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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129편1~8절
제목 :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인동초라는 풀이 있습니다.
넝쿨이 있고 연노랑색과 흰 꽃을 피는 꽃입니다.
흰색과 노란색의 꽃이 있기에 금은화라고도 부릅니다.
이 꽃의 이름 인동초의 뜻은 겨울을 견디어 꽃을 피운다는 뜻입니다.
인동초가 겨울을 지내서 피는 꽃이라는 이름 때문에 고난을 이기고 견디어서 종국에 영광을 본다는 의미가 이 꽃 이름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이겨온 인생을 보고 인동초 같은 인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동초와 비교되는 것 중에는 오뚝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오뚝이는 바닥에 무거운 것을 넣어 전체의 무게중심이 하부로 몰리게 만든 인형입니다.
그래서 어떤 자세에 놓더라도 오뚝하게 바로서는 인형입니다.
오뚝이는 넘어져도 일어나고 거꾸로 놓아도 똑바로 서는 놀라운 복구력이 있습니다.
100번을 넘어지고, 1000번을 넘어져도 일어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한 능력을 알고 있기에 인생에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을 우리는 오뚝이 같은 인생이라고 부릅니다.
오뚝이, 인동초, 고무줄 이런 것들은 다 화려한 것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넘어트려도 넘어지지 않고, 추운겨울이 와도 결코 얼어 죽지 않고, 아무리 잡아당기고 끊으려 해도 쉽게 끊어지지 않는 끈질 한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위대하고 아름답고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위대함도, 그 어떤 아름다움과도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것에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본래 모습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시편의 기록자가 이스라엘을 사람처럼 표현하면서
하나님 믿는 백성들이 당하는 현실과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의 모습이
동일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세상의 온갖 고난에도 굳건히 잘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하나님 백성들을 죽이려 할지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잘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동초처럼, 오뚝이처럼, 넘어져도 쓰러져도, 또 살아나고 또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횡포가 심할수록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악인들을 딛고 일어선 자신들의 역사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인들이 자신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할지라도,
결코 좌절 없이 그들과 당당히 겨루고 겨루어서,
최후 승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산다는 것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분명히 착하고 선하게 살았는데도, 오히려 세상의 비난을 더 받습니다.
세상이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려 합니다.
세상이 이유 없이 우리를 미워합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신기하게도 우리는 어떤 상황이라도 견디어 낼 수 있고,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들보다 더 큰 위치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세상살이 고난 고통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살피시며 지키시고 있기에 세상 환란을 만날지라도 능히 이기고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전을 오르며 부르는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오르는 예배자가
과거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각하니 참으로 감사할 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그렇게 죽이려 했지만, 결코 죽지 않고, 그렇게 묶으려 했지만 결박되어지지 않는 놀라운 은혜와 은총가운데 자신들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앞으로도 우리의 삶을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찬송하고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을 기록한 이들의 찬송입니다.
세상 살다보면 우리를 좌절시키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해도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희망을 품고 시도를 해보건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누릅니다. 세상에 나를 방해하는 것들은 왜 그리 많은지 산 넘어 산이고, 물 건너 물입니다.
돈도 없고, 나이는 너무 많은 것 같고, 몸도 아프고, 도와주는 사람은 없고, 나를 반대하고 괴롭히는 조건들은 점점 늘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이제는 숨조차 몰아쉴 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우리를 지키셨습니다.
오히려 원수의 시련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하셨으며, 우리의 환경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를 더 지혜롭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환란과 시련을 통하여, 약한 우리를 강하게,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병든 우리를 고쳐주시며, 싸매주시며, 세상을 이기게 하시며, 세상이 우리를 감당치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산다는 것은 기도원이나 수도원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 경쟁하고 세상 사람들과 다툼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화합하고 협력하려 하지만 그들은 우리와 경쟁하려 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다투려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쟁하고 다투는 것이 우리의 의지가 아니어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도원에 살고 기도원에 살며, 세상 것 다 끊고 산다 할지라도, 문제는 생길 것입니다.
세상을 다 버리고 주님만으로 산다고 각오한 사람끼리도,
서로 서로의 갈등으로 인하여 마음을 상하는 일에서 해방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괴롭히고 어렵게 하는 일들은 세상에 속해 살거나 기도원이나 수도원에 들어가서 살거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입니다.
천국가기 전까지 우리 앞에 놓여진 어려운 숙제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일을 회피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으니 저곳으로 가볼까? 새로운 일을 해볼까?
바꿔보고 옮겨봐야, 그 직장이 그 직장이고, 그 동네가 그 동네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쨌거나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날 괴롭혀도 어쨌거나 그들에게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어떠하든, 현실이 어떠하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심을 말씀합니다.
성도여러분, 세상 상황이 녹녹치 않을 것입니다.
먹고 살기가 날로 빡빡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는 조건이 점점 악화됩니다. 학생들은 날마다 공부할 것이 많아집니다.
장사하시는 분들은 날마다 경기가 나빠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결국 최후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인도하시기에 우리는 쓰러져도 반드시 일어날 수 있으며, 추운 겨울이 올지라도 반드시 꽃피고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능력주시기에 능히 세상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풍파 어려움에 있을지라도, 심지어 우리가 우리를 삼키는 원수의 입안에 들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기에 결코 좌절함 없이 오늘을 살아 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길 원합니다.
1-2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2]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소설이나 드라마의 끝은 대부분이 주인공이 승리하고 끝납니다.
이런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다 기쁘게 생각하고 호평을 합니다.
잘된 작품이라고 박수를 쳐줍니다.
물론 비극적 드라마의 경우는 주인공의 슬픈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런 드라마들은 시청자가 작가에게 압력들을 행사하고 작가를 비난하는 때도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향한 강한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마음에는 이렇게 작품 속의 사람들, 상상속의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이 더 행복해지길 우리보다 더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어제보다 오늘이 좋아지고, 내년이 올해보다 더 좋아지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경영하는 우리들의 인생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의 인생들은, 행복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록자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수한 고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주변 여러 나라와의 전쟁의 연속이었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강해지기만 하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이 개입되고 싶지 않은 전쟁에도 말려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치가 큰 나라와 큰 나라 사이에 길목에 있어서, 아랫 나라가 윗 나라 치러 갈 때도 이스라엘을 치고, 윗 나라가 아랫 나라 치러 갈 때도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스라엘이 살아왔습니다.
그러한 고난의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주변나라에 강대국이 생겼다하면 이스라엘을 반드시 침공하였습니다.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은,
해당시대에 세계사에 기록되어 있는 세계 최강대국들이었습니다.
이 나라들이 전부 이스라엘과 전쟁을 했습니다.
애굽을 시작해서, 앗수르가 망하면 바벨론이, 바벨론이 망하면 페르시아가, 페르시아가 망하면 그리스가, 그리스가 망하면 로마가 계속적이고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침공하였습니다.
바벨론 때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성전을 다 파괴하고,
70년간 대부분의 국민들을 바벨로 나라로 끌고 가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힘들게 했던 것을 시편의 기록자는 기억하여 소시적부터(어릴 때부터) 고난을 당했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결국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민족이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고난 가운데 있게는 하셨지만,
결코 이스라엘을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사야서 54장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사54:7~8)고 말씀하십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흘리신 피 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 나라의 자산입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포기하시도 않으시며,
우리의 고난을 참고 보실 하나님도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우리가 잠시의 고난당하도록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잠시 동안은 악인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공격으로 악인이 결코 우리를 이길 수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방해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역사에,
악한 것들은 늘 반대하고, 괴롭히고, 힘들게 하였습니다.
에덴에서 사단은 뱀으로 유혹하여 사람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구약시대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여도,
사람들을 전혀 반응하지 않게 했었습니다.
악한 것들은 예수님의 구원사역도 방해했으며,
악한 것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를 순교까지 시키며 저항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섬긴다는 그 한가지의 일로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0여 번의 대학살과 박해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죽였던 로마도,
결국 주후 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악인들의 횡포는 영원할 수가 없다는 것을 성경과 역사는 우리에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3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3]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악인들의 박해는 정말 만만치 않았습니다.
마치 사람의 등에 쟁기를 이용해서 고랑을 만들고,
둔덕을 만들 듯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역사를 보면 악인들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백성들을 이렇게 힘들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 때,
애굽 왕 바로는 애굽 땅에서 종살이 하는 히브리사람들,
그러니까 이스라엘 국민들이 숫자가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국민의 숫자를 줄이려 합니다.
애굽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①일을 괴롭게 하고, 못살게 하면 히브리 민족의 숫자가 적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애굽 감독을 세우고, 무거운 짐을 지게 하여 괴롭게 합니다.
큰 성을 건축하게 합니다.
모든 히브리 사람들이 가서 그 일을 하게 하여 괴롭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번성하게 만드십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일이 힘들게 해서 괴롭게 하는 것으로 히브리사람들의 번성하는 것을 애굽 사람들은 막을 수 없게 됩니다.
② 그러자 애굽 왕 바로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명령합니다.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까지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일들을 막으십니다.
그 명령을 받은 산파가 아이가 낳는 집에 도착해보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애를 낳게 하시어 그들의 계획이 아무 쓸모없게 만드십니다.
오히려 바로의 탄압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히브리 민족이 더 번성하게 하십니다. ③그러자 애굽의 왕은 히브리 사람들이 아들을 낳으면 나일 강에 던지라는 명령까지 내리게 됩니다.
이렇게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원수들이 쟁기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듯 사람의 등에 고랑을 내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이 있을지라도, 결코 악인들은 나를 이길 수 없었다고,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는 괴롭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고난은 성장을 주고, 발전도 줄 수 있습니다.
고난은 성장을 위하여 필요한 영양소와 같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성장으로 연결되려면, 엄청난 눈물과 고통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훈련입니다.
모든 것이 훈련을 통해야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키도 크려면 성장통이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도 영적 성장통이 있습니다.
삶을 통하여, 생활을 통하여, 고난을 통하여, 몸과 마음과 영혼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야만, 자신만 알던 사람들이 세상을 알 수 있게 하고,
혼자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하던 사람들이 세상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 마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야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들이 믿음의 장부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고난의 이유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징벌로 받은 고통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을 주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고난도 허락하시며, 하나님 안에 살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만 바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우리의 삶에 온다는 것은 원인이 무엇이든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고난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금의 고난이 훈련 때문에 온 것이라면,
훈련할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훈련을 통하여 크게 성장시키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내가 잘못을 하여 고난을 당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교정하시고,
다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기 위하심이니 이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은 의미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다만 그 깊은 뜻을 모르는 우리들의 고민만 있을 뿐입니다.
악인들에게 있는 고난은 형벌이고 멸망입니다.
악인들의 고난은 벌을 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벌을 통해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회복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우리의 고난은 형벌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고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교정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로 다시 살게 하시며,
다시 하나님 앞에 행복하게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기록자는 고백합니다.
악인들이 어릴 때부터 나를 괴롭혀도, 결국 나를 이기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내 등에 고랑을 파면서까지 나를 못살게 했을지라도,
나를 이기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 등이 휠 것 같은 무게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걷고 계십니까? 혹은 등이 파여 고랑이 난 것 같은 고난 가운데, 눈물 흘리고 계십니까? 그러한 고통가운데 계시다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지신 그 예수님 바라보시길 소망합니다.
그 구원의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며,
우리를 의와 평강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4,5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4]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5]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무수히 요구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예루살렘에 쳐들어 왔습니다.
산헤립 왕은 히스기야에게 ‘금 내놔라, 은 내놔라’ 요구가 많았습니다.
금과 은을 내어 주면, 더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이스라엘을 욕하는 이야기를 해댑니다. 히스기야 임금은 더 이상 감당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히스기야는 하나님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혀온 앗수르입니다.
정말 이스라엘과 히스기야 등에 쟁기로 골을 파듯 괴롭혀온 앗수르였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임금은 어떤 방법으로도 앗수르를 물리칠 힘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가 보낸 협박편지를 하나님 성전에 가지고 올라가 펴놓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보셨지요? 하나님 들으셨지요?”
저 악인들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주님의 백성들을 협박하는 소리를 들으셨잖냐고 여쭈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간절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리하여 앗수르 군대를 물리쳐 주십니다.
앗수르의 군인들은 당시 세계최강의 군인들이었습니다.
그 군인 18만 5천명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앗수르의 군인들을 하나님께서는 하룻밤 만에 완전히 몰살시키십니다. 산헤립은 그길로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 죽게 되어,
그것으로 세계 최강국 앗수르가 망해 없어지는 사건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끊어 주시고,
하나님 백성을 미워하는 이들을 보복하시고,
수치를 당하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는 단지 앗수르의 산헤립만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항하고, 주님의 백성들을 미워한 사람들은 성경시대 때부터 오늘날까지, 아니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끊어주시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시고, 물리쳐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미워하고, 교회를 미워하고, 성도여러분들을 핍박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반드시 끊어 버리시며,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므로 그들의 결말은 패망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향하여 눈물 흘리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아직도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교회와 성도여러분을 핍박하는 제도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가 어떤 권력에 있건, 그가 어떤 부를 누리고 있건, 그가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건, 하나님께서 끊으시면 모든 것을 놓아야하며
멸망의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 대하여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끊으시고, 하나님 섬기는 분들을 미워하는 이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고 물러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6-7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6]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7]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우리를 괴롭히는 악인들의 모습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가장 높은 곳에서 빛이 납니다.
모든 것 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있을 곳에 있지 아니하며,
교만한 모습으로 날뛰기에 무엇인가 있어 보였을 뿐이고,
위에 있어 보일 뿐입니다.
성경은 그들의 모습을 지붕의 풀과 같다고 기록합니다.
지붕 위에 있기에 자세히 보기 전에는 무척 크고 왕성해 보입니다.
그러나 뿌리가 깊지 않고, 의지할 것이 없기에 자라기도 전에 스스로 말라버리고 말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교만한 자들의 최후입니다.
또한 그들의 소득이나 그들이 크기가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악인들의 허상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 종살이 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을 붙잡고 내어 주지 않던 애굽의 바로 임금은 자신이 무엇인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홉 번까지 재앙을 당해도 견딜 줄 알았습니다.
새로운 재앙이오면 백성들을 내어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 재앙을 물리쳐 주시면, 이내 약속을 또 바꿉니다. 이러기를 아홉 번이나 반복하다 마지막 결정타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엄청난 재앙이었습니다.
애굽 땅 모든 것들 중 처음 난 것은 다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로 인방과 설주에 바른 집은 그 재앙이 건너뛰고 나머지 모든 집에는 처음 난 것은 모두가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하루 밤에 애굽은 전국이 초상집이 되고야 맙니다.
그때서야 애굽의 바로는 하나님과 모세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들어갈 때는
애굽과 주변나라를 다 살리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로 엄청난 가뭄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애굽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후대하고 친하게 지낼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하기 시작할 때,
그들은 지붕 위의 풀과 같이, 삶이 깨어지고 결국은 죽음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세상의 부끄러움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록한 시편의 기록자는
성경을 통하여 역사를 통하여 악인들이 패망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 시편의 말씀은 아마도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다가 돌아 왔을 때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대백성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다가 하나님께로부터 큰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왕은 눈이 뽑히고 바벨론까지 끌려갑니다.
포로로 잡혀 가서 70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흐르게 됩니다.
유대백성들은 그것으로 모든 역사가 끝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포로 된지 70년이 된 날,
갑자기 히브리 사람들은 고향으로 되돌아가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예루살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이런 일은 역사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멀쩡히 잡아다가 잘 부려먹고 있는 전쟁포로들입니다.
이들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부려먹을 수 있는 노예들입니다.
국가사업에 절대로 필요한 인력들입니다.
그런 무임 인력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잡아올 때 빼앗아 온 금은 보물을 다 돌려주면서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보내 줄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꿈과 같은 일들을 경험하고, 자신의 나라로 되돌아 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의지하였더니 세상에 없었던 일을 경험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전에 오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는 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기적이 우연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신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기적의 일들은 역사 속에서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 아니 이보다 더 한 일들이 우리에게만 기적이지,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바벨론도, 페르시아도, 망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역사 속에서만 일으키시는 일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생활가운데 영원히 우리의 숙제로 남아 있는 질병의 문제, 가정의 문제, 자녀들의 장래의 문제, 사업의 문제도,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를 어느 날 풀어 주신 것처럼, 풀어 주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날에 세상 모두는 기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모두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불가능하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세상의 걱정 근심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그들은 아무리 우리를 괴롭혀도, 결코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등에 고랑을 내며 우리의 삶을 망가트리려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끊어내시며,
그들을 지붕위의 풀같이 속히 마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예배자로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와 은총이 우리 교회와 성도여러분들 가정과 사업과 하시는 일위에 영원하시길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8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8]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직장 내에서 왕따를 당하는 일들이 있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가만히 생각해보면, 과거 우리가 어렸을 때도 마을에도 이런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사회나 마을 공동체에 해를 끼친 사람과 가정에는 마을사람들이 상종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같은 마을에 살지만, 말도 못 건내게 하고, 오가는 것도 없이 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동네 인심을 잃고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8절의 말씀이 바로 이렇게 모든 인심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라는 축복의 말도 받지 못하고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모습이 아마도 가장 비참한 사람의 인생 말로일 것입니다.
얼마나 인생을 참혹하게 살았으면, 이해 당사자도 아닌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복을 빌지 않은 다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의 이방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며, 모든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이러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정말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이 땅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칭찬받는 성도여러분들 되시길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땀 흘려 일하고 있을 때, 물 한바가지를 갖다 주고,
여러분들이 성공했을 때 환호를 질러주며,
여러분들의 승리에 모두가 즐거워하는 일들이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로 인해서 동네가 좋아지고,
우리교회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고,
우리교회 때문에 기쁨이 넘쳐서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기뻐할 때 모두 박수를 쳐주며 기뻐해주는 일들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말씀은 하나님 앞에 살아가면 결코 영광을 누리고 산사람의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며 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살았던 어느 예배자의 고백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을 때, 악인들이 그렇게 이기려 했지만,
결코 우리를 이기지 못하였노라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을 감사하며 나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님 손바닥에 새기시고,
그들을 기억하심입니다.
우리의 눕고 일어남을 기억하시고, 어떤 신음에도 귀기우리시며,
날마다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만 의지하는 은혜의 시간들이 우리에게 영원하시길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고난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신 구세주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임하시길 소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하나님께 예배하는 백성으로 이 땅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