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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그분은 우리의 눈물을 당신 손수건으로 친히 닦아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중 최절정기의 역동적인 사목활동의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입장에서 정말이지 신명 나는 날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구름 군중이 사방에서 몰려왔습니다.
몰려온 군중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뵈려고,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만져보려고 밀쳐대니, 이러다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두려울 지경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사도들과 제자들이 수행해야 할 주요 임무 중에 하나가 밀려드는 군중에 대처하기 위한 질서 유지였습니다. 아마도 요즘 같았으면 사도들은 눈에 띄는 모자와 완장을 착용하고 호루라기를 목에 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 앞으로 나서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습니다. 회당장! 당시 상당한 보직이었고, 유명인사였습니다. 그가 무릎 꿇은 이유는? 자신의 딸이 중병에 걸려 촌각을 다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길에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중 한 여인이 군중 사이를 헤치고 나와 예수님의 옷 자락에 터치를 했습니다. 놀랍게도 터치를 하는 순간 12년 동안 앓고 있던 하혈병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 안으로 들어가니 곡소리가 나고 있었습니다. 딸이 이미 숨을 거둔 것입니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늦게 오신 예수님을 향한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죽은 딸의 침실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딸의 손을 잡고 일으키며 외치십니다. 탈리타 쿰! 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아리땁고 화사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출현으로 인해 하느님의 어떤 분이신지 명명백백히 드러났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고통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눈물을 당신 손수건으로 친히 닦아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죽음을 결코 원치 않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영원한 복락을 만끽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분입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르코 5,21-43
쉬운 사람
10여 년 전에 저의 작은 형이 ‘투다리’라는 닭 꼬치 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일을 좀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거의 항상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장사는 매우 잘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도와주다보니 가게가 매우 더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쾌쾌한 냄새는 둘째 치고, 이제야 밝히는데, 주방 여기저기로 바퀴벌레가 돌아다니고 있었고 형은 그것들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서 죽였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미식거립니다.
한 번은 쥐를 잡으려고 약을 천정에 올려놓았는데 고양이만한 쥐가 그 약을 먹고 비틀거리다가 한 여자 손님이 소변을 보고 있는 앞으로 떨어졌습니다.
문제는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그 앞에서 손님을 쳐다보며 눈싸움을 하다가 시간이 꽤 흘러 쓰러져 죽었습니다.
손님은 나오지도 못하고 오랜 시간 그 쥐와 눈싸움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저는 가게를 좀 더 깨끗하게 하자고 했지만 형은 너무 깨끗해지면 손님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더러운 것이 가게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손님을 포함해서 많은 손님들이 이 지저분한 가게를 계속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하나 완전한 사람이 없고 그 부족함 때문에 완전한 사람 주위에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조금 부족해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기가 편한 것입니다.
어차피 술을 마시고 조금은 망가지는 사람들이기에, 너무 깨끗하여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형은 가게도 조금은 망가진 모습으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저도 고해성사를 볼 때 매우 무서운 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주일미사 빠진 것 때문에 그렇게 야단을 맞은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분은 고해 중간에 십계명을 외워보라고 하고, 대죄가 어떤 것들이 있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하셨습니다.
누구나 그러겠지만 저는 다시는 그 분께 고해성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 신부님들이 대부분 좀 무서운 분들 같아서 청년 때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학 가서 저의 지도 신부님을 만나고는
‘사제가 저렇게 편할 수도 있구나!’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너무 겸손하고 가난하시고 농담도 잘 하셔서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팬티가 보이도록 다 뜯어진 바지를 입고 오셔서 저희가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옷을 입으시면서도 꼼꼼히 살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런 부족한 면이 저희가 편하게 그 분께 다가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성으로나 학적으로나 굉장히 뛰어나고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편하시면서도 배울 것이 많아서 그런지 저를 포함해 너무 많은 학생들이 그 분께 논문을 쓰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구약의 하느님은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시나이 산에 거하시는 줄은 모두가 알았지만 그 주위의 불과 구름, 천둥과 번개 때문에 무서워 감히 범접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오로지 모세만 시나이 산에 올라가 그 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조차도 그 분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거룩하고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분께 어떻게 다가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분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이 피조물의 옷을 입으신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너무 낮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 분께 몰려들고 또 하혈병이 걸린 여인까지 겁 없이 그 분의 옷을 만질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하혈병이 걸린 여자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도 안 되는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왜 예수님께서 이 일의 증인이 될 제자 셋만 데리고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 들어가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또 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사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는지도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목숨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밖에는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예수님을 또다시 두려워하게 될 것이고 다가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까지도 같이 다니면서 그 분께 말 걸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사람들이 쉽게 다가와 죄를 용서받고 병을 고치고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다가오기 쉬운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에 무리가 되는 것들은 감추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렇게 보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저도 한 사제로서 가끔은 신자들이 저를 어려워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쉬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데 아직까지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우리들도 선교하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이 다가오기 편한 사람들이 되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편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5,21-43: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려주시고, 12년 동안이나 하혈하던 부인의 병을 고쳐주신다. 이 기적의 의미는 예수님은 잠자는 사람을 깨우듯이 죽은 사람을 되살리실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이다(39절). 회당장은 죽어가는 딸을 위해 주님께 도움을 청한다. 이것은 모든 부모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일 것이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23절) 회당장이 이렇게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고 계셨다.
많은 군중 틈에서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은 의사들에게 병이 낫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다. 오랜 투병 생활로 그의 심신은 피폐해졌고, 죽음에 가까이 이르고 있었다. 그녀의 생명까지도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여인은 고통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의 옷을 만진 것은 믿는 마음의 부르짖음이었다. 육체로는 스스로 부당하다고 여긴 여인은 마음으로 다가가 믿음으로 하느님께 손을 댄다. 여인은 그 순간 치유되었음을 느낀다. 아드님의 치유 능력을 통하여 여인의 믿음이 드러났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숨은 믿음을 보시고, 눈에 보이는 치유를 선사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건강해져라”(34절).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식을 전해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 회당장은 믿었고, 딸은 되살아났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집으로 가시어 사람들을 다 내쫓으셨다.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말씀하시고 나서,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세 사도와 함께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소녀를 깨우실 수 있는 분에게는 소녀가 그저 자고 있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41절) 뜻이다. 주님의 목소리에 소녀의 숨이 곧바로 돌아왔다. 소녀는 깨어났고 살아난 아이를 부모에게 돌려주셨다. 소녀는 되살아난 몸으로 일어났고,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음식을 먹었다(43절). 우리 자신 역시 주님 앞에 나아가기 부당한 하혈하는 여인과도 같을 수 있으며, 잠을 자는 소녀와도 같다. 주님이 말씀 한마디로 치유 받을 수 있도록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 34)
올 겨울은
유난히 더 춥습니다.
위태로운
우리의 삶에
좋은 일들이
더 많기를 이 겨울
예수님께 더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세상일지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아름답지만
아픈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프고 아픈 이들을
믿음으로 치유하여
주십니다.
치유는 삶을
지켜내는 힘이
예수님께 있음을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아픈 이들에게
가장 큰 선물은
다시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치유의 방향은
믿음이며
믿음의 방향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병고는
삶을 온통
뒤흔들어 놓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더 간절해 지는
주님 은총입니다.
다시 봄처럼
치유의 선물이
우리자신과
우리가족을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믿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르 5, 34)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오스트리아 정신 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말합니다.
“사람은 ‘이 사람과 함께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겠다’라고 느낄 때 사랑을 실감한다. 열등감을 품거나 우월성을 과시할 필요도 없이 지극히 평온하고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는 것, 진정한 사랑은 그런 것이다.”
자기에게 반문해 보십시오. ‘나는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하고 있는가?’ 혹시 다른 이에게 불편을 주었을 때가 많지 않았습니까? 자기의 교만과 이기심 그리고 세속적인 기준을 내세웠을 때 불편함을 더 많이 안겨 줍니다. 특히 ‘어쩔 수 없었다’라면서 정의를 내세우며 나의 정당성을 큰 소리로 외치지 않았습니까?
이런 모습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진정한 사랑에 대해 묵상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 때로는 율법도 어기셔야 했던 예수님, 사람들의 반대에도 죄인들과 함께했던 예수님, 진정한 사랑을 위해 당신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평온함과 자연스러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겸손의 삶입니다. 남이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줄 수 있는 황금률도 겸손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 주신 그 삶을 우리 역시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말이지요.
회당장이 아픈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아픈 딸을 향하여 나가시는 길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부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정한 사랑을 봤던 것입니다. 이 사랑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이지요.
이제 회당장의 집에 다다를 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제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보고,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그 사랑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녀는 ‘탈리타 쿰!’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곧바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앞서 ‘알프레드의 아들러’의 말처럼, 주님과 함께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오신 주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의 명언:사랑하는 것들은 쉽게 사라지기도 하지만, 다른 모습으로 반드시 돌아 온단다(카프카).
6)이병우 루카 신부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5,34)
'참믿음!'
오늘 복음(마르5,21-43)은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그분 발 앞에 엎드려 간곡히 청합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5,23)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길을 나서십니다. 그리고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군중 가운데에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가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대어 낫게 됩니다. 그 여자는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5,28) 하고 생각했고, 그 믿음이 그 여자를 구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으로 향하던 도중에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5,36)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딸을 다시 살리십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5,41)
'믿음의 기적'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고 있었던 여인의 믿음과, 야이로의 한 회당장의 믿음이 만들어 낸 기적입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이고, 참믿음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복음 안에 드러나 있습니다. 이 복음 안에서 '신앙생활과 잘 믿는다는 참믿음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례 때의 첫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겸손하게 나의 나약함(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로 돌아가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다시 세례 때의 첫믿음으로 돌아가는 것(부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잘 믿는다는 참믿음의 모습'이고,
'신앙생활인 믿음의 삶은 이것의 계속된 반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탈리타 쿰!"
7)조규식 신부님(출처 : 굿뉴스-우리들의 묵상)
어느새 새해가 서른 날이 지났습니다.
새해를 채운 우리의 서른 날이
주님을 향한 도약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를 보낸 우리의 서른 밤이
주님과의 사랑으로
더 채워지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앞으로 남은 열 한 달도
말씀에 귀가 밝아져서
말씀에 더 귀기울여 살아가는
축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첫댓글 복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 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마르 5, 2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