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8대 국회의원 총선거] 1. 노무현, 은퇴후 귀향해 내꼬랑 치우는 할배 대통령 노무현은 이 시대의 아이콘이다. 자신의 진퇴를 분명히 할 줄 아는 새로운 모델이다. 60대 초반인 그의 퇴임 이후 활동이 성공한 전직 대통령의 새로운 표상을 만들어 갈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퇴임 전 그는 활발하게 정치 사회활동을 계속할 것처럼 전망됐지만, 퇴임 이후 낙향해 소하천 환경정화 활동과 시골 촌로같은 은퇴자의 유유자적한 모습이 오히려 신선한 감동을 주면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덕분에 진영읍이 포함된 경남 김해을 지역구에서 통합민주당 최철국 의원이 재선되기도 했다.
2. 이회창, 21세기의 70대 총재 노무현에게 2번째 대선 패배를 당한 이회창은 분패 후 5년간 절치부심을 거쳐 지난해 대선 15%대 득표율과 충청도 지역주의를 선동해 4.9 총선에서 18석을 건졌다. 하지만 그에게서 미래의 희망을 찾기는 쉽지 않다. 국민에 대한 배려와 거리가 먼 그의 저돌적인 이미지는 독선적으로 비친다. 21세기에 총재라니...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자택을 약속도 안하고 야밤에 만나겠다고 쳐들어 가던 대선 때의 행태는 자기가 좋아한다고 밀어부치는 어리광에 불과해 보인다는 지적도 있었다. 4년간 그의 진일보한 정치행태와 70대의 경륜을 기대해 본다.
3. 강기갑과 권영길, 동남권 진보 아지트 집권 보수당 사무총장을 이긴 진보진영의 농민운동가인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의 재선이 단연 화제였다. 서부경남의 통합전 사천군 출신으로 삼천포 수협장 경력과의 소지역주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겠지만, 앞장서서 농업개방 정책에 맞서온 투사에 대한 사천시민들의 생존권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국민의 먹거리 관련 정책에 대한 개혁, 종북주의로 비판받는 민노당의 진로에 대한 혁신안은 물론, 진보신당 등 진보진영의 재편에 대한 그의 맹활약을 주목하고 있다. 중부경남의 창원을에서 재선한 권영길 의원도 관심거리이다. 인근의 거제시, 울산광역시와 연결되는 진보벨트는 정치권의 소금 역할을 담당할 '동남권 빨치산 아지트'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4. 남해 하동, 아름다운 연륙교와 남해대교 사천시와 '창선-삼천포 연륙교' 5개의 아름다운 교량으로 연결된 남해군과, 남해대교로 이어진 하동군 선거구는 격전지로 분류돼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 곳은 한나라당 대표를 역임한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이 5선을 기록한 곳이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대통령후보 경선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승리를 이끌었고, 대선 중앙선대위원장으로 이상득 최시중 김덕룡 이재오 등과 '6인회의' 멤버였던 그가 3월 16일 공천탈락하자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었다.
박 의원은 6년전 그가 공천해 재선시킨 같은 이동면 출신의 하영제 전 남해군수와 공천경쟁을 벌여야 했다. 6선 후에는 국회의장이 되겠다는 그를 노욕으로 몰아붙이는 분위기 속에, 하 전 군수는 갑자기 산림청장에 기용돼 실세인 박 의원이 개입했다는 여론에 휩싸인다. 보류지역으로 분류된 다음 결국 하동군 악양면 출신인 여상규 변호사가 공천을 거머쥔다. 어부지리였다.
5. 박익주와 김욱태, 20년 전의 주연들 20년전 박 의원도 비슷한 상황에서 등장했다. 4.26 총선을 앞두고 남해출신 2명이 치열한 싸움을 이어갔다. 민주정의당 박익주 의원(재선, 남면)이 4대 관세청장을 거친 김욱태 전 국민은행장의 거센 도전 속에, 취임 직후였던 노태우 대통령은 부산고등검찰청장이던 박희태를 차출한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다.
박익주는 전두환의 민정당 공천으로 재선해 건설교통 상임위원장을 역임한 장성출신이다. 김욱태는 화려한 경력과 함께 지역출신 청소년의 취업에 많은 혜택을 준 은인이라는 여론 속에 꿈을 접는 듯 했지만, 14대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통일국민당 후보로 나서 민자당 대변인으로 유명해진 박희태와 맞서지만 49,378표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20,466표에 그치며 퇴장한다. '붙을려면 4년전에 바로 붙지'라는 말도 있었지만 1988년에는 정보기관 등 국가권력이 노무현 때와는 다를 때였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6. 여상규, 어부지리한 지역주의 60대 자산가 여상규 변호사의 공천으로 '남해군 하동면민'이라는 자조감에 빠져 있던 일부 하동인들의 왜곡 속에 여론은 급속히 지역대결로 치닫는다. 민주당을 비롯한 하동 출신의 군소 후보들이 잇달아 사퇴한다. 유일한 남해출신 후보가 된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이 최대의 기회를 맞았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경남도민일보와 YTN 등의 여론조사에서 9% 이상 앞선다는 보도는 오히려 김두관의 발목을 잡았다. 박희태는 낙천후 10일간 술만 마셨다는 보도 속에 중앙당 선대위원장을 맡아 지원유세에 나서고, '힘있는 여당의원의 지역발전 적임자론'과 전국 1위 투표율을 기록한 하동지역의 몰표 속에 김두관은 4년 전 여당이던 열린우리당 후보로 벌인 박 의원과의 접전 때보다 낮아진 득표율로 낙선한다.
[2부 급성장하는 김두관] 1. 열정의 30대 정치권에서 김두관은 누구인가. 1958년생인 그는 박희태가 등장하는 1988년에 31살 민중의 당 후보로 맞서 2830표를 기록한다. 고현면 이어리 이장을 역임한 이후 중고생 위주의 회원제 도서대여점인 '책사랑 나눔터'를 경영하다가 1990년 지역신문인 남해신문 창간을 추진한다.
지역유지 12명에게서 200만원씩 출자를 받아 창간추진위 편집국장으로 준비호를 내던 그는 개혁적인 논조에 반대하는 유지들에 의해 해고되자, 남해정론을 창간한다. 하지만 이듬해 창간호에는 발행인이 다른 사람으로 나온다. 자금부족으로 창간 발행인을 양보하며 투자를 유치한 결과였다. 당시 34살이던 그는 이 정도로 유연했다.
2. 최연소 무소속 재선 2년간 경영에 전념한 그는 1년 먼저 창간했지만 휴간을 거듭하던 남해신문의 강명규 편집국장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으며 남해신문 통합을 이룬다. 이후 2년간의 흑자경영을 이뤄내며 지역에서 성공한 CEO로서 경영능력과 통합 추진력을 인정받는다.
그 동안의 여러 선거에 개입하지 않고 언론경영인으로 자리잡은 그는 1995년 초대 민선군수에 오른다. 상대후보는 민주자유당 강태선(남면)으로 통영시장 등을 거친 정통 관료였지만, 지역활동이 없었던데다가 가족의 서민적이지 않은 행태 등이 겹치면서 놀랍고도 극적인 역전 승리를 안으며 38살 군수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고, 3년 후에도 무소속으로 재선됐다.
3. 기자실 폐쇄와 개혁정책 취임 당시 지방일간지 7곳은 민자당 후보측이 관용집기를 선거사무실에 가져왔다는 등의 보도를 내보내 김두관의 당선에 일정한 기여를 했으나, 지역언론의 폐해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군청 기자실을 없애 한달간 200여건의 비판기사와 맞섰다. 2007년 노무현의 언론선진화방안 파장이 12년 전에 이미 남해군에서 진행된 것이다.
김두관은 일련의 개혁정책을 안정적으로 추진해 '두과니가 군수하니 좋다'는 여론 속에 김종현 전 도의원을 누르고 무소속 재선군수가 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남해중 20년 선배인 박희태가 심모원려로 김두관을 키운다는 분석도 나올 정도였다. 신한국당 3선의원이던 그가 현역군수보다 객관적으로 밀리는 후보를 공천한 것을 빗댄 말이었다. 3년전 지방선거 과정에서 군수는 김두관을 찍어도, 도의원은 자신을 찍어달라던 이를, 지역에 다 알려진 파렴치한 경력을 고려하지 않고 공천한 것에 대한 지역민들의 배신감으로 인한 반발이었다.
4. 하영제 ; 박희태의 희망과 불안한 결합 잇따른 군수 선거 패배에 따른 박희태의 초조감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김두관은 3선 도전을 포기한다. 화장 우선의 장묘법은 섬지역에서 강한 반발에 부딛히는 등 그의 3선도전은 무모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절치부심하던 박희태는 김혁규 도지사와 함께 하영제를 군수후보로 발탁한다. 그는 박희태와 같은 부산의 경남고를 나와 서울대 농대를 거쳐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내무부와 대통령실 요직을 거친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감사에서 책상서랍속 봉투가 적발돼 좌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혁규 경남도지사에게 불려온 그는 상당기간 무보직 상태로 머물다가 고향과 가까운 진주부시장으로 부임해 본격적인 군수출마계획에 착수한다. 당시 향우사회와 남해에서는 공직자로 더 성장하기를 바라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출마가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5. 정현태 ; 김두관의 꿈과 높아지는 장벽 하영제가 정치적인 꿈이 크다는 분석도 많았지만, 진주고와 서울대 출신으로 남해신문 기획실장과 편집국장을 거쳐 16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13,822표를 얻었던 정현태 남해인터넷뉴스 발행인을 꺾기 위해서는 대안이 없다는 분석이었다. 4선의 박희태는 하영제 군수를 재선시키며 고향 단체장에 대한 한을 풀었지만 결국 그로 인해 6선의 꿈을 날리게 된다.
김두관은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로 성장한 노무현을 통해 경남도지사 선거에 나선다. 한나라당 김혁규의 3선 고지에 제물이 되었지만, 그는 이를 통해 집권한 노무현 정부의 초대 행정자치부장관에 오른다. 남해군수 후보로는 정현태가 무소속으로 나서 9,995표로 한나라당 하영제의 18,121표에 대패한다.
[3부 김두관의 시련] 1. 박희태의 견제 17대 총선을 앞두고 67살 4선 야당의원으로 용퇴론과 지역구 이전론이 나오는 가운데 위기에 몰린 박희태는 급성장하는 김두관이 부담스러워 견제에 나선다. 시당 현판을 떼내는 과격 시위와 평택 미군기지에 난입한 반미시위대 사건 등을 핑계로 한나라당은 행자부장관 해임결의안을 통과시키며, 골프장에서 "시골 이장이던 촌놈"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던 박희태는 김두관의 발목을 잡는다.
건곤일척을 겨룬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김두관은 26,747표를 얻는데 그친다. 34,106표를 얻으며 5선에 성공해 국회부의장이 된 박희태가 완승을 거두는 듯 했다. 노무현은 낙선한 김두관을 대통령 정무특보로 배려한다.
2. 집권당 전당대회 3등 최고위원으로 부상 2006년 2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서 김두관은 당의장 경선에 나서 3위로 최고위원에 오르며 절정의 인기를 구가한다. 그는 "대통령과 당을 지키겠다"며 예수처럼 두 팔을 벌리고 울부짖어 대의원들을 감동시켰다. 4년전 도지사 선거에서 208,641표에 그친 그를 920,706표로 대패시킨 김혁규 의원을 4위로 주저 앉히며, 정동영 김근태에 이은 값진 성적을 거둔 명승부였다.
하지만 그는 독특한 색깔을 부각시키지 못하고 정동영 당의장의 기병대식 이벤트 행보에 묻혀간다. 참여정치실천연구회, 자치분권전국연대 등의 조직적 지원속에 안정적인 리더십을 구축하지 못하면서, 유시민 의원 등 개혁국민정당 출신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 김근태의 개혁진영과 결합하지도 못하는 등 정치적 성장이 정체된다.
3. 경남도지사 재도전과 중대한 실착 이후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던 그는 3개월만에 5.31지방선거에 다시 나선다. 거듭된 출마에 대한 부정적인 조언에도 불구하고 적임자가 없다는 이유로 경남도지사 후보로 나선 그는, 김태호 지사의 준혁신도시 논란을 거치며 서부경남 지역에서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국에서 갑자기 모여들어 동질감이 부족한 참모들 속에서 전략기획 기능의 마비속에 참모조직의 내분을 거치며, 막판에 정동영 당의장 사퇴를 요구하는 패착을 두게 된다. 선거 3일 전에 주포를 아군 후방으로 돌리는 전형적인 패장 진영의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호남정당으로 전락한 당시 민주당과의 통합을 주장하는 중앙지도부에 대한 배신감에 대한 김두관의 선전포고는 일부 지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 중도파와 개혁진영의 허탈감을 더하는 중대한 과오라는 평가속에, 지방선거 참패를 책임지고 일괄사퇴하는 정동영과 함께 휩쓸려 내려갔다. 이후 김근태 최고위원이 의장 승계를 거부하고 2월 전대 결과가 부정되면서, 새로 등장한 비상대책위원회의 지도부에서도 밀려나게 된다.
4. 민부정책연구원과 대통령후보 경선 도전 김두관은 쉬지 않았다. 재충전이 필요하다는 우려 속에 그는 2007년 대통령 선거에 주목한다. 민부정책연구원을 만들어 정책개발에 전념하고, 정치권의 이합집산 속에 민생탐방 강행군에 나선다.
이즈음 비슷한 개혁이미지의 유시민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나서며 대권도전을 준비한다. 이해찬 의원은 5선 경력을 바탕으로 국무총리로, 한명숙 의원도 환경부와 여성부 장관 경력을 바탕으로 국무총리로 승승장구한다. 손학규도 한나라당을 나와 3개월 동안 민생대장정을 거치며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한다.
김두관은 군웅할거의 다자구도에서 1차 예비경선을 통과하지 못하고 탈락한다. 정동영 손학규 이해찬 유시민 한명숙 5인이 주인공이 되었다. 개혁 3인방이 이해찬으로 후보를 단일화하자, 추미애 신기남 등 탈락자들과 함께 위장경선 의혹에 따른 동정론이 일기도 했다. 결국 정동영이 후보로 나섰지만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 이인제 민주당 후보와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이명박에 큰 표 차이로 지고 말았다.
5. 이명박과 박근혜의 사투와 남해 이상수를 누르고 2002년 새천년민주당 경선을 통과한 김민석 서울시장 후보는 1,496,754표에 그쳐 1,819,057표를 얻은 이명박에 패배한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직중 청계천 복원공사와 버스 교통체계 개선 등의 성과를 내 인지도를 올렸으며, 퇴임후 북한 핵실험 등을 기점으로 2006년 가을부터 박근혜를 제치고 지지율 1위를 달린다.
차떼기당 이미지에 탄핵역풍을 뚫고 한나라당을 121석의 거대한 제1야당으로 부활시킨 박근혜였지만, 거센 바람을 몰고온 이명박에게 몰려가는 의원들을 무력하게 떠나보내며 정권교체가 예고되는 당의 후보자리를 내주고 만다.
이 과정에서 박희태는 박근혜의 배신감 속에 이명박 편에 선 것이 빌미가 돼, 총선 공천에서 친박계 심사위원들의 물귀신 작전으로 김무성과 함께 막판에 탈락한 것이다.
김무성은 남해출신인 고 최치환 5선의원의 사위로 친박계 좌장으로 불리며, 무소속으로 부산 남구을에서 4선에 올라 주목을 받고 있다. 한나라당 후보는 이회창 총재 비서실 실장 때 부실장이던 정태윤 전 대선 사이버본부장으로, 남해출신이라는 점에다가 경남고와 라이벌 의식이 강한 부산고 출신이라는 악연으로 주변의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4부 김두관의 미래] 1.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김두관은 51살이다. 5선에 성공한 충청북도의 자유선진당 이용희 국회부의장, 이명박 대통령의 형으로 6선에 성공한 경북 포항남,울릉군의 이상득 부의장과 비교하면 앞으로 20여년의 정치활동이 가능하다. 평군수명이 더 길어지고 노령화사회가 진행된다면 30년도 넘게 정치 사회활동이 가능한 것이다. 길게 보고 실력을 키울 필요가 제기되는 시점이다.
통합민주당 깃발로 부산 사하을에서 재선한 조경태와 김해을에서 재선한 최철국 의원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경남고와 사울대 법학과 출신으로 행정고시를 거쳐 경남도청 문화관광국장을 지낸 최철국은 노무현의 고향을 포함한 지역구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당당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김해시장으로 3선을 기록하고 경남도지사 후보경선에 나섰던 60대의 한나라당 송은복과의 복수혈전에서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나서 재선에 성공했다.
조경태는 3번의 도전을 거치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하지역에만 집중하며 자력갱생했다. 지역의 현안인 지하철 1호선 연장사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단신에 마른 체형을 가진 부산대 공학박사로, 부산광역시 사하구의 절반을 지역구로 하는 조경태는, 개성이 뚜렷한 시골 두 지역을 포괄해야 하는 김두관과 다른 조건이다. 그는 42살이며, 20대 후반부터 낙선을 거치면서도 공부를 계속했다.
2. 남해 하동을 아우르는 지도자의 길 남해는 섬이다. 하동군과 34년전 다리로 연결됐고, 연륙교로 사천시와 이어진 독특한 정서를 가진 곳이다. 전국 230여곳의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유일하게 2개 이상의 지역신문이 유지되고 있을 정도로 애향심이 강하다.
"5~6대 이전 선조 때는 모두 한양 4대문 안에 살던 가문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거칠고 약간은 독선적이며 다양한 사고방식이 존재한다는 분석도 있다. 30여년 전에는 13만여명까지 살았을 정도이지만, 지금은 5만여명이 산다. 하동군과 인구차이는 1000명 이내이다.
10개 읍면이 다르고 40여개 국민학교 졸업생들의 정서가 다르다. 남해라는 말로 대외적으로는 단결하지만, 들어가 보면 초교의 마을별 동기생들도 결코 하나가 되기 어려운 복잡한 내면들을 안고 있다. 이는 45만여명이 나와 있는 객지의 향우사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묶어내는 일을 그동안 박희태가 해왔다. 그래서 20년 집권이 가능했다. 지금도 그를 아까워 하는 마음들이 남아 있다. 언제 6선 의원을 키워 국회의장을 만들 수 있겠느냐는...
박희태는 하동초등학교 총동창회 명예회장이었다. "섬놈이지만 똑똑하면 찍어준다"는 것이 그동안 하동인들의 육지근성이었다. 하동출신 국회의원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 것은 박희태와 남해인들이다. 하동인들이 소외감을 느끼도록 만든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 봐야 한다. 얼마나 거들먹거렸으면 재경하동군향우회에서 조기안 전 울산광역시 부시장을 공천해달라고 한나라당에 추천할 정도였겠는가.
우선 박희태 의원이 참모와 측근들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왜 용퇴론이 퍼져 나갔으며, 이를 제대로 보고받았는지, 대책을 깊이 고민하게 조언했는지, 효율적으로 대안을 만들어 나갔는지, 본인과 참모조직을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하영제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돈으로 또는 다른 것으로 한방에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 누구인지, 또는 무엇 때문이었는지 찾아내서 개선하지 못한다면 박희태는 대통령 정치특보든 국무총리든 마지막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3. 김두관의 길 먼저 남해 하동 지역에서 주민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권한다. 중국연수 같은 귀족적인 대권수업을 연상시키는 생활 말고, 4년간 유권자들과 부대끼며 정서상 일체감을 만들어 가야 한다.
박희태의 경남고 후배로 서울대 법대를 수석졸업하고 서울에서 지방법원과 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법무법인 한백의 대표변호사로 100억대의 자산가인 서울정서의 여상규 당선자와는 다른, 서민적인 풍모로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활로를 찾아야 할 것이다. 노무현에게서 제대로 배워야 할 대목이다.
또한 경상대학교 대학원 진학을 권한다. 지역에 꼭 필요하고 본인이 전공하고 싶은 분야를 정해 영어와 전공과목을 공부해 가을에 시험을 보기 바란다. 열심히 공부하면 4년 안에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도 2학기까지는 마칠 수 있다.
다음 총선 이전까지 변화하는 김두관을 보여줄 때, 아니 진정으로 노력하는 인간 김두관을 남해는 물론 하동군민들도 알아줄 때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래야 국회의원은 물론 대선 후보로서도 전국의 여론주도층이 무시할 수 없는 참 일꾼, 큰 인물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김두관의 이념과 노선은 많이 알려져 있다. 이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실력이 있음을, 전문적인 참모조직이 함께 하고 있음을 공인받는 일만 남아 있다. 물론 그 출발은 남해 하동에서 차근차근 시작해야 할 것이다. |
출처: 정론직필 원문보기 글쓴이: 폴리저널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