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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과 이끄심
이사야 6:1-8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주현 후 다섯째 주일이다. 오늘은 군포지방회가 열린다. 마침 김준택, 박희산 두 분 장로가 안수를 받는다. 그동안은 임명장을 받은 페이퍼 직분이었다면, 오늘 안수식을 통해 명실상부한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장로가 되는 것이다.
또 노승혁 전도사가 심사의 첫 관문을 통과한다. 어제 자격심사위원회에 참석했는데, 너무 긴장해서인지 처음에는 똑똑하게 답변을 못했다. 마치면서 다른 위원들이 내게 말하였다. “송 목사님이 보증할 수 있어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내가 “보증하겠다”고 장담하였다.
사실 장로든, 목회자든 사람이 누가 누구를 보증할수 있을까? 다만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불러내셨으니,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그런 부르심과 이끄심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고, 고백하고, 증거하며, 신뢰 가운데 순종하는 것이다.
20여 년 전에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책이 유행하였다. ‘책값 만원으로 평생을 살 수 있다’고 광고하였다. 그런데 그 메시지는 곧 시들해졌다. 인생의 목적이 유행가처럼 그때그때 변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 책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며,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지음 받았으며, 무엇보다 사명이 있다’고 강조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소명’이다. 한 인생이 자기 생애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한다면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런 소명과 사명 가운데 살기를 소망한다.
1)
예전에 어느 가정에선가 이런 글귀의 액자를 본 적이 있다.
“끌림이라고 생각한 것이 이끄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하루 작가의 캘리그라피이다. ‘끌림과 이끄심’ 사이, 아름다운 소명의 언어이다.
오늘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의 소명 이야기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이끄심으로, 평생 예언자로 살았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을 베푸셨다’로, 이사야는 그 이름값을 하면서 살았다.
이사야의 소명 기록을 보자. 그가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장면이다. 이사야의 소명은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다. 개인의 소명과 역사적 책임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1).
이사야가 부름받은 그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는 주전 742년이다. 남왕국 유다가 비교적 ‘독립을 누리던 시대’가 끝나고, 앗수르의 침략이 시작되던 시점이다.
그리고 소명 기록 다음 장인 7-8장에는 이사야의 구체적인 메시지와 행동이 나온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 왕에게 징조를 보여주면서, 수리아-북이스라엘 동맹군의 침략에 흔들이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한다.
이사야가 소명을 받은 곳은 성전이었다. 이사야는 세 가지 상황을 차례로 겪는다.
첫째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나타나신다.
이사야는 지극히 상징적인 환상을 목격한다. 하나님과 만남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내가 본즉”(1).
이사야는 스랍의 찬송을 황홀하게 듣는다. 여기 소개한 짧은 찬송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할 것 없이 모든 예배 전통에서 가장 유명한 찬송이 되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3).
이사야는 스랍들의 찬송을 듣는 중에 성전 문지방이 흔들리고, 실내에 연기가 자욱한 것을 보고 느낀다. 그 순간 이사야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강렬하게 느꼈다. 외적인 환경의 변화도 두렵고 놀라웠지만, 그의 내면은 더욱 흔들리고, 진동했을 것이다.
둘째, 하나님과 마주한 이사야는 자신이 죄인임을 분명히 깨닫는다.
어둠 속에 있다가 빛이 비치면 눈이 더 부신 것처럼, 빛 가운데 노출된 사람은 자신의 더러움과 허물이 더 크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게다가 하나님 앞에 섰다면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보잘 것 없을까?
당장 이사야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자각하면서, 크게 탄식한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이야말로 죄 때문에 죽을 운명임을 깨닫고 두려워한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5).
예언자들의 메시지 중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이 ‘부정한 입술’ 곧 거짓 예배에 관한 내용이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바로 서려는 것인데, 그 예배가 형식적이 되고, 인간의 탐욕을 추구하게 되고, 물질로 하나님을 대체하려고 하였다. 그런 예배는 하나님을 속이는 지극히 가증한 것이었다.
이사야 1장을 보면 첫 메시지가 거짓 예배에 대한 것이다. 선지자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파괴된 현실을 고발한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
이사야가 고발한 이스라엘의 죄는 ‘주홍 빛과 진홍 빛’(사 1:18)이었다. 그러니 그 죄가 얼마나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을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무엇인가? 그 계명을 통해 나를, 내 삶을, 내 죄를 진실하게 바라보라는 빛의 거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율법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고,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도구로 삼았다. 율법이 부정적으로 평가된 이유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 앞에 서니 자신의 허물과 죄가 모두 노출되었다. 그 순간 이사야는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5)이라고 토로한다. 입술은 인간의 ‘죄’ 성을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 부분이다. 입술의 부정은 마음의 부정이요, 본질적인 내면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이사야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면을 선포하신다. 스랍 하나가 성전 제단에서 집어 온 숯불로 이사야의 입술에 대고 선언하였다.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7).
이제 용서받은 이사야는 여호와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사야의 죄는 스스로 자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사면 받은 것이다.
2)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이 용서받은 그 사람을 당신의 사자로 보내신다. 아마 이사야는 탈진상태였을 것이다. 이때 주의 음성이 들려온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8).
이사야의 소명은 예배 중에, 깊은 기도 중에, 회개 가운데, 하나님과 만남을 통해 가능하였다. 하나님은 외적인 모습이 아닌 중심을, 형식적 행위가 아닌 진정성을 보신다.
이사야를 비롯해 많은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지적한 것은 형식적이고, 위선적 예배와 삶이었다. 오죽하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절기를 지키려는 백성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
미국에 있는 내 친구가 자기 아들이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비난했다고 한다. “hypocrite(히퍼크리트)!” 처음에는 그 뜻을 못 알아들었다. 위선자란 뜻이다.
목사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자녀들의 눈이다. 가장 불편한 비난이 “위선자”이다. 자칫 종교는 위선이 되기 십상이다.
라마단은 이슬람 금식절기로 유명하다. 한 달 동안 계속되는데 역설적으로 일 년 중 고기 소비량이 가장 많은 기간이 라마단 기간이기도 하다. 먹지 말도록 강요하니 오히려 더 욕심껏 먹기 때문이다.
해가 지자마자 7시경 푸짐하게 저녁을 먹고, 잠자기 전 10시경에 다시 먹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또 먹는다. 실상은 하루 세끼를 모두 먹는 셈인데, 심리적인 허기로 더 먹는다는 것이다.
라마단 기간 동안 사람들은 금식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그래서 별거 아닌 걸로 서로 다투는 경우가 많고, 거리의 자동차들도 더 양보하지 않아 거리가 늘 소란하고 시끌하다는 것이다. 퇴근 후에는 빨리 집에 가서 먹으려고, 또 식당에서 자리를 차지하려고 진통을 겪는다고 한다. 가장 경건한 절기에 가장 아이러니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율법을 잘못 적용한 폐해이다.
평생 목사로 살아온 나를 돌아보면 참 위선적이다. 얼마나 위선적인지, 이젠 위선인지 아닌지 그 경계도 잊고 산다. 평소에 너무 쉽게 자기를 합리화한 나 자신을 보면서 “너도 참 노회하였구나” 싶다. 불쌍한 존재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런 위선적인 예배, 형식적인 절기를 비판한다. 율법에 매인 생활이 아닌 자유로운 진리의 삶을 찾도록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예배든, 제사든 본래 정신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형식이 아닌 그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며, 제사하는 사람보다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먼저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제사는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형식일 뿐인데, 그만 껍데기가 본질을 삼켜버렸다.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셨다. 그 사랑을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예배이고, 하나님의 계명이며,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하신다.
3)
내 삶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 삶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예언자들과 같은 대단한 부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들처럼 목숨을 건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 가정, 일터, 교회, 사람과의 관계,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떤 부르심을 갖고 사는 가를 묻는 것이다.
내 소명은 무엇인가? 소명은 영어(Calling)로 직업이란 뜻이기도 하다. 직장이 아니다. 평생 내가 소중히 여겨온 직업이다. 흔히 ‘송곳이나 노끈과 같은 작은 쓰임은 언제나 뚜렷하지만 큰 쓰임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말이 있다.
인도에 슈리만 나라에이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브라만 계급으로, 런던의 정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동안 간디가 있는 아쉬람(힌두교 수양관)에서 지내는 동안 그곳 규정에 따라 어떤 임무를 맡게 되었다. 화장실 청소였다.
슈리만은 자신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일에 대해 분노하였다. 인도의 브라만 계급은 노동을 위해 결코 허리를 구부리지 않았다. 그는 불쾌해서 즉시 간디에게 달려가 불평하였다. “나는 브라만이고, 박사학위 소지자요. 큰일을 할 능력이 있단 말이요. 그런데 왜 화장실 청소하는데 내 시간과 재능을 낭비한단 말이요?” 간디가 대답하였다. “나도 당신이 큰일을 할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당신이 작은 일도 할 능력이 있는지 알고 싶은 거요.”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잘 알지 못할 때, 자주 실망한다.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고도 오래지 않아 기쁨도 감격도 동기도 시들해진 채 살아간다.
내게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히 알 때, 우리의 삶은 소망과 기쁨과 새 힘으로 넘치게 된다. 가장 깊은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심지어 시험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삶을 내어 드리며, 너무 멀게 느껴질 그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소명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과 만난 네 명의 어부의 경우이다. 그들 사이에 ‘부르심과 대답’이 있었다. 부르지 않았으면 대답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으면 주어진 기회를 잃었을 것이다. 그리고 ‘끌림과 이끄심이 계속되었다.
누구나 갈림길이 있다. 선택은 얼마나 중요한가? 인생은 매 순간 선택적이다. 나는 어떤 응답을 준비하고 사는가? 만약 즉흥적으로 산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가벼울까?
그러니 평소 여러분의 소명을 외면하거나, 거부하지 말라. 대단하지 않다고 여겨 부주의하게 여기지 말라. 내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은 인생은 없다.
내 안에 뿌려진 주님 말씀의 씨앗을 간직하고, 내 마음 밭을 가꾸라. 반드시 씨앗이 움트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내게 소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늘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