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의 청첩장 / 한정숙
초등학교 2학년을 나와 함께 보낸 은비는 늘 단정했고 얼굴에 웃음기가 많은 예쁜 아이였다.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사립유치원에서 경력을 쌓은 후 1년을 꼬박 공부하여 2년 전 임용 고사에 합격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신규 발령을 받고 엄마와 함께 나를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대접하고픈 마음이 앞서 내 음식 취향을 미처 묻지 못했던 탓에 얼큰한 낙지볶음을 함께 먹었는데 매운 티를 안 내려고 적잖이 애 먹었다.
은비는 선생님이 된 공을 나에게 돌렸다.
“2학년 때 저는 뛰어난 아이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받아쓰기 시험에서 100점을 맞았는데 선생님이 기뻐하시며 제가 100점을 맞을 줄 알았다고 하시는 거예요. 뭐든 잘 할 수 있는 아이라면서요.”
그때부터 공부에 재미와 자신감이 생겼고 하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고 한다.
내가 만난 적이 있는 초등 교사 남자친구랑 결혼한다며 청첩장 전달 차 저녁 식사를 하자는 예비 신부는 이번에는 미리 나에게 좋아하는 음식을 물었다. ‘꽃마름’이라는 고운 간판을 단 식당에서 ‘해물 샤부샤부’로 저녁 식사를 하며 2년 전에 했던 받아쓰기 시험 이야기를 다시 불러왔다. 선생님이 무섭기도 하고 좋기도 했겠으나 누구에게나 했을 칭찬을 가슴에 품어 꿈으로 키운 초등학교 병설유치원 김은비 선생이 대견하고 고마웠다.
보통 저학년 담임교사들이 그렇듯이 ‘받아쓰기’와 ‘일기 쓰기’는 ‘책 읽기’와 함께 우리 반 아이들과 꾸준히 해야 하는 과제였다. 학급 홈페이지에 본이 될 만한 친구의 일기를 올려 힘들어하는 학생들의 마중물이 되게 하였다. 책 읽기는 학부모도 함께 참여시켜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가 함께 소통하고 성장하는 장이 되도록 시도했다.
선생님이라면 학생들에게 그 정도의 칭찬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크게 기억해 준 은비에게 고마워하자 작은 일화 하나를 더 건넸다. “ 또 하나 기억 속에 있는 일이 있어요. 선생님은 학교에 일찍 오셔서 우리들의 아침활동을 살피셨는데 가끔 지각하는 강산이가 그날도 아홉시가 다 되어 들어오는 거예요. 우린 눈치만 보고 있었고요. 선생님 얼굴이 굳었거든요.” 들으면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불같이 화를 내며 아이들을 공포 속으로 밀었었나?’ 그는 밝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왜 늦었냐고 물으시자 한참을 망설이던 친구가 축구하다가 늦었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뒤에 이어졌을 내 언행을 짐작해 보았다. 은비의 얼굴을 보면 내가 크게 실수를 하진 않았겠으나 아홉 살 2학년 아이의 기억이 20년을 버티고 있다면 덩어리가 작지만은 않겠구나 싶었다. 축구가 재밌었냐고 다시 묻는 나에게 그 아이가 “네.” 라고 대답하자 “선생님은 살짝 웃으시며 그럼 됐다. 들어가라 하시겠지요?” 순간 나는 티 나지 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행이었다. “우리 반 친구들은 서로 얼굴을 보며 소리 나지 않게 웃었고요.” “그날 집에 돌아가서 엄마께 아침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었어요. 엄마도 선생님이 크게 화를 안내고 공부를 시작하신 점이 훌륭하다고 했었어요.” 유치원 아이들과 활동하면서 갈등이 생길라 치면 그 일을 생각한다고 한다.
37년을 건너 만났던 초임 시절 제자는 숙제 검사며 받아쓰기 시험 상황을 말과 표정으로 복기하며 가슴을 쓸게 하더니 - 그 시절 1학년들은 시험 치른 후 오빠나 언니를 데리고 오라는 말이 가장 무서웠다고 한다.- “교육과 지도‘라는 명분으로 행해졌던 모든 언행이 심판대에 오른다. 다양한 성향의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당당하고 바른 시민으로 자라게 할라치면 학생들의 사표(師表)가 되었어야 하는데 나의 뒷모습이 궁금하고 불안한 순간도 있다.
헤어지며 신혼집에 들여 놓으라고 작은 화분 두 개가 담긴 바구니를 손에 들려주자 반색하며 거실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놓겠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와 부리나케 그 아이들과 만든 학급문집 『소리 모아 마음 모아』 를 펼쳐 보았다. 스물여덟 명의 아이들과 학부모님의 응원 글도 몇 편 실린 80쪽 분량의 사랑 보따리다. 가족들이 잠든 밤 시간을 이용해 타이핑하여 편집하고 사진도 모양 내어 담느라 매년 겨울 방학을 야무지게 이용해 먹었던 젊은 날의 노래이기도 하다. 은비는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와 '우리 어머니'를 제목으로 한 동시를 포함하여 여섯 편의 짧은 글을 실었다. 문집 속의 귀여운 사진은 세월의 빛에 조금 바랬다. 책장을 넘기며 교실을 함께 썼던 아이들의 얼굴을 쓸며 이름을 불러 보았다. 금방 왁자하게 뛰어 나올 것 같았다.
존경하는 은사님으로 시작하여 교직의 첫 줄발을 응원해 주셨듯이 평생의 반려자와 함께 내딛는 첫걸음도 축하해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편지를 담아 전해 준 은비의 청첩장을 열어 봤다.
깔끔한 봉투 안의 초대장 표지에는 천정에서 비추는 조명을 받으며 검정색 예복을 입은 신랑 신부가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한다. 속지에는 재미난 인사말과 수직선 위에 그림으로 그린 식순을 배열했다. 결혼식장 가는 길의 주요 도로와 장소도 깜찍한 그림으로 담아 보는 재미를 톡톡히 했다. 낯설지만 현실감 있는 인사말이라 소개한다.
꼭 장발로 결혼식에 입장하고픈 철없는 동빈이와
기아타이거즈로 인생의 희로애락을 배운 은비가
많은 분들의 축복 속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빈이에게 없는 현실 감각은 은비에게 있고
은비에게 없는 꼼꼼함은 동빈이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많은 분들의 기대와 성원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빠른 시일 내에 세계를 뒤흔들 인재를 낳아 사회에 공헌하겠습니다.
희망에 부풀어 새 출발을 꿈꾸는 건강한 젊은이의 마음이 햇살처럼 반짝인다.
첫댓글 선생님도 대단하시네요.
그 선생의 그 제자입니다.
제자 분의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도 제자 이야기를 쓰게 되어 면구스럽습니다. 은비와 식사하면서 이번 주 과제 주제가 '교육'인데 네 이야기를 써도 좋을까? 하여 허락을 받은 참이라 말 빚을 지지 않으려고 잘난 체를 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인연이네요.
맘껏 자랑하셔도 누가 뭐랄 사람 아무도 없네요.
선생님의 말 한마디를 초등학교 2학년 때 가슴에 품은 은비나,
그런 제자를 따뜻하게 품어낸 선배님이나 참 좋은 인연이네요.
부럽습니다.
선생님은 지금도 그 기쁨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으시겠지만, 우리 선생들이야 긴 세월 아이들과 만나고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
영양제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때 만드신 문집을 여태 가지고 계시다니 놀랍습니다. 담임 하실 때 어떠하셨는지 지난 주에 이은 두 편의 글로 짐작이 됩니다. 우리 글쓰기 반에는 훌륭하신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부끄럽고 고맙습니다. 사알짝 으쓱하고요. 히.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얼큰한 낙지볶음만 아니었으면 110점이었는데, 딱 100점이네요. 하하하! 글 고맙습니다.
110점 받으면 채점 조사 들어간답니다. 하하. 100점 참 오랜만에 받아봅니다.
예쁜 아이가 아름다운 신부가 되었네요. 뿌듯하시겠어요. 발랄한 청첩장까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청첩장 보고 빵! 터졌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