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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 명사(名師)는 자수성가하였기에 전수계보가 없다.(고수가 되는 길)
1. 풍수지리학파의 전수 계보(傳受系譜)
석봉 허석진 풍수지리연구소 cafe에 국내풍수지리학파의 전수계보가 실려 있고 또 어떤 곳에는 지리명사의 전수계보가 게재되어 있다. 전수계보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어 학통을 이어온 사람의 명단을 말한다. 가장 확실한 사례는 큰 스님이 상좌(上佐)를 지정하여 공개적으로 자기의 법통을 넘겨 주고 그 상좌는 다시 상좌(孫상좌)에게 순차로 법통을 전(傳)해가면서 문중(門中)을 형성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풍수공부란 끝내는 자기만의 공부로 완성되는 것이므로 법통을 이어 가는 계보는 없고 “특정 학파 계열에 속한다 또는 특정학파로 분류된다”는 개념만 있는 것이다.
2. 풍수공부의 특수성
* 혈처를 찾는 일은 이론만으로는 안되고 최종적으로는 생기가 응집되어 있는 것을 느끼는 감각 즉 기감(氣感)이 발달되어 있어야 된다. 인자수지(人者須知) 나 지리오결(地理五訣)을 달달 외워도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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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수지(人者須知); 1564년 명나라에서 출간, 그때까지의 이론을 집대성, 형세론에 일부 이기론 첨가 @지리오결(地理五訣); 1800년대 청나라 조정동, 좌향을 중시하는 이기론, 팔십팔향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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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대의 풍수동호회 카페를 관리하면서 인자수지를 강의하고 유투브로 활약하는 모 풍수는 과룡처(용이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곳)에 장사지내면 삼대내에 절손(過龍之葬 三代內絶香火)한다고 강조해 왔는데 경주 김유신 장군 묘를 과룡처라 했다. 그러나 장군 묘는 입수래룡이 빼어날 뿐만아니라 전순 끝에 자기 안산이 있고 그 너머에 다시 동산이 암공하며 평야를 건너 조산이 넓게 울타리를 둘렀다. 봉정혈(鳳頂穴)이다. 김해김씨는 450만명 쯤되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그분의 후손이라 한다. 필자는 명당의 구조와 발복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는 명당이라 생각한다.
* 입문시에 특정 명사의 제자이었다 하더라도 기감을 높이는 단계가 되면 스승이 기감을 전수해줄 수 없고 스스로 터득해야 된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근기가 있어야 되고 후천적으로 자연과의 교감을 키워야 기감이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이론을 배우지 아니하여도 지리에 통달할 수 있으나 학문적 논리를 갖추지 아니하면 무식한 지사가 되어 명사반열에 오르지 못한다. 특정 명사의 제자 전수로 계보를 만드는 것은 부당하고 학파(學派) 또는 계열(系列)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다.
3. 고려초부터 이조말까지
가)도선국사 학파
* 도선국사(827~898, 옥룡자)는 지리산 월류봉 아래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에서 4년간 풍수지리를 공부하여 통달하였다고 한다. 중국에 유학가서 당 일행선사(683~727)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나 연대상 일행선사가 백년 앞서 졸하였으므로 사실이 아니다. 중국에 다녀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 풍수서적을 참고한 것은 틀림이 없다. 그 이전에도 풍수지사가 있었겠지만 저술을 남기고 확실한 풍수행을 한 것은 도선국사가 처음이므로 우리나라 풍수의 시조로 보아야된다.
* 도선답산가 도선비기 무감록등을 저술하였다(실제는 구전되어 오던 것을 후세인이 문서화 하였다고 본다). 자연을 사랑한 비보(裨補) 풍수가 기본적인 특색이고 한양도읍선정에 참여 하였고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한 음택비결을 남겼는데 물형론을 채택하였다. 그의 풍수행은 비보풍수를 바탕으로 하고 ①사회와 백성을 위하여 개혁을 추구하는 대승적(大乘的, 최창조교수는 大同的이라 표현) 풍수행과 ②개인의 발복이라는 이기주를 추구하는 소승적(小乘的, 최교수는 이기주의적이라 표현) 풍수행으로 나눌 수 있다.
* 도선국사는 광양에 옥룡사를 지어 승려600명을 가르쳤다고 하므로 전업(專業)풍수는 아니고 고승(高僧)이었다고 본다. 제자중 강해를 칭찬하였다고 하는데 생몰과 활동사항이 미상이고 전승한 제자도 없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기가 도선의 몇 대 제자로 칭하는 것은 사기라 본다.
* 도선의 대승적 풍수행(사회참여 활동)을 본받아 고려말 묘청(? ~1135)이 서경천도설, 김위제(고려 숙종때 1097)가 서울천도설, 신돈(?~1371 고려 공민왕)이 서경천도설을 제기하였고 무학(1327~1405), 정도전(1342~1398), 하륜(1347~1416, 이기론을 전파), 정인지(1396~1478) 최양선(태종부터 세조까지 5대 임금에 걸쳐 상지관) 안효례(세종과 세조의 왕릉건설에 참여) 묵효지(문정왕후 릉건설)가 조정의 일에 관여 하였다. 그중 무학대사는 개인의 음택을 다수 소점하여 음택풍수에 능함을 알 수 있으나 하륜과 정인지는 신후지(身後地)가 시원찮다. 아마도 고시과목에 있는 중국 서적을 공부하였을 것이다.
* 도선국사는 개인의 음택에 관한 결록도 남겼는데 소승적 풍수행을 이어 받은 풍수사는 학조대사(세조 때 활약, 신안동김씨 음양택 소점)이 있고 일지승과 일이승(보통 1800년대 활동하였다고 알고 있으나 1660년 무렵 활동하였다)은 도선의 결록지를 답사하고 산도를 남겼고 물형론을 따르는 등 도선국사의 음택풍수를 충실히 계승발전시켰다.
나) 중국 귀화파(정유재란 무렵)
* 임란과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사로 왔다가 귀화한 풍수가 다수 있었고 이들이 조정과 민간인에게 미친 영향력은 상당하다.
두사충(?~1627?)은 전국을 답사하고 최다수의 결록을 남겼고 그 사위 나학천은 충청 서부지역에 대하여 봉안결(鳳眼訣)을 남겼는데(유청림선생이 유청림 풍수기행으로 간산기를 저술) 주로 물형론이다. 그밖에 시문용 섭정국 이문통(패철도입)은 조정에 영향력이 있었는데 이기론자이다.
* 이분들은 후손이 번성치 않고(나학천은 절손) 제자들도 없으나 후세에 결록지가 탐구대상으로 각광을 받는다.
다) 이조 중기 이후(자생풍수)
남사고(1509~1571), 박상희(1538~1621), 이자백, 성지대사(연산군 때), 성거사(인조초기 이괄난에 가담한 탓으로 이름을 숨기고 살았다. 함경도 사람으로 승려), 이의신(교하천도론 형세론자), 정조(사도세자 묘), 민일스님과 홍성문스님(회문산 만가, 1800년대)은 명사로 이름있는데 스승없이 독학으로 지리를 깨쳤다. 자생적 풍수라 하겠으나 중국 풍수서적을 탐독한 흔적이 있다. 남연군 묘를 소점한 정만인은 충북지역에 결록을 남겼는데 형세론자이고 자생풍수이다.
라) 해방직전(만산도와 만산결)
만산도라는 형태로 많은 산도가 전해오는데 그 내용을 보면 명사급의 무명(無名)고수들이 경기 충청 일원의 기존 산도와 결록을 답사해보고 자기들 나름의 산도를 작성하고 수집한 만산결을 작성하였다. 상당히 신빙성이 있으나 원 산도와 결록을 중히 보아야 된다.
4. 해방후 현재까지
* 해방후 초기의 원로급 명사(故人이 많다)와 제자를 보면 아래와 같다.
① 하남(河南) 장용득(19??~1999); 강원도에서 장사일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배합 불배합이론을 개발하고 명사로 인정받았다. 형기론자로 분류된다. 이병철회장의 친산을 소점하였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정암 김종철(1922~1991, 부산 금정산 김종철은 청호 정철산의 제자), 박시익(1943~), 석봉 허석진(1924~2012), 김두규, 지종학이 대표적 제자이다. 원래는 나경을 사용하였는데 박시익 김두규 지종학등은 나경무용론을 주장하여 변신하였다. 제자라는 분들에게 스승의 이론을 변형없이 그대로 따르고 있느냐고 물어면 어떤 대답을 할지 의문이다. 가령 1대 제자가 전수계승을 인정하더라도 2대 제자 이후에는 아마도 순수성이 유지될 수 없다고 본다.
② 청오(靑烏) 지창룡(1922~1999); 24세 때 해방을 맞이하고 귀국하여 합천 해인사에서 역리학을 연구하였다. 이기론자이고 역학의 대가이다. 동작동 현충원을 선정하였다. 전용원씨가 수제자로 알려져 있는데 기탐지봉을 개발하여 활용함으로써 스승과 차별화된다.
③ 명당도와 결록파; 장익호(유산록, 따르는 자가 많았다. 김이중 임지열이 제자인데 스승의 그늘 아래 안주하고 있다) 이규상(천하명당 여기에 있다) 이명석(명산의 혈을 찾아서, 이기론) 김기설---명당도와 결록을 추구하는 계열인데 심혈방법은 각기 다르다. 스승은 없고 명사급 제자도 없다.
④ 이귀홍; 이기와 형기를 통합한 통맥법(여러 파가 있다)을 주장하고 도선국사 풍수비법회를 운영하였다. 추종자는 많으나 분가하지 아니한 제자 중에는 명사급 제자는 없다.
⑤ 수강 유종근; 제자가 많으나 명사급은 없다.
⑥ 고제희; 지창룡 계열로 포태법을 따르다가 현공풍수론을 일부 수용. 제자가 많다.
⑦ 최명우: 현공풍수(대만)에서 호경국(대륙)파로 변신. 전국적인 지부를 결성하였다.
⑧ 철산 정정표(1921~2007, 제자들은 청호선사로 호칭); 정음정양법, 부산에서 활동.
* 해방 후 많은 원로급 지사들이 활약하였으나 자료부족으로 누락되었다.
* 현재 풍수인구는 많이 줄고 있으나 학회와 연구소가 50여개 된다.풍수카페를 보면 대략 2만명 가깝다고 추측되고 학회와 연구소가 50여개 된다. 그중 지도급 지사는 40~50명되지 않을가? 그들의 풍수 초입(初入)스승은 의미가 없고 독자적 활동을 할 때에는 스승의 학문을 자기에게 맞게끔 변화시키고 아니더라도 기감에서 차이가 생기므로 이미 전수계승 제자가 아니다. 가령 조정동의 지리오결을 따르는 지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서적을 통한 비대면(非對面) 제자류(弟子類) 또는 지리오결파로 분류되어야 하고 조정동의 전수 제자는 아닌 것이다.
5. 고수가 되는 길
* 앞서 본 바와 같이 이조(李朝) 때에는 물론이고 해방 후 원로(元老)명사 중에는 아예 스승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학문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명사가 된 제자는 없고 그 이후 지금의 세대 중에도 독자 활동을 할 때에는 적든 많든 변신을 한다. 심지어 통맥법회 리귀홍은 스승이 없었기에 통맥법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도선국사 풍수비법 618P)
* 결론을 말하면 풍수공부의 특성상 스승 제자간에 전수계승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므로 전수계보란 있을 수 없고 학파와 계열이 존재한다. 스승 밑에서 안주할 것이 아니라 스승의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 설 수 있는 실력을 길려야 고수가 될 수 있다. 또 하나 고수가 되는 중요한 길은 생지든 이미 쓴 묘이든 불문하고 간산기를 쓰는 것이다. 다만 충분한 자료를 조사해야 되고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인사성 댓글 말고 비판글을 환영해야 된다. 필자는, 결록지 간산기450개와 조선백대명당 간산기 160개 합계 600여개의 간산기를 쓴 덕택으로 많은 지식을 얻고 실력을 향상시켰다고 생각한다.(2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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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든 회워님!! 밝은 달님 보셨지요.
한국풍수연구원 양봉환 원장이 이명석 선생의 제자입니다.
기탐지봉 개발자는 따로 있는 것으로 압니다.
명기되지 않았지만 학회를 이끄는 많은 실력자들이 포진하고 계시지요
화약공장 사장님 신후지를 2년 구산 끝에 소점했지만 고인이 된 최창조 교수 등 다수의 지관에게 교차검증 했다더군요
그래서 재벌가의 풍수자문역을 맡고 있다는 지사님들이 많은 듯 합니다.
아!! 역시 박식합니다.그려!!
故이명석선생의 "명산의 혈을 찾아서 "를 보면 제자로서 양박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책에서 두사충 결외 20여권의 산서를 참고하여 俗師不可見地(속사는 찾을 수없는 명혈) 70곳을 선정하고(경북 충북에 편중한 단점있다)15개를 찾았는데 함께 감상할 고수를 고대한다고 하였습니다.
불초의 간산기에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양박사에게 몇 곳(법성포 아룡도강 등)을 작고하신 스승을 대신하여 함께 가보자고 중재해 보세요 ^^
기 탐지봉은 여러 종류가 시판되고 있습니다. 전용원씨 유투브를 보면 개발후 스승 앞에서 시연을 하였다고 하는데 관룡자 비슷하고 비싸요. 현재 활약하는 지사는 역사이래 최다수일 것 같아서 챙기기 어렵더군요. 명사급 고수는 전수계보가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한국의 자생풍수(고인돌의 분포)로서 중국에 수출, 다시 역수입되었다 하나
이 또한 분명치 않은것도 사실입니다..그러하니 누구한테 배었느냐에도 배었는지도 그
선생이 없어 혼자 배운것으로.. 다만 청오경이나 금낭경을 비롯 조선시대의 풍수 고시
과목 지리신법,명산론으로 보아 그 시대에도 스승은 존재 했다고 보는것이...1900년도
대에도 형기론의 하남 장용득선생, 이기론(역학)의 청오 지창룡선생, 기감론의 육관 손
석우선생이 계시어 형기.이기.기감론에 대한 학문을 전수, 이로인해 풍수지리 학문이
조금씩 발전해 오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책을 많이 읽고, 실전 경험을 통해 많은 풍수
인들이 자칭 풍수학계의 지도자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무엇을 하셨는지가 불투명
한것도 사실입니다.. 이미 학문은 정해져 있어, 그 분야에서 불철주야(수천개 간산기.글)
노고를 아끼시지 않으시는 분들이 진정 그 학계의 계보이시고, 주위 시선에 아랑곳 하
시지 않으시고 글올리시는 모든 분들이 진정 풍수를 사랑하시는 선생님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풍수는 계보( 형기.이기.기감)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선생님도 계시다!!! 에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 ^^.
ㅎㅎ 지향선생님은 누구의 제자입니까?
청출어남이면 전수관계가 불성립하다고 봅니다. 고시과목을 공부한 선비들은 현장 공부를 하지 않아 스승이 없다고 봅니다.
@하남촌장 ㅎㅎ 하남촌장님의 글들을 보면 결록,형국론(물형)의 글들이 대부분이고, 다음은 각 가문의
묘소 간산,역사(족보) 글들을을 접할수 있읍니다, 그렇다면 과연 선생님은 어느분에게 전수를,
제자는 계시는지? 실전 경험은 얼마나 되시는지? 강의는 해보셨는지? 신안의 경지에 계시는지?
가 항상 궁금했습니다. 풍수인들은 저마다 풍수입문시 형기론이든, 이기론이든물형론.기감론,
결록,비보풍수,이든 간에 처음 입문시 교수로부터 일정기간,전수를 받게 되겠지요?
하남촌장님은 위 글에서 지향은 누구의 제자인가를 물으시기전에,저가 물으신 답을 주시면
소상히 입문부터 현재까지의 저의 입문과정에 대해서,현재의 저의 풍수관을 소상히 글로서
올려 드리겠읍니다..고시과목 또한 전해내려오는 전수과정이 없다하여도 그당시 청오경,금
낭경 ,지리신법, 명산론의고서에서 시험 문제를 발취해서 이론적시험을 보았다고는 보지 않
읍니다. 실기도 있었겠지요? 이조시대의 사대부의 묘소와 왕릉의 점혈조장이 책만을 전제로
의 재혈은 불가하며, 경험과 개안이 된 지사들에 의해 조장 되었다고 보며, 기록만 없었지 책
임지사와 그 제[자들이 함께 조장을했다보기에 스승과 제자가 없다함은 기우 아닐까요?
@池香 李政澔 정통풍수는 그런데로 이씨조선 도읍지 선정에서 하륜대감(무학,정도전)이 계룡산에
도읍을 계획하여 지리신법의 문제로 공사를 중단하고, 한양에 도읍지를 정한것도 풍수지리
학적 계보라 말할수 있고, 전수되어 현재까지 한양(서울)의 풍수지리학적 지세를 논하는 것
또한 전수의 과정이라 봐야 되겠읍니다..전수란 꼭 선생과 제자의 개념이 아니라, 풍수서적을
저술한 저자의 책을 통해 배웠다 해도 후학들에 전수되는 과정이라 보아야 될것입니다..
하남촌장님 개인적으로 존경합니다만 이러한 글 보다는 소불선생님께서 올리시는 글들에
대해서 회원님들께서 도움이 되시는 답글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질문하시기에 답올립니다.^^
@池香 李政澔 1) 책을 통한 비대면 공부는 책 저자의 전수 제자라 할 수 없고 학파 또는 계열이라 함이 정확하겠지요. 이조때 고시시험에서 실기시험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입니다. 이조의 역사는 이조실록에 자세히 적혀 있고 왕실에 관한 이야기는 시시 콜콜한 부분까지 적혀 있다고 들었습니다.
2) 님의 사제관계는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3) 님은 자꾸 뜬금없는 말을 하십니다. 어떤 분의 글에 대하여 회원님께 도움되는 답글을 올려 달라고 하는데 찬성 지지하는 글만 올려달라는 뜻인가 모르겠습니다. 이 카페는 특정개인 이름의 학회 또는 연구소라 하지 않고 한마당이란 광장을 표방하고 처음 소개글에는 풍수를 같이 공부할 사람을 환영한다고 하였습니다. 회원님들이 이색적인 글은 소화하지 못하고 배척할 정도로 약골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남촌장 오해 하시지 마십시요.. 회원님들을 위해 지도자의 가르침을 주시라는 말씀이지
다른의도는 없습니다. 누구의 제자냐고 물으시기에 선생님의 스승님이 누구신가
여쭙어 본거구요.. 이렇게 회원님께 공개된 풍수한마당에서 계보.전수.스승.제자
관련해서 왈가 왈부 할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읍니다..실제 하남 장용득선생께 정
통풍수를 전수하신 선생님도 계십니다(미공개). 이조시대때 실기시험 관련해서는
상식적인 이야기 아닌가요..작금의 풍수지리사 자격증 시험도 1)필기시험. 2) 음.
양택 현장 실기시험. 3) 시험자의 풍수관 발표(20분)로 합격시 자격증을 수여, 현
장에서 음양택의 혈을 소점 건축, 조장을 하고 있기에 말씀드린겁니다..
고분. 왕릉 모든 묘소들이 실습,경험없이 재혈 조장 되었다고는 볼수 없겠지요?
그리고 선생님을 약골이라 생각해본적도 없습니다.. 그동안에 예의는 지켰구요..
선생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입문시 배운 교수님은 계시지만 언급을 하고 싶지 않읍
니다..그동안 추모공원 계획설계 완공. 기환제개발, 목 L-ROD 개발,지하수개발,
요사체건립, 부도탑근수,수많은 신장.이장.개사초 등 경험, 실전 보시,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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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香 李政澔 때론 저의 주관적 기감론자와의 전쟁을 선포하듯, 한국최고 기감 권위자를
뽑는 개최를 선포하였으나, 참석대상, 기감론교수.박사님들 한분도 참여에
소식이 없으셔 대회를 접어야 했었고,, 20여년의 지속적 강의 진행중....
본인에게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이촌노가 붓을 들고,....
침체해저가는 풍수지리 발전을 위해 이자리에 섰지만 ....만감이 교차됩니다.
풍수는 기를 찾고 혈을 찾는 학문인데 경험도 없으면서 개안이 된것처럼 자가
당착 하시는 분들이 계시니 걱정입니다..이 글을 읽으시면서 납득이 않되시는
분도 계시고.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요..
글 잘쓴다고. 말 잘한다고 그 분들이 자연의 이치를 터득했다고 보지도 않읍니다.
글 내용을 보면 어느정도는 글쓴분의 위치를 짐작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하남촌장님께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풍수를 공부 하시는 모든분들의 지표가
되셨으면 합니다.소불선생님의 글을 보노라면 많은 부분 공유가 됩니다. 그래서
하남선생님께도 댓글도 부탁드렸구요. 두분의 형기론적 학문이 부합될시, 풍수
지리학문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수 있다고 보기때문에. 긴글 썻네요 ^^0^^
수고하셨습니다. 이 정도로 그칩시다.~~
예~ 감사 합니다. 항상 건승 하십시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