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꼬리와 묵은지
상기된 목소리로 스승이 입을 열었다.
"나는 항상 언어로 시대를 예지해왔네. 언어를 파고들면 다 그 안에 있어. 그런데 아쉽게도 디지털, 아날로그라는 말도 그 계통을 제대로 이해해서 쓰는 사람이 없다네."
"혼히들 온라인 오프라인 개념으로 쓰고 있는데요."
"이번 기회에 정확히 설명해주겠네. 여기 뱀 한 마리가 있다고 치세. 어디서부터가 꼬리인가?"
"글쎄요. 한 10센티 정도 끝부분이 꼬리인가요?"
"아니야. 뱀은 전체가 꼬리야. 연속체지. 그게 아날로그일세."
"아하! 뱀이 아날로그면 디지털은 뭐죠?"
"디지털은 도마뱀이야. 도마뱀은 꼬리를 끊고 도망가. 정확히 꼬리의 경계가 있어. 셀 수 있게 분할이 되어 있으면 그게 디지털이야. 아날로그는 연속된 흐름, 파장이야. 반면 디지털은 계량화된 수치, 입자라네. 이 우주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즉 입자와 파장으로 구성돼 있어.
더 쉽게 이야기해볼까? 산동네 위의 집이라도 올라가는 방법이 다르지. 언덕으로 올라가면 동선이 죽 이어져서 흐르니 그건 아날로그야. 계단으로 올라가면 정확한 계단의 숮자가 나오니 그건 디지털이네. 만약 언덕과 계단이 동시에 있다면 그게 디지로그야."
언제나 그랬든 선생은 놀라운 비유로 단번에 무 자르듯 개념을 설명해냈다. 더불어 디지로그 시대에 최적화된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첨언했다.
" '누이 좋고 매부 좋고'라는 말이 있지? 뽕도 따고 님도 보고. 이거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한국인이야. '이거냐? 저거냐?' 가 아니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거지' 외국인들은 디지털이면 디지털, 아날로그면 아날로금, 경계가 뚜렷해. 그런 이원론으로 과학과 합리주의를 만들고 메뉴얼과 원칙을 만들어 세계를 리드했지. 하지만 한국인은 정량적인 것과 정성적인 것, 원칙과 직관을 융합해버려. 그래서 조직도 오거나이즈가 잘 되는 시스템보다 비상시에 만드는 임시 조직이 더 잘 굴러가. 한국 사람이 위기에 강하다고 하는데, 위기에 강한 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강한 거라네."
"한국인들은 미리 계산하고 계획하고 자로 잰 듯 원칙에 맞게 행동하지 않고, 흐르듯이 상황에 맞춰 직관으로 반응한다는 거지요?"
"그렇지. 우리말에 버려두라는 말이 있지? 버리는 것과 두는 것의 중간이야. 그런데 버려두면 김치가 묵은지 되고, 누룽지가 숭늉되잖아. 버리지 말고 버려두면, 부풀고 발효가 되고, 생명의 흐름대로 순리에 맞게 생명자본으로 가게 된다네. 그게 살아 있는 것들의 힘이야. 버리는 건 쓸모없다고 부정하는 거잖아. 버려두는 건, 그 흐름대로 그냥 두는 거야. 코로나까지도 버려두면 백신이 되는 거야. 재생이 되는 거라고. 그게 생명 자본이 되는 원리야.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하는 힘이지."
이것과 저것의 대립이 아니라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인 상태. 함께 있되 거리를 두고, 경쟁하면서 협력하는 그 '경계의 힘' 그 사이에서 나온 막춤의 리듬이 디지로그이고, 바이러스의 발효가 생명 자본이라고 했다. p. 272~274
『이어령의 마지막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