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암리는 지금은 농촌이지만 예전에는 산림이 울창했던 곳으로, 조선 말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면서 형성된 부락이다. 1900년대 초 서울 종현(현 명동) 본당 관할이었던 의정부 지역은 구한말 박해를 피해 와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 구한말 우고리(양주시 광적면 우고리)와 신암리(양주시 남면 신암리)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신암리에 개성 본당 관할의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09년이었다. 이때 개성 본당의 주임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1866~1928, 루이)신부였고,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신암리로 와서 판공성사를 베풀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런데 개성과 신암리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신앙을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였다.

당시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1926년 대주교로 승품)는 신암리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최문식(崔文植, 1881~1952, 베드로) 신부가 초대 주임 신부가 되었다. 1931년 신암리는 다시 행주 본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1935년에는 양주군 덕정리에 본당이 생기고, 덕정리 성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46년 김피득(金彼得, 1904~1954, 베드로) 신부가 덕정리 본당의 주임 신부로 부임해 왔다. 김피득 신부는 덕정리 성당을 매각하고 의정부시 의정부동에 대지 1,625평을 매입하여 성당을 옮겼다. 이때부터 신암리 공소는 의정부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6.25때

구한말 박해를 피해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신앙의 뿌리가 된 신암리 신앙 공동체는 1909년 개성 본당 관할 공소로 설립된 후 1925년 3월 본당으로 승격돼 본격적인 지역 복음화의 길을 걸었다. 1930년 다시 공소로 환원된 후 지난 1959년부터 동두천 본당 공소로 편입돼 신앙의 명맥을 이어 오다가 2008년 9월 12일 준본당으로 승격하는 등 다난한 역사를 걸어왔다. 이곳이 고향인 이경훈 바르톨로메오 신부(상도동 본당 주임)가 공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은인들의 도움으로 성당 건물을 새로 건립하여 이곳 출신 순교자로 전해져 오는 박 다미아노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 본당과 준본당
법적 지위 면에서 본당은 ‘본당’과 ‘준본당’두 가지로 구별되는데. 본당은 주임 신부에게 사목이 맡겨진 개별 교회 내에 고정적으로 설정된 일정한 신자 공동체다. 반면에 준본당은 특별한 사정 때문에 아직 본당으로 설립되지는 않았으나 준본당의 주임 신부에게 사목이 맡겨진 신자 공동체로. 예를 들어 신자 수가 적거나 재정 자립도가 약하거나. 성당이 없거나 또는 구역 경계가 없는 외국인 성당 등의 경우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