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존재의 대변인, 아룬다티 로이
아룬다티 로이는 약 5년간 집필한 이 소설로 먼저 이름을 알렸지만, 페미니즘, 환경 문제부터 인도와 주변국의 정치 문제, 나아가 세계화에 따른 신제국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슈에 대해 강렬한 목소리를 내는 사회운동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탁월한 문체와 날카로운 지적 감수성을 지닌 사상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그녀는 라난 재단의 문화자유상, 시드니 평화상, 노먼 메일러 집필상을 수상했으며,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대개의 데뷔작이 그렇듯 『작은 것들의 신』도 아룬다티 로이의 삶을 투영한 반(半)자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 등장인물 설정에서부터 이야기의 사회문화적 배경까지 상당 부분이 아룬다티 로이의 삶과 겹쳐진다. 아룬다티 로이는 『작은 것들의 신』에 대해 “이 소설은 나의 세상이며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또한 이 소설은 장소나 관습에 관한 것이 아니라 들과 땅과 공간에 관한 것이며, 어떤 특정한 사회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본성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가라타니 고진은 소설이 아닌 에세이와 비평으로 방향을 튼 그녀의 행보에 대해 “로이는 문학을 버리고 사회활동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을 정통으로 계승했다”고 말한 바 있다. 즉, 여성, 아이, 파괴되는 자연 등 지구상의 작고 연약한 존재들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는 아룬다티 로이의 인간과 세상에 대한 시선, 그리고 문학의 본질에 대한 정수가 이 작품에 담겨 있다.
아름답게 파열된, 매혹적인 이야기
1969년 인도 케랄라 아예메넴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단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바뀐’ 한 가족의 비극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축을 오가는 초반 대여섯 페이지에서 정신적으로 이어져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는 이란성 쌍둥이 에스타와 라헬의 탄생, 영국에서 놀러왔다가 사고로 익사한 외사촌 소피 몰의 장례식, 경찰서에 갇힌 벨루타, 그를 구하고자 진실을 밝히려는 암무 등 앞으로 전개될 주요 사건이 조감도처럼 공개되나 하나의 풍경처럼 제시될 뿐이어서 오히려 궁금증만 커지고 만다. 도대체 이들 가족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작은 것들’은 무엇이며 ‘작은 것들의 신’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건축을 전공했고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한 이력을 반영하듯 아룬다티 로이는 사건의 파편을 하나씩 공고하게, 그리고 마치 스릴러처럼 끝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짜맞춰간다. 시리아 정교도와 힌두교도, 불가촉민과 가촉민, 남자와 여자, 영국 문화와 인도 문화, 과거와 현재, 큰 것과 작은 것, 삶과 죽음 같은 다양한 대립축을 세우고 하나의 조각처럼 제시되는 경험이 쌓이면, 우연히 혹은 어쩌다 겪게 되는 사건처럼 보이는 경험이 쌓이면, 불가피했다고 볼 수 없는 커다란 사건이, 사랑이, 죽음이 드러난다.
‘지구 여인’의 눈이 한순간 깜빡인 것일 뿐일 23년이라는 시간의 경계를 오가는 복합적인 내러티브를 통해 아룬다티 로이는 누가 사랑받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사랑받아야 하는지를 규정짓는 ‘사랑의 법칙’이라는 규범과 관습의 잔인함을 폭로하고 모든 권위적인 질서에 사랑으로 대항한다. 한 사람의 삶, 미래, 사랑과 죽음은 거대한 질서나 통념, 사회적 체면 같은 ‘큰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과 그 주변 사람들이 행한 ‘작은 것’이 서로에게 맞물려 돌아간다는 것을, ‘누구에게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룬다티 로이는 이 작품을 통해 핍박받는 자들의 대의를 대변하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고 위무하는 인간의 ‘작은 힘’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격변의 시기를 사랑으로 맞서다
아룬다티 로이는 이 작품에서 카스트제도에 억압받는 불가촉민과 남성중심적 분위기에 억눌린 여성의 삶을 두 ‘작은 존재’의 결합이라는 방식으로 강렬하게 그려낸다. 불가촉천민인 파라반들은 뒷걸음질치며 자신들의 발자국을 지워야 했고, 가촉민의 집에 발을 들일 수도 그들이 만지는 것에 손을 댈 수 없었으며, 상대에게 오염된 숨결이 가지 않도록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해야만 했다. 가촉민이라 해도 여성에게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여인에게만 긴 머리가 허락된 땅에서 같은 일을 해도 여성은 남성 임금의 절반을 받았고, 상속권이 없기 때문에 있을 권리가 없는 곳에 머무르거나 폭력을 당해도 인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와 통념을 깨고 손재주가 뛰어나 인정받는 파라반인 벨루타 그리고 이혼 후 친정에 얹혀살게 된 암무는 사랑에 빠진다. 자신들에게는 갈 곳이 없음을 아는, 자신들의 운명은 부서지기 쉬운 약한 것임을 아는, 약속할 수 있는 미래란 ‘내일’뿐인 벨루타와 암무는 본능적으로 ‘작은 것들’에 집착한다. 이들의 사랑은, 누명을 쓴 벨루타가 경찰에게 두들겨 맞아 죽으면서 그리고 암무가 집에서 쫓겨나 홀로 외롭게 죽으면서 끝나지만, 그들이 함께한 아름다운 저항의 순간만큼은 반짝이는 구슬알처럼 이야기 곳곳에 알알이 남아 있다.
아룬다티 로이는 말라얄람어를 곁들이고 아이들 특유의 유머와 어법을 섞으며, 색채의 마술을 부리듯 이미지를 묘사하는 식의 독특하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사랑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의 결을 짜나가며 독자에게 이런 물음을 던진다. ‘사랑의 법칙’이 그때 그곳의 질서만 규제하느냐고. 모든 ‘큰 것’에 맞서는 원리로서의 사랑은 여전히 존재하느냐고. 인도 사회뿐 아니라 사랑이 존재하는, ‘사랑의 법칙’이 지배하는 모든 시대에 대한 도전과도 같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