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즐거움
간혹 무취미가 취미라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취미를
지니고 산다. 60 ~ 80년대에는 고전적인 취미인 음악 감상, 독서, 영화감상 등이
전부였으나 지금은 사이클, 서예, 댄스, 아마추어 악기연주 등 열 손가락으로는
셀 수 없이 다양해졌다.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면 각종 동호회 모임도 활발하다.
이렇게 취미가 다양해진 이유는 소득이 늘어나 생활의 여유가 생겼고, 근무시간
단축과 ‘여가를 어떻게 보내느냐’를 삶의 질 향상으로 여기는 추세 때문이기도
하다. 또 개인적 생각일지 모르지만, 취미가 많을수록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생각한다.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어려운 시대에 20 ~ 30대를 보내고 이제 나이 들어 구세대에
편입된 나는, 취미도 당연히 고전적일 수밖에 없다. 이름 하여 음악 감상, 독서,
등산. 한두 가지 더 든다면 영화감상, 인터넷 바둑을 들 수 있을까. 그 중 가장
좋아하는 취미는 일주일에 2 ~ 3일 빼고는 늘 함께하는 책읽기다.
소설이든 인문 교양서든 책을 읽으면, 저자와의 교감과 아름다운 문장들로
너무 행복하다. 물론 지루한 부분이 있긴 하다. 산을 오를 때 처음 3 ~ 40분이
힘든 것처럼. 하지만 그 시기를 지나 정상을 밟으면 산 아래 펼쳐진 풍광들로
행복감이 밀려오듯, 읽고 나면 진한 감동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난 청년
시절 지극히 건방졌고, 나와 다른 남을 이해하기는커녕 무시하고 경멸하는, 오만의
극치였다. 이런 나는 변화시킨 건 도스또엡스키, 헤르만 헷세의 소설들이었다.
죄와 벌, 죽음의 집 기록,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싯달타.......
책읽기에 취미를 갖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다. 남을 잘 믿고 마음이 여렸던
어머니 잘못으로 가정이 파탄 난 우리 집은 한동안 뿔뿔이 흩어져 산 적이 있다.
난 숙부 댁에 머물게 되었는데, 7남매나 되는 숙부 댁엔 계몽사에서 나온 소년소녀
문학전집이 있었다. 객에 불과했던 난 50권이 넘는 문학전집을 모조리 읽었는데
지금도 그 때 행복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다 중학 1학년 때, 깨알 같은 글씨의 어른용 삼국지도 읽게 되었다.
고교 3학년인 사촌 형은 ‘네가 뭘 아냐’고 했지만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딸들에게 읽으라고 10여 년 전 이문열의 삼국지를 사주면서 한번 또 읽었는데,
중 1때 읽어서인지 그때보다 못했다. 2학년 겨울방학 때는 시골에 사는 친구집에서
한 달 간 머물렀는데, 성당에서 훔친 폴란드 작가 시엔키에비츠의 쿠오바디스를
밤이 새도록 읽었다. 소련의 지배하에 있던 폴란드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자 썼다는
이 소설은 로마 시대의 기독교 박해를 다루었는데, 종교 박해뿐만 아니라 기독교도인
리지아와 로마의 청년 장군 뷔니퀴스와의 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사랑에 반한
난, 한번 본 친구 누나의 친구를 짝사랑하여 한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전거로
그녀 집 앞을 순회했는데, 그 때 넘어져 다친 상처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주옥같은
아름다운 문장들을 흉내 내어 연애편지도 많이 썼었다.......
며칠 전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권 읽기를 마쳤다. 11세기 말에 시작하여
13세기 말까지 200년간 계속된, 그리스도교의 이슬람 세력 하에 있는 예루살렘 탈환
전쟁을 다룬 이 소설은 로마인 이야기,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 이어 진한 여운을
주었다. 이런 책읽기가 없다면, 어찌 천 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 역사적 사건을
현실감 있게 인식할 수 있을까. 8차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중세 암흑시대에,
신의 대리인이라는 교황의 주도로 일어난 만행이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1, 3, 6차 원정은 비교적 성공이었다. 이때의 지도자들은 합리적이고 오픈된
마인드를 지닌 왕들이었다. 앞뒤를 내다보는 전략과, 비록 적장이지만 교섭과정에서
친분을 쌓고 서로가 받아드릴 수 있는 타협안을 주고받아 전쟁도 피할 수 있으면
피했다. 반면에 7, 8차 원정은 철저한 패배로 끝나게 되는데, 이때의 지도자인 루이
9세는, 사후에 성인의 반열에 오르지만 무능한 지도자였다. 성공과 실패는 시대를
불문하고 전적으로 리더에 달린 것이다. 또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전에 읽었던,
베네치아 천 년 역사를 다룬 바다의 도시 이야기, 전쟁 3부작 중 하나인 ‘로도스
섬 공방전’의 배경을 알게 되었고, 카노사의 굴욕, 아비용 유수의 원인과 그에
따른 결과를 단편적인 지식이 아닌, 중세를 꿰뚫는, 총체적 관점에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라틴어, 아랍어, 영어, 불어 등으로 기록된 수십 권의
참고문헌을 섭렵한 저자에게 존경과 경외감이 일었다.
독서는 즐겁다. 주인공이 된 양, 감정이 저절로 이입되게 만드는 숱한 연애소설,
일방적 관점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식을 깨닫게 하는 역사 관련 書,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고 마음을 넓혀주는 여러 종류의 책들은 얼굴 없는 스승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몰라도 사는데, 그런 걸 알아서 뭣 하느냐’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따진다면
무엇인들 가치가 있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돈과 권력이 많아
好衣好食할 수 있다할지라도 감수성과 지식, 그것을 음미할 수 있는 베이스가 있어야
진정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존 스튜어트 밀의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낫다’는 말은 이런 뜻을 함축하는 말일 것이다.
- 2012. 11. 12. 鄭 俊 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