
지금은 향기롭게 기억하는데, 당시에는 유배지에 온 정약용 선생의 심정이었습니다.
하하!
섬에서 고단한 생활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가네요. 직장 생활하면서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원장님처럼 부부교사였더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주말마다 오가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안 나가면 먹을 게 없더라고요.-
주중에 사는 건 재미있었습니다.
지금이야 관사도 많이 좋아졌는데 그때는 거의 움막 수준이었습니다.
10년이 지난 2010년에 온 가족이 들어가 본 적이 있었어요.
너무 낡은 탓인지 우리가 3년을 살았던 관사는 부서져 있더라고요.
추억을 도둑맞은 듯 마음이 안 좋았었네요.
운전 면허 시험을 하루에 다 통과하시다니 대단하시네요. 작은 차가 그 섬을 제대로 알게 하는 데 큰 일을 했네요. 저도 가정 방문 다닐 때마다 차 없이 그 일을 하던 어려운 시절이 생각나서 고마워진답니다.
아니, 아니. 하루가 아니라 한 번에 통과했다는 말이지요.
시일은 여러 날 걸렸지만 두 번, 세 번 재시험 안 봤다는 이야기입니다. 하하.
그 작은 티코 덕분에 여러 사람에게 도움도 주고,
구경도 다니고 재미있었답니다.
가정방문에 얽힌 이야기도 많은데 언젠가는 쓸 날이 있겠지요.
살아온 모든 날이 글을 쓰는 준비 기간이었나 생각하게 합니다.
선생님 글을 읽으면 그 장면들이 파느라마처럼 이름답게 펼쳐집니다. 어린 시절 선생님들을 무척 따르고 좋아했지요. 편찮으셔서 결근하시면 집에 가서 울던 생각이 나요. 내겐 곱고 신비스런 존재였지요. 슈퍼우먼 같은 선생님 글 읽으면 눈물이 핑 돕니다. 너무나 애쓰셨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아하, 선생님의 착한 마음씨로 선생님도 그리 섬기셨군요.
느껴집니다.
슈퍼우먼은 되고 싶었으나 체력이 약해서 하지 못했고, 하루하루 근근이 부지런히 살기는 했답니다. 하하.
지나고 보니 그조차 그리운,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네요.
이렇게 글 소재가 되어 주니 고마운 일이지요.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이 위대해요. 하하!
저도 읽는내내 숨 고를 사이도 없었습니다.
대단하세요.
선생님의 티코가 우리 아버지 붕붕이와 비슷하다 싶습니다. 나란히 달리다가도 어느새 앞질러 요리조리 저만큼 가는걸 보고 뒤에 가면서 그냥 웃고 말았답니다..
늘 주시는 관심과 사랑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