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옹지마
정동식
설날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오랜만에 수변공원 산책길을 한 바퀴 돌고 오니 아내가 이곳저곳으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약속장소를 잡기 위해 식당으로 문의를 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설날 전후로 처가 식구들이 장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올 테니 점심을 밖에서 하는 게 어떠냐고 의견을 물었다. 나는 좋은 생각이라며 동의했다.
우리는 평소 외식할 때 맛집검색과 예약을 주로 내가 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아내가 직접 식당을 검색하고 예약을 진행했다. 참석 범위도 정해졌고, 메뉴는 흑태찜과 갈비찜을 동시에 잘하는 식당으로 압축이 되었다. 성서 이서방 가족들이 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가족 모임이라 예약은 순조로웠다. 다만 설 다음 날, 식당 영업 여부가 관건이었는데 10명이 넘으면 문을 열겠다고 하여 그 문제도 해결되었다. 아내는 ‘설 다음 날, 12시, 12명, 그리고 메뉴는 흑태찜 큰 거 두 개, 갈비찜 큰 거 하나’로 예약을 완료하였다. 식당은 아내의 직장동료가 소개해 준 모다아웃렛 근처에 있는 K 음식점이다. 이 식당은 한 달 전에 우리 가족이 저녁을 먹어 봤던 곳이어서 맛은 검증된 집이었다. 나는 다른 가족에게 아내가 검색한 식당 정보를 알려주었다.
성서 이서방은 오랜만에 자기 집 근처에서 만나게 되었다며, 10분이면 갈 수 있다고 좋아했다.
설날 다음날이었다. 우리도 준비를 끝내고 장모님을 모시고 출발했다.
도착 바로 직전에 성서 처제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우리, 곧 1~2분 내 도착할 거야’라는’ 멘트를 하려고 했는데 처제의 음성이 수화기를 타고 먼저 흘러내렸다. “형부, 아무래도 뭐가 잘못된 것 같아요. 식당에 불이 꺼져 있어요.” 했다. 나는 “그럴 리가? 있나? 언니가 분명히 예약을 했는데”.....
잠시 후 도착해 보니 우리 일행만 닫힌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뿔싸! 그때 서야 바로 아내의 전화번호를 확인해 보니 053-7로 시작하는 전화번호였다. 주소를 보니 수성구이다. 이곳 성서의 식당 전화번호는 053-5로 시작했다. 상호는 같지만 착오가 발생한 것이다. 아내가 인식한 식당과 예약한 식당이 달랐다. 수성구 식당에 전화해서 30분쯤 늦겠다고 말씀드렸다.
우리는 당황했고, 예약을 받은 식당도 아마 황당했으리라 생각한다.
식당에 도착해 보니 규모가 크긴 한데,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약간 썰렁한 분위기였지만 오롯이 우리를 위한 서빙이 가능하니 나쁠 것도 없다며 좋게 생각했다. 식사가 끝난 후, 성서 동서에게 솔직히 말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갈비찜 맛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형님, 별롭니다!” 대답은 단호했다. 날 것 빼고는 그런대로 잘 먹는 편인 이서방이 이런 푸념을 한 건 처음이었다.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식사 끝나기 조금 전, “고기 모자라면 더 시킬까?”라고 물었을 때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제는 생선을 더 좋아하고 이서방과 조카 남매는 고기를 좋아한다. 그 식구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선택한 식당인데, 착오를 일으키는 바람에 오히려 맛없는 고기를 대접한 셈이 됐다. 친절하지도 않았고 서비스 전반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맛집의 환상을 깨어버린 분위기를 뭔가로 보상받고 싶었다. 그건 가족 모두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카페에서 커피로 기분 전환을 해보자.
커피에 설탕을 넣고 그래도 맛이 나지 않으면 가족사랑을 듬뿍 태워 오후를 풍요롭게 만들고 싶었다.
애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조건은 까다로웠다. 거동이 불편한 장모님이 계시니 다시 차로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가까워야 했고, 호젓한 분위기라면 좋을 것 같았다. 잠시 후 애들이 검색한 집을 답사하고 전화가 왔다.
식당에서 불과 2~30m 되는 거리에 우리가 원하는 카페가 있었다. 인테리어도 깨끗하고 담백했다.
2층의 연인 한 쌍을 제외하고, 1층은 우리 식구들이 통째로 빌린 것 같았다. 식당의 만족스럽지 못했던 기분은 카페로 자리를 옮기면서 아침 안개 걷히듯 사라지고 가족 모두가 수다를 떠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마침 작은아들이 통신사 제휴 서비스 10%를 받은 데다, 주인께서 테이블마다 빵 하나씩을 특별서비스로 주셔서 마치 융숭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깔깔거리며 가족끼리 많은 담소를 즐기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해가 설핏 기울 무렵 우리는 돌아갈 채비를 했다.
이쪽으로 오다 보니 이번에는 복현동 처제가 자기 집이 가깝다고 또 좋아한다.
착오로 인한 예약 때문에 성서 이서방 가족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이 집은 아침 식사를 하지 않는다. 통상 12시경 아점을 먹는데 일상보다 1시간쯤 늦은 데다 갈비찜이 씹는 맛을 톡톡히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머쓱하여 “이서방, 다음에 한 번 더 좋은 자리 마련할게요.” 했다.
오늘 사연도 나중에 씁쓸하게 웃으며 회자될 추억이라면 추억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 같다.
갈 길을 미리 정해두었더라도 오늘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세상이 늘 생각한 대로 흘러간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예기치 않게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니, 더 흥미로운지도 모를 일이다.
오전엔 일이 배배 꼬였지만, 오후엔 가족들과 맘껏 담소를 나눈 기분 좋은 하루였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다.
예약 해프닝을 통해 다시 배운다. 인생사가 다 새옹지마인 것을.
(2023.4.28)
첫댓글 처가 가족들과 정담을 나누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