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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 본 문 : 디모데전서 4장 6절 - 16절 (신약 339쪽)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 하도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11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아멘!
+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 인사합시다. /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내 안에 계신 주님이 / 당신 안에 계신 주님께 / 문안 인사드립니다.
오늘은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라!” 는 제목으로 “영성훈련” 에 대해서,
말씀을 선포하므로, 함께 영적 무장을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한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자기 제자들에게 의미 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하루 동안 피아노를 치지 아니하면 내가 알고, 사흘을 치지 아니하면,
전문가들이 알고, 일주일을 치지 아니하면 내 팬들이 안다!“ 이처럼 역사상 위대한,
예술가들은 어느 날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피나는 노력과 훈련의 결과입니다.
세계 각국의 최고의 축구선수들이 펼치는 세계월드컵축구경기는 세계인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열광하는 지구촌의 잔치입니다. 한 나라의 축구대표선수 23명 중,
한 명이 되는 것, 그 23명 중에서도 11명의 주전이 되어 스타팅 멤버가 된다는 것은,
축구선수로서 영광 중의 영광입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세계인의 박수를 받을 만큼,
뛰어난 활약을 펼치는 축구 대표선수가 된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요.
축구뿐만 아니라, 온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역사상 위대한 스포츠맨이 되는 것도,
어느 날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타고난 소질도,
있었겠지만, 선수 자신의 피나는 노력과 훈련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신앙생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 하나님 나라를 향한 경주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삶을 빛내기 위해서,
강하고 담대한 영적 무장을 위한, 영성훈련이 있는 신앙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영성’ 은 무엇입니까? 말씀과 삶의 조화로운 모습, 영향력 있는 신앙생활,
이를 두고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원래 영성이란 “삶의 조화를 이룬 사람,
누군가에게 영적 영향력 있는 사람 누구 누구의 정신으로 살아간다.” 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느끼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영광스런 단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목표와, 받기 원하는 최고의 찬사는 영성을 가진,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경건한 사람, 영성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삶을 우리는 ‘영성훈련’ 이라고 말합니다. 이 영성훈련은,
고된 훈련이거나 지루한 여행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행복한 발걸음입니다.
우리는 “영성, 영성훈련” 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듣고 삽니다만, 사실은 성경에는,
“영성, 영성훈련” 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영성훈련이라는 말에 가장 근접한 말씀이,
오늘 본문 7절 말씀에 나오는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는 말씀입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 여기서 “연습하라.” 라는 말은 원어에,
“귐나조” 라는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영어에 ‘귐나지움’ 또는 ‘짐나지움’ 은,
‘체육관’ ‘운동장’ 이라는 뜻인데, “연습하라” 는 ‘귐나조’ 에서 나온 말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학교 교과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이 체육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헬라의 청소년들은 이 체육관과 운동장에서 달리기와 씨름 등으로,
잘 단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도 적절한 운동,
적당한 휴식, 식생활 조절이나 체중관리 등으로 자신의 신체를 관리하는 것은,
청지기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육체적 단련이나 연습이 성경적으로 정당한,
것이라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특별히 청교도들은 그들이 어떤 운동이나,
오락을 하려고 할 때,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서,
그들이 그 일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결정했습니다.
첫째, 그 운동이 우리 몸의 건강을 도와줄 수 있는가?
둘째, 그리스도인의 건덕상 해를 끼치지는 않는가?
셋째, 이 운동이나 오락이 나를 지배하는가? 아니면 내가 그것들을 이용하는가?
예를 들면, 중요한 일을 할 때, 쉽게 그 운동이나 오락을 떠날 수 있는가?
운동이나 오락의 종이 되어 가정으로 돌아갈 시간을 잃어버린다거나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조차 놓쳐 버린다면, 그 운동이나 오락은 정당한 것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넷째, 주님이 지금 오신다면, 주님께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이 활동을 기뻐하실까?
다섯째, 이 오락이나 운동을 하는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인가?
즉 운동을 해도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헌신하기 위한,
숭고한 목표를 가지고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건강학자들의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현대인들의 최대 관심사가 예뻐지는,
미용과 건강이랍니다. 미용과 건강에 좋다고 하면, 지렁이도 잡아먹고,
굼벵이도 잡아먹고, 뱀도 서슴없이 잡아먹는 세상, 뭐든 먹어 치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체의 건강을 위한 연습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헌신하는 것이 될 때에,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연습보다도 더 중요한 연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에 이르는 연습, 즉 주님이 제일인 영성훈련입니다.
오늘 본문 7절, 8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아멘!
이 말씀을 의역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사라지는 육체를 위해서도 여러분이,
모든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며 수고하시는데, 사라지지 아니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신앙과 인격을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투자하고 계십니까?“
육체의 연습은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성이 없습니다.
아무리 공을 잘 차는 축구선수라고 해도 죽은 후에까지 공을 차지는 못합니다.
야구선수가 아무리 홈런을 잘 쳐도, 죽은 후에까지 홈런을 날리지는 못합니다.
여러분! 육체는 조금 약하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 몸을 부활시키는 그 날,
우리의 몸은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건강과 안식과 평안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한 내생의 약속과 축복이 되는, 보다 중요하고 보다 더 필요한,
훈련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성훈련입니다. 과일나무의 열매는 분명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가 열매를 맺도록 가꾸는 일은 농부의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성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영성을 위해서,
자신을 훈련하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지런히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의 영성이 강해집니다.
부지런히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영성이 강해집니다.
열심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말씀중심의 영성이 생깁니다.
부지런히 전도하며, 교회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영성이 생깁니다.
영적인 성장은 요술이나 마술이 아닙니다. 하루아침 기도하고 나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요술방망이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영성훈련을 통한,
경건의 연습이 있어야, 건강한 영적 신앙생활의 체질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찬송은 임재입니다. 찬송을 멀리하면 강팍한 마음이 좀처럼 열리지 않습니다.
기도는 권능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게을리 하면 신령한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등한히 하면 경건생활의 변화가 없습니다.
은사를 무시하면 무력해지고, 은혜를 외면하면 은혜 밖에서 살게 되며,
성령을 거역하면 결국 버림받고 말게 됩니다. 교회출석을 게을리 하고 세상일이나,
사람과의 약속을 따라가면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머물러 살 수 있겠습니까?
동창회모임, 계모임, 건강을 위한 모임, 자녀를 위한 모임, 세상 명예를 위한 모임 등,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을 보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요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는 축복받는 자리에는 나오지 못함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적인 것을 얻기 위하여 경건의 생활을 내어 던집니다.
소돔성의 롯의 처가 세상 것 때문에, 경건에 이르는 생명의 길은 가볍게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영성훈련의 목표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영성신학자들은 영성훈련의 목표를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존재양식에서 하나님의,
존재양식으로, 인간의 행동양식에서 하나님의 행동양식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라구요.
이를 두고 오늘 본문 9절과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 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즉, 우리의 시선, 우리 삶의 목표와 소망을 주님께 두는 것이 영성훈련의 목표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적인 관심이 쇠퇴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에 대한 관심이나 기도에 대한 목마른 관심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소망이 진정 하나님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자 할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소망을 오직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에, 관심이 세상으로만 집중되고 있습니다.
돈! 땅! 아파트! 차! 가족! 강아지! 고양이,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대치하기 시작할 때, 그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지배하고, 그것들이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영적 식욕과 영적 관심은 쇠퇴하고 압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아멘! (야고보서 1: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우리 생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목마름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목마름이 여러분의 관심사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목마름이 영적인 사람은 영적 사람이요, 그 목마름이 육적인 사람은 육적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훈련 시켜야 할 영성훈련의 영역이 무엇입니까? 영성훈련의 영역을,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 영성훈련의 첫째 영역은 말, 언어생활입니다.
언어는 언제나 그 사람자체의 모든 것을 대변해 줍니다.
“공부를 잘 안하는 아들보고 성적 좀 올리라 충고를 하는데, 채소가계 주인은,
쑥쑥 올려라. 점쟁이는 점점 올려라. 한의사는 한방에 올려라. 성형외과 의사는,
몰라보게 올려라. 구두닦이 아저씨는 반짝반짝 올려라. 자동차 판매원은 차차 올려라.
백화점 주인은 파격적으로 올려라. 총알택시 기사는 따따블로 올려라.“
신년초가 되면 가정의 기도제목을 쓰는 일이 있는데, 어느 장로님 가정에서,
아들을 향한 기도제목을 썼습니다. 장로님은 목수이신데 뭐라고 썼는고 하니,
“하나님 우리 아들 재목감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부인 권사님은 막 운전면허증을,
따셨는데 “하나님, 우리 아들의 미래를 운행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했답니다.
오늘 본문 7절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이 말씀은 세상적 가치관속에서 떠드는 의미 없는 잡담이나 험담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한 집단의 영성을 측량할 수 있는 좋은 척도는, 그들이 모일 때 무슨 얘기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혹은 어떤 모임 속에서 어떤 얘기가,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이야기가 되어지고 있습니까?
이웃에 대한 험담이나 부정적인 얘기나 수군수군하고 파당을 짓는 얘기, 이런 따위들은,
여러분의 영성을 죽이는 독소가 됩니다. 정치적인 편향성, 음담패설 등도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모일 때마다 늘 불평이나 하고, 짜증내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그 속에 섞여 있을 때, 여러분의 인생도 찌들어 가는 삶의 황폐를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까?
내 주변에 영적인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과 교회를 이야기하며 삶에 대한 아름다운 사건을,
즐겨 말하는 사람들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이 귀한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영성훈련에서 이 언어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잘 다듬어져 있지 않은 언어 때문에, 생각하지 않고,
내 뱉는 말들 때문에 형제들의 가슴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4하)
‘Dei’ 라는 사람의 “세 황금 문” 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말하기 전에 세 황금 문을 지나게 하라. 다 좁은 문들이다. 첫째 문은 네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진실한 말이냐? 둘째 문은 필요한 말이냐? 네 마음속에,
참된 대답을 하라. 셋째 문은 가장 좁은 문으로 그것이 사랑에서 우러나온,
친절한 말이냐? 하는 것이다. 이 세 문을 지나 네 입에 왔을 때 비로소 담대히 말하라.“
옛날 유대인 중에 “시락” 이란 사람은 “나무나 돌이나 칼에 맞은 몸의 상처는,
쉽게 나을 수가 있지만, 마음에 받은 상처는 쉽게 낫지 않는다. 또한 세상에서 총과,
칼에 죽은 사람이 많으나 혀, 독설에 죽은 사람과는 비길 바가 못 된다?“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중심이 변화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제일 먼저 언어의,
변화가 따르고, 그것이 자신의 인격을 다듬어 가야 합니다.
+ 영성훈련의 두 번째 영역은 행실, 즉 진실한 삶입니다.
흔히 철학자들이 여러 가지 유형의 무신론자를 말하는 가운데,
‘영성적 무신론자’ 라는 것이 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자기 행위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사람, 날마다의 삶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도무지 하나님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영성적 무신론자라고 말합니다.
설교하고 설교 듣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설교한 내용대로 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교인이 되는 게 어려운 게 아니고, 신앙인답게 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 세 번째 영성훈련의 영역으로 본문은 사랑과 믿음과 정절을 들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이웃, 인간관계에서의 진실과 온유를 말합니다.
특별히 정절이라는 단어는 이성관계와 물질거래에서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역사학자 플리디우스라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을 관찰하고,
황제에게 이런 보고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음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도둑질을 하는 법도 없습니다. 그들은 약속을 어기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부채문제에 대해서도 절대로 깨끗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교회 밖에서 본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대한 한 역사학자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오늘 이 시대의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못내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었던 폭발적인 힘을 가진 영성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왜 찾아보기가 힘들까요? 인간관계에서 앉을 자리와 못 앉을 자리, 사람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독립기념관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에 시골에서 올라온 한 할머니가 이곳저곳,
구경 다니다가 다리가 아팠던지 한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경비병이 급히 달려오더니,
‘할머니 이 의자는 김 구 선생님의 의자입니다. 거기 앉으시면 안 됩니다. 일어나십시오.‘
할머니가 버럭 화를 내면서 ’임자 오면 일어나면 될 것 아니오.‘ 그러더랍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앉아야 할 자리 못 앉을 자리가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더불어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 해야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흉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흉내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온전히 거듭나야 합니다.
세계가 낳은 가장 유명한 희극배우로 알려진 챠리 채플린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날 채플린 흉내 내기 대회가 있었는데 진짜 챠리 채플린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이 대회에 참여했더랍니다. 모두들 분장을 하고 얼마나 꼭 같이 흉내를 내는지,
진짜 챠리 채플린은 3등 안에도 못 들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쇼가 아닙니다.
신앙은 연극이 아닙니다. 우린 경건, 영성을 흉내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믿어야지 흉내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흉내 신앙인과 영적 신앙인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영성훈련의 영역을 영성신학들은 그렇게 요약합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요. 둘째 이웃과의 정직하고 순결한 관계요. 셋째 자연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영성훈련이 가능할까요? 오늘 본문은 말씀을 가까이 하는 생활,
그리고 받은 은사를 따라 봉사하는 생활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입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그렇습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영성훈련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는 삶과 함께 은사를 따라 봉사하는 것입니다.
봉사생활 없이 신앙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가정과 교회 안에서 연약한 지체들을 안고,
서로 섬겨주는 봉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영성이 강해집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건강한가? 하는 질문에 독특한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뭘 먹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얼굴이 헬쓱하고 힘이 없어 비실비실 하다고 생각되면, 여름 다가오기 전에,
보약 한재 먹어야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뭐든지,
건강에 좋다면 다 먹습니다. 뿌리라는 뿌리, 벌레라는 벌레는 다 잡아 먹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우리나라 사람 갖다 놓으면 선악과는 안 따먹어도 뱀은,
잡아먹었을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뱀도 남기질 않습니다. 외국에 나가서 여행하는,
것도 보약여행을 합니다. 이게 우리나라 사람들입니다. 우리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뭘 먹으면서 친교하는 걸, 신앙생활의 전부인 양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은 말씀을 먹겠다고 온 나라를 다 헤집고 다닙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것,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겠다는 열망이 잘못된 것 아니고 나무랄 일 아니지만,
거기에 머무는 신앙생활, 내가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생각하지 아니하고,
뭐든지 좋은 목사님을 통해 말씀 한 첩 잘 먹으면, 내 영성이 건강해 질 것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신령한 목사를 찾아다니는데, 여기서 우리는 벗어나야 합니다.
잘 먹고 많이 먹었으면, 그것을 소화시키는 운동을 많이 해야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도 먹은 대로 살고, 기도했으면 기도한 내용대로 살아가야 건강해집니다.
목사가 목회하다가, 언제 피곤하고 탈진합니까? 주일마다 새 가족들이 많이 등록해서,
그들을 소개하고 환영하다가 지치는 목사를 보셨습니까? 목사가 열심히 설교를 준비해서,
설교하는데 교인들이 “아멘! 아멘!” 은혜를 받습니다. 그때 피곤해 하는 목사 보셨습니까?
기도 응답이 되어 너무 기뻐서 울고 웃다가 지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영성이 모자랄 때,
힘들어하고 피곤해 탈진 하게 됩니다. 왜 성도들이 세상 한복판에 살아가면서,
사탄의 유혹에 쓰러지고, 넘어지고, 봉사하고 헌신하다가 불평하고 원망하고,
지쳐 하는 것입니까? 영성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은혜 받다가 지치는 교인,
보셨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받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은 “내가 나무를 잘라야 한다면, 나는 먼저 도끼를,
갈겠다. 도끼를 가는데 쓰는 시간은 결단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홍사성의 채근담에 보면 “오래 엎드린 새가 높이 난다.” 고 했습니다.
자신의 영성의 칼날을 날카롭게 벼루기 위해서 교회 앞에, 기도회 자리에, 성도들 곁에,
목자 곁에, 오래 엎드릴 수 있어야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앙상블인 바이올린 첼로를 연주하기 전에, 피아노 음에다가 현을 맞춥니다.
이것을 조율한다고 합니다. 피아노 음에 자신의 현을 조율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영성을 조율하고, 성령의 가르침에 자신의 영성을 조율하고, 목회하는,
목사인 저의 영성에 여러분의 영성을 조율할 때에, 여러분 주변에 있는 많은,
너무나 닮고 싶은 멘토들과 더불어서 서로가 서로를 조언하며 조율해 갈 때에,
하나님 앞에 면류관을 쓰는 충성된 자로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가 있게 됩니다.
음악회의 연주가 끝난 다음에야 바이올린을 조율하는 어리석은 음악가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시간, 초라한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며,
뒤늦게 후회하고 조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기회 주실 때에,
건강한 영성, 능력 있는 영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옛말에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는 말이 있습니다. 잘생긴 나무는,
일찍 베어져 산을 떠나지만, 못생긴 나무는 눈에 띄지 않아 산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얼굴만 빼꼼 내미는 얼굴 신자가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교회에서 뿌리 신자가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인기와 박수갈채에 따라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따라 살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흔들리지 않는 건강한 영성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주님 안에 뿌리를 깊이 내리는 영성은, 그 어떤 세상 바람에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뿌리 깊은 영성을 가지고 늘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개인적인 영성훈련에 힘쓰고, 교회의 예배생활과 섬기는 봉사 생활을 위한,
영성훈련에 힘쓰시기를 바라며, 열매 맺게 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