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 나만의 공간
-이태억
‘휘-청’ 굽으며 공이 단, 장, 단 3개의 쿠션을 눈 깜짝할 사이에 맞추고는, 단쿠션 따라 빠르게 움직인다. 반대편 장쿠션까지 잽싸게 구르더니 힘이 다했는지 비실비실 흐른다. 수구(授球:게이머에게 주어진 공)가 적구(的球:과녁이 되는 공)에 ‘스르르 턱’ 힘없이 은근슬쩍 붙는다. 제2적구가 살짝 움직였다. “야-, 오늘의 베스트 샷”, “굿 샷” 옆에서 보던 갤러리들도 한소리씩 거든다. 만면에 미소를 띠며 “감사합니다.” 인사한다. ‘바운딩(Bounding) 샷’이었다.
며칠 전부터 연습을 해오던 볼이었다. 고난이도 샷이다. 두께 80-90%, 역회전, 약간 세게 등등을 생각하며 ‘쭉-’ 밀었다. 제1적구는 단쿠션에 붙어있고, 제2적구는 제1적구와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단쿠션 가까이 있다. 수학으로 치면 최고난도 문제다. 확률이 높지 않아 초보 때는 엄두도 못 내었던 샷이다. 훈련 끝에 주어진 짜릿한 이 쾌감, 성공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
오늘도 쉽지 않았다. 매일 당구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곱게 보아줄 집사람은 없다. 공들이 기다리고 있다. 친구와 동네 아저씨들이 웃으며 반겨준다. 고등학교에서 정학 받은 이유, 지나온 인생살이, 질곡의 삶 이야기와 그래도 늙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운동은? 등 수다와 웃음이 넘친다. 뒤 꼭지가 따갑지만 눈 질끈 감고 문을 연다. 오늘 저녁에도 또 한바탕 격랑이 몰아치겠지…. 각오한다. 집 밖은 언제나 맑음이다.
‘나만의 공간’을 꿈꾸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모든 사람은 자신을 치유할 공간을 찾는다. 한적한 해변으로, 산사 템플스테이로 자아 발견을 위해 혼자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감각을 따라 온전히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DIY 작업을 하는 이도 있다. 2030 MZ세대들은 핫플레이스 Caffe 순례가, 6070 라떼 세대들은 향수를 되살리기 위해 음악감상실 방문이 무리에게서 벗어난 자신만의 피난처 공간이 될 수 있다. 오롯이 자신만을 배려할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을 갖기를 모든 이는 갈망한다.
혼자서 즐기는 것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제2의 삶을 시작하면서부터 붓글씨, 그림으로 전시회 출품도 하였고, 성악 무대에도 서 보았다. 수필, 시, 시조도 공부하며 글쓰기 취미를 가져보기도 했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다’, ‘고독을 벗으로 삼아야 한다’ 되뇌며 ‘나만의 공간’을 찾아다녔다.
즐길 거리가 많지 않았다. 우리 세대가 젊었을 때는 당구가 인기였다. 그 땐게임비가 비쌌으며, 담배와 술을 하는 놈팽이들의 놀이터라는 좋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어울리며 다녔으나 미친 듯이 빠져 있는 친구들에 비해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재미는 있지만 형편이 되면 해봐야지 하며 접었었다. 퇴직 후, 배워 보고 싶은 욕망이 있던 차 동창생들 당구 모임이 있었고, 함께 재미를 붙였다. 빠른 습득력을 가진 지라 금방 친구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랐고, 재미는 배가 되었다.
친한 친구가 집사람에게 ‘쟈는 못 하는 게 없어요. 그렇다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어요.’라고 한 얘기처럼 선수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함께하는 친구 사이에서 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월, 수, 금요일 모임을 가진다. 비슷한 시기 퇴직하였고, 수준도 엇비슷하니 서로 경쟁심이 일어 날 수밖에 없다. 오늘도 8명이 모였다. 새로운 기술을 처음 써먹었으니 모두 경이로운 시선으로 쳐다본다. 한 수 가르쳐 주었으면 눈초리다. 허허허. 자연 신기술은 술 한 잔의 수강료를 받고 삼겹살 파티의 주인공이 된다. 서로 다른 길을 살아왔지만, 불알친구의 옛정에 공 3개의 구름을 안주 삼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제 한 점 올려야지?” “지난달에는 이사장이 승급 턱을 냈으니, 이젠 자네 차례지.” 또 한 번의 만찬 약속이 잡혔다. 허나 “ㅇㅇ 장 입원했다며? ▢▢암이라지”, “퇴원은 했다데?” 걱정되는 얘기가 어김없이 나온다. “그래서 우린 감사해야 해. 두 발로 섰다, 앉았다, 다이 한바퀴 돌고 또 앉았다 서고, 손에 큐대 들고 찌를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이냐? 거기다 자네들을 매일 보니 옛 추억도 생각나고, 고맙기 짝이 없네” 덩달아 “우리도 알 수 없다. 건강할 때 즐기자. 5년 장담하겠나?” 걱정 반 진심 반의 얘기가 헛돌기도 한다.
‘독서 모임’, ‘원서읽기동아리’ 활동도 한다. 지식이 쌓이고, 견문이 넓어질 수 있고, 교양이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를 배려하는 나만의 구체적인 기술이다’라고 하지는 못하겠다. 나이 들수록 자기를 케어할 수 있는 공간, 배려할 수 있는 공간이 더욱 절실하다. 자연스럽게 ‘나의 공간’, ‘우리의 공간’이 당구장이 되었다.
주어진 공 3개가 임의로 놓여 진 상황에서 3번의 쿠션을 맞추어야 하는 조건들을 찾아내고, 시스템 찾아 계산하고, 두께 맞추고, 회전량 헤아려보고, 힘 조절하고, 그리고 결단하여 큐를 내지르는 동작들이 어찌 간단한 놀이인가? 수학이 있어야 하고, 물리가 필요하며 체력이 뒷받침되고 마지막에는 운까지 따라주어야 한다. 계산은 기본이며 움직임은 부수라 정신의 활동과 육체의 움직임이 필요하니 문과 무를 겸한 장(場)이다.
미셸 푸코(1926-1984. 프랑스 철학자)는 자기 배려를 논하면서 ‘정신과 신체가 불균형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몸과 마음을 다 다스려야 한다.’라고 했다. 이에 합당한 활동, 어린 학생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남녀노소 모든 세대에게 적합한 운동은 당구라 확언한다.
“내 계산을 입증하고, 그런 자신을 입증해 내는 아름답고 건강한 스포츠의 이름은 당구”라며 함께 공부하는 피ㅇㅇ선생이 당구를 예찬한다.
나를 찾고, 나를 배려하며, 나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공간이 있다. ‘우리들의 공간’을 이루며 다시 젊음을 찾기 위한 노력이 스며있는 공간이 여기에 있다.
‘당구! 나만의 공간이다.’
2024. 11. 02.
첫댓글 퇴임 후에 적당한 취미활동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여러가지 취미 활동과 즐거운 노후를 응원합니다.
삼구를 가지고 치는 군요~저는 아직도 사구를 가지고 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