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65
4월19일[부활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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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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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cTux8S1lyZg
(이나라 사무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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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인간을 위해 세상에 보내신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대체 어디서부터 떠밀려 왔는지, 잔뜩 밀려와 쌓이고 또 쌓인 해양 쓰레기들을 치우고 또 치우고 있습니다.그야말로 쓰레기와의 전쟁입니다.
한곳에 모아놓으니 엄청난 양의 스티로폼과 밧줄, 각양각색의 플라스틱 통과 유리병들이 산더미 같습니다. 통상적이지 않은 모습의 플라스틱 통들을 보니 건너편 중국에서 넘어온 쓰레기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간 엄두도 못 냈었는데, 건장한 수련자 형제들이 도와주니, 눈에 띌 듯이 해안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리 많이 치우지도 못했는데도 저리 청정하고 아름다워졌는데, '태초에 하느님께서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는 얼마나 더 깨끗하고 아름다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우리 인간은 또 얼마나 세상을 더럽히고 훼손시키나, 하는 생각에 송구한 마음이 큰 하루였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마구 버리는 사람들, 특히 개념 없는 낚시인들, 틈만 나면 치우는 사람 생각해서, 더이상 제발 버리지 말아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애써 창조하신 이 사랑스런 세상을 함께 보존해나가기 위해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그 유명한 요한 복음 구절이 소개되고 있습니다.까마득한 어린 시절, 초등부 주일학교 다니던 시절, 성당이 협소하던 관계로 건너편 가톨릭에서 운영하던 여고 교실로 건너가 주일학교를 운영했었는데, 담당 선생님과 함께 이 구절이 신구약 성경 통틀어 가장 중요한 대목이니 반드시 외워야 한다며, 함께 달달 외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은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3장 16~17절)
놀랍게도 이 짧은 문장 안에 우리 가톨릭교회 신앙의 진수, 핵심, 본질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우리 인간은 어떻게 노력해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아주 간단명료하게 요한복음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안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럼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위해 당신의 외아들조차도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답은 너무나 쉽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세상에 보내신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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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g8D2sWaV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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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빛인지 어둠인지 아는 방법>
요한복음 3장은 구원의 원리 전반적인 내용을 다룹니다. 기적과 표징은 그저 예수님께로 이끄는 방향 판과 같았습니다. 실제로는 예수님을 통해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있는데 그분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그분과 함께 죽이고 그분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어제까지 내용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원죄의 결과로 아드님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태어난 모든 인간은 결국 지옥에 갈 운명이었지만, 그중에서 당신을 믿는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행실이 좋은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그러나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이미 “진리를 실천하는 이가 빛으로 나아가지” 그렇지 않은 자는 지금은 예수님께로 오는 것 같을지라도 결국엔 빛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사람은 이미 착하게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빛은 이렇게 어떤 사람의 행실을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좋은 행실을 하는 사람은 그 행실이 더 드러나게 만들기 위해 빛으로 나아오고 어둠의 행실을 하는 사람들은 더 멀리 떠나갑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빛인지 어둠인지 구별하는 방법은 단순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 그대로 나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내 이름은 칸’(My Name Is Khan, 2010)은 인도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자폐증을 앓는 인도 무슬림 남성이 미국에서 테러와 편견에 맞서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인도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칸은 남자아이가 있는 이혼녀와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9/11 테러 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 내 무슬림에 대한 편견이 심화되고 이슬람 혐오가 높아집니다. 이에 따라 칸과 그의 가족은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게 됩니다. 특히, 아들이 새 아빠 때문에 이슬람 성을 쓰게 되어 학교에서 인종 차별적인 놀림을 겪고 결국 참혹한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아내는 아들이 죽은 것이 무슬림인 남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죽인 아이들을 찾아내려 하지만 목격 증인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한 명이 있기는 하지만, 그 아이도 아이들이 무서워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아내는 칸을 떠나버리라고 내칩니다. 칸은 어떻게 하면 돌아올 수 있느냐고 하고 어이가 없는 아내는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내 이름은 칸입니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래야 자기 아들이 테러리스트의 아들로 죽은 게 아니게 되니까.
칸은 이내 짐을 싸서 대통령을 만나러 갑니다. 당연히 가는 길도 험난했고 가서도 오히려 테러리스트로 오해받아 심한 고문까지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무슬림이기는 했지만, 무슬림 테러단체를 신고할 정도로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언론이 그를 주목합니다.
그는 유명 인사가 되고 드디어 아내가 보는 앞에서 대통령을 만나 아내가 원했던 말을 합니다. 이 장면이 TV로 방영되자 유일한 목격자인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친구들이 칸의 아들을 폭행해 죽였다고 경찰에 실토하게 됩니다.
빛은 빛으로 나아갑니다. 빛 안엔 거짓이 없습니다. 그 거짓 없음은 주저하는 이를 거짓이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거짓이 있는 이들을 더 숨게 만듭니다. 착한 사람은 더 착하게 만들고 악한 사람은 더 악하게 합니다. 이것이 빛의 역할입니다. 이것이 왜 빛이 심판관이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내가 빛이 되려면 예수님 이전에 예수님처럼 착하기를 원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분의 선함에 내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분께 나아가야만 더 착해질 수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분께 나아갑니다. 그러면 나도 빛이 됩니다.
착해진다는 말은 거짓말과 자아, 그로부터 발생하는 세속-육신-마귀로부터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는 자기를 살리고 이웃을 죽이는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곧, 세.육.마.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고 친해진다면 나는 빛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멀리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다가온다면 나는 빛입니다.
이것이 내가 빛인지 어둠인지 구별하는 방법입니다. 나에게 모이는 사람이 돈을 좋아하고 육체적 욕망을 따르고 이웃을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어둠이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것들에서 벗어나 이웃에게 도움이 되고 행복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빛입니다. 이렇게 빛을 통한 나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나의 구원을 통해 이웃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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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어제부터 이스라엘과 요르단 성지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던 것은 1995년이었습니다. 어느덧 28년 전입니다. 해외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였습니다. 교우들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있었습니다. 교구에서는 사제들도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저는 본당 신부님의 허락을 받고 성지순례를 신청했습니다. 친한 동창신부님들도 8명이 함께 신청했습니다. 해외여행을 다녀본 적도 없고, 성지순례에 대한 이해도 적었습니다. 성지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공생활을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곳(Holy Land)을 뜻합니다. 베들레헴, 나자렛, 갈릴래아, 가파르나움, 예루살렘과 같은 곳입니다. 교회가 시작되면서 사도들이 선교한 곳, 교우들이 순교한 곳, 성인과 성녀들이 살았던 곳(Holy Place)도 성지가 되었습니다. 해외에도 성지가 많지만 우리나라에도 성지가 많습니다. 교우들이 순교한 곳, 순교한 교우들이 묻힌 곳, 성인과 성녀들이 신앙을 증거한 곳들이 있습니다. 절두산, 새남터, 미리내, 솔뫼, 치명자 산과 같이 한국에서 성지가 많습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왜 성지순례를 가는 걸까요? 저는 성지순례의 목적은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전날 과음을 했거나 과로를 했으면 얼굴의 모습이 까칠 할 것입니다. 직장의 일 때문에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자녀의 문제로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할 것입니다. 분노와 불만이 있다면 화난 모습일 것입니다.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와 충분한 수면을 취하면 생기가 가득한 모습일 것입니다. 감사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면 얼굴은 환한 미소가 보일 것입니다. 나눔과 희생으로 자선을 베풀면 온화한 얼굴이 될 것입니다. 성지라는 거울을 통해서 나의 신앙을 돌아보는 것이 성지순례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가니까 나도 간다는 생각으로 성지순례를 가면 성지순례의 목적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듬뿍 안고 성지순례를 가면 성지순례를 왜 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가기에 앞서서 미리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읽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9일 기도를 하면서 특별한 기도 지향을 드리는 것도 좋습니다.
제가 왜 성지순례의 목적을 이야기할까요? 28년 전에 저는 거울을 보는 심정으로 성지순례를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미리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9일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동창신부님들과 함께 간다는 즐거움에 성지순례의 목적과 의미를 망각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배를 타면서 주변의 경치는 보았지만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의 마음은 몰랐습니다.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던 예수님의 음성도 듣지 못했습니다. 풍랑에 흔들리는 배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왜 그리 믿음이 약하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못했습니다. 수위권 성당에서 갈릴래아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은 찍었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베드로야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베들레헴 주님탄생 성당에서 경배하면서 저는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께 봉헌할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에서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가기보다는, 베로니카처럼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기보다는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23년 성지순례를 시작하면서 성지라는 거울에 비치는 저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하혈하던 여인의 간절함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잡아보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바치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무 위로 올라갔던 자캐오처럼 주님의 발자취를 찾아 한걸음씩 걷겠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던 사도들처럼 저도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굳게 믿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부활의 영광으로 올리셨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를 하면서 베들레헴 성당에 있는 글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려고 합니다. “당신이 이곳에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나가십시오. 당신이 이곳에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나가십시오.” 주님! 이번 성지순례에 함께 하시어 순례에 함께한 모든 이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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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지난 강론
가톨릭평화신문의 지면 중에 ‘사유하는 커피’가 있습니다. 제가 즐겨 읽는 지면입니다. 커피를 통해서 철학적인, 문학적인, 신학적인 주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3월 21일 지면에는 ‘커피에서는 부활이 무엇일까?’라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의미를 헤아리지 않고 활용하다가 영영 본뜻에서 멀어진 단어들을 소개하였습니다.
‘마누라’는 조선 시대에는 임금을 이르는 극존칭어였다고 합니다. 혜경궁 홍 씨의 한중록에는 ‘왕, 왕대비, 세자, 세자빈’ 등 궁중의 높은 인물을 뜻하는 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부르는 표현이 되었지만 요즘 부부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족하(足下)’는 상대보다 자신을 낮추는 표현이었습니다. 폐하, 전하, 저하와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요즘은 형제재매의 자식을 부르는 ‘조카’가 되었습니다.
‘서방님’도 벼슬하지 못하고 책방에서 공부하는 사람에서 남편을 일컫다가 남편의 동생을 이르는 호칭으로 쓰임이 바뀌었습니다. 장인과 장모가 사위를 부르는 호칭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말은 시대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단어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부활((Resurrection of Christ)입니다. 부활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복권(Reinstate)과 사면(Clemency)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억울하게 벼슬에서 쫓겨났거나, 감옥에 갇혔거나, 죽임을 당한 사람을 후대에 사면하거나, 직위를 복권하기도 합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사상이 중세에 다시 등장하여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바뀌는 재생을 뜻하는 르네상스(Renaissance)가 있습니다. 르네상스는 근대 서구사회의 사상과 철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패션과 문화, 예술, 건축에서 회상, 회고, 추억이라는 뜻의 복고(Retrospect)가 있습니다.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거나 과거의 체제, 전통 등을 그리워하여 그것을 본뜨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감각을 현대와 접목하여 현대적 감성에 맞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보는 ‘부활(賦活)’은 공매도 부활, 비트코인 부활, 트럼프 부활과 같은 말로 사용됩니다. 그런 부활은 활력을 주고, 생기를 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復活)’과는 한글 표기와 발음은 같지만 뜻은 다른 말입니다.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부활은 묵은 생명의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단순히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소생(蘇生)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선은 언제나 악을 이긴다.”는 이치를 말해 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단순히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거듭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부활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은 과학과 이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부활은 체험과 삶의 영역입니다. 미사 전례에서 사제는 ‘신앙의 신비여!’라고 경문을 읽습니다. 교우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신 주님, 길이 영광 받으소서.’라고 응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권능과 힘을 가지셨지만 오직 그 힘과 권능을 사랑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사용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힘을 가졌을 때, 능력이 있을 때, 재물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매를 맞았을 때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진리가 사도들을 자유롭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자의 부활로 인간의 존엄을 다시 찾아 주시고 저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으니 저희가 해마다 믿음으로 거행하는 신비를 사랑으로 깨닫고 실천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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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16-21: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6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며 감사할 줄 모르고 줄곧 그분의 마음을 상해 드렸는데 그들을 사랑하셨다. 이들을 위해 그분은 다름 아닌 당신의 ‘외아들’을 내 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으며 귀중한 피를 흘리셨다. 그분이 헐벗고 나그네 되었을 때도 우리는 못 본 체했고, 무엇 하나 포기하려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드님을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 오신다. 첫 번째 오심은 이미 지났고 지금 계속되고 있으며, 두 번째는 장차 이루어질 것이다. 이 첫 번째 오심은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두 번째 오심은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두 번째 오시기 전까지는 심판하시는 대신에 용서를 베푸시며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8절)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심판받을 필요가 없고, 믿지 않는 자들은 불신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심판은 이미 나의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판받을 사람들은 하느님께 충실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즉 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유혹에 이끌려 잘못을 저지르고, 기도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어둠을 사랑하는 자들이 받을 심판은 이러하다. 그들은 어둠을 떠나 빛으로 달려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다. 빛이 자신에게 오는데도 빛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어둠 속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시각장애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자신이 눈이 먼 것을 빛을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구원이나 멸망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21절)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는 선행이다. 선은 어둠을 사랑하지 않는다. 선은 당연히 드러나며 그것을 기뻐한다. 이제 우리는 빛으로 나아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빛으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선행하고, 단식하고 베풂으로써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올바른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살아가야 하겠다. 여기서 올바른 믿음이 자라게 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감사드리며 기쁘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며, 빛의 자녀로 영광의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즉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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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6-18)
여기서 ‘세상’이라는 말은, 그냥 단순하게 ‘인간들’을 뜻하는 말이고, ‘심판’이라는 말은, 재판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멸망’을 뜻하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멸망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받는 것입니다.(마태 18,14)>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들을 언제나 항상 ‘사랑으로’ 보살펴 주십니다. 그 사랑은, 처음부터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고,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인간들을 대신해서 속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중요한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 즉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사랑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게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저 단순히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수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즉 죄를 안 짓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소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옳지 않고, 그렇게 해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무슨 죄를 지은 것이 없더라도, 사랑 없이 사는 것 자체가 ‘큰 죄’가 됩니다.(마태 25,45) ‘믿음’과 ‘선’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선을 지향하고 선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 방법은 사랑뿐입니다. 사랑 없이는 믿음도 선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라는 말씀과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믿는 사람답게 사는 사람만’ 영생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도 영생도 얻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 2,6)
여기서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라는 말씀은, 심판이 이미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선택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심판을 받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이신 분’이라는 것을 믿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믿기를 거부하는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자기가 구원받기를 거부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9-21)
여기서 “그 심판은 이러하다.”라는 말씀은,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모습은 이러하다.”로 해석됩니다. (‘심판’ 자체를 설명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라는 말씀은, 죄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겠다고 고집부리는 자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배반자 유다의 일이 연상됩니다.(요한 13,30) 배반자 유다는 그가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끝끝내 거부하고 떠나버렸습니다. 그것은 빛이신 예수님을 떠나서 어둠 속으로 들어간 것과 같은 일이고, 예수님 품을 떠나서 ‘밖으로’ 나가버린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는 “그들이 이미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입니다. 회개는 어둠에서 벗어나서 빛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입니다. 악인이라도 회개하면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살길이 없습니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죄를 짓고 나서 숨은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연상됩니다.(창세 3,8) 하느님께서 쫓아내시기 전에 그들 자신들이 하느님을 떠났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빛을 미워해서(싫어해서) 빛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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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수원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어제 복음에 이어집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주제는 오늘과 어제의 복음을 잇는 다리가 됩니다. 그러나 어제 복음에서 ‘들어 올림’(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으로 이루어진 구원이 언급되었다면, 오늘 복음에서 구원은 외아들을 파견한 결과로 소개됩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드님을 파견하신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서가 저술된 시기에 사람들은 ‘세상’을 하느님에게서 분리되고 단절된 곳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거짓과 어두움, 육과 죽음은 세상을 지배하는 실체와 세력입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머무르고 악마가 우두머리로 군림하는 세상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 반영된 이원론적 사고는 세상을 구원하고자 외아들이 파견되었다는 사실에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이자(1,3 참조),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장소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셨고, 세상은 다시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세상을,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를 결합시키신 구원자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거짓과 잘못을 저지르며, 마지막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의 죄를 몸소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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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기쁜 말씀입니까?
믿는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하느님,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비둘기 모양의 성령께서 내려오시며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르코 복음 1장 11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우리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 주시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본성으로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 내어 주시는 분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까지 내어 주십니다.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시어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를 닮은 아드님께서는 이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찾아 만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것을 온전히 내어 주십니다. 마침내 당신 생애의 결정체인 몸을 내어 주실 뿐 아니라, 목숨까지 내어 주십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의 하느님이시며, 그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우리는 이제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에게, 아파하는 이들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 주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말함으로써,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께서 저를 죽기까지 사랑하심을 받아들입니다.’라는 뜻으로 십자 성호를 그어 몸에 새깁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아멘.”이라고 응답함으로써 ‘저도 이웃에게 나아가 내어 주겠습니다.’라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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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구원>의 골자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복음 3장 16절)
이 구절이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핵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우리 구원의 시작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고, 우리가 구원받는 조건은 믿음이라는 의미지요. 당신의 생명을 헐어 우리를 지으신 창조가 그랬던 것처럼, 구원 역시 희생의 사랑, 비우는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창조와 마찬가지로 구원도 주님과 우리의 역동적인 상호 관계 안에서 완성되어 갑니다. 주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만물을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시고 피조물은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처럼, 주님은 목숨을 바쳐 구원하시고 우리는 그분을 충실히 믿고 따름으로써 구원을 얻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복음 3장 18절)
불신과 심판은 전후 관계를 따질 수 없을 만큼 엉켜있습니다. 은총으로 허락된 믿음의 기회 앞에서 완고히 믿음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는 스스로 구원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것과 다름없지요.
스스로를 어둠에 가두고 자기중심적인 오만을 고수하는 자체가 어둠과 죄악을 구원의 자리에 놓았다는 뜻입니다. 심판이 멸망을 부르는 게 아니라 불신 상태가 이미 심판받았음을 증거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복음 3장 21절)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는 빛을 향합니다. 예수님이 곧 빛이시지요. 믿음은 우리를 빛 가운데에 머무르게 합니다.
비록 자기 허물과 삶의 고통 때문에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어도, 주님을 믿기에 희망할 수 있고, 그분 사랑을 알기에 그 자신도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합니다. 믿는 이는 믿음으로써 이미 구원 상태를 살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의 모습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여라.' 이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사도행전 5장 20절)
"감옥"은 어둠의 영역을, "이른 아침 성전"은 빛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기득권자들의 시기심으로 어둠에 갇힌 그들을 주님의 천사가 다시 빛으로 꺼내어 주지요. 그런데 권력에 의해 합법적으로 풀려난 상태가 아니라면 조용히 숨는 것이 후일을 도모하며 안전을 지키는 상식일 터인데 제자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천사가 일러준 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공적인 장소로 되돌아가 말씀을 선포하지요. 빛을 선택하는 이에게 투옥이나 박해는 더 이상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빛 한가운데 서서 빛이신 분을 선포하는 이들로 인해 수석 사제들은 몹시 당황해합니다. 그들이 아는 "무식하고 평범한" 이들이 빛 안에서 그 자신이 빛이 되어 있음을 목도하는 자체가 적잖은 충격이니까요.
빛이 어둠을 동요시키고 있습니다. 이 동요가 구원으로 이어지려면, 그들이 기득권 유지에 골몰하며 진리에 귀를 막을 것이 아니라 새로움으로 인해 진동하고 균열을 일으키는 내면을 직시하고, 빛이 스며들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모든 것의 시작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출발점만 정확히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랑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빛 안에 있습니다. 구원에 머무는 구원의 상태를 누리는 중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오늘 따뜻한 봄햇살을 받으며 산책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빛살처럼 쏟아지는 주님의 사랑을 믿고, 믿기에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사랑이 때로는 아프고 힘겨워도 우리가 받는 사랑이 있어 멈추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분이 빛이시고 진리이시니, 우리가 아무리 부족한 죄인이어도 그분 안에서는 우리가 충만하고 온전하답니다. 빛 안에서 빛이 되어 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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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슴에 품어야 할 말씀>
저는 사제수품 성구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라는 말씀을 선택하였습니다.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처신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대로 살지는 못하지만, 성찰은 합니다. 우리가 가슴에 품어야 할 성경 구절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 삶이 풍요로워지리라 확신합니다. 그중에 하나로 오늘 성경 말씀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어떤 성경학자는 이 말씀을 두고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했다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향한 사랑입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인정하고 허물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비록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죄가 있든 없든 나를 사랑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방법으로’,‘이런 식으로’란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 방법을 가리킵니다."(송봉모)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항한 대가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반항하여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너무나’하면 하느님의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자 하시는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신 나머지’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사랑은 우리를 위한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희생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었어도 이미 용서하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는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주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사랑하신 나머지’,‘외아들을 내주시어’모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하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줍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사는 방법을 알려줬는데도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5에 보면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고 또 거절하는 것은 어둠의 지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어둠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은 곧 악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악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 자체가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된 것이 심판입니다. 하늘로부터 또 이웃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면 그보다 무서운 심판이 어디 있겠습니까?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빛을 거부하는 자신입니다. 심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서부터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별들처럼 빛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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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종종 기도가 너무 어렵다는 분을 만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주일 미사’ 참석하는 것도 힘든데, 평상시에 시간을 내어 기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정말로 힘든 일일까요?
물론 기도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마음의 평화도 얻고, 자기 삶을 정리할 수 있어서 분명히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기도하기까지가 너무 힘들다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냐고 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정의하지요. 아주 친한 친구와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절친’이라는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만났고,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까?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한 마디의 대화도 하지 않고서 ‘절친’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계속 만나고 대화해야지만 가능합니다. 하느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식사한 뒤에 꼭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 양치질을 하실 것입니다. 원래 인류는 양치질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양치질한 지는 10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이 양치질합니다. 양치질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더럽다고 피하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본인이 찝찝해서 못 견딥니다. 하다못해 껌이라도 씹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습관이 되어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기도가 어려운 이유는 습관이 되지 않아서입니다. 양치질이 인간 치아 건강에 큰 도움을 준 것처럼, 우리 삶에 기도는 커다란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습관적이라도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을 만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고 하십니다.(요한 3,16 참조) 따라서 주님과 대화하고 만나는 데 집중하는 습관이 가장 좋은 것이며 우리에게 꼭 필요한 습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습관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습관을 들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을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한 3,19)라고 하십니다. 빛이신 주님이 아닌,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어둠의 것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면서 그 어둠의 길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빛으로 나아가면서 주님의 뜻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좋은 습관을 나의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즉, 양치질처럼 당연히 해야 하는 기도와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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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의 길>
요한 3,16-21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믿음의 길>
빛을
믿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더디더라도 쉼 없이
빛이 되어갑니다
선을
믿는 이는
선으로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더디더라도 쉼 없이
선하게 되어갑니다
사랑을
믿는 이는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더디더라도 쉼 없이
사랑이 되어갑니다
희망을
믿는 이는
희망으로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더디더라도 쉼 없이
희망이 되어갑니다
진리를
믿는 이는
진리로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더디더라도 쉼 없이
진리가 되어갑니다
의로움을
믿는 이는
의로움으로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더디더라도 쉼 없이
의롭게 되어갑니다
거룩함을
믿는 이는
거룩함으로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더디더라도 쉼 없이
거룩하게 되어갑니다
살림을
믿는 이는
살림으로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더디더라도 쉼 없이
살림이 되어갑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는
하느님께로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더디더라도 쉼 없이
하느님처럼 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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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빛으로 나아가는? 빛으로부터 숨는?>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악을 저지르는 자가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자기의 죄악이 다 드러나기에 나아가지 않고 숨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빛이란 빛이신 주님이고 그래서 영적인 의미의 빛이지만 죄를 지으면 영적인 의미뿐 아니라 실제로도 빛이 두려워 숨습니다.
어려서 제가 돈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마침 남의 집에 갔을 때 방바닥에 동전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생각이나 망설임 없이 그것을 가졌습니다. 돈을 훔친 것이지요.
그런데 그때 저는 그것이 도둑질이라는 것도 모를 정도로 어렸는데 집에 와서 그 돈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있자니 차츰 제가 나쁜 짓을 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집을 나가서 밤늦도록 밖에서 떨었습니다.
저의 첫 번째 죄의식이었고, 어린 제게는 밤이 무척 무서운데도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밤의 두려움보다 죄가 드러나는 것이 더 두려웠던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죄짓고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숨었는데 죄 드러나는 것의 두려움이 하느님의 두려움으로 바뀌었고, 죄를 숨기려던 것이 하느님과 단절케 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숨기려고 하지만 시편 139편에서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내 모든 행위를 익히 보시나이다.”라고 다윗이 노래하듯 하느님은 다 아시는데 숨느라 하느님과 단절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노래하지만, 다윗도 처음에는 바세바와 간음한 사실을 숨기려고 그 남편을 죽인 사람이고, 그러나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그 사실을 드러나게 하시자 시편 51편에서 “당신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노래하고, 139편에서도 앞에서 본 것처럼 노래한 것이지요.
아무튼, 우리 인간은 죄를 숨기려다가 빛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숨고, 하느님과 단절되고 마는데, 오늘 저는 결이 좀 다른 차원에서 우리 삶을 성찰코자 합니다. 우리의 영성 생활 차원 말입니다.
저의 경우 프란치스코를 알면 알수록 제가 프란치스코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 사람인지 드러납니다.
그래서 처음 한동안은 프란치스코를 닮으려 애를 쓰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프란치스코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함을 발견하고, 그리고 더 있어봤자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수도회를 떠난 적이 있지요.
그런데 저와 같이 수도회를 떠나지 않더라도 프란치스코를 알수록 자기의 한계를 보는 것이 괴로워 프란치스코에게 나아가기를 중단하고 차라리 다른 성인들 얘기를 강론이나 강의 때 하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꼭 따라야 하지만 다른 성인은 꼭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요.
우리의 공동생활에서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잘살고 있는 형제들 곧 빛이 되는 형제들도 있는데 그런 형제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부담스러워 편한 형제들과만 어울리거나 더 안 좋은 경우는 유유상종하며 공동체의 어두운 면만 뒷담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자신을 성찰합니다. 나는 빛으로 나아가는 존재인가? 나는 빛으로부터 숨는 존재인가?
오늘부터 한 주간 모 수녀회 피정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주간 강론은 수녀님들을 위한 강론입니다. 감안해서 들어주시고 양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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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의 선택, 선택의 은총>
-“사람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궁극의 답이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2.6)
참 좋은 화답송 시편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 대한 영문주석이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부분을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이야기는 사도들과 유다 지도자들간에 점증하는 긴장으로부터 ‘우스꽝스런 구원(comic relief)’을 마련해 준다. 천사가 그들의 죄수들을 풀어줌으로 야기된 산헤드린 최고의회의 당황함은 참으로 ‘익살맞다(funny)’. 그것은 신적神的 경솔함(divine levity)의 섬광閃光이다. 누군가 알아채고 한말이다. ‘사탄이 추락한 것은 진지함 때문이다.’ 오늘 두 독서의 가르침은 ‘가볍게 하라!(lighten up!)’처럼 보인다”
심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각함, 엄중함, 진지함은 참영성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유머처럼 생각하고 마음을 가볍게, 밝게 지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쾌하게, 유쾌하게, 상쾌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계되어 읽은 글도 생각납니다.
“심각함은 덕이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악덕이다. 엄숙함은 사람들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러나 웃음은 도약이다. 무거워지기는 쉽고, 가벼워지기는 힘들다. 사탄은 엄숙함의 힘에 의해 추락했다. 천사들은 자신을 가볍게 함으로 날 수가 있었다.”
선택이 답입니다. 선택의 은총입니다. 이왕이면 행복을, 사탄이 아닌 천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제의 선택이 저를 참으로 행복하게 했습니다. 우연히가 아닌 은총의 선택입니다. 뜻밖에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의 사순특강을 동영상으로 감명깊게 공감하며 재미있게 보고 들은후 원장수사에게 휴대폰을 알아 아빠스와 주고 받은 내용입니다. 아래 두 경우 저의 탁월한 선택이었고 이 또한 선택의 은총임을 절감했습니다.
“뜻밖에 유투브에서 아빠스님의 사순특강 재미있게 감명깊게 보고 들었습니다. 정말 준비하시노라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부활 축복 가득 받으세요!”
“신부님의 격려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셔서 좋은 말씀 많이 들려주세요.”
주고받은 선택의 격려의 덕담이 참으로 저를 행복하게 했고, 즉시 원장수사를 불러 차 한잔 하며 이 기쁨을 나누었으니 실로 몇 달만에 은총의 선물같은 만남이었습니다. 또 재활병원에 입원중인 분이 보내준 사진이 너무 환상적인 아름다움이라 주고 받은 메시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혼자 병실에 있었더니 직원 간호사님이 옥상 여행 시켜주었습니다. 꽃구경 봄바람 구경했나이다.”
“사진이 너무 멋지고 아름다워 환상적입니다. 두 분이 정말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들같기도 하고 천사들같기도 합니다. 감사드리고 축하드립니다. 간호사님께 고맙다는 인사 전해 주세요.”
“네 신부님, 감사하옵니다.”
주고 받은 선택의 격려의 덕담에 참 행복했고 긴 여운의 향기로 남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참 좋으신 분을 선택할 것을 간곡히 권하는 느낌입니다. 복음 서두 말씀이 참 인상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이와 연상되어 떠오르는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13,1)
부전자전, 그 아버지에 그 아드님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에 주신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입니다.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는데, 그 아드님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실 때가 되자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새삼 두분에게는 사랑이 답이요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구원도 심판도, 행복도 불행도 선택입니다. 선택의 은총입니다. 어리석어 무지로 인해 이 좋은 선택을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이요 빛이요 영원한 생명이요 진리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어둠의 세상에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요! 인류의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사람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런지요! 어디서 희망과 기쁨을 찾을 수 있을런지요. 제가 조선 선비들의 평전을 읽으며 결정적인 아쉬움은 초월적 희망과 기쁨이, 파스카의 희망과 기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치명적 결함입니다.
그러니 빛이요 생명이요 진리요 구원이요 희망이요 기쁨이요 행복이신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예수님을 새롭게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지혜로운 선택은 없습니다. 무거워지기는 쉬워도 가벼워지기는 힘듭니다. 사탄이 추락한 것은 무거움 때문이요 천사가 날 수 있는 것은 부단히 자기를 비워 가볍게 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파스카 예수님을 선택할 때 날로 가벼워져 천사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최고의 탁월한 선택은 빛이자 생명이자 진리이자 행복이신 파스카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탁월한 모범은 사도행전의 사도들입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음을 봅니다. 주님의 천사가 개입하여 수인들이 된 사도들을 풀어줌으로 최고의회를 웃음거리로 만듭니다. 마치 빛이신 하느님과 어둠의 세력간의 싸움같습니다. 다음 두 구절이 사도들의 완전 승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선택했을 때의 사필귀정의 결론입니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새삼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생명의 말씀을 가둘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보고가 점입가경입니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의 은총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궁극의 답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예수님뿐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빛이자 생명이자 진리이자 생명의 말씀이자 행복인 주님을 날마다 선택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고백하고 그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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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3,17)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오늘 복음(요한3,16-21)은 '니코데모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 대답의 결론'입니다. 곧 "위로 태어나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에 니코데모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예수님 대답의 핵심이 바로 오늘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으로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는 말씀이 끝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영원한 생명)하시려고, 우리를 다시 부활하게 하시려고, 세상 안으로 당신 자신을 보내신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3,18)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심판은 '빛이신 당신을 따르지 않고, 어둠과 악을 더 사랑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는 심판'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과 그 반대의 나라인 지옥은 이미 우리 가운데에 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천국의 삶'을 살 수도 있고, '지옥의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구원과 비구원', '생명과 죽음'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 '선택권'은 '오로지 나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모든 것의 본질적인 결과는 너로부터 주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나의 선택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인 예수님을 선택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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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X5ixt2Xip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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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7)
목적과 파견은
예수님을 통한
사랑의 구원에
있습니다.
하느님 자체가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께서는
구원과 해방
치유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이신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은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생과
수난은 피조물과
하나 되고자
하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구원입니다.
구원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참된 사랑이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는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모아집니다.
하느님과
하나 되는
순간이 바로
구원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로
결합하는
놀라우신
사랑입니다.
사랑은 심판이
아닌
구원과
회복을
되찾아 줍니다.
참된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참된 사랑을
계시하십니다.
참된 사랑은
삶다운 삶인
사랑이며
구원입니다.
구원은
심판이 아닌
사랑의 실천임을
실천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뜨겁게
배웁니다.
오늘의 구원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오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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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7)
하느님
사랑에서
시작되는 강렬한
구원의 기쁨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영원합니다.
변함없는
사랑이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더 사랑하기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랑과 구원은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깊이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삶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랑과
구원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구원은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믿는 행복입니다.
불안이 아닌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랑은 예수님을
향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길이
구원의 길입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우리 삶안에
이미 와 계신
주님을 믿습니다.
사랑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는 사랑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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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심없이 '성모송' 제대로 바치는 방법 – 전주교구 박상운 토마스 신부님
https://youtu.be/-Sb14Z-Vx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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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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