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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근원이 되는 5대 요소
창세기 12장 1-9절/ 060101
< 하나님 안에 거하십시오 >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흔히 3가지로 표현됩니다. 첫째는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구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종으로 비유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예레미야는 다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종과 주인은 율법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처럼 법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고 쫓겨납니다.
둘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부자관계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한 집에 살고, 식탁에서 함께 먹고,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습니다.
셋째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가장 깊은 관계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관계는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가장 깊고 신비한 관계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초월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넘어서고,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며 사는 일입니다.
창세기 25장에는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이 나옵니다. 에서는 화려하고 멋있고 남자답고 익숙한 사냥꾼이어서 아버지 이삭이 좋아했지만 세상적인 방법을 좋아해서 결국 버림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에서형 교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냥을 잘하고 세상에서 성공해도 하나님께서 성공을 보시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10장 9절 말씀을 보면 ‘익숙한 사냥꾼’이란 별명을 가진 에서와 비슷한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특이한 사냥꾼’이란 별명을 가지고 고대에 대 국가를 이룬 니므롯입니다. 니므롯은 인간적으로는 성공했지만 하나님을 대적해서 결국 버림을 받았습니다.
부와 성공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부와 성공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겸손을 잃어버리고, 사명과 비전을 잃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와 성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안에 있기를 힘쓰는 사람은 가장 복된 사람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 복의 근원이 되는 5대 요소 >
왜 야곱이 선택받았습니까? 인간적인 매력은 적어도 하나님 안에 있기를 힘썼기 때문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까? 역시 하나님 안에 있기를 힘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단순히 복 받은 사람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복의 근원이 되는 몇 가지 비결을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조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떠나는 결단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바벨탑 사건이 나옵니다.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제국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교훈을 줍니다. 그 바벨탑 사건이 벌어졌던 시날 땅에 니므롯이라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나왔습니다. 그처럼 좋지 못한 토양에서 좋지 못한 사람이 나올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좋지 않은 곳은 과감히 떠나야 합니다.
그때 그 장소에서 과감히 떠난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 명령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좋은 곳은 끝까지 붙어 있어야 하지만 나쁜 곳은 과감히 떠나야 합니다. 나쁜 곳을 떠나지 않고 나쁜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진정한 축복은 없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과거를 과감히 떠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결혼했으면 옛 가정을 빨리 떠나야 합니다. 결혼 후에도 자꾸 친정 얘기만 하면 시어머니의 미움을 받게 되고 갈등이 생깁니다. 또한 결혼했으면 옛날에 알았던 남자나 여자를 만나도 모른 척 하고 지나가야 불행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 가정으로 시집을 왔으면 세상의 습관과 문화를 깨끗이 포기하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맘대로 할 수 있는 세상에서 떠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을 제한하며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바로 그것이 축복의 씨앗입니다.
삶에는 때로 제한도 있어야 오히려 참 자유를 얻습니다. 제한성 안에서 자유를 극대화시키며 사는 것이 행복의 본질입니다. 우리에게는 먹지 말아야 할 선악과가 있는 것이 오히려 필요합니다. 그 제한까지 풀어버리면 오히려 에덴을 잃게 됩니다. 성도는 어떤 한계성 안에서 행복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떠나라!”는 말은 “하나님 안에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우리 분당샛별교회와 요삼일육선교회를 세워주신 소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실 때는 실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성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명을 이룰 수 있다고 믿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연약한 모습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2. 순종하려는 의지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사실 그 명령을 아브라함은 완벽하게 지키지 못했습니다. 본토는 떠났지만 조카인 롯을 데리고 떠났고, 아비 집을 떠나지 않고 처음에는 아버지 데라와 함께 떠났고, 처음에는 하나님이 지시한 가나안 땅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란 땅으로 갔습니다.
그처럼 아브라함의 믿음이 처음부터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의롭다 여김을 받은 때는 75세에 하란을 떠날 때보다 10여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절대 순종의 믿음으로 인정받은 받은 때는 창세기 22장에서 자기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할 때로 다시 약 30년 이상 지난 때였습니다. 그처럼 아브라함의 믿음이 처음에는 부족했지만 그 믿음을 가지고도 순종해서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등장인물이 약 3만 명으로 얼마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등장인물이 많은 책이었고, 두 번째가 삼국지로 약 6천명인데,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이 알려지면서 그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조선왕조실록만 봐도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의 문화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나라에도 실록은 있지만 그 방대함과 내용의 풍부함과 역사적 가치에 있어서 조선왕조실록을 따를 것은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제외하고 성경처럼 등장인물이 많은 책은 없는데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 중에 하나님께서 믿음이 완벽한 사람을 선택한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개 믿음이 없는 사람을 부르시고 믿음을 주셔서 쓰셨습니다. 신약에서 제일 일을 많이 한 베드로나 바울도 믿음이 없을 때 선택받았습니다. 구약에서 제일 일을 많이 한 모세도 믿음이 없을 때 선택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믿음이 좋은 사람을 택하셨다면 저는 결코 목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1979년 처음 교회를 다니면서 5년 동안은 거의 엉터리 신자였습니다. 그처럼 믿음은 없었지만 한 가지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음 좋고 헌신하는 사람을 보면 너무 부러워서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믿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믿음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지금 믿음이 부족해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엄청난 자를 택하지 않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을 불러 믿음을 주셔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이 적다!”고 말하지 말고, 이 순간에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 같이 부족한 사람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일에 쓰고자 하시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욥은 우스 땅에 살았습니다(욥 1:1). 그 땅이 어딘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고향이었던 갈대아 우르 옆에 우스가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욥이 살던 시대도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와 비슷한 시대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약한 아브라함보다는 동방의 의인으로 하나님까지 인정했던 욥이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욥 대신에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은 꼭 믿음 좋은 사람만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현재 “나는 믿음이 적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큰 믿음을 가지고 크게 순종하려고 하지 말고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작은 부분부터 순종해보십시오. 작은 일에 순종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면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에 처하게 되지만 작은 일부터 순종하며 점차 믿음의 분량도 커지고, 축복의 분량도 커지게 될 것입니다.
3. 내일의 소망
아브라함이 중간 기착지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가 얼마였습니까? 75세였습니다. 이제 기력도 쇠퇴하고, 생각도 쇠퇴할 나이였습니다. 또한 정확한 목적지도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처럼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는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우리도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과감히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한국에 올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왔습니다. 살 길도 막막했습니다. 다만 한국을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CMA)의 전초 기지로 만들어 120년 된 선교의 노하우를 전하고, 훌륭한 선교사를 배출하고 많은 선교중심적인 교회를 많이 세우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다 비웃었습니다. 교단의 벽이 높은 한국에서 그게 되겠느냐는 얘기였습니다. 지난 세월은 정말 고난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선교의 동역자도 조금씩 생기고 그 비전이 조금씩 열매를 맺는 것을 봅니다.
성도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내일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말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의미 있는 일을 이 땅에 남기고 천국에 가겠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참새도 죽어가면서 자기 존재를 알리겠다고 “짹!”소리를 내며 죽습니다. 우리도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남기고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저는 한국에 돌아와서 미국에 있는 선교 본부와 김독님과 선교 동역자들과 끊임없이 교류를 했습니다. 그들이 한국에 방문하면 항상 말했습니다. “저의 비전은 한국에 선교센터를 세워 선교사 훈련학교를 만들 것입니다.” 그 말을 귀담아 듣는 분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희 팀의 사역을 보면서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구나 하고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꿈과 소망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라면 꼭 붙들고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기도하고 준비하고 땀을 흘리십시오. 그러면 신비한 도움의 손길이 어디선가 주어지게 될 것이고, 거룩한 비전의 동역자도 붙여주실 것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바울이 유럽선교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헌신적인 루디아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선교의 비전을 키워나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루디아와 같은 동역자를 보내어주셔서 비전의 기초를 놓아주실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가 돕던 안디옥 선교회에서는 콘테이너에서 제 3세계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한 권사님이 그 선교회가 가진 비전의 기초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분의 남편이 돌아가시자 남편의 뜻을 받들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안디옥 선교회에 선교센터를 세워준 것입니다. 지금 그곳에서 3세계 목회자들을 많이 길러내고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사명을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도 좋은 동역자와 후원자를 반드시 붙여주실 것입니다.
힘이 없고 나이가 들었다고 꿈까지 버려서는 안 됩니다. 몇 년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365개의 긍정적인 생각들’이란 책을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그 책의 서문을 보면 그를 변화시킨 가장 위대한 구절은 예레미야 29장 11절이었다고 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일과 희망을 주려고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도 내일의 희망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대부분의 불행과 절망은 잘못된 생각 때문에 생깁니다. 우리가 문제에 집중하면 우리는 패배합니다. 반면에 문제에 뒤따라오는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면 성공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이 우리 눈에 불가능해 보이고, 우리가 해보지 않은 것이고, 잘못된 결과가 나올 것 같고, 결과를 알 수 없을지라도 그 비전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한 때에 반드시 그 비전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4. 공동체 정신
본문 5절 말씀을 보면 아내와 조카 롯, 그리고 그가 얻은 소유물과 사람들까지 다 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을 큰 꿈을 가지고 저 높은 곳에 향해 나아갔지만 무조건 혼자 나가지 않고 아랫사람도 살피며 같이 나아갔습니다. 가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오해하는 사람 중에 자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고, 가정을 희생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짝 성공은 주지만 진짜 성공은 주지 못합니다.
사실 가나안 땅으로 혼자 떠나면 얼마나 홀가분합니까? 그러나 축복받는 사람 중에 혼자는 거의 없습니다. 챙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천로역정에서 순례길을 혼자 떠나는 주인공보다 자식들을 데리고 함께 떠난 주인공의 부인을 더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떠나야 할 것을 떠나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챙겨야 할 것을 챙기는 것도 잘해야 합니다. 어떤 특별한 사명이 있으면 떠나야 하지만 보통은 챙기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선교사 노릇도 잘해야 하지만 가정의 선교사 노릇도 잘해야 합니다. 사실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한 일은 가족들을 예수 믿게 하고 구원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같이 승리하려는 공동체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남을 기쁘게 하는 삶이 행복의 근원입니다.
일본에 기꾸찌라는 수학 천재가 있었습니다. 그가 옥스포드 대학에 다닐 때 항상 1등만 했습니다. 그때 영국인 브라운은 항상 2등만 했습니다. 그래서 기구찌를 넘으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 되니까 백인들의 시기심이 대단했습니다.
어느 날, 기꾸찌가 독감에 걸려 몇 주간 결석했습니다. 백인들은 “됐다! 이번 학기는 브라운이 1등하겠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학기에도 또 기꾸찌가 1등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브라운이 매일 강의들은 걸 노트해서 기꾸찌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친구가 아플 때 그 기회를 틈타 1등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마음입니까? 그처럼 남을 기쁘게 하고, 밀어주고, 이해해주고,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복의 근원이 됩니다.
또한 본문 5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얻은 소유물까지 가나안으로 가지고 갔다는 것은 성도는 사람뿐만 아니라 소유물도 잘 챙기고 관리해야 함을 도전합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말은 가정과 자녀와 재산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가정과 자녀와 재산을 우상처럼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말이다. 그래야 이 땅에서 백배의 축복을 얻고 천국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자녀를 백배로 사랑하려면 자녀를 내 소유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버려야 합니다. 재산을 백배로 얻으려면 재산을 내 소유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것이요 “나는 재물을 잠시 맡은 청지기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버리는 자세로 살면 버린 것의 백배를 얻고 천국을 얻게 됩니다. 그처럼 주어진 재물을 가치 있게 잘 사용하는 사람이 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5. 제단 중심적인 생활
본문 7-8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서 단을 쌓았습니다. 그처럼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습니다. 사실 그가 단을 쌓았던 것은 축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감사해서 쌓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교회에서 예배하는 삶을 무엇보다 중시해야 합니다.
교회 중심적인 생활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주님의 신부라고 합니다. 남편에게 부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친구의 부인이 나를 환영하지 않으면 그 집에 못 갑니다. 어느 날 친구의 집에 갔는데, 부인이 귀찮아하는 모습을 보이면 다시는 그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남의 집에서 대접을 잘 받으려면 그 집 안 주인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친구 집에 갈 때에는 친구 부인의 선물은 꼭 준비해 가고 칭찬도 많이 해야 합니다. “야! 너 정말 장간 한 번 잘 갔다!” 그러면 편하게 대접받을 수 있습니다.
영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신부를 교회를 박대하고 축복받기를 바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 것이지만 주님의 신부인 교회를 사랑함으로 나의 믿음생활에 구체적인 축복이 넘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 중심적인 생활과 예배 중심적인 생활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에서처럼 들에서 사냥하고 사투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좋은 부모 만나고 그 부모 밑에서 풍요와 여유를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열심히 사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날 왜 돈을 벌려고 합니까? 행복하겠다고 돈을 버는데 오히려 돈을 벌어놓고 불행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행복은 돈에 있지 않고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최선을 다해서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흘러나옵니다.
< 하나님 앞에 있기를 힘쓰십시오 >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미국 여자들을 볼 때마다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허드렛일을 남자와 거의 똑같이 합니다. 제가 다니던 신학교는 대학교와 같이 있었기 때문에 학교 내에 20대 초반의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았습니다. 그처럼 미모가 있어서 학교에서 뭇 남자들의 시선을 받는 여자도 수업 후에는 허드렛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는 만 18세 이상이 되면 남녀를 불문하고 스스로 학비 문제와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처음에 미국에 갔을 때 왜 대학교마다 하나같이 강의실 건물보다 기숙사 건물이 훨씬 많은 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강의실 건물이고 기숙사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미국 대학에는 기숙사 건물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만 18세 이상이 되면 거의 집에서 나와 스스로 자립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대학교 학비를 내주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낮에 공부하고, 공부 후에 아르바이트로 청소나 식당 일을 합니다. 훌륭한 일이긴 하지만 보기에는 안쓰럽습니다.
반면에 부모의 넉넉한 후원을 받고 공부하는 학생도 간혹 있는데 그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제가 있던 싱글 기숙사 4층에는 약 20명의 미국인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부모가 학비를 대주는 사람은 아버지가 대기업 부회장이었던 짐 턴벌(Jim Tunball)이란 학생 한명뿐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내 옆방에 살았는데 마음씨가 좋아서 저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고 애썼고, 이해심도 넓고, 상대방을 경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감싸 안고 가는 친구였습니다.
저는 그때 “넉넉하고 지혜롭고 좋은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 전까지는 넉넉한 부모 밑에서 자라는 사람을 ‘고생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은근히 깔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물론 자녀가 고생을 모르고 잘못 배우면 비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부모의 넉넉한 사랑과 후원을 받고 자라면 풍요로운 인성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도 많습니다.
일 관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미국은 여성이 존중받는 사회이지만 여성들도 남자들과 똑같이 일해야 합니다.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또한 그렇게 일을 더했다고 가정이 행복하게 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호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는 순간 이혼으로 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혼자 자립할 수 있으니까 치사한 남편과 안삽니다. 그래서 이민가정을 보면 세 가정 중의 한가정이 깨진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미국 한인교회에 부흥회를 가서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다음날 한 여자 집사님이 온갖 선물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 좀 빼주세요. 한국에서 건너와서 똑같이 돈벌고 사는데 순종까지 하려니까 죽을 지경입니다. 이제는 좀 피차 순종하라고 해 주세요.”
열심히 일하고 남편의 시중까지 들려고 하니까 얼마나 힘듭니까? 어떤 가정에서는 일찍 들어온 남편이 늦게 들어온 아내에게 한국식으로 말했습니다. “물 좀 떠다 줘.” 그러자 아내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직접 떠다 먹어!” 그렇게 했다고 남자가 손찌검을 해서, 그날로 그 가정이 끝났습니다.
우리는 돈을 버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행복하겠다고 돈을 버는데 벌어놓고 불행해진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돈과 명예가 반드시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흘러나옵니다. 오늘도 주신 말씀처럼 항상 하나님 안에 있기를 힘쓰고, 믿음을 부족해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비전을 이루려고 힘쓰고,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하는 삶을 통해서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anqyu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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