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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이렇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친히 이렇게 말하였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37. 다윗 스스로가 그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많은 무리가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마가복음12:35-37)
35 As Jesus was teaching in the Temple, he asked the question, “How can the teachers of the Law say that the Messiah will be the descendant of David? 36 The Holy Spirit inspired David to say:
‘The Lord said to my Lord:
Sit here at my right side
until I put your enemies under your feet.’
37 David himself called him ‘Lord’; so how can the Messiah be David's descendant?”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이렇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
35 As Jesus was teaching in the Temple, he asked the question, “How can the teachers of the Law say that the Messiah will be the descendant of David?
*교회
주님께서 가르치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주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때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오신 후 우리는 성전 대신에 교회에 앉아있습니다.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킵니다.
스타인 웨이 피아노에 최고급 마이크와 스피커를 가져다 두고 화려하게 장식해도 교회는 비어 가는데 말씀입니다.
주님은 아파트 단지에서 말씀을 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바다로 가시면 바다가 교회가 되었습니다.
산으로 가시면 거기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삼 일을 굶으면서도 흩어질 줄 몰랐습니다.
주님도 이 사역에 투자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다에서 설교하실 때입니다.
잠시 베드로의 배를 빌려 타신 적이 있습니다.
가나안 교인이 늘어가는데 코로나까지 겹쳤다느니, 인터넷으로 골라서 설교 듣고.......
그러면 성도의 교제와 성례는 어떻게 하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맞는 소리기는 하지만 그런 말은 푸념에 불과합니다.
이 시골 거창에도 밥 한끼를 사 먹기 위해 사람들이 산 속에 지어둔 식당을 차를 타고 찾아갔습니다.
비싼 음식을 먹고 갔습니다.
물론 그와는 반대로 먹을 것을 쌓아두고도 먹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병원 침대에 누워있습니다.
생명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영적 생명력이 넘친다면 제 발로 교회를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력을 주는 것은 말씀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지도자
주님은 그 죽으심을 며칠 앞 두고 계셨습니다.
당시 내노라는 지도자들이 차례대로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헤롯당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들은 주님께 질문을 던졌는데 그 동기는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주님을 죽음으로 몰아가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들이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제 주님은 무리를 앞에 앉히시고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 대상은 당시 지도자들입니다.
주님은 특별히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35.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
35 “How can the teachers of the Law say that the Messiah will be the descendant of David?
6.25 때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군이 쳐들어오자 도망가는 일이 급했던 모양입니다.
KBS를 통해 일관성 없는 정보를 내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한강 다리를 넘어 도망간 후에 그 다리를 끊어버렸습니다.
국민은 상황 판단을 못 한 채로 한강에 빠져 죽고 공산당 총에 맞아 죽고.......
“서울의 봄” 영화로 사람들이 한 사람의 미친 지도자가 나타나면 백성들에게 어떤 일을 벌어질 수 있나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문제의 지도자를 맞상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무리를 상대하시며 무리의 생각을 바꾸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지도자를 양성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무리의 생명을 구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리가 잘못 배운 특별히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을 바꾸실 것입니다.
양의 운명은 목자가 결정합니다.
양은 제 힘으로 자신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리가 오면 잡혀 먹고
제 먹을 풀이 어디에 많은지도 모르고
물은 어디에 있는지
언제인가 보니 양은 뒤집어지면 거북이처럼 일어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양에게 목자의 선택은 죽고 사는 문제였습니다.
목자 중에는 도둑도 강도도 있습니다.
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다.(요10:1)
양이 도둑놈 강도로 제 목자를 삼는 경우 그 양은 여지없이 도둑놈 강도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들이 할 일은 첫째 목자를 제대로 알아보는 것입니다.
물론 둘째는 목자의 정체를 알아보았다면 달아나는 것입니다.
5. 양들은 절대로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고, 그런 사람을 보면 도리어 달아난다. 양들은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10:5)
*가르침
과거에 성전의 역할은 제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인해서 성전의 역할은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한 구속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소나 양으로 드리는 제사가 필요치 않게 된 것입니다.
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을 주관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다시 말하면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을 거쳐서,
12. 오직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룩하여 주셨습니다.(히9:11,12)
이제 성전은 믿음을 지키는 장소입니다.
교제와 성례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장소입니다.
그 믿음을 잘 지키도록 가르치는 장소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문을 열고 들어갈 정확한 믿음의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며칠 전 급한 일로 부천을 갔습니다.
도착하니 한 밤이었습니다.
그렇게 다음날 이른 새벽이었는데 주인이 출근한다는 것입니다.
늦은 지난밤 주인 차를 막고 제 차를 주차시킨 관계로 제 차를 빼주기 위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습니다.
차 빼주고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아파트 현관문이 자동으로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겉옷도 걸치지 않고 대충 내려왔는데 황당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새벽의 겨울바람에 덜덜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몇 시간을 떨고 있어야 할지 모를 일입니다.
까마득한 아파트 위층까지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습니다.
열려라 참깨 이 참깨라는 정보가 생각나지 않아서 죽은 사람 이야기가 있습니다.
단 네 자리 숫자만 알면 되는데.......
주차장에서 현관문으로 나오니 방 호실을 누르고 벨을 누르라고 안내문이 붙어있었습니다.
비밀번호를 모르는 외부 손님을 위한 친절한 안내였습니다.
하지만 4층은 알겠는데 방 호실 세 자리 숫자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우편함이 옆에 붙어있어서 우편물을 뒤적여 주인을 확인했습니다.
호실 정보를 안 것입니다.
그렇게 통화하고 올라와 보니 마누라는 따뜻한 방에서 텔레비전 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얼어 죽을 뻔 했는데.......
그런데 너희는 너희 지도자들에게 무엇을 배웠느냐?
지도자의 가르침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느냐?
그들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치니 그런 줄 알고 그대로 믿었느냐?
4층인 것은 알겠는데 무성의한 정보를 지도자(the teachers of the Law)들이 주었다는 것입니다.
사탄을 무찌르는 목사의 칼은 말씀입니다.
그것으로 악의 세력을 여지없이 꼬꾸라뜨리는 것입니다.
“태초에 가나안 교인이 많았느니라, 그런데다 코로나까지 터졌느니라. 하지만 거기에 말씀이 있자 그 세력이 맥없이 물러갔느니라”
“영국 교회, 프랑스 교회 다 무너졌느니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 한국 교회에는 문제가 없었더라. 이는 둘째 날이라”
*안일한 사고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 때 한 아말렉 사람이 사울을 죽였다는 정보를 들고 다윗 왕을 찾았습니다.
다윗의 과거를 보자면 사울 왕은 틀림없이 다윗의 적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다윗에게 좋은 소식입니다.
자신이 사울왕의 죽음에 일조했는데 자신의 손에는 죽은 사울왕의 왕관과 팔찌가 들려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있게 다윗 왕에게 보고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습니다.
13. 다윗이 자기에게 소식을 전하여 준 젊은이에게 "너는 어디 사람이냐?" 하고 물으니, "저는 이스라엘 땅에 거주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입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14. 다윗이 그에게 호통을 쳤다. "네가 어떻게 감히 겁도 없이 손을 들어서, 주께서 기름을 부어서 세우신 분을 살해하였느냐?"
15. 그리고 다윗이 부하 가운데서 한 사람을 불러서 "가까이 가서, 그를 쳐죽여라" 하고 명령하였다. 명령을 받은 그 사람이 그를 칼로 치니, 그가 죽었다.(삼하1:13-15)
그는 다윗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자신은 그 소식을 자신의 복음으로 여겼는데 자신의 깊지 못했던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탕자의 형은 그 날도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뜬금없는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탕자놈을 위해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고 있었던 것입니다.
29. 그는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내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눅15:29,30)
자신은 자신의 주장에 어디 한 마디 틀린 데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32.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였다."(눅15:32)
형은 아버지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그의 선행이 있었을 것입니다.
형이 탕자가 되어 아버지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고향에서 설교하셨을 때입니다.
22.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눅4:22)
예수님은 목수인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정보가 그들에게 무슨 유익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가짜가 아닌 진짜 정보입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정보였습니다.
그런 정보는 단순히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차단해버리는 것입니다.
그 심각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2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26.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 지방의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27.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깨끗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깨끗함을 받았다."(눅4:25-27)
28.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잔뜩 화가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 일어나서 예수를 동네 밖으로 쫓아냈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에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눅4:28,29)
차라리 예수님의 말씀을 모르는 이방인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 손에 죽을 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안일한 정보와 싸우신 것입니다.
안일한 정보가 신앙의 적입니다.
*열린 마음
심문하던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나병을 고치시며,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대제사장 역시 보고 듣고 있던 내용입니다.
그랬으니 이 질문은 일정 그의 진실을 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답을 하신 것입니다.
64.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당신이 말하였소. 내가 당신들에게 다시 말하오. 이제로부터 당신들은, 인자가 권능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65. 그 때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고, 큰소리로 "그가 하나님을 모독하였소.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들이 더 필요하겠소? 보시오, 여러분은 방금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소.(마26:64,65)
주님은 물론 옳게 대답하셨는데 이미 그들 안에 답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물을 필요도 없은 질문을 한 셈입니다.
듣고도 제 주장을 할 텐데 뭐 하러 물어!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정답을 듣고 하나님을 모독했다면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성전 앞의 한 거지는 오직 한가지 생각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깡통을 500원짜리 동전으로 채우는 그 일에 날마다 올인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동그란 깡통을 각진 네모 모양으로 찌그러뜨려 보기도 하고, 깡통에 노란 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그 사람은 물론 거지의 생각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그 말을 했습니다.
“나는 네 깡통 채우는 사람 아니다.”
6.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7.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8.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행3:6-8)
제 생각에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거지를 일으켜 세웠더라면 거지 스스로 깡통의 의미를 알았을 텐데.......
아! 예수님의 이름이 최고구나!
그러나 베드로는 이 부정의 말로 꼭 짚고 넘어갔습니다.
거지가 순발력을 발휘했더라면 베드로는 거지의 욕을 듣고 쫓겨갈 뻔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에게 반드시 우선 되어야 할 것은 우상의 부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분명한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내 손아귀에 내 잘난 것을 꽉 쥐고 있으면 거기에 하나님의 것을 쥐어줄 수 없습니다.
깡통을 내다 버리는 일이 먼저 할 일이었습니다.
36.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친히 이렇게 말하였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36 The Holy Spirit inspired David to say:
‘The Lord said to my Lord:
Sit here at my right side
until I put your enemies under your feet.’
*성경
주님은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교정하시기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셨습니다.
가르침의 절대 권위는 성경에서 옵니다.
율법 학자들은 성경이라면 일가견이 있다고 자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경을 인용하시며 그들이 성경도 제대로 모른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36.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친히 이렇게 말하였다.
36 The Holy Spirit inspired David to say:
예수님의 지적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과 그냥 다윗은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다윗의 눈은 성전 옥상에서 옆집 여인의 목욕하는 것을 엿보는 눈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의 눈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것을 볼 것입니다.
그는 다른 것을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다윗에게 전혀 다른 말씀을 하게 하셨습니다.(The Holy Spirit inspired David to say)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말씀하시는 광경을 보고 그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서 감동하시지 않으면 그 다윗의 말씀을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그 말씀을 읽어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에 따라 선택한 것입니다.
또한 제 시각으로 해석할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씀한 그 말씀을 읽는 사람 역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인용했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없습니다.
마귀들은 교묘했습니다.
그들이 인용한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었습니다.
즉 말씀을 인용하므로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6.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7. 예수께서는 악마에게 말씀하셨다. "또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마4:6,7)
하나님께서 원수를 완벽하게 이기신 사건은 곧 십자가의 사건을 이릅니다.
그런데 이런 비참한 십자가의 사건이 어떻게 하나님의 승리로 읽힐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의 눈에 마귀의 승리로 보이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 십자가를 하나님의 승리로 읽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덤을 열고 부활하신 사건은 누구에게나 제대로 읽힐 것으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역사 가운데 순교하신 손양원 목사님과 그 아들의 부활까지 본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 눈에 확인될 수 있는 것은 두 아들에 이어서 목사님이 총살당하신 것 뿐입니다.
거기까지입니다.
죽음 후의 부활은 믿을 뿐입니다.
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서도 그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보고도 못 믿겠다고 한 사람은 제자였습니다.
찔린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보는 것으로 부족하니 만져보겠다는 것입니다.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서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요20:25)
그것을 듣고 보아도 다른 문제입니다.
도마는 그 정도였지만 그 일을 하고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헛것을 봤었나?
성령의 역사로 영적 눈이 열려야만 하는 문제입니다.
*십자가
36.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36 Sit here at my right side
until I put your enemies under your feet.’
이 일은 성부 하나님께서 원수를 이기신 완전한 승리를 이릅니다.
그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일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빌립보서는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빌2:8,9)
영적 승리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잘 감당하는 여부를 이릅니다.
이렇게 제 십자가를 감당한 사람이 승리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그 실패를 부활의 소망 가운데 수용하는 일을 두고 승리라고 합니다.
1. 내가
주님은 회초리질을 당하시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걸으셨습니다.
손과 발은 못에 박히고 허리는 창에 찔리셨습니다.
비명을 지르시고 죽으시기까지 십자가를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침 뱉고, 욕하고,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씌우고, 옷을 벗겨.......
주님은 그 고통을 미리 아셨습니다.
물론 제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물리적인 고통 뿐입니다.
어느 탈북 작가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임신한 상태였는데 보안부인지 그 미친 작자들이 자신의 배 안에서 태아 다리를 잘라 꺼내고, 머리를 잘라 꺼내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녀는 북한의 그 의사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그 녀는 자신이 당한 일을 두고 하나님께 이 문제를 물어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런 일을 내가 왜 감당해야 하나요?
하나님은 그 녀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일러주었다고 했습니다.
나의 아들 예수가 그렇게 당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 녀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믿고 수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남한에서 작가가 되어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지 못한 저는 이해가 잘 안 갑니다.
혹은 이해가 되더라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수용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늉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랬다가는 정신이상이 될 것이 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하나님을 간증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한가지 질문을 하겠는데 이런 하나님의 사건을 여자 빤쓰 이야기로 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하나님의 말씀이 빤쓰 보조 목사의 코메디로 전달될 수 있다는 말인가!
더 첨족을 한다면 여러분은 이데올로기에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좌파에게 당하고 이제 또다시 극우파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극우파의 이데올로기 역시 미친짓을 하는 것은 똑같기 때문입니다.
우파 독재자가 장태완 장군의 식구들을 한 사람씩 죽여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경악을 했습니다.
이 나라를 살리려면 장 장군의 아들을 죽인 자들을 끝까지 찾아내서 그 문제를 바로 잡아두어야 합니다.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제 몸 안에 있던 태아의 잘린 팔과 머리는 예수님의 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성부 하나님(내가)의 몸이었습니다.
우리는 성자 예수님을 보았는데 그 분은 성부(내가)이셨습니다.
2. 네 원수
예수님의 원수는 성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물론 우리를 죽음의 종이 되게 하는 우리의 원수는 그리스도의 원수입니다.
최소한 저는 그 탈북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보안원 의사가 내 원수가 되었습니다.
장 태완 장군의 아들의 소식을 들으면서 그를 죽인 정보부원이 내 원수가 되었습니다.
3. 앉아 있어라
하나님 전쟁의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이 일하실 때 우리는 앉아 있는 것입니다.
아무 일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일을 성부 하나님께 맡기신 것입니다.
그것이 성부 하나님의 명령이셨습니다.
그저 앉아 있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앉아만 있을 그 일을 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손과 발을 못 박아도 가만있는 일
창으로 옆구리를 찔려도 가만있는 일
욕을 해대고
침을 뱉어도
뺨을 때리고 모욕을 해도.......
주님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끝까지 앉아만 계셨습니다.
일절 아무 대꾸도 없으셨습니다.
때라면 맞고
찌르면 찔리고
침 뱉으면 그것을 얼굴에서 닦아낼 수도 없으셨습니다.
그렇게 앉아만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37. 다윗 스스로가 그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많은 무리가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37 David himself called him ‘Lord’; so how can the Messiah be David's descendant?”
* 주께서 내 주께
율법 학자들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지도자의 가르침 때문에 무리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 그것이 그들에게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은 율법 학자들의 가르침이 안일하다는 것입니다.
또 그 가르침을 들은 무리가 안일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주는 다윗의 그리스도였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자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보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질문
안일하게 지도자의 말을 듣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그들은 새로운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르침의 뜻입니다.
아무리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더라도 이 말씀이 임하시면 바로 소망의 빛이 비칠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의 첫날의 사건입니다.
바로 그 말씀!
그 하나님의 말씀이 관절과 골수를 찌르며 죽을 뼈들로 살게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무리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지도자의 가르침을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37.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37 so how can the Messiah be David's descend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