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괴롭히던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통치자
| 크리스천투데이 : 2023.05.06 06:35
[김구원 칼럼]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통치자, 클레오파트라 이야기 1
알렉산더 후 사등분된 마케도니아
이집트 맡은 프톨레마이오스 장군
1세, 70만 권 보관 도서관 건설해
2세, 70인역 성경 그리스어로 번역
100여 년 전성기 후 권력다툼 쇠퇴
12세, 로마 위해 세금 올리다 퇴위
▲주전 1264년 건립된 고대 이집트 람세스 2세의 아부심벨 대신전(Abu Simbel Temple of Ramesses II). ⓒ위키 |
1. 클레오파트라의 가문, 프톨레마이오스 왕가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론에서 열병에 걸려 죽어갈 때, 네 명의 장군들이 그의 방에 모여 후계 문제를 논의했다. 네 명의 장군들은 제국은 누구에게 돌아가느냐고 질문했고, 이에 대한 알렉산더의 대답은 “가장 적합한 자에게”였다고 한다.
이 대화가 얼마나 역사적인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알렉산더가 후계자 문제를 명확히 정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죽자 제국은 그의 장군들에 의해 사분된다. 이 때 이집트를 맡아 다스리게 된 것이 프톨레마이오스(주전 323-285)이다. 처음에 그는 알렉산더 가문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알렉산더 대왕의 아들 알렉산더 4세(주전 323-309)의 총독으로 섬기다가, 주전 305년부터는 직접 이집트의 왕이 되어 300년 정도 지속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시작한다.
소테르(구원자)라는 별칭을 가진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독특한 어려움을 가졌다. 이전 이집트를 지배한 제국들(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제국들)은 본래 통치 거점이 있고 이집트를 자국 영토로 편입해 통치하였지만, 프톨레마이오스는 외국인 왕임에도 본토라 할 수 있는 통치 거점이 없었다. 그에게는 이집트가 전부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이집트인들에 의해 지지받지 못하면 돌아갈 ‘고향’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이집트인들의 왕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은 이집트 전통 의복을 입고 전통 제의를 수행하는 파라오의 모습으로 대중들을 만났다.
특히 고대 이집트의 전통을 따라 왕은 자신의 여동생이나 누나와 결혼했으며, 왕과 왕비의 신전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게 했다. 학자들은 이것을 ‘통치자 종교(the Ruler Cult)’라고 부른다. 즉 통치자를 신으로 섬기는 정치 체계이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실질적으로 왕과 여왕 2인 통치 체제였다. 물론 이것이 고대 이집트의 전통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신왕국 이집트에서 왕실 여인의 권한이 강했다는 점, 람세스 2세의 경우 아직 살아있을 때 자신과 아내 네페르타리를 위한 신전을 건설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형식적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이집트 전통을 따르려 했던 것 같다. 물론 그런 전통이 그리스인이었던 그들의 이집트 통치에 도움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초기 통치자들은 위대한 업적들을 남겼다. 예를 들어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집트 북부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70만 권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보관한 도서관을 건설했다.
▲당대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알렉산드리아 항구 도서관 상상도.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건립했다. ⓒ위키 |
70만 권이라는 수는 구텐베르크의 활자가 발견되기 전 유럽에서 제작된 책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수이다. 도서관 사서 캘리마쿠스(Callimachus)가 작성한 도서관 소장 목록만 120권 분량이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규모보다 더 혁신적인 것은 도서관의 공공성이었다. 과거 이집트 신전에 설치된 ‘도서관’은 비교(祕敎)의 비밀 서고에 가까웠다. 이집트 신전에서 일한 사서의 공식 명칭이 ‘비밀의 감독관(Overseer of secrets)’이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에 반해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일반에게 개방하였다. 이것은 지식은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그리스 문화가 영향을 끼친 덕분이다. 그리고 도서관의 일부로 박물관도 건설되었다. 박물관의 어원 ‘무세이온(museion)’은 본래 9명의 학예 여신들인 ‘뮤즈들의 집’을 의미하며, 그 이름대로 그것은 학예를 장려하는 인류 역사 최초의 국립 고등연구기관이었다.
이전까지 학문과 예술은 개인의 업적이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학문을 혼자 했다. 생물학, 물리학, 수학, 윤리학 등을 혼자 연구했다. 여러분이 점성가였다면 한두 명의 조수를 둘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연구는 혼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서는 여럿이 공동으로 연구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전국에서 학자들을 모아 함께 연구하도록 ‘박물관’을 지었다. 박물관 소속 학자들은 무료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이용하고, 집과 음식도 제공받았다. 그리고 여기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학자들이 나왔다.
이곳에서 유클리드가 <기하학>을 저술하였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 길이를 계산했다. 그는 유럽의 탐험가 콜롬버스보다 먼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지름까지 계산한 것이다. 히로필루스는 심장이 아니라 뇌가 지성을 담당하는 기관임을 밝혀낸다.
이처럼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과 박물관은 당시 지식의 발전소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네로 황제(주후 54-68)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은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당시 동전에 새겨진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Ptolemy II Philadelphus)의 두상. ⓒ위키 |
프톨레미마오스 1세를 이어 왕이 된 2세 필라델푸스(Ptolemy II Philadephus, 주전 285-246)도 국가를 잘 경영하였다. 그는 1세 소테르의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는 정책을 이어받았다.
특히 그는 구약 성서를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한 왕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번역된 그리스어 구약 성경은 칠십연역으로 알려졌으며, 그것은 초기 기독교에서 히브리어 성경보다 높은 권위를 가졌다.
하지만 초기 100여 년 간 전성기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쇠퇴의 길을 걷는다. 가장 큰 이유는 왕가 내 권력다툼이다. 형제들이 형제들을 죽이는 일이 일상이었다.
이런 왕가 내부 혼란은 국내외 반란을 조장하였다. 주전 205-186년에는 이집트인들이 테베를 수도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로부터 독립적 국가를 세웠고, 셀레우코스 왕국이 그때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지배 하에 있었던 시리아-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았으며, 주전 170년 알렉산드리아까지 함락하려 했다.
로마의 중재로 간신히 독립을 유지했지만,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로마 영향권 아래 들어간다. 로마의 원로원이 이집트의 지배자를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 네오스 디오니소스(아울레테스, Ptolemy XII Auletes)의 두상. ⓒ위키 |
이런 가운데 왕이 된 것이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제위 주전 80-58)다. 그는 왕조의 창시자 알렉산더 대왕처럼 스스로를 ‘디오니시우스’라고 불렀지만, 백성들은 그를 ‘호로자식’, 즉 부적절하게 태어난 아들이라고 부르며 그의 왕위 정당성을 의심했다. 혹자들은 그를 아울레테스, 즉 ‘피리 부는 자’로 부르며 조롱했다. 피리 연주자는 나라일은 돌보지 않고 놀기만 좋아한다는 의미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가 왕이 되었을 때,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와 로마의 관계는 미묘했다. 당시 로마 군대는 세계를 호령했지만, 로마인들은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그리스인들에게 그다지 존경받지 못했다.
이집트의 그리스인들은 로마인들이 무식하고 교양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가 자랑할 것은 강한 군대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경제력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힘 세고 돈 많다 해서 문화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늘날 로마를 관광하는 사람들은 로마를 문화의 도시라 생각하기 쉽지만, 지금 남아있는 건축물과 조각 등은 모두 후대에 지어진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로마는 알렉산드리아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로마는 면적도 작고, 집들도 진흙 돌로 된 것들이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처럼 석고나 대리석으로 지어진 집에 살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들은 기본적으로 로마인들을 무시했다.
▲주전 300년대 알렉산더 사후 4등분된 제국 중 이집트를 차지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Ptolemy I Soter)의 왕국(푸른색). ⓒ위키 |
문제는 백성들이 로마를 미워해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로마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왕위에 계속 머물기 위해서는 로마 원로원의 승인과 로마 군대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이 시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오랜 내부적 다툼으로 대내외적 통제력을 상당 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이집트 원주민들은 독립을 원했고,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는 틈만 나면 침략하려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게 매우 중요한 동맹이었다.
한편 로마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를 유지시키는 것이 국익에 부합했다. 그 이유는 이집트가 ‘로마의 빵 바구니’였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 수입하는 곡물은 로마 경제에 필수적 요소였다. 당시 이집트 곡물의 중요성은 오늘날 세계 경제에서 석유나 천연가스가 가지는 영향력에 비교할 수 있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이집트에 강력한 왕권이 유지되어 로마로 곡물이 안정되게 공급되기를 원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에게 곡물을 제공함으로써 왕권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들이 그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경멸했다는 것이다. 문학·예술·학문에 많은 자부심을 가진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왕이 로마인들에게 굽신거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다 반로마 정서에 불을 붙인 사건이 발생한다. 주전 60년, 로마에서 크라수스·폼페이우스·카이사르에 의한 제1차 삼두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새로운 로마 정부와 협상을 한다. 자신의 왕위를 보장해 주면, 더 많은 공물을 로마에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재원 마련을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세금을 올렸다. 이것이 민중의 분노를 일으켰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집트에서 쫒겨나 로마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고 큰 딸 베르니케(Berenice IV, 제위 58-55)가 왕이 된다. 아버지가 로마로 도망가고 큰 딸 베르니케가 왕이 되었을 때, 나머지 가족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왕가의 이전 역사에서는 왕이 된 형제가 나머지 가족들을 죽이는 것이 전통처럼 되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베르니케는 2인 통치 전통에 따라 사촌과 결혼하지만, 곧 그를 죽이고 오랜 친구와 재혼한다. 후에 여왕이 될 클레오파트라의 동명 누이도 기록에서 사라진다. 아마 제거되었을 것이다. 당시 7살이었던 클레오파트라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어린 나이가 그녀를 살렸을 가능성이 있다.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이집트 제30왕조 아피스(Apis)의 여신상. ⓒ위키 |
다음 글에서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삶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그 이야기 전에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친다.
주전 76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온 가족을 데리고 멤피스에 여행한 일이 있다. 이것은 그의 14살짜리 아들(Pasherienptah III)를 대사제로 임명하는 의식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 일을 마친 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가족들과 함께 멤피스 주변에 있던 아피스 황소의 무덤을 방문한다.
그때 이집트인 사제가 성각 문자의 내용을 설명해가며 왕의 가족들을 안내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그 모습에 크게 감명받은 듯 하다. 그후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서 유일하게 이집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아버지가 로마로 망명한 후에도 그녀는 여느 10대처럼 궁에서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전통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러 언어도 습득했다. 또한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고 이집트의 위대한 역사에 대한 자부심도 가졌을 것이다. 당시 로마 여인들이 학교에 가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후에 로마 남성들이 글과 문학에 박식한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하게 된 이유를 조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김구원 교수
단국대 고대문명연구소 연구교수
저서 통독주석 <사무엘상>과 <사무엘하>, <김구원 교수의 구약 꿀팁>, <쉬운 구약 개론(공저, 이상 이상 홍성사)>, <가장 아름다운 노래> 등
역서 <하나님 나라의 서막>, <이스라엘의 종교>,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고대 근동 역사>, <고대 근동 문학 선집(공역, 이상 CLC)>, <구약 성서로 철학하기>,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 <출애굽 게임(이상 홍성사)>, <책의 민족(교양인)> 등
신구약 중간기, 이집트와 로마에서 일어난 일들
| 크리스천투데이 : 2023.05.26 06:35
[김구원 칼럼]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통치자, 클레오파트라 이야기 2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를 만나다
절세미인, 팜므파탈 등 가짜 뉴스
승자 의한 역사 기록, 양념 이야기
▲영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중 한 장면. 클레오파트라는 ‘절세미인’으로 곧잘 묘사된다. ⓒ위키 |
지난 글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로마로 망명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후 프톨레마이오스는 카이사르를 설득하여 군대를 이끌고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오게 된다.
장녀 베르니케는 아버지의 귀환에 반대하였지만, 로마 군대에게 패전하고 사망한다. 이집트 왕위에 복귀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더 이상 ‘피리 부는 자’가 아니었다. 로마 망령 경험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아스완 근처 필래 섬에 당시 이집트인들에게 크게 사랑받던 여신 이시스를 위한 신전도 건설했다. 그리고 죽을 때 유언장에서 그는 전통에 따라 두 명의 통치자를 임명한다.
그 유언장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Cleopatra VII)와 그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결혼하여 이집트를 통치할 것이다.” 왕과 왕비가 함께 다스리는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관행이지만, 문제는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이복 남동생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역사를 말할 때, 그녀에 관한 전설들과 역사적 사실을 구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다음 내용은 분명한 가짜 뉴스다. 로마인들은 그녀를 선량한 로마 남자를 유혹한 음녀, 팜므파탈, 헤픈 여자 등으로 폄하하는데, 이것은 분명 사실과 다르다.
이런 가짜 뉴스가 아직까지 널리 유포된 것은 역사가 승자에 의해 기록되기 때문이다. 이집트에게 승리한 로마인들이 그들의 무용담에 클레오파트라 이야기를 양념으로 섞어 이야기한 것들이 아직까지 회자된다.
▲글래스고 대학의 훈테리안 박물관이 소장한 클레오파트라 동전. 매부리코에 미인상이 아니다. |
실제 역사에서 클레오파트라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고, 일부일처였으며, 여러 남자와 돌아가며 잠자리하는 여자도 아니었다. 다음 동전은 클레오파트라의 초상을 담고 있는데, 매부리코에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 그녀의 흉상도 발견되었다. 그녀는 빨간 머리에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유혹녀의 얼굴이 아니다.
그녀의 인생은 카이사르를 만나기 전, 카이사르와 함께, 카이사르 이후 등 세 기간으로 나뉜다.
이집트어·그리스어 했던 명석한 여왕
왕권 위해 로마 제국 지지 중요 이해
포티누스 반란 터지자 시리아로 망명
1. 카이사르를 만나기 전
클레오파트라는 매우 명석한 여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멤피스 근처 사카라를 방문했을 때 아피스 황소의 무덤을 보고 이집트어를 배우기 시작해, 유일하게 이집트어를 할 수 있는 그리스 왕이 되었다.
이집트어를 마스터한 것이 그녀의 언어에 대한 재능의 결과일 수 있지만, 외국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이집트 원주민의 지지를 얻는 것이 중요함을 인식했던 것 같다. 초기 통치에서 테베 남쪽 헤르몬티스(Hermonthis, 현 아르만트)로 가서 부키스 황소 축제에 참가했는데, 이때 이집트 사제들이 같은 배에 탄 클레오파트라를 보고 이집트어를 할 수 있는 그리스 여왕이 그들과 함께 배를 타고 이집트 축제에 간다는 사실에 매우 흥분했다고 한다.
▲베를린 박물관이 소장한 클레오파트라 흉상. 빨간 머리에 평범한 얼굴이다. |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어를 할 수 있는 ‘이집트’ 파라오로서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또한 그녀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보고 왕권을 유지하는 일에 로마의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했다. 이것은 이후 그녀의 정치적 행보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클레오파트라가 여왕이 됐을 때 나이가 대략 17세였고,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10살에 불과했다. 때문에 포티누스(Pothinus)가 이들과 함께 통치하여 로마처럼 3명이 함께 협력하여 통치하는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 왕과 여왕의 연소함을 생각할 때, 환관, 정치가, 수사가였던 포티누스가 실질적 권한을 행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던 중 클레오파트라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포티누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함께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안 좋은 여론을 형성했던 것이다.
포티누스는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에게 클레오파트라가 ‘친로마주의자’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물론 클레오파트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로마를 매우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들은 언제나 로마에 대한 경멸감을 가졌고, 자신의 지배자가 로마의 꼭두각시라는 사실을 용납하지 못했다. 포티누스의 선동으로 발생한 반란으로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로 망명하게 된다.
카이사르에 17세 융단 쌓여 배달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 복권해
알렉산드리아 전쟁 승리로 회복
2. 카이사르와 함께한 기간
로마가 이 상황을 파악하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당시 로마는 내분 중이었는데,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피해 이집트로 도망하는 중이었다.
폼페이우스가 먼저 이집트에 도착한다. 포티누스는 폼페이우스를 영접하는 척 하면서 그와 그의 가족들을 모두 죽인다.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도착하자, 포티누스는 그에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때 카이사르가 포티누스에게 대노한다. 구약 성서의 다윗처럼, 카이사르는 그의 적을 존중하는 신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집트에 혼란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폼페이누스를 죽인 포티누스를 벌하지 않는다. 이집트 곡물의 안정적 공급이 로마에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한편 클레오파트라도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그와 대면하여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기로 결심한다. 포티누스와 그의 남동생이 자신에 대해 나쁜 말을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녀는 몰래 알렉산드리아에 들어가 궁으로 잠입한다. 엘리자베스 테일라 주연의 영화 <클레오파트라>(1963)를 보면, 그녀는 융단에 쌓여 카이사르 앞에 배달된다. 오래된 영화이지만 역사적 고증이 잘 된 영화이다.
실제로 클레오파트라는 융단에 쌓여 궁으로 들어갔다. 카이사르가 “이것이 무엇이냐?” 물으니 신하들이 “선물입니다”라고 대답했는데, 막상 그 융단 안에는 17살짜리 클레오파트라가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회자되는 매우 유명한 장면이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어떤 관계였는가? 연인이었던 것 같다. 카이사르는 교육을 받은 중년 신사였는데,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지성과 강인함에 반했던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는 많은 언어를 했을 뿐 아니라 헤로도투스의 <역사> 등 고전 문서들을 읽어 박식했다.
반면 카이사르가 경험한 로마의 여인들은 집에만 있고 학교에도 가지 않아 글도 깨우치지 못했다.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중년 남자가 클레오파트라와 같이 이국적 외모에 지적이고 강인한 여자를 보고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가 다시 그의 남동생과 함께 이집트를 다스릴 수 있도록 허락했다. 즉 이전 지위로 클레오파트라를 복권시킨 것이다. 하지만 포티누스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이에 반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을 ‘알렉산드리아 전쟁(주전 47년)’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카이사르가 승리하고 포티누스는 처형을 당했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도망하다 나일 강에 빠져 죽었다. 이로서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유일한 지배자가 된다.
▲테베 남쪽에 위치한 헤르몬티스 신전의 1857년 모습. 그후 무분별한 발굴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와 여행
아들 낳자 카이사리온이라 지어
로마 입성시 화려한 볼거리 유혹
전통에 따라 클레오파트라는 남자 통치자를 곁에 두어야 했다. 그래서 다른 남동생과 결혼한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된다.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그리고 그는 기록에서 곧 사라진다.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때부터 클레오파트라의 남편은 카이사르가 된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는 그를 데리고 나일 강을 따라 이집트 여행을 떠난다. 이것은 카이사르의 마음을 사기 위해 계산된 여행이었다. 카이사르는 교육받은 신사이지만, 피라미드, 신전, 탑 등의 이집트 문명을 본 적 없는 로마 ‘촌놈’이었다.
그는 탈라메고스(Thalamegos ‘houseboat’)라는 거대한 배를 타고 이집트의 다양한 건축물과 예술들을 보고는 큰 감동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또 이집트 사람들이 클레오파트라를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하고, 곁에선 자신도 숭배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아마 이때 카이사르는 통치자가 일반 백성과 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른다. 물론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죽게 될 것이다.
여행 중 그들은 테베 남쪽에 위치한 헤르몬티스에 방문한다.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임신 중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 아이가 카이사르의 것이라 주장하며, 만약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곳에 그의 출생을 기념하는 작은 신전(맘미시 mammisi)을 짓겠다고 약속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여신이기 때문에, 그의 몸에 태어난 아이도 자동적으로 신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카이사리온, 즉 ‘작은 카이사르’라고 짓는다. 오늘날 카이사리온 신전은 파괴됐지만, 지금 남아 있는 돌에 클레오파트라의 카르투쉬 이름이 아직까지 새겨져 있다.
카이사리온이 정말 카이사르의 아이인지는 논쟁이 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카이사리온이라는 이름을 쓰도록 허락한 것 같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갈 때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을 데려가, 그들에게 아내와 아들의 지위를 부여한다.
이집트인들 관점에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합법적 남편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한 번에 한 명의 남편만을 두었다. 당시 카이사르가 유일한 남자요 남편이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이미 좋은 로마인 아내를 두고 있던 카이사르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로마로 데려왔을 때, 로마인들은 이를 좋게 보지 않았다.
이런 안 좋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클레오파트라는 대중에게 큰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에 입성할 때, 화려한 수행단이 그녀를 호위했다. 당시 이시스 신으로 분장한 이집트 여왕의 모습은 로마인들에게 경외감을 불러 일으켰던 것 같다.
그후 카이사르는 그녀를 로마 교외 자신의 빌라에서 살게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아내로 인정받고 카이사리온도 그의 후계자로 인정받은 것 같다.
▲덴데라 신전의 클레오파트라(하토르 분장)와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XV 카이사리온. |
원로원, 카이사르 신격화 우려해
카이사르 死, 클레오파트라 위기
이집트로 도망, 아들 왕으로 세워
카이사르도 대중들에게 큰 볼거리를 제공한다. 알렉산드리아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 행진을 한다. 그 때 그가 전쟁에서 취한 다양한 전리품들을 보고 로마인들은 매우 신기해했다. 이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데, 기린을 처음 본 로마인들은 그것을 ‘표범 가죽을 가진 낙타’라고 표현했다.
이 개선 행진의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는 클레오파트라의 여동생 아르시노에(Arsinoe)가 쇠사슬에 매여 행진한 것이다. 아르시노에는 포티누스와 협력해 클레오파트라를 죽이려 했고 클레오파트라도 그녀를 싫어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족이 쇠사슬에 매여 다른 노예나 동물 들과 함께 행진하는 모습에 클레오파트라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족은 300년 동안 이집트를 다스린 가문인데, 그 가문의 공주가 그런 모습으로 조롱당하는 것이 마냥 기분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카이사르는 큰 위기를 맞는다. 그는 이시스 신으로 묘사된 클레오파트라의 신상을 로마 신전에 세웠는데, 이것을 본 로마인들이 크게 분노하였다.
이집트 여인을 로마 신전에서 여신으로 섬기는 것은 민중의 정서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로마인 아내가 있지 않는가?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신으로 생각하는 카이사르가 점점 자신도 신격화할 것이라는 염려도 생겨났다.
로마 원로회는 카이사르가 왕이 될까 걱정했다. 사람들은 그가 너무 이집트 왕처럼 되어간다고, 너무 그리스인처럼 되어간다고 걱정했고, 정치인들도 그가 공화정을 포기할까 걱정했다.
이런 카이사르에 대한 백성들과 정치인들의 분노는 결국 카이사를 죽음으로 이끈다.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크(Plutarch)에 따르면, 어떤 예언가가 카이사르에게 3월 15일에는 원로원에 가지 말라 예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그 예언을 무시하고 그 날에 원로원에 갔다가 칼에 찔려 암살당한다. 그 때가 주전 44년이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클레오파트라를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한다. 남편이 암살당한 지금 로마에 아들 하나와 함께 홀로 사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물론 로마 여자들은 클레오파트라에게 매우 많은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녀의 화장술이나 패션 등이 유행했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그런 그녀의 인기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녀는 도망해야 한다. 이집트로 아들을 데리고 도망한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세트(Seth)에게 남편을 잃은 여신 이시스의 처지와 자신을 동일시했을 것이다. 실제로 평소 이시스처럼 화장하고 치장한 그녀는 이제 이시스처럼 지켜야 할 어린 아이도 가졌다. 그래서 이집트로 도망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집트의 여왕으로 복귀하고, 아들 카이사리온을 왕으로 세운다. 덴데라 신전의 벽에 이시스-하토르 여신의 모습을 한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아들 카이사리온의 모습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카이사리온은 프톨레마이오스 15세가 된다. <계속>
고대 이집트 문명,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로마에게로
| 크리스천투데이 : 2023.06.14 06:37
[김구원 칼럼]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통치자, 클레오파트라 이야기 3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와 투쟁
안토니우스, 이집트에 지원 요청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와 임신
안토니우스와는 이름 다르게 지어
▲클레오파트라의 잔치,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1743-1744,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 |
3. 카이사르 사후
카이사르는 유언장에 카이사리온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정하지 않았다. 그의 조카 옥타비아누스(주전 63- 주후 14)가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된다.
하지만 곧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진다. 안토니우스는 권력 다툼에서 이기기 위해 이집트의 재정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집트의 곡물은 로마 경제의 엔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타르수스(Tarsus, 현 터키 남부 도시, 바울의 출생지)에서 만나자고 긴급 요청한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 화려한 배를 타고 느리게 타르수스로 건너간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 배는 떠다니는 궁전이었다. 보좌, 테이블, 그릇 등은 모두 금으로 되었고 노 젓는 사람들도 모두 천사처럼 분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렇게 화려한 배를 타고 나타난다.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는 그런 배를 전에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선상 연회에 초대한다. 그들은 화려한 가구에 앉아 황금 접시, 포크 등을 사용하며 파티를 즐긴다. 그리고 진주를 포도주에 담가 녹여 그것을 마셨다고 한다.
실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화려한 파티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선상 연회에 참여한 로마 손님들에게 원하는 물건을 가져가도록 허락했을 정도로, 클레오파트라는 그 연회를 통해 자신의 부와 영광을 과시하기 원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화려함에 매료당한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보다는 거칠고 교육받지 못한 로마 군인이다. 그리고 욕망도 가졌다. 재미있는 것은 클레오파트라에게도 그런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돌아가서 ‘흉내 낼 수 없는 간(inimitable Livers·肝)’이라 불리는 비밀 연회를 즐겼다. 형식상으로는 그리스 주신 디오니소스를 위한 종교 모임이지만, 그곳에서 그들은 친구들과 방탕한 파티를 즐겼다.
곧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쌍둥이를 임신한다. 카이사르의 아이를 임신했을 당시, 그녀는 아이의 이름을 카이사리온 즉 ‘작은 카이사르’로 명명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쌍둥이를 안토니우스를 따라 이름 짓지 않는다. 남자 아이는 알렉산더 헬리오스(태양)으로, 여자 아이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달)로 이름 짓는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사랑했을지 모르지만, 그가 영웅이 아닌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사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클레오파트라, 알렉산더의 꿈 좇아
안토니우스, 버렸다가 다시 호출
동방 원정 승리, 로마 이집트 경계
옥타비아누스, 이집트 침공 나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진짜 영웅인 알렉산더 대왕을 기억하기 원했다. 그녀의 자녀들이 알렉산더 대왕의 꿈을 이어 가길 원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마케도니아 왕들의 후예 아닌가? 그녀의 자녀들이 로마인 아버지를 닮기를 원치 않았다.
또 권력을 위해 형제 죽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선왕들도 닮기를 원치 않았다. 그녀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을 닮기 원했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로마로 돌아가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과 결혼한다. 물론 이것은 정략 결혼이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한 번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세 명의 자녀를 기르고 있는 여자가 다시 한 번 남편이라고 믿었던 남자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여전히 이집트의 왕이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큰 힘이 있다. 3년 후, 안토니우스가 동방 원정을 나온다. 그리고 이 전쟁을 위한 재정 지원을 얻기 위해 3년 전 버린 클레오파트라에게 다시 연락한다.
“우리, 이야기 좀 할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마음 같았으면 거절하겠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왕권이 로마의 지지에 크게 의존함을 잘 알고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에서 안토니우스를 만나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다시 당할 바보가 아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와 일종의 협상을 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전쟁 재원을 공급하면 안토니우스는 그녀와 결혼해야 하며, 전쟁에 승리하면 그가 얻은 땅의 대부분을 클레오파트라에게 양도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클레오파트라는 시나이 반도, 유다, 키프루스 섬, 아라비아 반도를 얻게 될 것이다.
▲사형수들에게 독약을 실험하는 클레오파트라, 알렉상드르 카바넬, 1887, 벨기에 안트베르펜 왕립 순수 미술관. |
반면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남편이지만 이집트의 왕은 되지 못할 것이고, 여전히 카이사리온이 이집트의 왕으로 남을 것이다. 이쯤 되면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갑을 관계는 완전히 역전된 듯 하다.
이렇게 시작된 동방 원정에서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고전한다. 그때 클레오파트라는 군대를 보내 그를 돕는다. 안토니우스의 로마인 아내 옥타비아도 전쟁을 돕겠다고 왔으나, 안토니우스는 그녀와 이혼하고 그녀를 로마로 돌려보낸다(주전 32년). 이로서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독점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안토니우스 군대는 동방 원정에서 승리하고 그것을 기념하는 축제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열었다. 그때 클레오파트라는 이시스로 분장하고, 그녀의 자녀들은 다양한 지역의 왕들의 모습으로 출연했다.
그 자리에서 안토니우스는 약속한 땅들을 클레오파트라 일가에게 공식적으로 양도하였다. 장남 카이사리온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를 다스리고, 알렉산더 헬리오스는 아르메니아와 폰투스 지방을 얻고,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리비아를 받고,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클레오포타르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태어난 세 번째 아들)는 페니키아와 북부 시리아를 얻게 됐다.
로마,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
악티움 전투 패배, 이집트 돌아가
안토니우스 넘기라는 제안 거절해
생포됐지만 독사 통해 목숨 끊어
이로서 클레오파트라의 자녀들은 땅을 받아, 미래의 안정을 보장받았다. 이 모든 것은 어머니 클레오파트라가 각본을 쓰고 직접 감독하여 모두 현실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때부터 로마는 안토니우스가 아닌 클레오파트라를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를 홀려서 마땅히 로마에게 돌아가야 할 땅과 영광을 가로챘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가 이 모든 상황을 끝내기 위한 전쟁을 선포한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주전 31년 9월 2일 악티움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이집트 연합 군대가 패배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선상에서 전쟁을 지켜보다, 패색이 짙어지자 이집트로 돌아간다. 안토니우스도 침몰하는 배를 몰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하고 클레오파트라와 협상한다. 안토니우스를 넘겨주면 휴전하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이것을 거부한다.
왜 그랬을까? 지금까지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정부에 한 번도 저항한 적이 없다. 이집트를 버릴 정도로 안토니우스를 사랑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왜 옥타비아누스의 제안을 거절했을까?
여하튼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데리고 도시 안으로 진입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살을 준비한다. 그녀는 절대 포로로 살지 않을 것이다. 앞서 그녀의 여동생 아르시누에가 쇠사슬에 매여 조롱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에게 자신이 죽었다는 가짜 뉴스를 전한다. 그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클레오파트라가 그 소식을 듣고 그를 데려오고,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품에서 죽는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생포해 로마로 데려가기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독사를 몰래 들여와 자신의 몸종들과 함께 죽는다. 이 소식을 들은 옥타비아누스는 매우 분노했지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이집트를 로마인들의 제국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고대 이집트 문명이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김구원 박사. ⓒ크투 DB |
김구원 교수
단국대 고대문명연구소 연구교수
저서 통독주석 <사무엘상>과 <사무엘하>, <김구원 교수의 구약 꿀팁>, <쉬운 구약 개론(공저, 이상 이상 홍성사)>, <가장 아름다운 노래> 등
역서 <하나님 나라의 서막>, <이스라엘의 종교>,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고대 근동 역사>, <고대 근동 문학 선집(공역, 이상 CLC)>, <구약 성서로 철학하기>,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 <출애굽 게임(이상 홍성사)>, <책의 민족(교양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