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로 들어서면서 본격적 한발의 조짐이 우크라이나 지역에 뚜렷해졌다.
파종시기인데도 두 달 동안 비 한 방울 구경 못한 밭에는
바짝 마른 검은 흙들이 먼지만 푸석거릴 뿐이었다.
말라붙은 밭 처럼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은 농민들의 얼굴만이 아니었다.
1세기 전, 1920년대에 사람까지 잡아먹게 만든 비참한 대 기근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포가 서서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이르쿠츠크에 이르는 넓은 곡창지대가 흉작을 맞으면 곡물 수확량은 30% 이상 감소할 것이었다. 밀의 경우는 더욱 심해 40% 이상이 사라질 암울한 전망이다.
이 물량은 국제 곡물시장 밀과 옥수수의 30%에 달하는 2,500만톤을 확보해야 겨우 채울 수 있는 엄청난 분량이다.
자치주와의 분쟁 따위는 코앞에 닥친 식량위기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얼굴이 누래진 코마로프 농무상이 가즈미 가세끼의 통산성 건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리다 공항에서 호텔도 들리지 않고 곧장 달려온 그의 복장은 후줄구레 했다. 만면에 미소를 띄며 코마로프를 맞은 사토오 통산장관은 악수를 청했다
“미국에서 활동하신다는 말씀은 진작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코마로프는 수염 한 올 없는 맨질맨질한 사토오의 턱에
한 방 날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글쎄, 막강한 정보망을 가진 일본의 통산장관께서는
이미 전모를 알고 계시리라 짐작됩니다만---,”
사토오는 이 러시아 사내가 미국의 곡물 메이저들 -- 카길과 ADM--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고 왔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곡물시장의 강자로 부상한 중동국들의 비위를 거스르기 싫었던
미국 메이저들은 대륙국가로 이동되는 물량의 일정 부분은
베링 철도로 운송해야 한다는 협약을 내세웠다.
중동국가들은 수송물량의 20% 이상을 베링 철도를 통해 운송하는 조건부로 곡물을 거래하기로 메이저들과 계약했었다.
작년에 공표된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러시아는 더 이상 말을 꺼낼 입장이 못 되었다. 러시아 수입곡물을 전쟁물자로 간주해 자치주가 수송을 보이콧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남은 미국 곡물은 마이너 업체들의 소유분 뿐이고 그나마 선물 시장에서 대부분이 팔려나간 상태다. 러시아의 식량위기 덕분에 곡물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선물 증권에는 두 배 이상의 프레미엄이 붙어버렸다.
가격을 따질 계제가 아닌 러시아로서는 그나마 구입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곡물을 러시아로 싣고 갈 방법이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선박들은 이미 선물시장에서 상사들이 장악한 상태였는데
이들은 러시아 보이콧을 선언하고 있었다.
용선시장이 자치주에 장악되었다는 의미였으니
코마로프로서는 아예 협상을 벌일 여지조차도 없었다.
미국에서 쓴 맛을 톡톡히 본 코마로프는 자체 선박과 곡물하치장, 가공시설 등의 일관 라인을 가진 미쓰비시, 미쓰이, 마루베니 등 일본의 곡물 메이저들에게 희망을 걸고 날아오는 길이었다.
베링 자치주에 반감을 지닌 섬나라들의 대표주자 일본에게 기대한 코마로프의 생각은 반만 맞아 들어갔다. 생각대로 일본은 전폭적 지원을 했고 확실히 운송수단까지 제공했다.
그러나 그들의 공급 능력은 미국의 마이너 곡물상 수준을 넘지 못하는 백만 톤 남짓이 고작이었다. 모자라는 물량 중 수백만 톤 정도는 호주, 남미의 메이저 분게 등을 통해 확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수송이 문제였다.
해상 수송로가 봉쇄된 상황에서 일본 메이저들처럼 일관 운송 라인을 갖춘 업체가 아닌 이상 러시아로 싣고 갈 방법이 없었다.
러시아로 전화를 요청하는 코마로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상대방이 전화에 나오자마자 분노로 폭발했다.
“대체 어떤 개자식이 베링 자치주를 건드린 거야!
그 자식을 찾아내.
그 자식한테 식량을 구해오라고 하란 말이야.”
농무성 차관이 전모를 파악한 것은 영문 모를 욕설을 5분도 넘게 얻어먹은 뒤였다.
주요 곡물 메이저들 뒤에는 중동국가들의 입김이 있었고
중동국가들과는 타협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외무성 장관을 수행해 파이잘과 만났던 농무성 차관의 보고는
예상을 뛰어넘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파이잘이 그를 방문한 러시아 외무성 장관을 몰아 세웠다고 했다.
“러시아는 무슨 이유로 베링 자치주를 위협하는가?
귀국은 베링 철도와 자치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은혜를 입지 않았는가?
은혜를 왜 원수로 갚는가?
신은 어리석고 경우 없는 자를 싫어하신다.
귀국에 한발이 덮친 이유를 알겠다. 우리 곡물을 팔아 달라고--?
베링 자치주에는 수십만의 무슬림 이민자가 있고
그 땅의 수장은 우리의 파티마다.
13억 무슬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존재다.
파티마의 적에게 곡물을 팔라고? 하-- 하앗!“
2개월 남짓 버티던 러시아는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현실로 다가오는 기아의 공포에 직면한 러시아는 베링 철도로 미주 지역 곡물을 조달하는 조건으로 조차계약 중단선언을 철회했다
베링 자치주에는 다시 봄날이 찾아왔다.
베링 사태가 마무리되면서 보조를 맞추어 사태 해결에 협력해왔던 남북간에는 1세기에 걸친 분단기간 중 가장 부드러운 우호 무드가 조성되었다. 그러한 우호관계는 베링 철도의 한반도 구간 건설협의로 표현되었다.
자치주와 남북한 3자간의 상호안전보장 조약은 간접적으로 맺은 남북간의 안전보장이었다. 조약에 싸인 하는 순간 사실상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나 진배없다는 사실을 당사자들은 물론 국민 모두가 자각하고 있었다.
2041년에 베링 철도를 평양을 경유해 부산까지 연결하는
논의가 진행되면서 통일협상 역시 시작되었다.
동구권 통일에서 일어났던 비참한 사태는 남북한의 통일 과정 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공단 개발계획을 앞당긴 베링 자치주가
100만개 이상의 일자리를 만들어 유민의 20% 이상을 흡수했기 때문이었다.
베링사태 덕분에 세계적 유명인사가 된 지형은
고생 탓인지 50대 인데도 반백이 되어버렸다.
나이보다 들어보이는 외모였지만
원로들에게는 여전히 아이로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자기도 환갑이라며 항의해봤자 돌아오는 건 꿀밤뿐이었다.
자치주의 창업 1세대 중 이제 3명만 남은 원로들은 90살이 넘었다.
그들이 나타나면 자치주 사람들은 어디서나
따뜻하면서도 정중한 예우로 환영했다.
늙어서도 변함없는 그들의 명랑성은
언제나 주위 사람들을 흐뭇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반백의 하 지형이 파파할멈 김 청자를 부축하고 다니며
때때로 구박받는 장면이 보도되면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동방의 파티마로 사랑 받는 그녀가 예언자를 모시고 다니는 것을 연상시키는
그 장면은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주었다.
자녀 교육의 귀감으로 그 사진을 구해 걸어놓는 집이 자치주 안에 점점 늘어갔다.
그러나 하 지형이 파이잘을 향한 사랑의 아픔을 평생 감추고 살았던 것은
아무도 몰랐다.
그녀가 죽은 후 세상에 알려진 일기는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자치주 탄생에 깔린 희생과 슬픈 사랑은
몽골리안 루트의 철도 이야기꾼들을 통해
관광객들에게 전해져 세상에 퍼져나갔다.
여자들은 지형의 연시를 들으면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
미안해, 파이잘, 죽는 게 끝은 아냐.
죽으면 몸은 사라지고 마음만 남아.
영이라고 부르지.
생애를 통해 쌓은 정을 그 영은 기억할까?
몸이 없으니 우린 아무 것도 못 하겠지.
시간이 멎은 세상에서 그냥 씨앗으로 잠잘 거야.
그런 씨앗으로라도 나란히 있으면 좋겠어.
그러다 어느 날 같이 싹을 틔우면 더 좋겠어.
나라니 떡잎을 올리면 너무 좋겠어.
잘 자, 파이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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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만세!
베링철도 만세!
정작가 만세!
하지형 만세!
(천국에서는 시집 장가 가는 일이 없다.)
천국에서도 이승의 기억을 가질 수 있을까,
지형이 파이잘을 알아 볼 수 있을까,
그래도 싹을 튀워라.
몸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질까,
기억이 없다면 자기 아이덴티티는?
이승의 자신이 저승의 천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랑가,
영혼이 존재한다면 기억도 담고 있을까...
농담같은 공상이지만,
클라우드 저장장치를 연상합니다.
그 저장장치는 이승에 있지만. ㅎㅎㅎ
누군들 알겠어요.
치매로도 기억을 다 날려버리는 인간인데...
자신을 맡기는 수 밖에.
그동안의 성원과 열독에 감사드립니다.
시력 보호를 위해 화면을 1.5배 정도 키워보는 방법은 어떨까 합니다.
@태윤 집에서는 27인치와 21인치 모니터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보거등요. 하얀 배경화면을 좀 눈이 덜 부신 색으로 조정해도
별 도움이 안되더군요.
@나도 백사 음, 제 설명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말한 "화면"은 모니터 Size가 아니라,
인터넷 화면 우측 상단에 있는 『페이지』 란을 클릭해
확대 배율을 150% 정도로 키우면 어떠냐는 뜻이었는데...
@태윤 보통 125%로 고정해 두고 있슴다 ㅎ
그동안 꼼꼼히 읽어 볼 시간은 없었지만,가슴이 쿵쾅쿵쾅 거릴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2041년 후에 한반도의 씨나리오가 궁금하기는 한데..이쯤해서 접어야?? 아뭏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