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초의 바다가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남국의 태양은 눈부시게 빛나고 감청색의 하늘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 파도에 일렁이는 요트, 산뜻한 빛깔의 꽃들은 만발하게 피어 향기를 가득 뿜고 있었다.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은 이 날도 수만 명의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1975년 7월, 미국 SGI멤버들에 의해 3일 동안 호놀룰루 시를 무대로 하와이 총회(conven tion)가 열리고 있었다.
이듬해에 있을 미국 건국 200주년을 앞두고 개최되는 기념 총회로써 하와이 주정부, 호놀룰루시가 전면적으로 후원하여 전국 각지의 대표 약 2만 명외에 일반시민들도 다수 참석했던 성대한 행사였다. 번화한 대로변의 가라카우아 거리에서는 브라스밴드, 고적대 연주, 장식마차 등의 퍼레이드가 다채롭게 행해지고 있었다.
마지막날에는 미국 건국의 정신이 뮤지컬로 상연되어 알로하의 정신이 드높이 선양되었다. 하와이 주지사인 조지 아료시 씨도 개최측을 대표하여 인사했다. 알로하의 정신은 인종, 언어 등 모든 차별을 뛰어넘어 사람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나아가는 데에 있으며, 미국 SGI멤버들에게서 그 승화(昇華)를 보는 듯하다고 칭찬해 주셨다.
하와이의 천지에서 이처럼 많은 미국인들이 불법자로서 희망에 불타 신심에 면려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참으로 기뻤다. 왜냐하면 15년 전 처음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맞이해 주었던 것은 하와이섬에서 온 단 한 사람의 청년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숙박했던 호텔은 허술하고 초라한 곳이었다. 외화제한이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1달러라도 절약하지 않으면 안되는 검소한 여행이었다.
무너지지 않는 행복성을 구축하길 염원한 하와이 첫 방문
세계광포의 첫 장을 열었던 하와이 첫 방문은 불과 하루 반밖에 되지 않았던 짧은 체류였지만 좌담회에는 30명 정도의 멤버가 참석했다. 이 조촐한 모임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후로도 몇차례나 하와이를 방문하여 열심히 멤버들을 격려, 대화를 거듭해 나갔다. 언제였을까. 하와이 회관에서 회합이 끝나고 멤버들도 모두 귀가하여 정적만이 주위를 감싸고 있을 때, 함께 노고하며 광포의 길을 걸어온 소중한 동지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펜을 들었다.
푸른 하늘, 초록빛 바다, 빛나는 태양, 새하얀 구름, 군이여! 이 낙원 하와이를 영원한 적광토로 만들어 가는 맑고 깨끗한 명장(名將)이어라. 문밖으로 나오니 만월이 빛나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공기가 참으로 맑고 깨끗했다. 석양에 물든 오아후섬의 썬셋 힐(sun set hill)에서 멤버들과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와이메아 해변은 석양에 붉게 물들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구름을 가르고 내리비치는 광선이 푸른 바다를 순식간에 금파, 은파로 물들여갔다. 와이메아란 하와이어로 붉은 물을 의미하는 것인데, 석양의 만(灣)은 확실히 장엄한 붉은 빛의 만이었다. 각양각색의 알로하 셔츠나 무무(하와이 원주민의 의상)로 몸을 감싼 멤버들에게 나는 이야기했다.
나는 불법의 지도자입니다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러분들보다 지위가 높다거나 하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하와이의 이름난 꽃 안트륨(Anthrium)이나 버드파라다이스, 하이비스카스가 피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하와이 벗들의 웃음 띤 얼굴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여러분들의 형제이자 친구이며, 어느 때는 아버지도 되어 진심으로 여러분들의 성장을 지켜볼 결심입니다.
신앙에 차별은 없다 ! 원점은 인간 !
인간사회에 상하 등의 차별이 있을 리가 없다. 하물며 종교의 세계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와이에 종교혁명이 일어났던 것은 19세기 초라고 한다. 고대 폴리네시아의 신화를 입으로 전하는 사람은 카후나라고 불렸다. 그들은 신관, 기도자, 예언자로서 세습권력을 손에 쥐고 영화와 권세의 극치를 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에게 수많은 금령(禁令)을 부과하여 이것을 어기면 사형에 처하거나 생매장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황색, 적색은 신분이 귀족이나 신관보다 낮은 사람은 사용할 수 없었다. 여성은 남성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없었으며, 바나나나 야자열매도 먹어서는 안되었다. 신들로부터 벌을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외에서 온 사람들에 의해 미신의 정체가 밝혀졌다. 외국인 여성은 바나나를 먹어도 남자와 식사를 해도 빨간색이나 노란색의 옷을 입고 신전에 들어가도 전혀 벌을 받지 않았다.
사람들은 의구심을 갖게 되면서 서서히 눈뜨기 시작했다. 카메하메하 대왕이 죽고 왕의 후계자에 의해 폴리네시아 고대 신(神)들은 부정되고 신관이나 기도사들도 추방되었다. 불합리한 모든 종교적 금령은 폐지됐다. 이 종교혁명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던 듯하다.
하와이에는 훌륭한 것이 두 가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자연과 알로하의 정신이다. 알로하는 환영할 때와 이별할 때 모두 쓰이는 데, 마음으로부터의 호의를 나타내는 말이다. 거기서 우애를 중시하는 조화의 정신을 알로하 정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와이 사람들의 영지가 낳은 알로하 정신을 소중히 하고 싶다. 아무리 화려한 무대에 있어도, 또 아무리 격투의 강행군을 하고 있을 때라도 나의 원점은 서민이며, 인간이다. 모두 평등하다. 차별을 두어서는 안된다. 이 마음으로 나는 살아왔다. 이것은 알로하의 정신에도 통한다고 생각한다.
세계를 무대로 한 여행에 동행하는 아내도 똑같은 마음으로 일해 주었다. 처음에는 표면에 드러나는 것을 꺼려했지만 해외에서 주요인사나 문화인, 식자들과의 회견, 또 부부동반으로 참석해야만 하는 행사가 많아지고 보니 포기해준 것 같다. 그러나 현지의 SGI멤버들과 만나는 것을 가장 우선시하고 있는 점만은 변함없이 일관해 오고 있다. 원래 몸이 약했던 나는 국내에서도 언제 쓰러질지, 언제 병마로부터 엄습을 당할지 모르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하물며 해외에서는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식사, 수면, 미묘한 스케줄 관리 등 세심하게 신경을 써준 덕분에 모두 극복할 수 있었다.
언제나 개척과 도전의 나날을 결의하는 나에게 아내의 세심한 마음씀씀이는 너무나도 고마운 것이었다. 어느 때는 간호사이고, 때로는 비서이며, 어머니 같기도 하고 딸이나 동생같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동지이다. 내가 취침한 후에도 조용히 창제를 거듭하며 나의 건강을 기원해 주었던 아내. 나는 깊이 감사드리고 있다. 아무튼 하와이의 멤버는 쾌활하고 늠름하게 또 한없이 발랄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알로하와 더불어 획기적인 블루 하와이 총회의 또 하나의 테마는 미국 건국에 맥동치는 용기와 정열의 자랑스런 프런티어 스피릿(개척자 정신)이었다.
하와이야말로 세계평화의 요충지
와이키키란 샘솟는 연못을 의미한다. 이 해변의 바다에 실로 거대한 인공섬이 만들어져 있었다. 6층 건물과 똑같은 높이라고 한다. 발상의 신선함과 웅대함은 과연 미국다웠다. 이 섬을 스테이지로 하여 1만 발의 폭죽이 쏘아 올려지고, 테마송 머나먼 2백년의 미래를 향해가 연주되었다.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웠던 저 생기넘친 건국의 정신을 상기하라며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해상 뮤지컬이 펼쳐졌다. 숭고한 목적을 위해, 서민이 손을 맞잡고 투쟁을 위해 일어선다
이것이 1776년(미국의 독립선언)의 정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는 영국군에 대항하여 마침내 자유와 독립을 목표로 의용군이 일어섰다.
그들은 유사시에 그 자리에서 즉각 출동했다고 해서 미닛맨(minute man:즉시 동원 가능한 민병)이라 불렸고, 용감히 싸웠다. 군사경험은 부족했지만 44세의 조지 워싱턴(훗날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사령관에 선출되어 의용군으로 구성된 독립군을 조직했다. 일곱 개의 바다를 제패하여 이미 전투에 익숙해진 영국군과 싸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직업군인과 같은 훈련을 받지 못했다. 철퇴(撤退)에 이은 철퇴. 전의가 꺾여 도망자도 나왔다. 그러나 독립선언의 기초자 벤자민 프랭클린은 워싱턴을 뒷받침해 의용군 병사들에게 외쳤다.
제군들, 지금이야말로 행동해야 할 때다
목숨을 걸어야 할 바로 그때이다
역사가 답을 기다리고 있다
독수리는 추락할 것인가
날개쳐 날 것인가 하고
정의를 위해
죽음을 각오한 미국인은 어디에 있는가
자유다!
정의다!
독립국가이다!
자, 나가자!
손을 맞잡고!
전쟁의 비극을 새긴 한편, 실로 평화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와이. 그 지리적 위치에서 보아도 환태평양지역의 문화흥륭과 평화를 위해 중심적인 역할을 완수해 낼 수 있는 섬들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1월, 나는 10년만에 하와이를 방문했다. 이번에는 동서센터와 하와이대학의 스팩 마쓰나가 평화연구소의 초빙에 의한 것이었다. 그때 뜻밖에도 동연구소로부터 알로하 국제평화상을 수여받았다. 또 아리요시 씨를 비롯한 그리운 분들과도 재회할 수가 있었다.
올해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지 50년. 요청을 받아 평화와 인류를 위한 안전보장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평화의 길을 모색하는 인류에게 있어서 진정한 안전보장은 어떠한 것인가를 논했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인류익이라는 관점을 지닌 세계시민의 육성이라고 강연하면서 나는 감청색의 하늘에 꿈을 그리고 있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사방과의 교류가 필수적인 하와이야말로 조화와 융합의 새로운 세계 모델이 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