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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는 좋은 글 등(1) 스크랩 스크랩 소경 바디매오 - 조지 휫필드
유오디아 추천 0 조회 75 05.06.22 10: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소경 바디매오
마가복음 10장52    조지 휫필드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서(고넬료에게 한 설교) 나사렛 예수를 언급하면서 그분
에 대하여 짤막하지만 영광스럽고도 존귀한 묘사를 하였습니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그는 두루 다니셨으며, 착한 일을 행할 기회를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자신을 보내신 분의 일을 하시는 것으로 자신의 양식과 음료를 삼으셨습니다. 한 선지자가
'의의 태양'이라고 예언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탱  우주 공간을 통하여 소생시
키는 광선을 비취오듯이 의의 태양이신 복되신 예수님은 그분이 나타나시는 곳마다 치료의
역사를 가져오셨습니다. 그분은 실로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이셨으며 여러 기적들을 행하심
으로써 장차 세상에 오리라 예고되었던 메시야가 지신이었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저는 먼저, 복음서 기자가 기록한 대로의 사실을 좀 관찰하고 나서 그 다음에 그 관찰로
부터 도출되는 몇 가지 점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설교를 축복해 주셔서 모든
영적인 소경들이 시력을 되찾고 바디매오의 본을 따라 예수님을 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건의 전체 이야기를 알기 원한다면 10장 46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
다.
"저희가(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앞선 문맥에 의하면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
었습니다.)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여리고는 여호수아가 저주한 곳입니다(수6:26). 그러나 그러한 곳에서도 예수님께로 회심
한 자가 나왔습니다. 즉 그곳에서 이미 삭개오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디매오
가 그곳에서 우리처럼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사렛에서조차도 선한 것이 나왔습니다. 그리스
도 자신이 그곳에서 자라나지 않았습니까. 그의 주권적인 은혜는 가장 열악한 곳에 있는 가
장 약한 사람들에게까지 미쳤고 그들을 정복해 버렸습니다. 그 예수님이 여리고로 지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인도하실 때에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가장 열악하게 보이는 곳이라 할지
라도 그곳에 가기를 꺼려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택함 받은 삶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여리고로 갔습니다. 그들은 순회 전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자주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은 한 곳에 좀처럼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특정지역에 머물며 사역하는 목회자들을 공격하는 주장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께서 이렇게 행하심으로써, 순회 전도자로 부름받고 자질을 갖추어, 그 사역에 몸담고 있는
자들의 일을 거룩한 것으로 ask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느 지역에 부흥이 일어나는
데네는 순회 설교가 큰 역할을 한다고 확신해도 좋다고 믿습니다.(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께 부흥의 방편을 지시하거나 명령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요즘 순회 설교의 겉모습이 초라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
은 두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들은 순회 설교를 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비난했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허다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시대의 대제사장들이 부른 대로 일단의 '무
리'(rabble:하층민,오합지졸, 어중이 떠중이란 의미로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낮추어 부른말)였
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를 계속해서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의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
은 빈민들어었으며, 그 평범했던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기쁨으로 듣고 한곳에서 또 다른 곳
을 그를 좇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르 따른다고 해서 모두가 그의 참된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이
들은 단지 떡을얻기 위하여 그를 좇았으며, 어떤 이들은 호기심에 이끌려 그를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그것에
의해 양육받기 위해 그를 따랐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자신을 따르
고 있는 이 무리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얼마나 언짢은 존재들인지를 의식하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언제나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하나라도 있느냐?" 라
고 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 주님께서 그들을 자기로부
터 떠나게 했다는 것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오직 단 한번의 예외만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사흘을 지내고 먹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목자 없는 양떼처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가르치셨습니다.
무리가 어떤 이유에서 나아왔던 간에 복음전파자가 불쌍한 영혼들을 향해 말씀을 전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 전도자들은 청중들에게 단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을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
을 주의 시켜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주 그렇게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예수님
을 따르고 그의 사역자들을 따르며 그들의 말씀을 기쁘게 듣고 여러 가지 일들도 했지만,
두렵게도 마치 헤롯 임금처럼 그들을 따라 천국에는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
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여리고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분에게 분을 내며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로서"라고 외쳐댔습니까? 누
가 대중적인 인기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아침 구름이나 새벽이슬 같아서 쉽게 사라
져버리고 맙니다.
대중적 인기란 타오르는 용광로와 같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인기있는 유명 사역자들이
그것에 의해 해를 입지 않도록 지켜 줄 수가 없습니다. 느부갓네살의 풀무에 던져졌던 세사
람을 지켜 주셨던 그분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능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종종 생각합니다. 유명한 설교자들이 많은 무리의 추종을 받으며 느낄 수 있는 지
나친 기쁨과 자기 만족을 잠재우거나 최소한 완화시킬 수 있는 생각은 무엇일까 하고 말입
니다. 이러한 생각이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이 청중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설교
에 의해 구원의 유익을 받지 못하고 돌아갔을까? 아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설교에 의해
그들의 저주의 분량을 더욱 커지게 하였을까?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 거리에서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진실로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본문을 계속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
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그는 유명한 거지였던 것 같습니다.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방도 없이 먹기 위
해 구걸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경우 더 불쌍한 것이, 그의 이름이 암시해 주는 것처럼 소경
아버지의 소경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 30절에 보면 "소경 둘이 ...소리질러
가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에
서 한 사람만 언급된 것은 바디매오 혼자만이 그 길에서 예수님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경건
하고 분별력있는 주석가 매튜 헨리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바디매오는 구걸한
다고 해서 비난받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그렇게 하고 있는 경우, 우리는 그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라고 말했던 것은 불의한 청지기였습니다. 남의 신세지기를 싫
어하게 만드는 것은 때로 우리의 교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음을 지니시지 않았
습니다 에수님도 구제를 받고 사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던 여자들이 자신들의 소유를 가지고
예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노동을 할 수 없는 바디매오는 살아가기 위해 구걸을 합니다. 그
리고 그것을 더 잘 하기 위해 큰길가에 앉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한
성문가에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시력은 잃었지만 온전히 들을 수는 있었습
니다. 우리가 한가지 감각을 잃어버리더라도 다른 감각을 사용해서 결국 모든 좋은 것들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비록 볼 수는 없지만 들을 수 있다
는 것이 바디매오에게는 큰 행복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우리 주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
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호기심에 무슨 일인지 알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에
게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워
졌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그곳에서 자라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 이말은 경멸하는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나사렛은 매우 비천하고 열악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사함
이 없는 사람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있겠느냐?" 라고 말했던 것입니
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바디매오는 어떻게 했습니까?
47절을 보면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이것을 보면 그는 비록 육신
의 눈은 멀었지만 마음의 눈이 어느 정도 열려 있었던 것
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 중 누구보다도 더 잘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에
대해 듣자마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전에 예수님에 대해 들은 적이 없
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실 능력
이 있으시며, 또 기꺼이 그런 일을 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소리지르기 시작했습니다."(KJV:He began to cry out).
이 표현은 그가 자신의 비참함과 치료받아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음을 암시해줍
니다. 그의 간구는 입술에서 나오자마자 얼어붙어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군중들의
요란한 소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들으실 수 있도록 그는 크게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마자 다시는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으로 그는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은 그분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분을 "다윗의 자손 에수여"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세상에 오신 메시아로 믿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주 하나님은 그 메시아에게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고 그 나라는 영원할 것임을 바디매오는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것은 마태복음 20장 30절에 있는 병행 구절에 "주여, 다윗의 자
손이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 이사야 35장에 이미 예언되기를, 그분이 오실 때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라
고 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발 앞에 드려진 영혼의 자
연스러운 언어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어떤 선행을 통해 치료함을 받겠다는 뜻이 전혀 없습
니다.
"하나님,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는 식의 어떤 자랑거리도,
자기 의도 없습니다. 그는 자기의 선행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능력과 그분이
기거이 고쳐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오직 심령 RKEMRG, 심령으
로부터 그는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상한 마음으로, 가난한 말로 기도드렸던 그 세리의 동일한 언어를 가지고 그는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 죄인의 친구시며, 구원자시여, 참 하
나님이시나 다윗의 자손이 되기를 기뻐하셔서 사람이 되시고 잃어버려진 자들을 찾아 구원
하시는 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가난하고 비천하고 눈먼 거지를 향해 동정심을 발
하소서"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처럼 감동적인 간구가 그 무리의 마음을 녹여서 그들로 하여금 그를 위해
예수님께 구하게 하고 또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가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48절
을 보면 정반대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원어를 보면, 이 말은 위협하며 꾸짖는다는 의
미가 있습니다. 또 이 말은 매우 성난 태도로 말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그를 꾸짖어 "잠잠하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만일 그가 잠잠하지 않으면 그를 때리겠다고 위협하는 말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거지가 나사렛 예수께 있어서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할 일이 없어서 너 같은 것을 시중들어 주시
겠느냐'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소경 바디매오를 매우 낙심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양을 따르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로부터 반대를 받았
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때때로 배우자로부터 비난받기도 하고 친형제 자매들의
노여움을 사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대를 당하는 것은 때로 간절한 열의를 더욱 자극하는 역
할만 합니다. 바디매오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무리의 꾸지람과 위협을 받고 조용해지기는커
녕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동일한 겸손
한 말로 계속해서 부르짖었습니다.
만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만 한다면 그는 화난 무리들이 그에게 무어라 말하고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태도입니다.
이것은 공허한 간구가 아닙니다. 그가 원하는 것을 간절하게 거듭 간청하는 것입니다.
리는 때때로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헛된 증언 부언이 아니면서도 같은 말을 거듭해서 간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고통 중에 두 번이나 간은 말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
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하고 말입니다.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거듭 구하였습니다. 그 다윗의 자손은 그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그분은 무리들과 같은 태도를 취하시고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하셨습니
까? 아니면 그를 무시해 버리고 갈 길을 계속해 가셨습니까? 아닙니다. 마가는 49절에서 이
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분은 여행중이었습니다. 그것도 서두르는 길이었을 것입니다.(지금은 멈추어 서서 시간
을 허비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선한 일을 하시기 위해 길을 가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가난한 자에게도, 심지어 진짜 거지에게도 우리가 겸손하
고 친절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또 잠잠하라고 꾸짖었던 이들의 눈멀고, 잘못된
열심을 무언중에 책망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소경의 믿
음과 그를 치료할 때 드러나는 주님의 자비와 능력에 사람들이 주목할 수 잇도록 무리를 준
비시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자선을 행하되 공개적으로 행하도록 부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 왼
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모순되지 않습니다.
자선을 행하고 구제할 때 그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과 사람들이 알게 하기 위해 그
일을 하는 것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는 언제나 죄이며 전자는 종종 우리의
의무가 됩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부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누가 그를 불렀습니까? 잠시 전에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던 바로 그들일 것입니다.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우리를 대적하고 낙심시킨 자들이 후에는 우리의 친구가 됩
니다. "삶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
시느니라"(잠언16;7)
예수님께 부르짖는 불쌍한 영혼들을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하고, 자제하라고 하고 너무
의로운 척 하지 말라고 하던 모든 자들이 여기 이 사람들을 본받아 한때 자신들이 핍박하고
비방하던 자들을 격려해 주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그들의 말과 태도는 소경의 구원에 대한 염려와 서두름을 느끼게 합니다. 오! 여기서 우
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이들을 향해 오래 참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갓 깨어난 영혼을 대적하곤 하는데 그것이 적대감에서가 아니라 편견과 오해, 무지와 불신
앙 때문에 형성된 잘못된 관계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진정 그들
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경우가 아니라 할지라도 모든 이들을 온유함으로 대하며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축복해 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고 이로써 축복을 기업으로 얻게 될 것을 알아야 합니
다. 예수님도 얻게 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바디매오도 이 반대자들을 향해 거친
말을 토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오거늘"
만일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지를 때 그의 마
음이 진심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왜 당신들은 나를 조롱합니까? 왜
나에게 일어나라고 말합니까? 내가 일어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일어서고 나면 소경인 내
가 어떻게 예수님을 찾아갈 수 있습니까? 만일 그분이 내게 오신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의 요구는 쓸데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요"

오늘날 이런 식의 반론이 복음 선포자들에게 수없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왜 당신들은
우리에게 예수께 나아가 그를 믿으라고 요구하나요? 당신들은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
가는 것이나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하나님 아버
지께서 이끌지 않는다면 아무도 예수께 나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나갈 수 없는 바디매오에게 일어나서 예수께가라고 사람들이 말한
것은, 오늘날 복음 선포자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진실로 그러합니다.
이런 반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본받아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나와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으라고 요청하는 것이 무엇
이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그것은 당신들 안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
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어 냄새나는 나사로의 시신을 향해 "나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나사로 스스로 그 무덤에서부터 나아 올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하신 말
씀입니까? 우리 복음 전파자들은 만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여러분들에게 요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말씀과 함께 역사하여, 여러분의 죽은 영혼을 살
려내고 일으키게 되기를 소망하고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율법사에
게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이유에서 여러분들에게 믿으라고
요구합니다. 즉,
여러분들은 그분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불신앙에 대해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믿음을 간구하게 되는 것입
니다. 믿음은 바로 그분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분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에 더해서 연못가에서 기다리는 것은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요구받은 의무를 성실
하고 꾸준히 이행하면서 여러분이 가진 힘을 사용하는 것은 여러분의 할 일인 것입니다. 비
록 여러분이 영적인 행위의 기초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영적으로 선한 일을 전혀 행
할 수 없다고 해도, 여러분이 이성적인 존재인 이상 도덕적으로, 물리적으로 선한 일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당신의 의무를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은혜를 불러
오는 것은 아니며, 또 당신에게 그런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그 길은 당신이 걸어가
도록 요구받고 있는 길이며,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마른손을 뻗으려고 노력할 때, 그때 그것이 치유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당신 안에 믿음을 일으켜 주실 줄 누가압니
까?
바디매오는 그러한 장애물들을 극복하는 예를 보여주었습니다.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이
자기를 낮추어 단 한 번만이라도 이 가난한 소경 거지에게 배울 수만 있다면! 그는 그의 겉
옷을 내어버리고 일어나 소경인 채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이 옷은 긴외투거나 망토라고 여겨집니다. 그는 비가올 때
나 추울 때 그것으로 자기 몸을 감쌌을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그가 지닌 가장
요긴하고 값비싼 의복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그것을 입은 채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 옷이 그의 발꿈치에 걸려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되거나, 최소한 예수님께 나아가 는 것이 지체될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값진 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내어던져 버렸습니다. 이 말은 그가 매우 서
둘러 그리고 단호하게 그것을 그의 어깨로부터 던져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만일 그가
원하는 대로 고침을 받는다면 다시는 그 옷이 그에게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
니다. 진심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이후부터 영원토록 그분의 나라에서 그분을 보며 즐거워할
자들은 모두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오른손을 자르고, 자기 오른쪽 눈을 뽑아버릴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고, 남
편과 아내를 버릴 것입니다. 예, 그들 자신의 생명마저도 내버릴 것입니다.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권면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십시오"(히12:1)

여기서 얽매인다는 말은 원어로 볼 때 발꿈치에 걸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관습상 긴 옷을 입은 사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디매오의 몸을 감싸고 있던 옷
이 바로 그런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내어 던지고 일어나 에수께로 감으로써 그
가 진실로 다시 보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가까이 오지 마라, 이 소란스럽고 염치없는 거지야" 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기이한 질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바디매오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르신단 말
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께서 우리를 다루시듯, 그
를 다루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도록 만드
십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의존하는 존재임을 고백하게 하고 또 우리의 필요를 더
실감하게 하여 그 분의 신적인 도우심을 더 인식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 소경은 즉시 대답
합니다. "주 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저는 마치 이 불쌍한 사람이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 가슴속의 간절함을 나타내는
표정과 몸짓으로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락 외치는 것을 보는 듯 합니다. 그의 말은 마
치 " 저는 당신이 세상에 오시기로 된 메시아임을 믿습니다. 저는 당신의 이름을 이미 들어
왔습니다. 오 예수님! 당신이 이 길로 오신다는, 오랫동안 기다려 오던 복된 소식을 듣고 당
신께 부르짖습니다. 금이나 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만이, 오직 당신만이 제게 주실구
있는 그것을 구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구하자 그는 즉시 그것을 받았습니
다.
52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라고 했습니다. 말씀과 함께 능력이 나간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더라"는 말씀대로 어둠 가운데 빛을 명령하신 그분께서
불쌍한 소경 거지의 눈에 빛을 명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제 그에게 빛이 있습니다. 이
기적은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그는 곧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직후 무언
가에 의해 빛이 가로막혔습니다 다시 그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시력
을 주신 분이 그 앞에 서 계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셨습니다.
오! 행복한 바디매오여! 그대의 눈이 열리고 그대가 처음 바라보는 대상은 늘, 언제나,
완전히 사랑스러우신 예수님이 아니신가! 그대는 놀라움과 경이감에 휩싸여 있고 모든 제자
들과 큰 무리는 그대를 둘러싸고 주목하고 있다네. 자, 이제 보게 되었는데 왜 그대의 주님
의 명령대로 그대의 길을 가지 않는가? 왜 서둘러서 겉옷을 다시 집어들지 않는가?
그러나 그는 그렇게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믿기로는 그의 육신의
눈이 열리자, 그의 영혼도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에
게서 흠모할 만한 풍채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지만, 바디매오는 마음의 눈으로 예수님 안
에 있는 고귀하고 탁월한 인격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동시에 이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예
수님에게 신성한 느낌에 이끌려 그의 겉옷을 가지러 가는 대신 길에서 예수님을 좇았습니
다.
그는 이 행동을 통해 신실하고 진실했던 룻과 같이 "당신을 떠나라고 강권하지 마옵서
서,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나도 가고, 당신이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당신
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당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길에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요,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저는 그 후 그가 면류관을 받기까지 예수님을 좇고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 주님과 함께 앉
아 있을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자, 이제 청중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놀라운 기적과 관련해서 여러분의
심령이 감명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모세의 노래를 부를 용의
가 있습니까?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15:!1)
오 예수님! 당신의 행사는 너무나 놀랍습니다. 우리 영혼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
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바디매오에게 행하신 일을 찬양하면서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본문은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날에 살고 있는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둘째 대지에서 이 이야기로부터 어떤 영적인 메시지를 얻을 수 있는지 살
펴보겠습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이미 약간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자연인은 성경의 바깥뜰까지 밖에는 못 들어갑니다. 이 본문이나 혹은 우리 주님의 다른
이적에 대한 내용을 읽을 때에도 자연인은 호머의 전쟁기나 알렉산더의 전기를 읽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듣는 것으
로만 만족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나는 바로 당신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증거되는 복음
을 듣고 앉아 있는 당신이 누구이건 간에 만일 당신이 자연인의 상태에 있다면 당신의 영혼은 바디매오의 육신이 그러했듯이 영적으로 소경인 것입니다.
소경 아버지의 소경 아들입니다. 당신 조상 아담의 소경 자손인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의 순전함을 잃어 버렸을 때 그의 영적 시력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정당하게 부과된 영적으로 눈먼 상태를 당신과 나 그리고 그의 모든 후손
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말 자신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정말 잠꼬대 같
은 말이요, 정신이 나간 사람의 말입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나 타락한 인간을 보여주고 있습
니다. 영적으로 단지 눈멀었을 뿐만 아니라 죽어 있는 상태까지 보여줍니다. 본성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길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디매오가 소
경일 때 무지개의 색깔들을 알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나는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이
무언가 느끼기 시작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염려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눈물
을 흘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만일 제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이
무어라고 대답할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시력을 되찾고 싶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목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도 하나님은 제가 여러
분에게 잠잠하라고 꾸짖는 것을 금하십니다.
아니, 여러분이 자신의 자연적인 소경 상태에 대하여 깨닫게 되고, 그래서 진심으로 예수
님께 부르짖고 있는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그의 성령에 의해 깨어났다는 최소한의 표지인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에서처럼 비통하게 울고서도 마침내 버림받는 일이 가능하기는 하
지만).
그러므로 일어나십시오. 안심하십시오. 확신하건대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
다. 그러므로 바디매오의 본을 따르십시오. 여러분의 겉옷을 내어 던지십시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십시오. 일어나서 예수님께 오십시오. 그분은 기록된 말씀
으로 저에게 여러분을 부르라고 명령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나사렛 예수를 찾으십시오. 보십시오. 그분은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오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큰길가에 있습니다. 확신컨대 예수님은 지금 지나가고
계십니다 저는 그분의 임재를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이것을 함께
느끼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분께 힘껏 부르짖으십시오 그분은 강하시며 또 기꺼이 여러
분을 구원코자 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을 주권적인 은혜의 발아래 두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이렇게 말하십시오 "다
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여러분에
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에
따라 여러분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소경이라고 해도 여러분은 보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사단과 불신앙은 여
러분에게 수많은 반론을 제시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육적인 모든 것들도 그들과 함께 여러

분을 고소하며 잠잠하라고 여러분을 꾸짖을 것입니다. 어떤 것은 여러분의 눈먼 것이 너무
나 심각한 상태여서 고침을 받을 수 없다고 여러분에게 말할 것입니다. 어떤 것은 여러분에
게 이미 너무 늦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 어떤 것은 여러분에게 비록 예수는 할 수 있지만
그는 너희 같은 가난하고, 눈멀고 비열한 거지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여러분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으면 꾸짖을수록 여러분은 더욱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구주
시며, 죄인의 친구이십니다. 당신은 다윗의 자손이시요 따라서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그렇
게 부르짖고 매달려야 합니다 이 이름들을 생각하시고 힘을 내십시오 그분에게 가까이 나아
가십시오.
예수님은 다윗의 주이셨지만, 육체를 따라 다윗의 자손이 되셨습니다. 이는 그를 통하여
여러분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로 당신이 어떤 사람이건 간에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문자 그대로 가난한 거지라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비
천한 당신을 주목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그런 가난한 거지를 부르
시기 위해 큰길로나 산울타리로나 가리지 않고 오십니다. 만일 당신이 부자라 해도 스스로
를 너무 높게 생각하여 예수님 앞에 엎드리기를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
든 왕 중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예수님 안에서 부요해 지기까지는 결코 진
실로 부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시당하거나 세상적인 명예를 잃어 버리는 것을 겁
내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고쳐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스
러운 어린양 안에서 너무나 매력적이고, 너무나 끌리고, 너무나 만족스러운 그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즐거움은 여러분 앞에서 시들어 버리고, 죽고, 소
멸되어 버릴 것입니다. 마치 바디매오가 시력을 되찾고 나서는 다시 돌아가 그의 겉옷을 가
져오지 않은 것처럼, 여러분도 이전의 헛되고 보잘것없는 오락 거리를 더 이상 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 오늘 여러분 가운데 그러한 소경 거지들이 많이 있기를!
이곳에는 가련한 벌레 같은 저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추수하게 희어
진 들판을 보며 매우 기뻐합니다. 그래서 이 가운데 복음의 그물을 수없이 던졌습니다. 그러
나 만일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이 일어나 나의 예수님께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저는 무거운
마음을 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전하기 원합니다.
저에게서 듣고 저를 따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믿고 그를 따르십시오. 저는 큰길이나 산울타리 안에서 전하는 저의
설교 때문에 낙심하지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 중 누구에 대해서도 단념하지 않습니
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저주받아 하나님께
드려진, 여리고를 지나가시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이 이 비천한 들판에서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을 부르시기 않겠습니까? 그분이 팔이 짧아져서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없단 말
입니까? 그분이 1700년 전에 지니고 계셨던, 그분을 통해 아버지께 나아가는 자를 얼마든지
구원하실 힘과 의욕을 지금은 가지고 계시지 않는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분명코 그분은 지
금도 그러하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
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십니다. 결단코 그렇습니다.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입니까! 죄인 여
러분 이 말씀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일어나십시오 예수님께서 정말 여
러분을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믿건대,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은 이 초대를 받아들이고 오래 전에 이미 그분을 뵈
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송축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바디매오에게 말씀하셨던
것같이 너의 길을 가라고 여러분에게 말씀하셨다면 여러분의 대답은 "우리는 우리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
러분은 주님의 권면의 말씀을 참고 힘써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옛 일을 상기시킴으로써 여러분의 순수한 마음을 휘젓는 것을 용납 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진실로 주님을 뵙고 여러분이 진실로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길에서 그를 좇음으로써 입증하였습니까? 그 십자가의 길,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길,
그분의 거룩한 명령을 순종하는 그 길에서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사랑이 식어졌습니까! 그 좁은 길을 따라 바르게 예수님을 좇고 있
는 사람들이 이제는 거의 없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데, 자신들의 겉옷을 기꺼이 내어 던
진 사람들이 너무나 적다는 말씀입니다. 너무도 많은 우상들이 우리 주변에 있어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지혜로운 처녀
들처럼 깨어나십시오! 깨십시오!(마25:1-3) 그리고 새 힘을 옷 입으십시오! 먼지를 떨고 일
어나서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가까이 예수님을 좇으십시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
으켜 세우십시오 여러분의 발을 위한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
고 고침을 받게 하십시오!(히12:12-13)
비록 그 길은 좁은 길이지만 그렇게 길지는 않습니다.
비록 그 문은 좁은 문이지만 영생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그분의 모습을
새롭게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은혜의 수레바퀴에 윤활유가 되어 여러분의 영혼을
아비나답의 마차같이 달리게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이 날이면 날마다 무거운 걸음을 걷는 것은, 순전히 그분을 시야에서 놓쳤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과 같아서 영혼을 덮고 있는 어두움과
그림자들을 모두 쫓아 버리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성도 여러분들이여! 그분을 새롭게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면서 그분의 모습을 직접 뵙고 황홀해질 때까지 그
싸움을 쉬지 마십시오. 그리하면 진실로 그러할 것입니다. 주 예수여!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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