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석공 어필각비
화원선생충주석공 어필각 비명 병서
비각은 지금 이천군 장호원의 진암리에 있다. 전한(前韓,조선) 태종(太宗)의 어필(御筆) 한 통을 보관하였는데 곧 증화원선생 충주 석공에게 하사한 것이다. 대개 공은 고려 공민왕 갑인년(1374)에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을과(乙科)에 올라 관직에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이르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전한(前韓) 태조가 천명을 받아 고려의 운이 끝나자, 공의 선공(先公)은 태조(太祖)와 이종형제인 인연으로 비로소 벼슬길에 나갔는데, 공은 스스로 고려조에 벼슬길에 나갔기에 망복(罔僕)의 뜻을 지켰다.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평소 공을 중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얹어 특별히 은혜로운 명을 내려 불렀으니, 이것이 어필(御筆)을 하사한 이유이다.
공은 이미 의리를 굳게 지켜, 은혜로운 돌보심의 융숭함에도 조금도 그 뜻을 돌이키지 않고, 이 때문에 임금의 노여움을 저촉하여 충주 수리산 회문동에 안치(安置)되어, 끝내 사면받지 못하고 생애를 마쳤다. 임금께서는 처음에는 비록 그 왕명에 거역한 데 노하였으나, 끝에는 그 의리를 지키는 뜻을 가상하게 여겨 숭록대부(崇祿大夫) 좌찬성(左贊成)의 관직을 증직하여 포상하였다. 대개 불러들인 왕명과 증직으로 포상한 것은 모두 특별한 은전이지만, 친히 신한(宸翰,왕의 글씨)을 내린 것은 더욱 귀중하기에, 이것이 각을 지어 존중하여 봉안한 이유이다.
어필각은 중간에 일찍이 무너졌으나, 뒤에 향사(享祀)를 거행함으로 인하여 다시 묘우(廟宇)의 곁에 복원하였다가, 고종(高宗) 무진년(1868)에 묘우가 국가의 금령(禁令)으로 인하여 폐하게 되자, 어필각 또한 따라서 훼철되어, 최근까지 백년이나 되었다. 그 사이 여러 번 다시 일으키자 도모하다가, 지난 갑진년(1964)에 이르러 비로소 이루어져, 어필각의 체제가 한결같이 그 예전 대로 복구되었는데, 실로 상철(相哲) 상헌(相憲)씨가 여러 해 경영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고서 몇 년 만에 장차 어필각의 마당에 비석을 세워 그 일을 서술하려고, 우정(宇禎), 진홍(鎭洪), 규업(奎業)씨가 와서 그 비문을 나에게 청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공은 일찍이 발탁의 은혜를 입었기에 은혜로운 왕명이 내리는 일이 없었다면, 비록 의리를 지켜 자정(自靖,스스로 분수를 지킴)하였더라도, 영예로운 은총에 흔들리거나 금고(禁錮)에 저지되지 않은 정충(貞忠) 탁절(卓節)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니, 어찌 이 어필각을 폐기된 채로 그냥 두고 복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혹자는 공의 선공(先公)께서 이미 한조(韓朝,조선왕조)에 벼슬하러 나갔으니, 공의 사적을 드러내는 것은 선공의 절개에 흠을 드러내기에 알맞다고 한다. 이는 그렇지 않은 것이, 선공께서는 이미 고려조에 신하가 되지 않았으니 비록 벼슬 길에 나가더라도 굳이 청의(淸議)에 비난받을 것이 없거니와, 공에게 있어서는 처한 처지가 이미 절로 같지 않았으니, 같은 길로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여명(汝明)이요, 자는 윤립(胤立)이다. 그 호 화원(花園)은 송경(松京)의 자남산(子男山) 아래 화원(花園)에 살았으므로 일컬은 것이다. 보계(譜系)는 충주(忠州) 석씨에서 나왔는데, 뒤에 휘 정(靖)과 휘 달(㼀)이 있어 모두 밀직제학(密直提學)이었고, 휘 흥국(興國)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니, 곧 공의 고조부이시다. 증조부의 휘는 도(道)로 판결사(判決事) 쌍썽총관(雙城摠管)이었고, 조부의 휘는 양선(良善)인데, 태조 2년 계유(1393)에 홍양부원군에 책봉되었고, 배위 영흥최씨(永興崔氏)는 경창옹주(慶昌翁主)로 책봉되었으며, 고(考)의 휘는 천을(天乙)인데 조선에 벼슬하여 중랑장(中郎將)이 되었다. 대개 가문이 이미 훌륭하였으니 공이 전해 받은 미덕은 유래가 있거니와, 세 아들을 두어 모두 현달(顯達)하여, 문수(文守)는 예조참판(禮曹參判)이고, 문현(文賢)은 이천현감(利川縣監)이고, 문성(文成)은 직제학이니, 또한 의방(義方)의 가정교육이 파급된 것을 볼 수 있겠다. 명을 붙인다.
새 왕조에서 왕명을 내리고, 운장(雲章)이 영롱하였고,
구 왕조의 신하 지조를 지켜, 풍절(風節)이 융숭하였다.
지극한 보배의 광채가 공중에 치솟을 뿐 아니라
생각건대 천년토록 후인 격려하리라.
정미(서기 1967년) 정월 서흥 김희달(金熙達) 근찬
※명(銘)의 마지막 두 글자는 사진에 보이지 않으니 살펴보시고 마지막 문장을 적절하게 다듬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