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70] 하래비의 손주 사랑 “본능?”
손자를 앞에 두고, 흔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같다’고 말하는 것은 진짜로 거짓말이 아닌 것같다. 우리 친구들의 지갑을 보면, 대부분 손주들의 사진을 한 장씩은 넣어다니고 있음이 그 방증일 터. 나 역시 그렇다. ‘아이가 태어난다면 자식의 소생이니 당연히 예쁘겠지’하는 것은 너무나 추상적이다. 실제로 이렇게 정신을 못차릴 줄은 몰랐다. '처자식 자랑하는 넘은 팔불출'이라고 손가락질한 대도 할 수 없는 일. 아아, 손주를 아직 갖지 못한 친구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아들이 있고, 큰 애가 아들손주를 낳은 지 8년 전. 그러니까 아직은 여덟 살짜리 손자(초등학교 1년)가 한 명 있을 뿐이다. 그 녀석을 두어 달에 한번 보는 게 큰 재미였는데, 제 애비를 따라 머나먼 타국, 바레인으로 살러 간다는 것이다. 축하를 해주면서도 마음속으론 ‘비상’이 걸렸다. 아니, 최소 1년 이상은 못볼 게 아닌가. 내일모레 출국을 앞두고 배웅차 상경했는데, 비행기표가 원활치 못해 일주일째 제 할미집에서 나와 같이 있다. 한 마디로 ‘행복한 일주일’이다. 제 딴에도 속은 놀놀하여 빤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슬픔을 이해하는 듯, 종이접기를 하여 ‘다면체 종이공’을 선물했다<사진>. 그 작은 고사리손으로 색종이를 어찌 그리 잘 접는지 무수한 실패 끝에 두 개를 완성,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기특할 수가 있으랴. 흐뭇하기 짝이 없다. 아아, 그래서 재벌집 회장들이 재산을 손주들에게 증여하려고 몸부림들을 치는구나, 천하의 독재자 전두환도 손자 둘을 옆에 끼고 팔베개를 해주는구나 싶었다. 27살 그 손자, 얼마나 괴로웠으면 양심선언을 했다. 요 녀석, 얼마 전에는 제 아빠에게 “할아버지는 기분이 나빠 인상을 쓰다가도 나만 보면 활짝 웃는다”고 했다는 거다. 한 달 전 임지에 부임한 아들은 나에게 아예 손자 배웅을 하지 말라고 한다. 보나마나 제 애비가 공항에서 헤어지면서 ‘폭풍울음’ 울 것을 저어해서이다. 지금 이렇게 스킨십을 하고 있으면서도 곧 석별惜別할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글썽글썽한데, 왜 아니겠는가.
아무튼, 이것이 종족 본능인지 내리사랑인지는 몰라도 참 ‘지독한’ 정서이다. 손주 자랑을 하려는 게 본뜻은 아니다. 아이와 있으며 느끼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흔히 말하는 동심童心을 엿보면서, 우리는 언제 그런 동심을 어떻게 잃어버렸고, 언제 이렇게 추하게 나이가 들어버렸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조잘조잘 얘기하는 토막마다 나를 반성하게 한다. 언젠가 나의 도반이 “도대체 인문학人文學의 요체가 무엇이요? 그건 바로 짜-안한 마음이 아니요”라고 하던 말이 떠오른다. 그 짜-안한 마음이 바로 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아니던가. 그 측은지심이 가득한 것을 보고, 아이가 장래 인문학을 공부했으면, 아니 예술가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술인은 무엇인가? 배고픈 시인, 소설가를 비롯한 작가, 화가, 음악인 등을 이를 터. 유식하게 말하자면, 창조적인 일, creative한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기 때문이다. 하하.
운영하던 사업 잔무처리에 바쁜 며느리와 아직도 현역인 아내 대신에 사나흘 아이와 꼬박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일종의 축복이지만 그만큼 또 큰 곤욕이다. 에너지 덩어리인 아이가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끝없이 아이패드로 게임을 하게 해달라는 아이를 어떻게 달래겠는가? 종이접기, 그림책 읽기, 만화영화 보기에 지치면 ‘게임하고 싶다’는 아이를 어떻게 달래겠는가? 자는 시간만 제하고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하니, 나의 자유自由는 완전 실종이다. 허허-, 좋으면서도 싫은 일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그 가운데, 며칠 전 ‘뮤지컬 가족연극 깜냥’을 둘이 같이 보고, 어제는 ‘백희나 그림책전’을 예술의 전당에서 보고 왔다. 일종의 ‘추억 쌓기’가 될 듯하다. 시내버스와 지하철로 돌아오는 경험도 꼬맹이로서는 해봐야 할 듯하다. 그동안 그저 승용차로만 나들이를 한 통에 약간의 짜증도 낸다. 이것저것 사달라는 말도 반갑다. 무엇이 아까우랴.
이 녀석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저를 예뼈하는 마음을 십분, 아니 십이분 알고 있다. 엄마 아빠에게 할 말과 할미와 하래비에게 할 말이 따로 있다. 영악하다고 해야 할까? 우리가 본능이듯, 이 녀석도 본능일 것이다. 이 새벽, 거실에서 너브러져 자고 있는 나의 핏줄을 본다. 둘째아들이 낳을 아들이나 딸은 어떻게 생겼을까? 걔들도 이 녀석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울까? 귀여운, 앙증맞은 녀석의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내일모레면 아주 오래 보지 못할(영상통화가 이런 ‘갈증’을 어떻게 해소해 주겠는가)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눈물이 앞을 가린다. 손자가 보고 싶어서라도 장거리 비행기는 타고 싶지 않지만, 날아가야겠다. 그때는 쏼라쏼라 잉글리시로 이 하래비 기를 죽이겠지만, 그래도 좋다. 스킨십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잘 가서 아프지 않고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외국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부쩍 자라서 와라” 하래비의 중얼거림을 잠결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기특한 놈. 천상 시인 천상병의 시구 <요놈/요놈/요 이쁜 놈>(시집 제목이다)을 되뇌며 엉덩이를 토닥거린다. 오늘은 이 녀석과 무엇을 하고 놀까? 뇌구조가 우리와 다른 이 녀석은 또 ‘게임 좀 하게 해달라’고 졸라대겠지. 네 이름 ‘윤슬’이 무슨 뜻인지 알지? 호수나 강물, 바다의 잔물결이 햇빛이나 달빛에 비쳐 반짝거리는 모습이란 뜻이란다. '호수의 윤슬이 아름답다'라고 쓴단다. 사랑한다. 내 새끼! 잘 가서 잘 살다 와라. 금세 만날 거야. 너와 ‘찢어지는’ 것이 슬픈 하래비가 이 새벽에 쓴다.
첫댓글 우천아 난 한 삼일 같이 있어더니 어서가면 좋겠던데 신기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