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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밟는 곳은 모두 주었노니
참고말씀: 창13:14-17; 15:5,18-21; 35:1,3; 37:7,9; 신23:5; 대상4:10; 시9:19; 12:5; 사60:1; 롬8:28
읽을말씀: 수1:1-4
주제말씀: 수1: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 위기가 곧 기회입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수1:1)
당시는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위기상황입니다. 어째서입니까? 모세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1절 상) 아시다시피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존재였습니까? 출애굽의 주역으로 광야 40년 동안을 그들과 함께 해 온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그 모세가 죽고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위기가 또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렸습니다. 어떤 문입니까? 오매불망 바라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기회의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2절)
우리의 위기는 하나님 안에서 무엇이 될 수 있습니까? 기회입니다. 어째서입니까?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의 위기를 기회로 바꿔주시고,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우리에게 당한 저주를 복으로 바꿔주시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신23:5 하) 우리의 한계를 새로운 역사의 장으로 능히 바꿔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위기 가운데 있습니까? 지금 한계상황에 다다랐습니까? 지금 생각지도 못한 고난 가운데에 놓여 있습니까? 그럴지라도 위기를 기회로 능히 바꿔주실 하나님께 구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한계를 통해 새 일을 시작해가실 하나님을 바라기 바랍니다.
* 지금은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수1:2)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맨 먼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일어나라고 입니다.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2절 중) 여기서 ‘일어나’(히, 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다, 공고하다, 착수하다’는 뜻으로, 어떤 목표의 성취를 위해 결연히 나섬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으로 일어나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특정 목표를 이루기 결연히 행동으로 옮길 것을 의미합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13:17) /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서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35:1) /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창35:3 상) /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사60:1 상)
하나님께 적용된 경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시9:19) /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놀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시12:5)
왜 일어날 것을 맨 먼저 명하셨습니까? 이는 모든 일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일어나야 다음의 일들이 진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어나지 않고도 이룰 수 있는 일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로 지금 일어나기 바랍니다.
누가 일어나야 합니까? 지도자 몇 사람만 일어나면 됩니까? 아닙니다. 모두가 다 함께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모두 일어나라고 명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2절 중)
그러므로 다 함께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일으켜주셔야 합니다. 일어났으면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 세워주어야 하고요. 먼저 일어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차례대로 일으켜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일어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떤 준비 말입니까? 뭐든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즉 그 자리에 계속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일을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있는 사람 말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주저앉아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일어나 있는 사람입니까?
* 달려가야 할 비전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수1:4)
일어났으면 다음으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그리 했던 것처럼, 달려가야 할 비전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그들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무엇부터 명확히 했습니까? 그들이 들어가서 차지해야 할 땅의 경계입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였습니까? 남으로는 아라비아 사막과 경계하고, 북으로는 레바논 산맥에 이르며, 동서로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지중해 연안에까지 이르는 지역이었습니다.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4절)
이는 언제부터 약속된 지경이었습니까? 아브라함 때부터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15) /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프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창15:18-21)
한편, 그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비전을 명확히 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알려주심으로써 입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3,4절)
마찬가지로 우리의 비전도 어떻게 명확히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것을 부지런히 귀 담아둠으로써 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호수아와 백성들처럼, 달려가야 할 비전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까? 일어났다면 이것부터 명확히 해 둘 수 있기 바랍니다.
* 그 비전은 언제나 맥시멈 형태로 주어집니다!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수1:4)
이스라엘 역사상 이 지경을 모두 확보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윗 왕 때에 근사치로 근접한 적이 최대일 뿐, 한 번도 그 지경을 모두 확보해 본적은 없습니다. 그나마 다윗이 확보했던 영토도 후대로 갈수록 조금씩 유린되어 갔고요.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언제나 맥시멈(maximum) 형태로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즉 최대치, 곧 이상적인 범위를 먼저 제시하시고 우리의 순종 여부와 정도에 따라 그 축소 여부를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비전은 이미 주어진 게 분명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3절 하) ‘주었노니’(히, 네탓티우)는 예언의 완료형이 사용되어서 하나님께서 이미 그 땅을 주신 것으로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비전도 언제나 맥시멈(maximum) 형태로 주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백성들에게 꿈과 이상을 먼저 보여주시며 그것을 향해 매진하도록 격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창37:7,9)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되 언제나 맥시멈(maximum) 형태로 주신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까? 즉 이상적인 범위를 먼저 제시하시고 우리의 순종 여부와 정도에 따라 지켜보고 계신다는 점을 알고 있느냔 말입니다.
* 부지런히 밟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수1:3)
그러나 이는 비전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입니까? 하나님께서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라고 조건을 다셨기 때문입니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3절 중) 참고로, ‘밟는’(히, 티드로크)은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곧 이제 계속 감당해야 할 일을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밟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 결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즉 순종하는 만큼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이미 허락하신 그것들을’ 얻기까지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까? 그것을 얻기까지 기도와 간구를 쉬지 않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일지라도 ‘일어나, 가서, 밟는’ 수고를 부지런히 하고 있느냔 말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약속받은 땅을 얻기 위해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녔듯이 말입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13:14~17)
물론 여기서 밟는다는 것은 단순히 땅을 밟고 돌아다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히브리어에서 ‘발’은 힘을 상징하기도 하므로(시110:1) 발바닥으로 밟는다는 것은 오히려 정복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 정복하고 차지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지경이 맥시멈까지 확장될 때까지 계속해서 넓혀가야 할 것이고요.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대상4:10 상)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비전이나 관련된 일들이 축소되지 않도록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상적 범위대로 실현될 수 있도록 날마다 부지런히 밟고 또 밟고 있느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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