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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테로포비아 41
<요일의 끝>
할로겐 등의 불빛에 눈이 부시다.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이 곳은... 병원이다.
몸을 움직이자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프다. 힘겹게 손을 들어보니 머리에 붕대가 감겨 있다.
소리치며 핸들을 꺾던 올랭도의 모습이 떠오른다. 벌떡 일어났다.
뼈 마디마디가 쑤시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린다. 다리에도 하얀 붕대가 감겨 있다.
움직여보지만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다.
내 침대 앞을 지나치는 간호사를 붙들고 외친다.
"올랭도는... 올랭도는 어찌 됐습니까?"
"같이 타신 분 말씀하신 거죠?"
간호사가 의사로 보이는 사람과 한참 이야기를 하더니 나에게 다가와 말한다.
"중환자 실에 있습니다."
중환자 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온다. 온 몸의 상처가 욱신욱신해 혈관이 터질 것 같다.
"...죽는 건가요? 올랭도가..." 간호사가 한숨을 쉬고 말한다.
"좀 두고 봐야지요. 목숨을 잃을 것 같지는 않지만, 척추를 다쳐서..."
척추를 다쳤다고? 올랭도가 불구가 될 수도 있단 말인가? 망연자실해 간호사를 바라본다.
"조수석은 문제가 없었는데, 운전석 사이드 에어백이 터지지 않았죠."
'넌 내 실험의 희생양이야. 모르모트처럼 말이야.'
모두가 교수가 꾸민 짓... 주먹 쥔 손이 분노로 떨린다.
일어나 만류하는 의사와 간호사를 뿌리치고 힘겹게 병실을 빠져나간다.
손을 들어 거추장스러운 머리의 붕대를 잡아뜯는다. 손에 피가 묻어난다.
너덜해진 육체 뿐 아니라 영혼까지 고통으로 삐걱거린다. 나를 살려놓은 건 무슨 뜻인가.
병원 문을 나서 바람에 옷깃이 펄럭이자, 내 속에 몰아치던 분노도 차곡차곡 낮게 깔린다.
이제 이것은 분노가 아닌 살의이다. 단 한 가지 집념에 모든 정신이 쏠려 비틀비틀 걸어간다.
나무가 우거진 교수의 집 앞에 도착해 현관문 손잡이를 돌린다. 기다렸다는 듯 쉽게 열리는 문을 밀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은색 벽과 오크 색 몰딩이 벽에 걸려 있는 그림과 함께 음산한 느낌을 준다.
휘몰아치는 증오심과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예감에 몸이 떨려온다.
"브라보! 역시 Z-8은 좋은 차야. 멀쩡히 잘 살아있군."
2층 난간에서 교수가 비웃듯 손뼉을 치며 내려온다. 저 웃음소리에 이제는 단 한 가지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내 안에 묵직하게 가라앉은 살의를 누르며 묻는다.
"...그 차에 무슨 짓을 해 놓은 거지?"
"백 킬로를 넘지만 않았어도 작동하지 않았을 텐데. 뭐, 그 정도로 죽진 않아."
팔짱을 끼고 내 앞에 선 그녀에게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고 말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당신이 내 모든 걸 파괴하는 걸."
그 말에 그녀가 증오로 가득 찬 내 눈을 보고 천천히 미소짓는다.
"이거... 드디어 예열되셨군. 행복한 예감이 드는걸?"
"무얼 바라고 이러는 거지? 내게..."
"재미있는 걸 보여주지." 교수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넓은 거실의 안쪽 기둥을 돌아가 방문을 연다.
그녀의 손짓에 방안을 바라보자 현기증이 일어 비틀거린다.
방안에 들어찬 것은 모두 내 모습이다. 스스로도 기억나지 않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의 수많은 모습들.
나와 연관된 사람들의 사진과 필름, 홀로그램까지. 이런 것이었나? 충격에 서 있기가 힘들다.
"5주전 이 날이었지, 자네가 처음으로 헤테로를 접한 것이."
"...재원도 당신이 보낸 거였군."
"너의 삶은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계획해 온 거야. 난 너 자신보다도 너를 잘 알고 있지."
"태어나기 전부터라니... 어떻게 당신이..." 할 말을 잃은 나에게 그녀가 담배를 꺼내 물며 말한다.
"소위 유전자 변형 클로네이드 1호라고 하지."
"유전자 변형...?"
"지금도 유전자 변형은 일어나지만, 난 민간 기업 클로네이드 제작 허용 이전의 비공식 클로네이드야.
'project 101'추진을 위해 만들어졌지."
교수가 연기를 내뿜으며 눈웃음짓는다.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공식 클로네이드 제작은 2042년 허용되었을 텐데... 반세기 이상을 그 몸으로?"
"문화인류학을 전공하게 한 보람이 있군." 그녀가 피식 웃으며 재를 턴다.
"우수한 두뇌와 노화하지 않는 육체를 가진 꿈의 클로네이드, 신 인류의 희망이라고들 하더군."
신 인류를 위한 희망? 노화하지 않는 육체! 서바이벌 로터리를 위해?
"...서바이벌 로터리를 실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괴물이군!"
"정답이야." 그녀가 즐거운 듯 웃는다.
"그 금색 눈동자도 유전자 변형으로 인한 건가?"
"지속적인 교육의 효과가 나타나니 기쁜걸? 드물게 자연 태생에서도 금색이나 연두색 눈동자는 있어.
대체로 근친간의 결합 혹은 유전적 결함으로 발생하는 일이지."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하는 그 모습에 소름이 끼친다.
헤테로포비아 42
"그래서... 어째서 나를 감시해 온 거지?"
"넌 자연태생이야. 네가 헤테로포비아인건 내 학습의 결과지."
"자연태생...?"
"요주의 인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감시 받지. 아무런 유전적 제약이나 변형 없이 태어난 몸이니까."
교수가 크게 제스추어를 취하며 외친다.
...내가 이성애자들간의 결합으로 태어났단 말인가?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녀가 반쯤 남은 담배를 비벼 끄고 말한다.
"헤테로섹슈얼로 자라날 거라 생각했는데, 넌 자연적인 호모섹슈얼이더군. 모르지, 그것도 성공적인 학습 결과일지."
"...어차피 호모섹슈얼이 대다수일 텐데..." 내 말에 그녀가 비웃듯 팔짱을 끼고 말한다.
"호모섹슈얼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자연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나?"
"...뭐?"
"시험관 아기는 정부의 정책을 거쳐서만 태어나지.
신 인류를 위한 정책에 부합시키기 위해 유전자를 변형했을지, 진실은 아무도 몰라."
"그럴 리가..."
"지금도 이 현실이 날조되지 않은 것이라 확신하는 건가?"
나를 내려다보는 사악한 금빛 눈동자에 고개를 돌리면 다시 방안에 가득 찬 내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믿을 수 없는 말들도 모두 그녀가 꾸민 것은 아닐까? 혼란스러운 내게 그녀가 다시 말한다.
"이젠 알 텐데. 너를 둘러싼 모든 것이 비정상인 것, 인공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당신이 만든 거잖아!" 주먹을 쥐고 외치지만 교수가 내 말을 막는다.
"굳이 내가 만들지 않아도 마찬가지야. 모두가 날조된 거지! 자연적인 것은 오로지 너의 몸뚱아리 하나 뿐이야."
내 삶 전체가 날조된 거라고? 나 뿐 아니라 나와 연관된 사람들까지... 그들의 괴로워하던 모습들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거대한 발에 짓눌려 꿈틀대는 벌레가 된 듯한 이 느낌!
"이제 궁금증이 좀 풀렸나?"
그녀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온다. 충격으로 내려앉은 살의가 다시 들끓는다.
교수를 죽이기 전에는 이 혼란과 감시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악문다. 손톱이 주먹을 파고들어 피가 난다.
"그럼 끝내볼까? 쾌감이 솟구쳐. 두근두근하는 걸?"
눈을 빛내며 말하던 그녀가 안주머니에 손을 넣다 현관 쪽을 보고 손을 멈추며 외친다.
"제희...!"
고개를 들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제희가 위태위태하게 현관에 서 있다. 제희가 왜 여기에?
그녀가 다가와 다정하게 나를 껴안는다.
"준휘..."
내 얼굴을 감싸쥐고 조용히 까만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미소짓는 그 얼굴이 지독하리만큼 슬퍼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언제나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듯 하지만 곧 입을 다물던 제희.
그녀가 다시 나를 껴안더니 가만히 서 있는 나에게서 떨어진다.
마치 마지막이라는 듯, 내 몸에서 떨어지는 그녀의 따뜻한 몸이 익숙한 향기와 함께 아스라한 여운을 남긴다.
"선생님..."
교수에게 다가가 나에게 그랬듯 그녀를 껴안는다.
교수는 지금까지의 표정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로 중얼거린다. "안돼..."
"그 동안 감사했어요."
조용한 제희의 말에 굳은 듯 서 있던 교수가 이내 넋이 나간 듯 팔을 들어 제희를 껴안는다.
교수의 눈이 아무 것도 비치지 않는 듯 공허하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영원의 연인과도 같은 그들의 모습에 도저히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고 짐작할 수 없는
많은 나날들이 얼핏 비쳐 그들만이 이곳에서 괴리되어 존재하는 아련한 초 현실 같은 느낌마저 든다.
"...이 모든 게 정해져 있었던 일일까?"
교수가 눈을 감고 고통스러운 듯 말한다. 체념한 듯한 얼굴에 투명한 한 줄기 눈물이 흐른다.
눈앞에 펼쳐지는 저 이질적인 영상과 닮은 것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
입술을 깨물고 창백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교수의 모습이 내가 다그치자 새하얀 얼굴로 눈물을 떨구던 제희의 얼굴과 꼭 같다.
멈춘 듯한 짧은 시간이 흐르고 제희가 교수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가서 기다릴게요. 당신의 오랜 소망이 성취되길."
곧 교수가 시선을 돌리고 제희를 으스러질 듯 꽉 끌어안는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손을 모은 제희의 손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들려 있다.
"제희...?"
순간 그녀를 안고 있는 교수의 등뒤로 새빨간 피가 왈칵, 분수처럼 뿜어져 분출한다.
솟구치는 붉은 피가 내 얼굴에까지 튄다. 뜨겁다!
"제희! 안돼!"
"제희에게 손대지 마!" 달려드는 나를 향해 교수가 소리친다.
"너 따위에게, 너 따위에게 제희를...!"
절규하듯 외치며 제희를 끌어안는 그녀의 하얀 수트에도 붉은 피가 번진다.
새하얀 카라에 붉은 핏방울... 또다시 언젠가 보았던 모습!
"제희는 죽어서도 너 따위에겐 안 줘...! 이 앤 내가 데려왔어, 내가 키웠어!"
오열하는 그녀의 품속에 제희의 고개가 힘없이 뒤로 넘어간다.
하얀 목에 깊은 칼자국이 벌려져 계속해서 울컥 울컥 새빨간 피가 솟아오른다.
"당신이... 제희를..."
이미 생의 흔적을 잃고 하얗게 변해 가는 그녀의 얼굴에 망연자실해 중얼거린다.
폭발할 듯 솟구쳐 올라 몰아치는 살의에 교수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쥔다.
"이 모든 것을 당신이 계획한 거겠지? 그녈 죽이기 위해!"
교수가 달려든 나와 함께 쓰러지면서 그녀가 안고 있던 제희의 식은 몸이 힘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쓰러진 교수의 몸 위에 걸터타고 목을 조른다.
"이 악마! 죽여버리겠어!"
무시무시한 힘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아래 그녀의 이마에 혈관이 부풀어오른다.
머릿속에 가득 차 터져 버릴 듯 나를 지배하는 생각은 오로지 눈앞의 이 악마를 없애야 한다는 일념뿐이다.
금색 눈동자가 조용히 나를 올려다보더니 눈을 감는다. 저항하지도 않는 그녀의 얼굴은 차라리 행복해 보인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그 편안하고 고요한 얼굴은 무슨 뜻이지?
멈춘 듯 무한하게 느껴지는 짧은 순간 교수가 만들어 낸 모든 일들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라 스쳐 지나간다.
제희, 올랭도... 어째서! 무엇을 위해 모든 것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나는 왜 지금 여기서...
머릿속에 꽉 차 소용돌이치는 증오의 말, 죽여! 죽이라고! 이 악마를 없애 버려야 해!
헤테로포비아 43
"...못 죽이겠나."
힘없이 떨리는 내 손을 뿌리치며 일어난 그녀의 목에는 붉은 손자국이, 눈의 혈관에는 출혈이 일어나 있다.
곧 안주머니에서 오토매틱 권총을 꺼내 찰칵, 안전장치를 푼다.
"무엇하나 제대로 해 내는 게 없군. 끝까지!"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 식어 가는 제희를 바라보고 울컥 내 어깨를 움켜쥐고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소리친다.
"너의 그 증오가 나를 죽이지도 못할 정도면서 제희를 내쳤나? 제희와의 약속만 아니었어도 널 죽여 버릴 것을!"
새빨간 핏빛이 어린 광기 어린 눈에 금빛 광채를 발하며 집어삼켜 버릴 듯 소리치는 그 모습에 정신이 아찔하다. 곧 외친다.
"당신이 제희를 죽게 만들었잖아!"
"그래, 내가 죽음으로 몰고 갔지! 하지만 그 앨 죽인 건 너야!"
"내가 제희를...?"
"네가 제희를 죽인 거야! 그 앤 널 사랑했어! 처음으로 다른 의미를 찾았던 거야, 그걸 내친 건 너의 자유 의지였지!"
"...그건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어!"
고통스럽게 어깨를 파고드는 팔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지만 그 팔이 더욱 강하게 조여 와 나를 마구 흔들며 소리지른다.
"넌 분노와 의심에 휩쓸려 그 애가 찾은 의미 따윈 무시해 버렸어! 더 중요한 게 뭔지 몰랐던 거야!"
"내가..."
'그 앤 자넬 사랑해.'
'모든 게 거짓이야. 당신마저도...'
"아니야!" 머리를 감싸쥔다. 제희의 생생한 목소리, 제희의 체온, 제희의 향기.
'당신과 함께라면 더 기쁠 것 같아서.'
행복하게 미소지으며 말하던 제희, 다그치는 내 말에 시선을 돌리며 흘리던 한 줄기 눈물. '아니야, 준휘...'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에 벗어나려 몸부림치지만 그녀의 영상들이 온 몸 깊숙이 파고든다.
비슷하다. 무엇과? 그녀에게서 달아나 차 문을 닫자 떨어지던 눈물,
그러나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나를 집어삼켜 해체 해 버릴 것만 같은 이 고통!
'양수리의 원래 이름은 '두물머리'였대. 두 물줄기가 만난다는 뜻이래.'
뇌 속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은 현기증에 털썩 바닥에 주저앉는다. 어째서 지금 그 말이 떠오르는 것일까?
감각 없는 손가락에 붉은 피가 묻어난다. 고개를 든다.
그 피가 이르는 곳은 제희의 벌어진 목이다. 방금 전까지 나를 껴안던 따스한 몸에서 뿜어져 나와 차가워진 붉은 피.
목이 잘려 바닥에 누워있는 제희. 제희가 죽었다. 아냐!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날조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내 작은 새..."
교수가 제희에게 다가가 껴안고 눈을 감긴다. 살며시 이마를 쓰다듬더니 싸늘한 그녀를 껴안는다.
"먼저 날아 가 버렸구나. 기다려라... 곧 갈 테니."
그녀가 조용히 제희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눈을 감는다. 새하얀 제희의 얼굴 위에 몇 방울 투명한 눈물이 떨어진다.
슬픔에 빠진 모습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 모습은 극한의 슬픔, 바로 그것이다.
"잡아." 교수가 천천히 일어나 내 손에 총을 쥐어준다.
"이제 끝내, 네 손으로. 날 쏴."
비현실적인 충격과 무감각에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곧 동료들이 올 거야. 내가 제희를 죽이고 널 죽이려 하자 네가 정당 방위로 나를 쏜 거야."
눈물 자국이 남아있는 얼굴로 차분히 설명하는 교수의 말에 현기증이 난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보고 그녀가 손을 들어 내 얼굴을 때리지만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독한 비 현실감. 무엇도 생각할 수 없다. 그녀가 다시 한번 내 뺨을 친다.
"정신 차려!" 단호한 외침에 그녀를 외면하며 중얼거린다.
"스스로의 손으로 죽음을 계획하다니... 무엇 때문에..."
"'project 101'이 폐기되어야만 하니까!"
그 말에 고개를 들자 다시 이 곳은 현실이다. 'project 101' 폐기! 당신의 목적이 그거였나?
격렬한 증오와 분노에 휘말려 제희가 목숨을 잃고, 내 손으로 교수를 죽여야만 하는,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현실?
차가운 권총의 묵직한 무게 감에 손이 떨린다. 그녀가 말한다.
"주요 요원들은 내가 없앴지. 마지막으로 내가 사라지면 'project 101'도 없어질 거야."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도살장으로 끌고 갔지!" 말을 흐리는 내게 그녀가 단호한 어조로 실소를 머금고 말한다.
"확실히 세상엔 살아 있을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 넘쳐나지.
하지만 그건 나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냐. 단죄의 화신 노릇은 질려버렸어."
"...왜 거기에 날 이용한 거지? 자살을 하면 서바이벌 로터리에 당첨되기 때문에?"
"내 몸은 노화하는 일반인의 생체시계와 맞지 않기 때문에 도너로 사용할 수 없어.
보안 유지를 위해 'project 101'요원이 자살하면 대신 그와 연관된 사람들이 모두 서바이벌 로터리로 제거되게 되어 있지!"
"그런...!"
"내가 자살하면 너도, 올랭도도, 춘란도, 르네도, 그밖에 모든 사람들이 당첨되는 거야!
장기기증자가 넘쳐나지, 정말이지 행복한 사회가 아닌가!"
그녀가 미친 듯 웃음을 터트리더니 내 멱살을 잡아채 번뜩이는 금색 눈으로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외친다.
"노화하지 않는다는 게 어떤 뜻인지 알아? 그건 괴물이야, 사랑하는 사람이 늙어갈 때 늙지 않는다는 뜻이야!"
내 옷깃을 움켜쥐고 흔드는 차가운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 깊고 고요하고, 광기에 가득 차 있던 눈은 그런 뜻이었나!
이내 그녀가 손을 놓고 침착히 말한다.
"이 순간을 위해 26년을 기다렸어. 이제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장내 줘."
"내가 당신을..." 다시 무감각한 비 현실감속에 빠져든다. 손은 떨리고 머릿속은 하얘진다.
"어서!" 그녀가 주춤거리는 내 팔을 잡아채 몸에 총구를 갖다대고 폭발하듯 외친다.
"너의 그 빌어먹을 자유 의지로 증오스런 날 죽이라고! 쏴!"
헤테로포비아 44 (완결)
* * *
"요즘 선생님은 무척 즐거워 보여요."
"즐겁지. 모든 게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잖아."
"죽음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 그리도 가벼운가요?"
"...날 알잖아, 제희."
"행복하세요? 그 분 곁으로 갈 수 있어서."
"...이제야 이 막연한 삶의 끝이 보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즐거워."
"선생님."
"죽음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 이후 단 한 순간도 마음놓고 쉬어본 적이 없어.
너무 많은 밤이 고통이야. 끝없는 나날들, 끝없는 고독... 이젠 쉬고 싶어."
"...때가 왔군요. 언제나 선생님과 함께 죽을 수 있기를 바래왔어요."
"제희!"
"잘 아시잖아요? 당신이 없는 삶은 제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제희, 넌 행복할 수 있어. 넌 다른 의미를 찾았잖아."
"...알고 계셨어요?"
"그 눈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향하는 걸, 내가 모를 리가 있나."
"그래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의미를 찾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니었어요. 그것도 알고 계시겠죠?
...전 이제 모든 의미를 잃었어요. 이제 제게 남아있는 나날들은 끝없이 똑같은 나날들뿐이에요.
아주 어렸을 적, 선생님을 알게 된 이후로 선생님이 늘 살아왔던, 바로 그런 나날들...
버텨 낼 자신이 없어요. 선생님 없이, 그 무거운 나날들을 살아낼 순 없어요."
"살아내야 해. 넌 나와는 틀려."
"...잔인한 말이군요.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저의 불행이에요.
당신의 소망이 그 사람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을 제가 어떻게 보고 있을 수 있겠어요?
그 후 설령 그와 함께라도 제가 행복할까요?"
"...안 돼."
"예감하고 있었어요."
"너를 데려온 게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가기 위한 거였나!"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에 제 삶이 의미 있어졌던 거예요. 선생님이 제게 삶을 주셨어요.
만일 당신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 어둠 속에서 저를 꺼내주지 않았더라면,
전 어떤 의미도, 기쁨도 알지 못하고 살아가다 사라졌을 거예요."
"마지막까지 넌 내게 슬픔을 주는구나."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준휘를 다치게 하진 않을 테니, 염려 마."
"두 번째예요, 당신의 눈물. 단 한 번 본 적이 있죠."
"제희..."
"이젠 보고 싶지 않아요... 너무 아프거든요. 너무 너무 아프거든요..."
* * *
"어서! 쏴, 쏘란 말이야!"
-타앙----!
<남겨진 나날들>
이 년이 지났다. 'project 101'은 사라졌다. 서바이벌 로터리를 위한 국외 추방 제도도 그와 함께 사라졌다.
'project 101'의 건물도 예전과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스카이라운지도 보통의 바로 변했다.
건물 바깥으로 비치던 파란 네온도 보이지 않아 이전의 몰아치던 밤들을 떠올려도 이질감만 느껴질 뿐이다.
제희의 싸늘한 얼굴, 원영의 광기 어린 금빛 눈동자를 떠올릴 때면
내 자신이 지금 이 거대한 진짜 현실 속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어쩌면 그들이 진정한 현실을 향해 이 곳을 벗어나고,
나는 여기 날조된 환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들이 사라지면서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함께 가져가 버렸던 것이다.
진정 감시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졌지만 그것만큼은 아직도 알 수 없다.
어디까지 휘둘린 것이고, 어디까지가 내 스스로 선택한 것인가. 그들과 나의 자유 의지는 어디까지였나.
나는 이 비현실적인 감각 없는 현실 속에서 끝없는 나날들을 살아가고 있다.
원영이 살아냈던 그 많은 나날들, 끊임없이 똑같은 나날들을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하고,
어떤 기쁨도, 즐거움도, 고통도 괴로움도 슬픔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나에게는 어제와 다른 오늘이 없고, 오늘과 다른 내일이 없다.
(헤테로포비아 완결)
첫댓글 와...광장했어요 마치 영화한편을 보고난 느낌이랄까? 대단해요 내가 글을 읽고있다는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세드인게 조금 찡하지만 굉장히 멍한데요?!^^ 대작 이었어요^^ 잘보구 갑니다
SF영화.. 에서 나올법한 그런 스토리 ㅎㅎ
와 굉장하네요. 어떻게 이런글을 쓸수가잇죠?
역시 소설가들은 대단해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