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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閔宗植, 1861.3~1917.6.26) 선생은 철종 12년(1861) 3월 경기도 여주에서 민영상(閔泳商)과 기계(杞溪) 유(兪)씨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종조 명문가에 해당하는 여흥(驪興)이다. 증조부인 민치병(閔致秉)이 명성황후의 생부인 민치록(閔致祿)과는 재당질간인 것으로 확인된다. 부친은 명성황후의 조카뻘로 문과에 급제하고 충청도 관찰사를 비롯하여 이조·호조·예조·형조·공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친 광무황제의 신임을 받은 관료였다.
선생 역시 약관 20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런데 선생은 “체구가 비대하고 얼굴이 크며 성긴 구레나룻”을 하고 있어서 문신이면서도 동시에 무인의 풍채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이조 참판을 역임하는 등 종2품에까지 올라 탄탄대로의 벼슬길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1895년 선생의 인생행로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일어났다.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배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국가의 운명을 바꿔놓은 치욕의 사건이면서, 선생 개인으로서도 묵과할 수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리고, 어려서 살던 충청도 정산으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낙향 후 1년 만인 1896년에 모친을, 1899년에는 부인과 사별하였으며, 이어서 1901년에는 부친마저 떠나 보내고 말았다. 선생은 1904년 한산 이씨 이은식(李殷植)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새로운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였다. 한산 이씨 부인은 홍주의병의 동지인 이용규(李容珪)의 이복동생이며, 안동관찰사를 역임한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의 종제이기도 하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선생은 편안한 생활을 거부하고 항일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처남인 이용규와 이남규는 의병의 동지가 되었다. 홍주 을미의병의 총수였던 김복한(金福漢)과 이설(李偰)이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기 위하여 상경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은 하인을 데리고 상경하였다. 선생은 서울 전동의 여인숙에 투숙하면서 한편으로는 이설에게 상소문의 초안을 의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영익과 민영휘 등 여흥 민씨의 당대 고관들을 만나 상소의 일을 의논하였다. 하지만 그들로부터 상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니 그만 두라는 권유만 받았다. 게다가 이설과 김복한이 피체, 구금되고 이설이 작성한 상소문마저 압수당하자 선생은 충남 정산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낙향하여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마침 홍주 을미의병의 주도자로 홍주향교 전교를 맡고 있던 안병찬(安炳瓚)이 홍성·청양 일대의 재지 유생들과 함께 의병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생은 의병의 총수 자리에 올랐다. 의병장에 오른 선생은 가산을 팔아 군자금 2천 원을 마련하여 군수품으로 제공하였다. 후일 피체되었을 때, 선생은 의병을 일으킨 동기와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즉 을사늑약이 늑결되어 위로는 임금을 괴롭게 하고 아래로는 만민이 편안하지 못하여 국가의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 선생은 5적과 이등박문(伊藤博文)·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를 죽여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상소문을 작성한 이설과 김복한이 피체되어 뜻을 이루지 못함에 따라, 선생은 낙향하여 의병을 일으켜 국권회복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 것이다.
선생은 의진의 근거지를 자신이 거주하는 정산군 천장리로 삼고 의진의 편제를 정비하였다. 이때의 주요 인물로는 안병찬·채광묵·박창로·이용규·홍순대·박윤식·정재호·이만직·성재한 등이 있다. 이어서 통문을 발표하고 각국의 공사에게 청원문을 보냈다. 그 중에서 안병찬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통문만이 현재 전해진다. 주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의진 편성을 마치고 선생은 1906년 3월 15일(음력 2월 21일) 광수장터(현, 예산군 광시면)에서 봉기의 첫 깃발을 들었다. 이때 참석한 의병은 600여명에 달했다. 우선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리고 이튿날 바로 홍주로 향하여 홍주의 동문 밖 하우령(일명 하고개)에 진을 쳤다. 선생은 홍주성 안에 살고 있는 일본인을 잡아오면 머리 하나에 1천냥을 상금으로 주겠다고 하면서 홍주성 공격을 명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저항에 오히려 대장소마저 위태롭게 되어 다시 마을 밖으로 나와 진을 쳤다. 다음날 이세영(李世永)이 의진에 당도하였다. 홍주 을미의병에 참여하였다가 군대에 들어가 계급이 부위에까지 오른 그의 참여는 의진으로서는 큰 힘이 되었다.
선생은 회의를 개최한 후 다시 광수장터에서 군세를 바로잡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공주관아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선두부대가 묵방(일명 먹고개, 현재 청양군 비봉면 중묵리)에 이르렀을 때 공주병력과 경병 300여명이 청양읍에서 휴식 중이라는 척후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의병은 진로를 화성으로 옮겨 합천 일대에 진을 쳤다. 이날 관군과 일본군은 오후 6시 먹고개에 도착하여 탐문하고 10시경 합천 인근으로 쳐들어와 잠복하였다. 다음날(3월 17일) 오전 5시 의병진은 이들로부터 기습을 받아 안병찬과 박창로 등 23명이 피체되었다. 안병찬은 이남규 등의 노력으로 선생이 홍산에서 재기하기 4일전인 5월 5일(음력 4월 12일) 석방되어 의진의 참모사로 다시 종군하였다.
합천전투 이후 선생은 각지를 잠행하다가 전주의 친족인 민진양(閔晉錫) 집에서 지내던 중, 조상수(趙尙洙)·이용규·이세영·이상구(李相龜)·이봉학(李鳳學) 등과 재기를 협의하였다. 그리고 “원근에서 바람처럼 모여든 60여 인과 함께” 5월 9일(음력 4월 16일) 충청남도 홍산군 지티동의 주막에서 거의하고 대장에 추대되었던 것이다. 홍순대의 해암사록에는, “산과 들을 헤매면서 왜놈의 눈을 피했던 의병들이 4월 19일 홍산군 내산면 지치리에 다시 모였다.”라고 패산했던 의병들이 선생의 재기 소식을 듣고 다시 홍산에 모여들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때 선생은 선봉에 박영두(朴永斗), 중군장에 정재호(鄭在鎬), 후군장에 정해두(鄭海斗)를 임명하였다.
지티 봉기를 가능하게 하는데 처남인 이용규의 역할이 컸다. 이용규는 합천싸움에서 패한 뒤 전주·진안·용담·장수·무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았으며, 서천과 인근의 남포·오천 등지에서도 의병 모집 활동과 함께 식량을 준비하였다.
5월 13일(음력 4월 20일) 선생은 의병을 이끌고 서천읍을 공격하였다. 관아에 돌입한 의병부대는 서천군수 이종석(李鍾奭)을 감금하고 양총 등 무기를 획득하였다. 이때 선생은 군수의 인장을 이용하여 의병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다음날 비인을 함락하고 남포에 가는 도중에 일본인 한 명을 체포하였으며, 남포에 들어가 읍성을 공격하였다. 선생이 지휘하는 의병부대의 공격에 관군은 요새인 남포읍성을 지키며 방어하였고, 나중에는 공주의 관군까지 합세하여 반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일간의 전투 끝에 선생의 의병부대는 승리를 거두었다. 남포군수 서상희(徐相喜)는 잡아 감금하고, 관군 31명을 의병진에 귀순시키고 군량을 확보하였다. 이때 남포의 유생 유준근이 유회군(儒會軍) 33명을 거느리고 와 합세함에 그를 유병장(儒兵將)으로 삼았다. 그 후 남포부근의 용동에서 일본인 2명을 체포하여 1명을 총살시키고, 이어서 광천에서도 일본인 6명을 체포하였다. 이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결성에서 하루를 지냈다.
선생이 이끈 의병부대가 홍주성을 공격한 것은 홍주 장날인 5월 19일(음력 4월 26일)이었다. 1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부대는 홍주의 삼신당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기고, 구식 화포 2문을 선두에 내세워 홍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의병부대의 우세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한 일본군과 관군은 북문을 통해 덕산방면으로 도주하였다. 드디어 홍주성이 의병들에 의하여 탈환된 것이다. 의병의 홍주성 입성 상황을 홍순대의 해암사록에서 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선생의 의병부대가 홍주성을 탈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보균·신현두·이식·안항식·김상덕·유호근 등 명망 있는 지방 유생들이 의병을 초모하여 차례로 입성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은 총 멘 자 600여 명, 창 가진 자 300여 명, 유회군 300여 명 등 모두 1,200여 명에 달했다.
홍주성을 점령한 뒤 선생은 의진을 새롭게 편제하였다. 의병 지휘부는 충남의 서북부 지역 인사가 중심이 되었다. 특히 선생이 거주하는 청양 출신의 인사가 많았다. 정산면의 박윤식·이식, 화성면의 안병찬·안병림 형제, 안항식·채광묵, 임한주·임승주 형제, 장평면의 이세영·김덕진, 한태석·한훈 형제 등이 그들이다. 이들 외에도 예산의 이남규·남규진, 보령의 유준근·신보균·신현두, 부여의 이용규·이상두, 해미의 박두표, 온양의 곽한일 등이 있다. 선생은 각 군수에게 훈령을 내려 양식과 군기의 징발과 징병의 일을 알선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 해미 군수만이 포군 10명과 약간의 군자를 보냈다.
홍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선생은 광무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리고자 하였음이 최근에 밝혀졌다. 즉 선생은 상주문을 작성하여 이민학(李敏學)에게 주어 광무황제에게 올리게 하였던 것이다. 상주문의 내용은 을사5적과 이등박문의 처단 등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거기에다 거병(擧兵)한 이유를 들면서 의병을 일으킨 뜻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민학이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홍주성이 일본군 수중에 떨어짐으로써 이 계획은 중지되고 말았다.
홍주성에서 패주한 일본군은 공주병력을 지원 받아 20일부터 홍주성을 둘러싸고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선생의 의병부대는 이를 격퇴하였다. 21일은 수원 헌병부대로부터 파견된 헌병과 경찰 혼성부대를 패주시키자 22일에는 서울 경무고문부의 배원(排原)경시와 조선 경무관 및 그 부하 20명이 증파되어 왔다. 이들은 24일 공주 진위대에서 파견한 57명의 관군과 함께 의병을 공격하였다. 27일 동원(桐原)경시는 토방(土坊)경부와 한국인 경찰 송총순에게 순사 5명을 딸려 서문 밖을 정찰하도록 시켰으나 이들은 오히려 의병에게 체포되었다. 선생은 29일 밤에 선봉장에 명하여 체포한 일본인 3명과 일진회원 2명을 총살하였다.
이와 같이 몇 차례의 일본경찰과 헌병대의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이등박문은 한국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파견을 명령하였다. 사령관 장곡천의 명령을 받은 일본군 보병 제60연대의 대대장 전중(田中)소좌는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를 거느리고 30일 홍주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우세한 화력과 전투경험이 많은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전중소좌의 지시에 따라 30일 밤 11시에 동문에서 약 500미터 지점의 숲 속에 잠복하였으며, 31일 새벽 2시 반 기마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시켰다. 이를 신호로 하여 일본 보병과 헌병대, 경찰대가 기관총을 쏘며 성문 안으로 침입하였다. 또한 2중대 1소대와 4중대 1소대는 각각 갈매지 남쪽고지와 교동 서쪽 장애물 도로 입구에서 잠복하여 의병부대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31일 새벽 4시경 홍주성은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기마병을 시켜 의병을 추격 사살케 하였다. 이때 양민들 역시 다수가 희생되었다. 이와 같이 의병과 양민 수백 명을 학살한 일본군은 홍주지역에 일본인을 이주시킬 것을 계획하였으니, 《대한매일신보》1906년 6월 15일자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이때 선생은 홍주성을 탈출하게 되는데, 피체된 후 진술한 공초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위에서 홍주성 전투의 치열함과 그 와중에 선생이 남문과 서문 사이의 담을 넘어 탈출한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의병장의 인장과 모든 기록도 버리고 탈출하기 바빴던 선생의 모습은 홍주성 전투의 처절한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측이 10여명 사살된 반면 의병 측은 참모장 채광묵 부자와 운량관 성재평과 전태진·서기환·전경호를 비롯하여 여기에 학살된 양민의 수를 합하면 300여명에 이른다. 붙잡힌 의병 수도 145명에 달한다. 그 중에 김상덕 등 78명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일본군 사령부의 심문을 받은 뒤 윤석봉 등 70명은 7월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유준근·안항식·이상구·신현두·이식·남규진·최상집·문석환 등 9의사는 대마도로 유배되어 감금생활을 하였다. 이세영은 6월 붙잡힌 뒤 겨울에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고 황주의 철도에 유배되었다.
홍주성전투에서 패퇴한 선생은 성을 빠져 나와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런 정황을 보여주는 것이 《만세보》1906년 6월 30일자 보도이다.
즉, 정산일대에서 선생이 의병을 다시 모으고 있는 사실을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선생은 예산의 한곡(지금의 대술면 상항리)에 있는 이남규의 집에서 재기를 계획하였다. 처남인 이남규의 도움을 받아 11월 20일 예산을 공격하여 활동 근거지를 확보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헌병 10여명과 지방병 40여명, 그리고 일진회원 수십 명의 습격을 받아 곽한일·박윤식·이석락 등이 피체되었다. 이남규·이충구 부자도 함께 피체되어 온갖 악형을 당하였다. 선생은 다행히 미리 공주로 피신하여 화를 면했으나, 결국 11월 20일 붙잡히고 말았다.
붙잡힌 뒤 선생은 12월 7일과 25일에 모두 4차례의 심문을 받았는데 일본 경찰은 계속하여 궁중과의 관련을 추궁하였다. 이에 대하여 선생은 사실무근이라고 강하게 부인하였다. 이때 심문한 일본 경찰이 “완미(頑迷)ㆍ과묵(寡黙)ㆍ침착(沈着)한 태도로 진술하면서도 타인에 누를 끼치는 것을 피하였다”고 선생의 진술 태도를 알려주고 있어 비록 옥에 갇혀 있는 형편이지만 의병장으로서 의연하고 책임 있는 태도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1907년 7월 3일 교수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선생의 교수형 선고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이는 선생의 사형선고에 대하여 세인의 관심이 컸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으로 감형되어 진도에 유배되었으며 12월에는 융희황제의 즉위를 맞아 특사로 석방되었다.
풀려난 후 선생은 1911년 영주 영릉에 있는 수 만평의 토지를 개간할 계획을 세우다가 처남인 이용규의 만류로 그만 두었다. 선생은 1917년 6월 26일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나 총독부에서 “폭도대장”(暴徒大將)이라 하여 선영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3개월 만에야 간신히 여주군 강천면 가야리의 선영에 묻혔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