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추종의 실천, 마티아 보선(補選)
사도 1,15-26; 요한 15,9-17 / 성 마티아 사도 축일; 2024.5.14.
오늘은 성 마티아 사도 축일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9.12) 하신 예수님의 계명에 따라서, 초대교회가 행한 첫 일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떨어져 나간 유다의 자리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서, 즉 그분이 열두 제자를 부르신 역사적 선택의 뜻에 충실하고자 이스카리옷 유다의 배신으로 비워진 한 자리를 마저 채워서 열두 제자로 교회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 보궐선거를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하여 백스무 명 가량 되는 무리가 모였습니다(사도 1,16). 이 무리는 우선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제자 가운데 열한 명과, 그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복음을 선포하면서 합류한 예순 명에다가, 이들이 또 두 번째로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면서 확보한 토박이 지지자들을 포함한 숫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던 공생활 동안 줄곧 동행했던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뽑아서 유다의 자리를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초대교회의 첫 행적을 통해서 세상을 복음화시키고 교회도 민주화하는 큰 원칙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셨다는 제자 선발의 역사성을 계승하는 일은 그분이 예언자적 정통 노선을 걸으시고자 하셨고 이 노선을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 왕정시대에 우상숭배에 물들어 훼손되기도 했으나, 본시 이스라엘 백성의 질서는 열두 지파의 연합체제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한 개인이 왕정에서 왕이 휘두르는 전제적 권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하지 않았고, 오직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목자요 왕이셨습니다. 그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거나 혈통이 좋아도, 그는 하느님을 믿는 백성의 일원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시적인 지도자는 이 열두 지파의 연합체제 안에서 지파별 대표자들이 하느님께서 부르셨다고 인정되었던 예언자들, 즉 모세, 여호수아 그밖의 여러 판관들과 사무엘 같은 지도자들만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유다가 스승을 배신하고 나간 그 자리를 채우고자 했던 것이었고, 또 그렇게 해서 채워진 열두 사도들이 순교하여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두 번 다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열둘이라는 숫자 안에 담겨 있는, 예언자적 정통 노선에 따른 연합체제의 공동합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하셨던 예수님의 뜻이 계승되어야 한다는 예수 추종의 의지가 중요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예언자적 정통 노선은 하느님의 구원의지에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를 당신 백성으로 이끌고자 원하셨고, 그 백성 안에서 당신의 나라가 세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단계적인 절차에 따라서 먼저 당신의 뜻을 가시화시켜 구현할 수 있는 이스라엘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런데 왕정시대를 거치면서 이 뜻이 훼손되고 줄어들고 심지어 왜곡되기까지 했기 때문에 구세주를 보내신 것이고, 따라서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원상회복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열두 제자의 연합체제와 이들에 의해 계승되어야 할 성체성사, 그리고 이 성체성사에 참여함으로써 예수님의 생명을 이어받아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할 새 이스라엘로서의 하느님 백성, 즉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또 앞으로도 지켜져야 할 세상 복음화의 원칙입니다.
셋째, 초대교회는 최초에 부르심 받은 열두 제자와, 이들을 포함한 일흔두 제자에다가 토박이 지지자들까지 백스무 명 가량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 모두가 참여한 가운데 추천을 받아 사도 보선이 이루어졌습니다. 추천의 조건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으로서 이를 보편화된 원칙으로 풀면 신앙이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신앙의 충실성 여부는 동료들의 인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바르사빠스 요셉과 마티아, 이 두 사람으로 후보를 압축한 다음, 기도하고 나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관련된 신앙인들의 추천 과정과 기도 그리고 제비뽑기가 교회의 직무를 맡을 사람을 선발하는 절차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이 절차가 교황 선출에만 적용되고 있습니다. 교황직무가 궐위되면, 즉 교황이 선종하거나 퇴위하면 80세 미만으로 선출권을 가진 추기경단이 소집되고, 이들 안에서 투표하여 2/3 이상의 득표를 할 때까지 무제한 계속합니다. 이 동안 외부와는 전면 차단되어 자물쇠로 채워진 방에서 감금된 채로 교황 선출 절차가 진행되기에 라틴어로 ‘감금된 자리’라는 뜻으로 ‘콘클라베(Conclave)’라고 합니다. 황제의 간섭 등 외부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마련된 이 절차가 확정되는데 1천 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넷째, 고대교회 때까지 모든 교회 직무는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관련 신앙인들의 추천에 의해서 선발 절차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서품 공시 절차가 그 흔적입니다. 그런데 매우 형식적이 되어 버렸지요. 그리고 신앙의 충실성을 보완하고 확인하는 절차로서 신학 과정을 밟게 한 후 일정 수준 이상을 취득하게 하고 반드시 공동 생활을 통해 성품과 신앙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임명 절차가 따릅니다. 이렇게 서품된 사제들 중에서 주교직을 맡을 후보자를 교황이 상시로 확보했다가 궐위되면 그 후보자들 중에서 임명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사제 선발에 대한 신앙 공동체의 추천권도 명실상부하게 살아나고, 교구와 본당의 책임을 맡는 직무도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그리고 교황 선출 절차를 참고하여 성서적이고 민주적으로 추천되고 선발될 날이 올 것입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는 상호 섬김의 공동합의 전통을 활성화시켜야 하는 전통은 그 다음입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왕정으로 축소, 왜곡, 훼손되었던 역사적 교훈을 기억하여 예수님께서 복원하신 예언자적 정통 노선의 바탕 위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고, 이것이 사회 복음화와 교회 민주화의 대원칙입니다.
우리 사회의 현실과 교회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대원칙을 오늘 성 마티아 사도 축일의 전례적 취지와 하느님 말씀의 초점에 따르자면 중요한 시사점이 발견됩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달라진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역사적 선택에 충실해야 한다는 ‘예수 추종’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복음 말씀을 중심으로 전례를 거행하는 큰 뜻인데, 중요한 것은 전례에서 복음 말씀을 중심으로 거행하듯이 교회 운영과 신자 생활에서도 복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복음적 매력을 발산하고자 하면 이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복음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삼년 마다 가,나,다 해로 나누어 전례에 배치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전례력의 특성에 맞추어 복음 말씀을 봉독합니다. 구세주 오시기를 기다리는 대림 시기에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을 봉독하고, 성탄 시기에는 이 두 복음서에 들어 있는 예수 탄생 이야기와 함께 요한 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강생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사순 시기에는 네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들을 발췌하여 봉독하고, 부활 시기에는 요한 복음에 집중하여 봉독합니다. 사순 시기의 기간이 한 달인데 비해 부활 시기는 오순 즉 오십일이나 됩니다. 이는 십자가의 신비에 담겨 있는 부활의 뜻을 묵상하고 그에 따른 사기지은의 실천적 의미를 아는 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연중 시기에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세상을 복음화시키자는 취지로 모든 복음서를 봉독하되, 마르코 – 마태오 – 루카 복음서의 순서로 봉독합니다.
또한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 등 네 복음사가가 기록한 복음서는 성령의 감도로 쓰여졌고, 이는 복음서의 각 구절과 문장에 대해서 반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네 복음서가 각기 차지하는 특성과 구조에도 반영되고 있다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대신경(大信經.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과 사도신경(使徒信經)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 신조가 확정되기 전까지 고대 교회에서는 이 네 복음서로 예비자를 가르치고(마르코 복음서), 신자들의 재교육을 실시하며(마태오 복음서), 선교사를 양성하고(루카 복음서), 신앙의 성숙을 도모했는데(요한 복음서), 이는 네 복음서가 쓰여진 취지와 각기 다른 특성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막 신앙의 길에 들어서고자 하는 예비자들을 가르치는 데 사용되었던 마르코 복음서의 초점은 “예수는 누구인가?”를 알리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그분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없다는 이른바 ‘메시아 비밀사상’을 전제로 예수님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이유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함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자비임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서를 이해한 예비자들이 거둘 수 있는 신앙의 열매는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단지 세상의 죄에서 벗어나는 물의 세례만이 아니며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 하셨던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는 성령의 세례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代贖)의 삶이지요.
세례를 받은 신자들에게 신앙 재교육 교재로 쓰인 마태오 복음서의 초점은 “교회는 누구인가?”를 깨닫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대속적 삶이라는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되어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십자가야말로 부활의 길임을 깨달아야 하고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 안에는 부활의 길이 다섯 꼭지의 설교, 즉 산상설교와 파견설교와 비유설교와 공동체 설교 그리고 종말설교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요한 가르침을 집대성한 이 설교들을 통해서 신자들은 부활한 삶을 사는 길을 배우게 되고, 이 부활 신앙의 삶이 교회 생활임을 터득하게 됩니다.
아직도 더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살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살고 있으므로, 루카 복음서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는 의도로 쓰여졌습니다. 특히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서의 핵심이 ‘하느님 나라’ 또는 ‘하늘 나라’의 복음으로 소개된 바를 루카 복음서에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로 풀어서 소개됩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친 성숙한 신자들이 더 깊은 신앙의 경지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요한 복음서는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의 초점은 ‘영원한 생명’을 이 현세에서부터 누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마르코, 마태오, 루카 등 이른바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 복음서의 줄거리가 비슷해서 서로 비교하고 대조해 가면서 볼 수 있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들보다 한층 더 높은 차원에서 예수님의 신원을 소개하고, 한층 더 깊이 있게 그분을 믿을 수 있는 길을 안내합니다. 그래서 일곱 가지의 사건을 통해서 그분의 신적 신원이 드러났음을 알려주면서, 마지막으로는 부활 신앙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네 복음서는 다만 전례용이 아니라 교회 운영에 있어서 항상 참조해야 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신자들의 교회 생활에 있어서도 복음서는 장식용이거나 매일미사 책으로 대체되는 용도가 아니라 기도와 독서를 통해 늘 들여다 보아야 하는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오늘날에도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명심했던 바 ‘예수 추종’의 대원칙을 지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의 환시(에제 1,10)와 사도 요한의 환시(묵시 4,7)에서 유래된 네 복음서의 상징은, 역동적인 메시아를 그렸으며 광야에서 포효하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으로 시작되는 마르코 복음서는 사자로, 자상한 해설로 하느님의 자비에 이르는 부활의 길을 그린 마태오 복음서는 천사 같은 형상을 한 사람으로,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통한 이방인 선교를 강조한 루카 복음서는 선교 노력을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로 그렸으므로 전통적인 번제물로 바쳐진 황소로, 한처음부터 계신 존재로 예수님을 알려 준 요한 복음서는 높은 창공에서 지상의 먹잇감을 꿰뚫어 본다는 의미로 독수리로 상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