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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잡고(武陵雜稿) 주세붕(周世鵬)생년1495년(연산군 1)몰년1554년(명종 9)자경유(景遊)호신재(愼齋), 남고(南皐), 무릉도인(武陵道人), 손옹(巽翁)본관상주(尙州)시호문민(文敏)특기사항강신효(姜藎孝)의 문인
武陵雜稿卷之三○別集 / 詩 / 洞門磐石上。與縣監趙良弼 應世 對酌。良弼令小童磨墨。所坐石索詩。戲題。
使君許我大磐石。要我泚川題好詩。我且夜携磐石去。使君他日悔何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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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집(退溪集) 이황(李滉)생년1501년(연산군 7)몰년1570년(선조 3)자경호(景浩)호퇴계(退溪), 도산(陶山)본관진보(眞寶)시호문순(文純)특기사항문묘(文廟) 및 선조(宣祖)의 묘정(廟庭)에 배향
退溪先生續集卷之一 / 詩 / 聞慶慶雲樓西閣。對山臨池極淸絶。金貳相 國卿,李貳相 復古 皆題詠。主人趙良弼導余以登眺。二首。
小作看山閣。仍開竹下池。不因賢宰語。孤負兩公詩。
春深花映竹。風細雨斜池。靜裏泉聲咽。渾疑說我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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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文集攷證卷之八 / 續集第一卷詩
聞慶慶雲樓云云慶雲樓。在客館東南。
國卿 慕齋
趙良弼 未聞。
조응세(趙應世) | 횡성(橫城) | 양필(良弼) | 조준(趙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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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집(穌齋集) 노수신(盧守愼)생년1515년(중종 10)몰년1590년(선조 23)자과회(寡悔)호소재(穌齋), 이재(伊齋), 십청정(十靑亭), 암실(暗室)본관광주(光州)시호문간(文簡)초시문의(文懿)특기사항이연경(李延慶)의 문인
穌齋先生文集卷之九 / 碑碣 / 有明朝鮮國故中直大夫司諫院司諫郭公墓碣銘幷序
萬曆五年夏。察訪郭懷瑾狀先司諫來視曰。惟先生能重哀吾父心跡。其必能有以發之。敢以請。嗚呼尙忍言。謹按其世。曰郭氏。出玄風。爲望族。世居淸道郡之大坪村。有諱成己。司醞署直長。生諱孝元。長鬐訓導。訓導生諱遂寧。司宰監僉正。聘永川金氏(忠順衛) 哲端之門。弘治壬戌十月八日。公生永川蒼水里第。諱(珣)字伯瑜。婦翁監察鄭彦脩。長男卽察訪。娶士人李誼女。生一女。適崔柱南。妾有子。庶星。次男懷玠。生子二。幼。次庶子懷珷。生一女。幼。長女適幼學許允宗。次女適習讀洪汝昌。次庶女壻。李壽千,李栻。其官曰。嘉靖戊子。文科第幾名。乙未。成均館博士,校檢,戶曹佐郞。丙申。眞寶縣監。壬寅。典籍刑禮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持平。癸卯。舒川郡守。甲辰。司藝,司成,掌令。乙巳。司諫相禮,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七月。告身盡褫。越二十四年戊辰。職牒還授。其葬曰。乙巳九月十五日。在理而終。靈柩之南也。宋圭庵遣子應慶致奠禭。又爲之喪具以送。李公潤慶,浚慶,鄭公源,宋公麒壽,李公若海,沈公逢源,李公弘幹,鄭公潚。助以衣服米布紙席。其賻不以名者亦多。次于中原。灘叟公爲文以祭。而哭之慟。資以糧饌人馬。及葬。成聽松作宔寄焉。重言公牧星山。朝夕祭粒。月致不絶。明年十二月十七日。窆龜龍山五福洞之卯向原。至其德行。則不可一二擧。少瑩秀。稍長勇逸。乘木屐踔墻屋如飛。人皆異之。年及一終。始就學。自是連捷發解。聲號聞嶺外。先大夫卒官于都。旣挽轝歸故里。貧無以爲葬。破産負土而營之。喪制一依文公家禮。鄕人談其孝藉藉。夙興。冠帶謁祠堂。仍省大夫人。風雨不廢。常曰。男女七歲。坐不同席。內外不可不別。雖姊妹之家。亦未嘗入內。御臧獲。寬而莊。先世老僕。不曾名呼。上下幼卑。皆得其歡心。有寡妹無庇。輒捐其家。表姪輩食貧。割。田分畀之。凡餽遺。非親奮不受。受必盡獻大夫人。媳婦李氏製衣以進。頗精細。郤之。才出仕。便乞養專城。以行其志。任五期而罷。受而不辨。至家屢空。晏如也。乃於雲門山中占一區。曰東京。丘有水石林壑之趣。遂手誅茅墾土。囂然爲終焉之計。辭臺職復爲郡。櫛爬俱至。絃誦偕作。未幾被召。稚耋咸啼號願借。立朝。神相毅然。望之知其有大丈夫之風焉。常喜讀庸學。尤好中庸。公退。必讀二十遍。雖夜必盈其數。而後就寢。侍書筵。首言爲學必以敬爲本。而人君之學。與韋布不同云云。仁廟嘆賞不已。命書以入。竭誠諫職。有懷必達。當事不避。始終如一。所撰疏箚。深見嘉納。辭疾回鄕。行李草草如布衣時。幽谷館夫遮馬揮之曰。司諫行且至。不可入矣。在山寺。承聞晏駕。北向哭。絶而蘇者三。奔哭闕下。歸稟大夫人曰。權判書貢一言。爲不負國。大夫人在。兒未敢爾。金吾之來。祈訣母。不可。大夫人出路傍。公再拜跪曰。何虞勿念。向廟又再拜去。顧察訪曰。吾不克終孝。吾罪也。吾非好學致。汝其讀書無怠。至新寧。勅諸弟曰。善事老母。吾無累汝也。先業不敷。只遺懷瑾書冊。可矣。每早必梳髮。聞慶宰趙應世曰。何心爲此。公笑之。止安保驛。命諸子名字。入錦衣衛。但曰。父死子繼。兄亡弟及。古今通義。容有一寸邪意。遂閉口不言。曹南冥詔諸生曰。郭某不愛官爵。好賢樂善。使遇可爲之時。必能爲國做事。其不素餐明矣。灘叟公謂權相公曰。郭伯瑜其直如矢。其亦可謂知言也與。嗚呼。公以强項直躬之資。有聞義見善之識。宜其不容於叔世。而至殺其身而後已焉。則天之不可諶也甚矣。雖然。天未嘗不定。明廟晩年大悟。今上首發大霈。而察訪蘊幹蠱之才。霑錄用之恩。護同氣以克家。飭一己以奉公。玆蓋公之遺敎。有以使之。而其實天也。非人也。嗚呼休哉。銘曰。
疇揠公剛。鐵石腸也。欲汚公淸。氷雪精也。人各行其偏。學以全之也。因循爲好。何古之道也。運屬龍蛇。賢人嗟也。堯舜穆穆。罪咸服也。芳百代。臭萬載也。辭以解之。爲鹿馬之戒也。
소재집 제9권 / 비갈(碑碣)
유명 조선국 고 중직대부 사간원 사간 곽공 묘갈명 병서 〔有明朝鮮國故中直大夫司諫院司諫郭公墓碣銘 幷序〕
郭珣 | 1502 | 1545 | 玄風 | 伯瑜 | 警齋 |
만력(萬曆) 5년(1577, 선조10) 여름, 찰방(察訪) 곽회근(郭懷瑾)이 선고(先考) 사간(司諫)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보이며 “오직 선생만이 우리 아버지의 마음과 행적을 깊이 슬퍼할 수 있고, 반드시 그것을 드러내 줄 수 있기에 감히 써 주실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삼가 그 세계(世系)를 살펴보니, 곽씨(郭氏)는 본관이 현풍(玄風)으로 명망 있는 집안이 되어 대대로 청도군(淸道郡) 대평촌(大坪村)에서 살았다.
휘(諱) 성기(成己)는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지냈는데, 장기 훈도(長鬐訓導)를 지낸 휘 효원(孝元)을 낳았다. 훈도가 휘 수령(遂寧)을 낳았는데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을 지냈고 영천 김씨(永川金氏) 충순위(忠順衛) 김철단(金哲端)의 집안에 장가들었다. 홍치(弘治) 임술년(1502, 연산군8) 10월 8일에 공이 영천(永川) 창수리(蒼水里) 집에서 태어났다.
휘는 순(珣)이고, 자는 백유(伯瑜)이며, 장인(丈人)은 감찰(監察) 정언수(鄭彦修)이다. 장남은 찰방으로 사인(士人) 이의(李誼)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는데, 최주남(崔柱南)에게 시집갔다. 첩에게서 낳은 아들 서성(庶星)이 있다.
차남 회개(懷玠)가 아들 둘을 낳았는데 어리다. 다음으로 서자(庶子) 회무(懷珷)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장녀는 유학(幼學) 허윤종(許允宗)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습독(習讀) 홍여창(洪汝昌)에게 시집갔다. 다음 서녀 사위는 이수천(李壽千), 이식(李栻)이다.
공의 벼슬은 가정(嘉靖) 무자년(1528, 중종23) 문과(文科)에 제 몇 위로 급제하여, 을미년(1535)에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교검(校檢), 호조 좌랑을 지냈고, 병신년(1536)에 진보 현감(眞寶縣監)을 지냈다. 임인년(1542)에 전적(典籍), 형조와 예조의 정랑 겸 춘추관기주관, 지평(持平)을 지냈고, 계묘년(1543)에 서천 군수(舒川郡守)를 지냈다. 갑진년(1544)에 사예(司藝), 사성(司成), 장령(掌令)을 지냈고, 을사년(1545, 인종1)에 사간(司諫), 상례(相禮),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을 지냈다. 7월에 고신(告身)을 모두 빼앗겼다가 24년이 지난 무진년(1568, 선조1)에 직첩(職牒)이 환수(還授)되었다.
장례일은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 9월 15일이었다. 신문(訊問)을 받다가 죽었는데, 영구(靈柩)가 남쪽으로 떠날 때 송규암(宋圭菴)이 아들 송응경(宋應慶)을 보내어 무덤에서 치전(致奠)하였고, 또 그를 위하여 상구(喪具)를 보냈다. 이윤경(李潤慶), 이준경(李浚慶), 정원(鄭源), 송기수(宋麒壽), 이약해(李若海), 심봉원(沈逢源), 이홍간(李弘幹), 정숙(鄭潚) 등 여러 공이 의복(衣服)과 미포(米布)와 지석(紙席)을 보내왔고, 이름을 밝히지 않고 부의(賻儀)를 보낸 사람도 많았다.
영구가 충청도 중원(中原)에 머물 때에는 탄수공(灘叟公)이 제문을 지어 제사 지내고 애통해하며 곡하고서 사람과 말을 먹일 식량과 찬을 보냈다. 장례를 지낼 적에는 성청송(成聽松 성수침(成守琛))이 신주를 만들어 부쳐 왔으며, 중길공(重吉公)이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제수로 쓸 쌀을 매달 계속해서 보내 주었다.
이듬해 12월 17일 구룡산(龜龍山) 오복동(五福洞) 묘향(卯向)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의 덕행(德行)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려서는 용모가 수려하였고, 조금 성장해서는 용감하고 날래서 나막신을 신고도 담장 위를 마치 나는 듯이 뛰어넘어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열두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문을 배웠는데, 이때부터 연달아 발해(發解)되었으니 영남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선대부(先大夫)가 도성(都城)에서 벼슬하던 중에 졸(卒)하였는데, 상여를 메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나서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수 없자 가산(家産)을 털고 흙을 져 날라 마쳤다. 상제(喪制)를 한결같이 문공(文公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따라 거행하니, 고향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칭찬하는 소리가 자자하였다.
일찍 일어나 관디 차림으로 사당(祠堂)에 배알하고 이어서 대부인(大夫人)의 안부를 살폈는데, 바람 불고 비가 내려도 그만두지 않았다. 늘 “남녀가 일곱 살이 되면 같은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되니, 내외(內外)를 분별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비록 누이의 집이라 해도 내실(內室)에는 들어간 적이 없었다. 종들을 부릴 때 너그러우면서도 위엄 있었고, 선세(先世) 때부터 있던 늙은 하인은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어 나이가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낮든 상하 모두에게 환심을 샀다.
혼자 된 누이를 보살필 사람이 없자 바로 자신의 집을 내 주었고, 외종질들이 먹을 게 없자 전지(田地)를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보내온 모든 물품은 친구가 보낸 게 아니면 받지 않았고, 받은 것은 반드시 모두 대부인께 올렸다. 며느리 이씨(李氏)가 옷을 지어 올렸는데, 아주 정교하고 곱다 하여 이를 물리쳤다. 출사(出仕)하자마자 바로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지방 수령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그 뜻을 이루었다. 5년 동안 재임하다 파직되었지만 그대로 따르고 따지려 들지 않았으며, 집으로 돌아온 뒤 곡식이 자주 떨어졌지만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다 운문산(雲門山) 속 동경(東京)이란 구역에 터를 잡았는데, 그 산은 물과 돌, 숲과 골짜기를 즐길 만했다. 그래서 드디어 손수 풀을 베고 땅을 개간하며 그곳에서 한적하게 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다.
대관(臺官)의 직임을 사직하고 다시 군(郡)을 다스리면서 폐해를 없애고 고충을 해결하는 일을 동시에 했고 예악으로 교화하는 일을 모두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소명(召命)을 받게 되자 어린아이, 늙은이 할 것 없이 모두 울부짖으며 더 유임되기를 원하였다. 조정에 있을 적에는 신상(神相)이 꿋꿋하여 바라보면 대장부의 풍모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늘 《중용》과 《대학》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중용》을 특히 더 좋아하여 공무를 마치고 물러나면 반드시 20번씩 읽었고, 비록 밤중이 되더라도 반드시 그 숫자를 채운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서연(書筵)에 입시했을 때 맨 먼저 “학문을 하는 데는 반드시 경(敬)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며, 인군(人君)의 학문은 일반 선비와는 다릅니다.……”라고 하자 인종이 감탄하며 칭찬해 마지않았고, 그것을 글로 써서 들이도록 명하였다.
대간의 직분에 정성을 다하여 마음에 품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고 일을 당해서는 회피하지 않아 시종여일(始終如一)하였고, 지은 소차(疏箚)는 아주 흔쾌히 수용되었다.
병으로 인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적에 벼슬하지 않을 때처럼 여장(旅裝)이 단출하자 유곡역(幽谷驛)의 관부(館夫)가 말을 가로막고서 손을 내저으며 “사간의 행차가 이를 것이니 들어올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산사(山寺)에서 임금이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곡하다가 세 번이나 기절했다 깨어났다. 대궐로 달려가 곡하고 돌아와 대부인께 “권 판서(權判書)는 한마디 말을 바쳐 나라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대부인이 계셔서 소자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의금부 관원이 왔을 때 모친과 작별할 시간을 달라고 청했으나 안 된다고 하였다. 대부인이 길가에 나오자 공이 두 번 절하고 꿇어앉아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하고, 사당을 향하여 또 두 번 절하고 떠나면서 찰방(察訪 곽회근)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끝까지 효도하지 못한 것은 내 죄로, 내가 학문을 좋아하지 않은 소치이니, 너는 독서를 게을리하지 말라.” 하였다.
신녕(新寧)에 이르러 여러 아우에게 신칙하기를 “늙은 어머니를 잘 모셔라. 내가 너희에게 누(累)가 되지 않겠다. 선대의 사업을 펴지 못하였으나, 그저 회근에게 서책(書冊)을 물려주기만 해도 된다.” 하였다. 매일 아침 꼭 머리를 빗자, 문경 현감(聞慶縣監) 조응세(趙應世)가 “무슨 마음으로 이렇게 하십니까?” 하자, 공이 빙그레 웃었다.
안보역(安保驛)에 이르렀을 때, 여러 자제의 이름을 금의위(錦衣衛)에 들이라고 명하자 “아버지가 죽으면 자식이 뒤를 잇고 형이 죽으면 아우가 뒤를 잇는 것은 고금(古今)의 공통된 의리이니, 어찌 조금이라도 나쁜 뜻이 있겠습니까.”라고만 말하고, 마침내 입을 닫고 말하지 않았다. 조남명(曺南冥 조식(曺植))은 제생(諸生)에게 “곽 아무개는 관작(官爵)에 연연하지 않았고,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善)을 즐겼다. 그가 일할 만한 때를 만났더라면 반드시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있었을 것이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서 녹봉을 축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하였다. 탄수공(灘叟公)은 권 상공(權相公)에게 “곽 백유(郭伯瑜)는 곧기가 화살 같습니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말을 할 줄 안다고 할 만하다.
아, 공은 목을 빳빳이 들고〔强項〕 몸을 정직하게 움직이는 자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의로움을 듣고 선을 볼 줄 아는 식견이 있었으니, 그가 말세에 용납되지 않음이 마땅하거니와 그 자신이 죽음을 당한 뒤에야 끝난 것은 하늘을 참으로 믿을 수 없다 하겠다. 비록 그러하나 하늘은 일찍이 시비가 정해지지 않음이 없어 명종께서 만년에 크게 뉘우치셨고, 금상(今上 선조(宣祖))께서는 처음으로 큰 은전을 펴 주셨다. 그리하여 찰방이 부친의 뜻을 계승할 만한 재주를 품고 있다가 녹용(錄用)되는 은혜를 입고서, 동기간을 보호하여 집안을 잘 꾸리고 자신을 신칙하여 공무를 받들게 되었다. 이는 대체로 공이 남긴 가르침이 그렇게 만든 것이긴 하지만, 실로 하늘이 한 것이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아, 훌륭하도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공의 강직함을 그 누가 꺾을쏜가 / 疇揠公剛
돌과 쇠처럼 단단한 마음을 지녔네 / 鐵石腸也
공의 청렴함 더럽히고자 해도 / 欲汚公淸
얼음과 눈처럼 순수하여라 / 氷雪精也
사람은 저마다 치우치게 행동하지만 / 人各行其偏
학문으로 이를 온전하게 하였네 / 學以全之也
해 오던 대로 따르기를 좋아함이 / 因循爲好
어찌 옛 법도이겠는가 / 何古之道也
운수가 진사년에 속해 / 運屬龍蛇
현인이 탄식하였네 / 賢人嗟也
요순 같은 성군의 거룩한 덕에 / 堯舜穆穆
죄인들이 모두 복종하였네 / 罪咸服也
백대에 아름다운 명성 전하기도 하고 / 芳百代
만세에 악명을 끼치기도 하니 / 臭萬載也
이를 말로 써서 / 辭以解之
지록위마 하는 자의 경계로 삼노라 / 爲鹿馬之戒也
[주-D001] 정언수(鄭彦修) : 《내암집(來庵集)》 권13 〈사간곽공묘갈명(司諫郭公墓碣銘)〉에는 ‘정희수(鄭希修)’로 되어 있다.[주-D002] 송규암(宋圭菴) : 송인수(宋麟壽, 1499~1547)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미수(眉叟), 호는 규암,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한성부 좌윤에서 파직되었는데, 청주(淸州)에서 은거하다가 윤원형(尹元衡) 등에 의해 사사(賜死)되었다.[주-D003] 탄수공(灘叟公) : 이연경(李延慶, 1484~1548)으로, 본관은 광주, 자는 장길(長吉), 호는 탄수ㆍ용탄자(龍灘子)이다. 기묘년(1519)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지평, 교리 등을 지내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몰려 파직되었고, 이후 은거하여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주-D004] 중길공(重吉公) : 이윤경(李潤慶, 1498~1562)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길, 호는 숭덕재(崇德齋),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평안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병으로 죽었다.[주-D005] 권 …… 않았는데 : 권 판서는 권벌(權橃)을 가리킨다. 1545년(명종 즉위년) 8월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이에 반대하여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할 마음으로 밤새도록 불을 밝히고 윤임, 유인숙(柳仁淑), 유관(柳灌)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啓辭)를 올렸다. 계사의 초안을 잡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조정에 나가려 하자, 집안사람과 사위들이 붙잡고 울면서 만류하였으나 뿌리치고 갔다고 한다. 《冲齋集 卷9 附錄 乙巳禍蹟》[주-D006] 조응세(趙應世) :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양필(良弼)이다. 평양부 서윤(平壤府庶尹)을 지낸 조준(趙俊)의 아들로, 1534년(중종29) 생원시에 입격하여 참봉(參奉)을 지냈다. 《내암집》 권13 〈사간곽공묘갈명〉에는 ‘조응서(趙應瑞)’로 되어 있다.[주-D007] 목을 빳빳이 들고〔强項〕 :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 때 강직하기로 유명했던 동선(董宣)과 관련한 고사이다. 동선이 낙양 영(洛陽令)이 되었을 때, 대낮에 살인을 한 공주 유모의 노비를 공주가 외출할 때를 기다렸다가 공주가 타고 가는 수레에서 끌어내려 처형하였다. 공주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광무제가 진노하여 동선을 잡아오게 하여 신문하자, 그는 법을 집행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그 뒤 광무제가 동선으로 하여금 공주에게 사과하도록 하였으나 끝까지 고개 숙여 잘못을 시인하지 않아 ‘강항령(強項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한다. 《後漢書 董宣列傳》[주-D008] 진사년(辰巳年) :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한 갑진년(1544)과 인종이 승하한 을사년(1545)의 병칭이다. 이해에 명종이 즉위하고 나서 바로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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