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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7. 묵상글 (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 영적인 지혜와 깨달음을 얻으려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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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7.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영적인 지혜와 깨달음을 얻으려면
바오로 사도는 오늘 영적 지혜와 깨달음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런데 지혜와 깨달음에는 영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생활의 지혜나 삶의 지혜도 있으며 이런 지혜는 보통
깨달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 곧 깨달음의 결실입니다.
버리는 것을 가지고 유용한 것을 만드는 것과 같은
생활의 지혜가 있으면 얼마나 삶에 유익이 많겠습니까?
우리 가운데서는 이렇게 지혜가 뛰어난 분이 많습니다.
저도 주방에서 같이 일하시는 분도 정리를 잘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정리가 잘 되어 있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사람인데
얼마 전 한 분이 팔을 걷어붙이고 정리하니 순식간에 깔끔해졌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깜짝 놀랄만한 정리의 달인이요 생활의 지혜가 있는 분이셨지요.
그런가 하면 인생의 지혜를 갖춘 사람도 많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욕심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욕심을 버리고 심신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는 지혜를,
모든 걸 잃어도 사랑을 얻고 사람을 얻는 것이 제일 값진 것임을
깨달은 결과 사랑도 얻고 행복도 얻는 지혜를 갖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깨달음과 지혜란 어떤 것입니까?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겠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따르면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영적인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주님 마음에 들고 이웃에 대한 온갖 선행으로 열매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간청하고 있습니다.
곧 여러분이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고 그 지식이 자라기를 빕니다.”
그러면 이런 영적인 깨달음과 지혜는 어떻게 얻습니까?
이것을 우리는 오늘 베드로 사도의 하느님 체험과 연결해 볼 수 있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기잡이의 달인입니다.
고기 잡는 데 지혜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의 생활의 지혜가 그날은 아무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치라고 하시는 대로 그물을 치니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그물을 다시 치라고 하셨을 때
달인인 내가 밤새도록 애썼는데도 안 되니 싫다고 거절할 수도 있었는데
전날 자기 장모를 예수께서 치유해주신 것을 봤기에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하고 그물을 칩니다.
그리고 예수의 무한한 능력을 보고 자기의 한계를 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유한함을 깨닫고 더 나아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으며
동시에 예수는 스승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주님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스승이던 예수님 호칭이 주님으로 바뀌고,
죄인이니 떠나가 달라던 그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주님 뜻을 따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지혜는 영적인 깨달음을 통해서 얻는 것이고,
영적인 깨달음은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얻는 것이며,
영적인 체험은 자기의 인간적인 힘과 지혜로 한 일들이 좌절되고
그 좌절로 인해 오히려 하느님을 만나게 될 때 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적 좌절-영적인 체험-영적인 깨달음-영적인 지혜의 순서가 성립됨을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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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7.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시몬의 배에 타시어 군중을 가르치시고 난 다음,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그러자 시몬이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일이 다 끝났는데도 굳이 다시 그물을 치는 일은 귀찮기도 한 일이었지만, 더 깊은 의미로, 그물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부로서의 자신의 앎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고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밤새도록 확인한 그곳에 다시 그물을 친다는 것은 이미 경험을 통하여 확인한 앎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프로였던 베드로는 그렇게 자신의 ‘앎’을 내려놓고 ‘말씀대로’을 따랐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1코린 3,18)
그렇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끌어올린 그물에서 많은 고기와 함께 자신의 앎에 대한 한계도 깨달았고, 무엇보다도 많은 죄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물을 치기 전에는 예수님을 어떤 한 분 ‘스승’(5,5)을 만났을 뿐이었지만, 그물을 치고 난 다음에는 오직 한 분 ‘주님’(5,8)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진정한 인격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변화’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앎’을 버릴 때 찾아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변화는 자신이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대상이 될 때에 오게 됩니다. 곧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되는 존재가 될 때 찾아들게 됩니다.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기에 변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요, 회개 역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수락에 의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할 때 생겨나는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의 ‘앎’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나의 배’가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주님의 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항해하는 주님의 배일뿐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주님!
제가 민낯으로 당신을 뵙고, 진정 죄인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 생각을 내려놓고 제 경험을 내려놓고, 당신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제 앎을 내려놓고 제 옳음을 내려놓고, 당신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게 하소서!
제가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임을 알게 하시고,
스스로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 변화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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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7.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버리고 떠나기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며 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바랐던 성모님의 모습에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로마4,18).해야 한다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수고와 땀을 통해 일구어 자리를 잡은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많은 미련과 아쉬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명을 받았으면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있고 싶은데 떠나라는 명을 받고, 빨리 떠났으면 좋겠는데 더 있으라는 명을 받기도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성직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때가 되면 자기가 움켜잡고 있던 모든 것을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떠났으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안주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습니다.
엉뚱한 생각을 해 봤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으로서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 생각하셨을까? 선출되면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못하시는데 짐 정리는 다 해놓고 오셨을까? 소지품들은 어떻게 처리하실까? 아니 추기경 관저에서 살지 않으시고 방 한 칸의 아주 검소한 아파트를 임대하여 간단한 저녁식사를 직접 해 드셨고, 버스로 출퇴근하며, 근검한 선교사들에게 추기경 숙소를 내놓으셨다니 아예 정리할 것도 버릴 것도 없이 사신 것은 아닐까? 세상의 권력은 다 버리고 주님의 권위와 겸손으로 만족하셨음에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시몬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는 이유는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은 윤택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실망 속에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셨습니다. 시몬은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믿고 주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차고 넘쳤습니다. 순명은 기적을 낳았습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부가 많은 고기를 보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현실입니다. 전에는 고기만 봤는데 이제는 능력의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 모시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자기의 모습을 또한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하시며 죄 많은 자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능력과 자비를 체험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기의 어부로서의 지식과 경험, 상식,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가 배를 놓고, 고기를 놓고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사람을 낚을 사명을 주시니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바뀌는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로 살게 된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부여잡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지식이나 경험, 업적, 애착…인정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되는 하나를 버리는 가운데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나고 싶은 만큼 버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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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7.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1982년에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시 입학생 대부분은 저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군대도 마친 후에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한두 살 차이가 나면 ‘형’이라고 부르지만 대부분 저보다 7살은 많았고, 그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분은 저보다 15살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형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제일 나이가 많은 형님은 1948년생이었고, 그 다음은 1952년생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직업도 다양했었습니다. 어떤 형님은 학원 강사를 하였고, 어떤 형님은 보험회사를 다녔고, 어떤 형님은 장교였고, 어떤 형님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가수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이라는 노래처럼 형님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신학교로 왔습니다. 반듯한 직장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들어온 형님, 모든 사람이 알아주는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기꺼이 신학교에 들어온 형님들을 보니 신학교에는 분명 세상의 것들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신학교에 들어온 저와는 생각의 폭과 깊이가 많이 달랐습니다. 그 형님들과 군대에 갈 때까지 4년을 함께 지냈습니다. 군대 갈 때는 형님들이 조촐한 파티를 열어주었습니다.
저는 마지못해서 하는 일들을 형님들은 기쁘게 하였습니다. 성소주일이나 축제를 마치면 청소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저는 일의 요령도 잘 모르고, 힘들어 하는데 형님들은 군대를 다녀와서인지 삽질을 잘하였고, 기쁜 마음으로 청소하였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면 졸리기도 하고, 집중이 잘 안되었습니다. 외출하고 한 잔 한날은 몸은 성당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세상의 것들에 있었습니다. 형님들은 기도 시간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형님은 더운 여름날에도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어려움을 이기는 길은 오직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수업시간에도 그랬습니다. 저는 다른 책을 읽은 적도 있고, 늦게 들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형님들은 나이가 많아서 배움에 어려움이 있다면서 구도자의 자세로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장학금은 수녀님과 형님이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 농부가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발견하면 모든 것을 팔아서 밭을 산다.”고 하셨습니다. 형님들은 신학교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발견하였고 모든 것을 버리고 신학교로 들어왔으니 그 기쁨이 충만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을 보면 어린 나이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첫 번째 제자들은 어부였습니다. 베드로는 장모가 있었으니 결혼도 했었습니다. 바오로는 유대교의 정통파 바리사이였습니다. 당대의 스승인 가말리엘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런 베드로와 바오로도 총 맞은 것처럼 예수님께 사로잡혀서 사도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마니교를 신봉했었습니다. 방탕한 생활도 했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상을 받았던 프란치스코 성인도 방황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분들도 예수님께 사로잡혀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직업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들어갔던 많은 동기들도 이제는 서품 32년이 되었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적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보다 더 많이 감사할 것이다.” 저 역시도 많은 빚을 탕감 받았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월의 무게가 쌓이면서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면 됩니다. 다른 것들은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방법으로 채워 주심을 믿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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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7.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복음에서 주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장면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이 아침일까요? 아니면 저녁일까요?
저는 아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베드로의 배 위에서 언덕 중턱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아침에는 호수의 찬바람이 지면을 타고 상승하기 때문에 작은 목소리도 잘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이크가 없던 시대에 바람을 이용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했고, 아마도 주님께서도 이 방법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질했지만 하나도 잡지 못했다고 전하는 복음 구절에서 아침이겠다.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피곤한 베드로는 처음 보는 주님을 태우고 그분의 말씀대로 움직입니다.
베드로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지 모릅니다. “피곤한데 하필이면 내 배에 타서, 그물 손질도 못 하게 하는 거야.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퉁명스럽게 있었을 베드로에게 주님은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갈릴레아 호수는 누구보다 베드로가 잘 압니다. ‘지금은 고기가 없습니다.’라고 하고 싶었지만, 베드로는 그냥 던져 봅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상상할 수 없는 만큼 많이 걸렸습니다. 어쩌면 그때 베드로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도대체 내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그리고는 엎드렸습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밤새 호수와 씨름을 하고 아침에 태양이 뜨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밤이 없었다면 고기잡이 프로인 베드로가 고기잡이를 허탕 치지 않았다면 아침도, 또 주님의 능력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밤일 수도 아침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주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혹은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뻘건 맛
한국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얼큰한 김치찌개가 생각나고
시원한 짬뽕이 생각나고
시뻘건 육개장이 생각납니다.
특히 외국을 다녀오면
이런 음식들은 더욱 간절합니다.
육개장의 맛은 고추기름의 뻘건 맛이라 생각합니다.
보기만 해도 그 맛이 느껴지는 뻘건 색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어쩔 수 없기를 바랍니다.
어쩔 수 없이….
내적 평화를 그리워하고
기도의 감동을 찾고
성체의 그 은총을 음미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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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7.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림 그리기 대회에 나간 주인공이 ‘불꽃놀이’를 주제로 불꽃과 검은색 밤하늘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그림을 본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밤하늘이 마냥 검은색인 건 아니야.”
주인공은 밤에 빛이 없으니 검은색이 맞다고 우겼지만, 상을 받은 것은 짙은 남색으로 밤하늘을 칠한 친구였습니다. 그때 주인공은 처음으로 하늘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파란색, 붉은색, 연보라색을 거쳐 짙은 남색이 된 하늘을….
인상적인 이야기였고, 동시에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이럴 것이다’라며 판단했던 적이 참 많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읽고 있는 역사책이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제대로 된 판단이 가능해짐을 깨닫습니다. 당시의 군주는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역사는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최악의 선택을 했던 당시의 군주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좋은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너머에 있는 그 사람의 믿음을 보셨고, 겸손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시선으로 봐야 나의 좋은 역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리는 어부였습니다. 어부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겉모습만을 보고서 과연 장차 교회의 반석이 될 것임을 누가 알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만이 알아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어떤 목수가 어부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말하면, 어떤 어부가 따를까요?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엄청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지요.
예수님을 통해 베드로는 어부라는 자기의 옛 역사가 아닌, 삶의 변화가 이루어져서 예수님의 제자라는 새 역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기의 가장 좋은 역사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평가될 자기의 역사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주님과 함께하는 가장 좋은 역사를 만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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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은 자전거와 같다. 계속 페달을 밟는 한 넘어질 염려는 없다(크라우드 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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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7.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적 여정의 순례자들
“함께와 홀로”
-예수님은 우리의 평생 유일한 가이드-
어디서부터 강론을 시작할지 모르겠습니다. 인터넷을 열어보니 국내외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갑니다. 어제처럼 만세오창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념의 늪에서 민생을 구하겠습니다.”인터넷 뉴스를 보다 마음에 와닿은 말마디입니다. 정말 시급한 것이 민생이요 정치도 민생을 위해 존재합니다. 엊그제 받은 녹색평론 183호가 반갑고 기뻤습니다. 맨처음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근대문명은 쓰레기를 생산하는 시스템이다. 망가져버린 지구 물질대사 사이클의 한쪽에서는 물, 표토, 광물, 생물 등 기초적 자원들이 급격히 사라져가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처리되지 않는 쓰레기들이 더 빠르게 쌓여가고 있다.”
쓰레기들은 제가 요즘 부쩍 실감하는 현실입니다. 쓰레기를 치우는 원장수사에 물으니 1주에 3회, 쓰레기를 치운다 했습니다. 쓰레기를 볼 때마다 깊은 좌절감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먹고 살아간다는 것이 지구에 죄를 짓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안팎으로 쓰레기를 최대한 적게 내고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쓰레기들이 양산되는 시절 급기야 사람들도 쓰레기 취급을 받기도 하는 비일비재한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사람 자신도 쓰레기처럼 처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깨어 있어라!”
정말 작금의 타락한 현실에서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말마디입니다. 어제 수요일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알현시간 교황님의 몽골 방문 소감도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나는 얼마동안 아시아의 중심에 있었고 그것은 나에게 참 좋았다. 내가 몽골 사람들을 만났을 때 좋았던 것은 그들이 자신의 뿌리와 전통을 애호하고, 자신의 어른들을 존경하고 주위 환경과 조화되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창조의 숨결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옛 모습도 이랬습니다. 정말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너무 많은 우리 현실이 마음 아프게 와닿습니다. 사상누각, 흡사 모래위의 집처럼 위태해 보이는 우리의 불안한 현실입니다. 어제 우리 수도원은 아랫집 수녀님들과 함께 가을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우리 수도원의 14명과 아랫집 수녀님들 10명이 자동차 셋에 분승하여 전번 삼척의 덕항산德項山에 소재한 환선굴에 이어 대금굴을 순례여정하듯 가을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5억 3천만년전에 생긴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덕항산속의 굴이었습니다.
대금굴안에 흐르는 물소리는 얼마나 우렁찬지 흡사 세찬 강물 소리와도 같았고 폭포소리도 모습도 장관이었습니다. 12시부터 1시까지 무려 1시간 동안 걸었던 참 긴 강같은 굴이었습니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정말 내적 순례 여정을 상징하는 듯 한 1시간 동안 걸었습니다. 대자연의 신비앞에 저절로 대침묵이었습니다.
“산같은 정주의 수도원이라면, 수도승이라면 이런 정도의 대금굴같은 강을 지녀야 하지 않겠어요?”
제 말에 “저는 싫습니다. 너무 복잡하고 시끄럽습니다.” 원장 수사의 즉각적인 답변이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는 백두대간 태백산맥에 위치한 1070m 덕항산은 산속에 무려 큰 강같은 환선굴과 대금굴을 지니고 맑은물을 끊임없이 쏟아내니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저 역시 덕항산을 닮아 날마다 맑은 강물같은 강론을 쏟아내야 하겠다는 결심을 새로이 했습니다. 말그대로 “산속의 강”같습니다. 마침 전에 인용했던 제 애송시에도 딱 맞는 모습입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천년만년
끊임없이 한결같이 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끊임없이 한결같이 임향해 맑게 흐르는 강,
산속의 강”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 산속의 강 같은 내적 여정의 삶, 제가 늘 소망하는 삶이요, 정말 이런 한결같은 내적 여정의 삶이라면 참 멋질 것입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성 베네딕도를 살고, 안으로는 강같은 성 프란치스코를 살라는 성 베네딕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수도사제로서 제 신원에 만족합니다. 바로 여기서 착안한 오늘 강론 제목, “내적 여정의 순례자들- 함께와 홀로-”입니다. 어제의 대금굴 가을 소풍은 혼자라면 의미도 없고 엄두도 못냈을 것입니다.
24명이 함께, 내적 여정을 상징하는 가을 소풍에 주님을 찾는 내적 여정의 순례자들이 되어 떠났던 것입니다. 함께 하되 홀로의 순례 여정이었습니다. 또 내적 여정을 상징하는 대금굴 탐사 여정에는 가이드가 앞장 섰습니다. 새삼 내적 여정의 순례자들에게 필수적 전제 조건이 영적 가이드, 안내자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함께와 홀로의 내적 여정의 순례자들인 우리의 평생 유일한 영적 가이드, 안내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시편23장이 고백하는 바로 우리의 영원한 착한 목자 예수님, 얼마나 큰 위로와 평화, 격려가 되는지요!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아란 풀밭에 이몸 누여주시고,
고이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주시니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
주께서 당신 이름 그 영광을 위하여,
곧은 살 지름길로 날 인도하셨어라.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그 지팡이에, 시름은 가시어서 든든하외다.”
바로 착한 목자이자 최고의 영적 가이드 예수님을 은총의 선물처럼 만난 오늘 복음의 베드로 일행 어부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신 다음 군중을 가르치신후 시몬에게 명령하시니, 주님의 개입이 참 은혜롭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어디가 깊은 데입니까? 바로 주님이 함께 하시는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 꽃자리가 깊은데입니다. 시몬의 대답이 참 솔직하여 마음에 와 닿습니다. 언뜻 영적 가이드 예수님을 알아챈 듯 스승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영적 가이드 예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밤새 노력을 다했지만 인생 바다에서 물고기가 아닌 허무만 가득 길어 올렸던 것입니다. 즉시 생각나는 시편127장 전반부 내용, 시몬 베드로는 아프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로다.”
베드로는 신속히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으니 배가 가다앉을 지경입니다. 바로 그 순간, 전광석화 베드로는 주님을 만났고 즉각적인 회개가 뒤따릅니다. 스승이자 주님이신 영원한 영적가이드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의 즉각적 응답에 주님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거울에 비친 죄많은 자기 얼굴을 발견한 베드로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회개를 통해 참 자기 얼굴을 발견한 베드로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미련없이, 지체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선 시몬을 위시한 어부들입니다. 이제부터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순례 여정에 영원한 영적 가이드가 된 주님입니다. 그대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영원한 순례 여정의 모델이 되는 예수님과 그 어부들입니다. 사람마다 주님을 따르는 양상은 다 다릅니다. 각자 공동체 삶의 자리에서 동료 순례자들과 함께 날마다 온맘과 온힘으로 새롭게 예수님을 따라 나서면 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의 콜로새 교회를 위한 기도는 그대로 이런 우리를 위한 기도가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다음 이 기도대로 이뤄주시어 성공적 내적 순례 여정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기를 빕니다. 또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오는 모든 힘을 받아 강해져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내기를 빕니다.”
바오로의 우리를 위한 간절한 기도에 이어 다음 말씀이 우리를 더욱 용기백배, 사기충천하여 내적 순례 여정 길을 걷게 하며,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콜로1,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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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7.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을 낚으러>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
사람을 낚으러
사람에게로
사람에게
거부당할지라도
사람에게 오신
주님 따라 주님처럼
사람을 낚으러
사람 속으로
사람에게
버림받을지라도
사람 속으로 들어오신
주님 따라 주님처럼
사람을 낚으러
사람과 함께
사람에게
상처받을지라도
사람과 함께하신
주님 따라 주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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