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示衆)
10-7 연야 달다가 머리를 잃다
大德아 時光可惜이어늘 祇擬傍家波波地에 學禪學道하며
認名認句하며 求佛求祖하며 求善知識意度이로다.
莫錯하라 道流야 儞祇有一箇父母어니 更求何物고 儞自返照看하라.
古人云, 演若達多失却頭라가 求心歇處卽無事로다.
《해석》
“대덕아! 시간을 아껴야 하거늘,
다만 옆길로만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선(禪)을 배우고 도(道)를 배운다고 하는구나.
이름과 글귀를 잘못 알고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한다고 하는구나.
선지식을 찾아가서 생각으로만 헤아리는구나.
그렇게 잘못 알지 말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에게 다만 일개 부모[根本]가 있다.
다시 무슨 물건을 구하는가?
그대들 스스로 돌이켜 보라.
옛사람이 이르기를
‘연야달다(演若達多)가 머리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다가
다시 구하는 마음이 쉰 그 순간에
아무런 일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강설》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하고 참선을 한다고 하면서
공연히 옆길로만 치닫는다.
책자를 통해서나 남의 이야기를 듣고
부처니 조사니 보살이니 하는 것을 찾는다.
그들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나름대로 헤아리고 사량 분별한다.
그러면서 아까운 시간들을 다 써 버린다.
인생은 짧다.
시간은 흐르는 물처럼 잠깐 사이에 지나간다.
사람의 몸 만나기 어렵고 불법 공부하기 더욱 어렵다.
이렇게 어려운 것을 다행히 만났다.
천만금을 주고도 못 얻을 불교를 만났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제발 그릇 알지 말라.
우리들에게는 모두 우리들의 근본 마음자리가 있다.
그것을 버리고 다시 무슨 물건을 구하는가.
부디 잘 생각해 보라.
능엄경(楞嚴經)에서 연야달다가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잘못 생각하여
거울 안에는 사람의 머리가 있는데
자신의 머리는 어디 있는가? 라고 하여
자신의 머리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대의 머리는 그대로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갑자기 자신의 머리는 잃어버린 적이 없고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순간 머리를 찾으려는 마음이 쉬어버렸다.
더 이상 아무런 일이 없어졌다.
머리가 있는데 머리를 다시 찾을 일이 있겠는가.
쓸데없는 짓 그만들 하고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라.
성불한다는 일이 그와 같은 이치다.
이것이 성불의 지름길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진짜 불교 공부다.
두상안두(頭上安頭)라는 말이 있다.
머리 위에 다시 또 머리를 하나 올려 둔다는 뜻이다.
머리를 두 개 포개어 달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어떻게 되겠는가.
틀림없이 요귀(妖鬼)이거나 아니면 있을 수도 없는 병신이다.
우리들은 이미 완전무결한 부처님인데
다시 부처를 찾아 헤매는 일이 그와 같다는 말이다.
속 터질 일이고,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이 이치는 수억만 번을 강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불교이며, 공짜불교다.
돈도 들지 않으며 노력도 들지 않는다.
정말 바르고 좋은 가르침은 이렇게 쉽고 간단하고 편안하다.
그래서 과거의 모든 눈 밝은 선지식들은
전부 임제 스님의 가르침과 그 사상을 받들고 숭상한다.
법주사에 있는 벽암(碧巖, 1575-1660) 스님의 비문에
“태고(太古, 1301-1382) 스님이 중국에 들어가서
부처님의 종지를 얻어서 우리나라에 돌아와 전한 그 법이
벽암 스님에게까지 여덟 번째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임제 스님의 바른 종통(宗統)이다.”라고 하였다.
또 편양(鞭羊, 1581-1644) 스님의 어록에
“임제 스님의 전통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이라야
근본과 연원이 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의 태고 스님은 중국에 들어가서
임제 스님의 법을 이은 석옥(石屋, 1272-1352) 스님의 법을 잇고 와서
다시 환암(幻庵, 1320-1392) 스님에게 전하였다.
환암 스님은 다시 구곡(ꜫ谷) 스님에게 전하고
구곡 스님은 다시 정심(正心) 스님에게 하고
정심 스님은 다시 운운” 하였다.
또 대흥사에 있는 서산 청허(西山淸虛, 1520-1604) 스님의 비문에
“임제 스님이 열여덟 번째 법을 전하여 석옥 스님에게 왔고
태고 스님은 석옥 스님에게 전해 받았다.
이로부터 여섯 번 전해져서 우리 스님에게 전해졌다.
그 법의 원류가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전거는 부지기수다.
전거를 모두 소개하려면 책을 따로 한 권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들의 법손이 아닌가.
그들이 물려준 불교를 하고 있지 않은가.
배불숭유(排佛崇儒)의 피눈물 나는 아픈 역사를 딛고 물려준 것이다.
그래서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반드시
“빨리 사바세계에 오시어 임제문중에서
길이 인천의 안목을 지으소서.”라고 간절히 축원한다.
한국불교의 전통이 이와 같은데 그 정신은 모두 어디 갔는가.
하루 빨리 바르고 전통이 있는 정통(正統)불교로 돌아가야 한다.
특히 이 단락에서는
“이자반조간(儞自返照看),
연야달다실각두 구심헐처즉무사(演若達多失却頭 求心歇處卽無事)”를
사무치게 참구하다보면 저절로 마음이 쉬어질 것이다.
大德아 且要平常인댄 莫作模樣하라.
有一般不識好惡禿奴하야 便卽見神見鬼하며 指東劃西하며 好晴好雨하나니
如是之流는 盡須抵債하야 向閻老前하야 呑熱鐵丸有日이니라.
好人家男女가 被這一般野狐精魅所著하야 便卽捏怪하니
瞎屢生이여 索飯錢有日在로다.
《해석》
“대덕들이여! 평상 생활 그대로이기를 바란다면 다른 모양을 짓지 말라.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머리 깎은 노예들이 있다.
그들은 문득 귀신을 보고 도깨비를 보며,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구분하며,
맑은 것이 좋으니, 비 오는 것이 좋으니 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모두 빚을 지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
뜨거운 쇳덩이를 삼킬 날이 있을 것이다.
공연히 아무 탈 없는 집안의 남녀들에게
일종의 여우와 도깨비의 정령이 붙어 있다.
마치 멀쩡한 눈을 비벼서 괴상망측하게
허공에서 헛꽃을 보는 일과 같이 되었다.
이 눈멀고 어리석은 것들아.
밥값을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강설》
평상심이 도라고 했다.
도는 평상의 삶인 것이다.
그런 도를 위해서라면 아무런 조작이나 인위적인 꾸밈을 짓지 말라.
조작이나 꾸밈은 다 가짜다.
진실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사는 일밖에 달리 무엇이 있는가.
도니 진리니 불법이니 하는 것은 모두가 이대로 사람이 사는 일이다.
평상의 삶이다.
그런데 여기에 아무도 모르는 머리 깎은 노예들이 있다.
그들은 이상한 불교를 배워가지고
있지도 않은 귀신이나 도깨비들을 보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 있다.
자신을 저버리고 부처를 말하고 조사를 말하는 이들도 다 그와 같다.
또 불교를 말하면서 동쪽이 어떠니 서쪽이 어떠니 하는 일도 있다.
그리고 맑은 날 비 오는 날을 운운하는 괴상망측한 사람들도 많다.
관세음보살이 영험이 있느니, 지장보살이 영험이 있느니 한다.
무슨 산이 영험이 있느니, 무슨 섬이 영험이 있느니 한다.
이 진언이 좋으니, 저 다라니가 좋으니,
참선이 좋으니, 염불이 좋으니 한다.
간화선이 좋으니 묵조선이 좋으니 한다.
이 스님이 큰스님이니, 저 스님이 큰 도인이니 한다.
완전히 도깨비에 홀린 삶이다.
불교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라.
아니면 불교를 그만 두어라.
불교는 없다.
차라리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라.
사람이 일상의 삶을 버리고,
또 당당한 자기 자신을 버리고 밖으로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임제 스님은 그와 같다고 본다.
이런 일들은 모두 염라대왕 앞에 가서
뜨거운 쇳덩이를 삼킬 날이 있을 것이다.
공연히 아무 탈 없는 집안의 사람들에게
여우나 도깨비들의 정령이 붙어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공연히 눈을 비벼서
허공에 꽃이 가득 피어 있는 것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본다.
야, 어리석고 눈 먼 자들아, 시주들의 밥값이나 갚아라.
《문수경전연구회 강좌》
10-7 演若達多(연야달다)의 얼굴
大德(대덕)아 時光可惜(시광가석)이어늘
祗擬傍家波波地(지의방가파파지)에 學禪學道(학선학도)하며
認名認句(인명인구)하며 求佛求祖(구불구조)하며
求善知識意度(구선지식의탁)이로다.
莫錯(막착)하라 道流(도류)야 儞祇有一箇父母(이지유일개부모)어니
更求何物(갱구하물)고 儞自返照看(이자반조간)하라.
古人云(고인운), 演若達多失却頭(연약달다실각두)라가
求心歇處卽無事(구심헐처즉무사)로다.
大德(대덕)아 且要平常(지요평상)인댄 莫作模樣 (막작모양)하라.
有一般不識好惡禿奴(유일반불식호오독노)하야
便卽見神見鬼(변즉견신견귀)하며
指東劃西(지동획서)하며 好晴好雨(호청호우)하나니
如是之流(여시지류)는 盡須抵債(진수저채)하야
向閻老前(향염노전)하야 呑熱鐵丸有日(탄열철환유일)이니라.
好人家男女(호인가남녀)가 被這一般野狐精魅所着(피자일반야호정매소착)하야
便卽捏怪(변즉날괴)하니 瞎屢生(할루생)이여
索飯錢有日在(색반전유일재)로다.
이건 능엄경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임제 스님의 그 법문은 간단합니다.
핵심이 뭔고 하면 끊임없이 자기 자신,
현재 말하고 말을 듣는 바로 그 사실,
그 사람에게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 외의 것은 전부 가짜고 지어낸 것이고
따지고 보면 허위고 그림자고 꿈이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외적인 상황으로 너무 팔려 다니지 말라,
팔려 다니면 진정한 자기 자신, 무위진인을 망각하게 된다.
그거 망각하면 정말 귀신에 덮어 씌인 것 같이 돼 버리고
무단히 돈 사람이 돼 버리는 그런 상황이다 하는 것입니다.
演若達多(연야달다)도 결국 그런 이야긴데,
‘大德(대덕)아 時光可惜(시광가석)이어늘’,
대덕이여 시간을 가히 아껴야 하거늘,
‘祗擬傍家波波地(지의방가파파지)에’, 다만 옆집으로 부산하게,
파파지라고 하는 것은 아주 부산하게,
‘學禪學道(학선학도)하며’, 禪도 배우고 道도 배운다 하며,
또 ‘認名認句(인명인구)하며’, 이름을 명사들을 알고, 또 구절을 알려고 하며,
‘求佛求祖(구불구조)하며’, 그런 것을 통해서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하며,
또 ‘求善知識意度(구선지식의탁)이로다’,
선지식을 구해서, 意度(의탁), 생각으로 헤아림이로다.
그리들 한다 이거요.
지금 불교 공부라는 게 대개 그렇죠.
거의 뭐 99 프로가 그렇게 해서 불교 공부를 하는 것인데,
‘莫錯(막착)하라’, 착각하지 마라.
‘道流(도류)야 儞祇有一箇父母(이지유일개부모)어니’,
우리에게는 다만 일개 부모가 있다.
이게 뭔 말인고 하니, 청법저인, 무위진인,
지금 보고 듣고 하는 바로 그 사람이 있다 이 말이여.
그걸 두고 하는 소립니다.
그게 유교적인 관점에서 부모라고 하는 것은
제일 큰 의지처고 기둥이고 전부입니다.
왜냐, 忠孝거든요.
벼슬 나간 사람은 나라에 충성하는 게 생명보다 더 중요한 일로 알고
그 외 모든 백성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제일 큰 과제고
그것이 생명이고 그것이 그냥 평생 할 일입니다.
우리나라도 그 유교적인 관습 때문에 그런 것을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시골에서 부모들의 그 묘를
오랫동안 그냥 지켜야 하기 때문에
시골을 떠나지 못하는 사례들도 많이 보는데.
그래서 부모라고 하는 것은 서민들에게는 이 세상이고 이 우주고
나의 기둥이고 나의 전부가 그저 부모입니다.
여기서는 그런 뜻이에요.
그대들에게는 다만 일개 부모가 있다.
말하자면 나의 기둥, 청법저인, 무위진인,
보고 듣는 그 사람, 그 사람이 있으니,
‘更求何物(갱구하물)고’, 다시 무슨 물건을 구하겠는가.
‘儞自返照看(이자반조간)하라’, 그대들은 스스로 반조해서 보라,
한번 돌이켜 보라.
‘古人云(고인운)’, 고인이 말하기를,
‘演若達多失却頭(연야달다실각두)라가’, 연야달다가 머리를 잃어버렸다가,
‘求心歇處卽無事(구심헐처즉무사)로다’, 구하는 마음,
머리를 구하는 마음을 쉰 곳에,
그 마음이 쉬어버리니까 곧 아무 일이 없었다, 그 말입니다.
이 한 마디를 능엄경 四권에 있는 내용을 게송으로
이렇게 간단하게 표현을 했습니다.
참 좋죠.
演若達多失却頭(연야달다실각두)라가 求心歇處(구심헐처),
구하는 마음이 쉬는 곳에서 곧 아무 일이 없더라.
연야달다가 실라벌성에 사는 사람인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니까
아주 그 잘 생긴 그런 얼굴이 하나 있거든요.
그런데 그 얼굴을 보고 왜 나는, 내 머리는 어디 갔는가,
내 얼굴은 어디 갔는가,
내 머리는 어디 갔는가, 이런 생각을 문득 하게 된 거요.
그게 한 순간 정신이 약간 이상하게 된 거죠.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무슨 약을 잘못 먹은 것도 아닌데
그래 가지고 그만 미쳐서 온 곳을 돌아다니면서
내 머리 못 봤는가, 내 머리 못 봤는가, 그렇게 하는 거요.
실지로 실라벌성에 그런 사건이 있었어요,
이 사람은 뭣 때문에 그렇게 아무 까닭 없이 돌아다니는가.
여기 말은 그거에요.
사실은 머리를 잃어버린 게 아니잖아요.
문득 거울을 보다가 거울에는 아주 어여쁜 얼굴이 있는데
왜 내 얼굴은 어디 갔는가.
사실은 그렇게 생각할 까닭이 아닌데
정신이 약간 착각을 일으키려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자기 얼굴, 자기 머리를 찾으려고 온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구했는데,
모두 다 ‘저 미친 사람’, ‘저 미친 사람’ 만 했지
그 사람을 깨우쳐 주려고 생각을 못했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아, 네 머리는 네 목 위에 그대로 있다,
아무도 누가 가져간 사람도 없고 전혀 손상도 없고
그대로 네 머리는 네 목 위에 그렇게 있다,
네가 한번 만져봐라.
그렇게 누가 용기를 내서 가르쳐 줬어요.
그러니까 떡 만져보니 있거든.
그래서 다시는 구하는 마음이 쉬어 버렸어.
더 이상 구할 필요가 없는 거야.
그래 求心歇處卽無(구심헐처즉무)여,
그러면 아무 일이 없어져 버린 거죠.
야, 내 머리가 이렇게 있는 것을,
아무 탈 없이 있는 것을, 하고는 머리 찾던 일이 그만 멈춰진 거요.
찾을 필요가 없어져 버린 거지.
그와 같이 우리가 수행을 한다, 참선을 한다,
도를 닦는다, 무슨 성불을 한다, 조사가 된다 하는
그런 어떤 희망을 가지고 부단히 노력하는 그것이
부디 밖을 향하지 않고 내면으로 자기 자신을 返照看(반조간)하라 했잖아.
이자반조간하라, 스스로를 반조해 보아라 하는 반조하는 그것뿐이지,
달리 딴 데서 구해지는 것은 아니다.
더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 장엄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 보강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부증불감이거든요.
그 존재는 부증불감이요 불생불멸이고.
그래 부처라고 하는 것은 그 사실을 아는 것뿐입니다.
그 사실 아는 거지 조금도 장엄을 하거나 더 보태거나 꾸미거나
그런 사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래 완전무결하게 존재하는 그것을 그런 것인 줄로 아는 것.
‘大德(대덕)아 且要平常(지요평상)인댄’,
다만 평상이기를 요할진댄, 그냥 평상심 대로 살기를 요할진댄,
‘莫作模樣(막작모양)하라’, 모양을 짓지 마라.
형식 짓지 마라 이거여.
억지 쓰지 말라.
‘有一般不識好惡禿奴(유일반불식호오독노)하야’, 好惡, 좋고 나쁜 것을,
不識, 알지 못하는 머리 깎은 중, 이거는 중들, 이런 뜻입니다.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머리 깎은 중들이 있어서,
‘便卽見神見鬼(변즉견신견귀)하며’, 곧바로 神을 보고 鬼를 보며,
‘指東劃西(지동획서)하며’,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그으며,
‘好晴好雨(호청호우)하나니’, 맑은 날이 좋으니, 비오는 날이 좋으니, 하나니.
이건 뭔 말인고 하니,
수다원이다 사다함이다 아나함이다 아라한이다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이다, 열반이다 보리다,
벽지불이다 성문 연각이다, 극락이다 지옥이다,
뭐 참선이다 염불이다 주력이다 다라니다 간경이다…
일체 그런 방편들을 말하자면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귀신도 보고 西를 그으며 동쪽을 가리키기도 하고
맑은 것이 좋다 비오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습니까.
경전마다 이 경이 최고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잘 모르면 참 헷갈리고
초보자들이 정말 어려움을 많이 겪어요.
신심은 있는데 이게 어떻게 할 바를 모르는 거라.
누군 기도가 좋다 하고, 어딜 가니까 천도만 계속 권하는 데도 있어.
천도 몇 번 했느니 몇 번 했느니 그걸 자랑으로 하는 절도 있어요.
그래고 사경을 얼마나 했느니 독경을 얼마나 했느니
또 어디 가니까 무슨 아비라 기도가 좋다 하고
어디는 가니까 능엄주가 좋다 하고
아니야, 대다라니, 그게 천수경에 있는 대다라니가 좋아.
아이 그런 소리 하지 마,
저 티베트에 가면은 옴 마니 반메 훔 만 하는데
그게 최고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아이 그거보다 더 할배가 있는데
그건 뭔고하니 광명진언이라고… (대중웃음).
이게 見神見鬼 指東劃西 好晴好雨여.
이 임제 스님의 표현 방식은요, 참 이렇습니다.
내가 이걸 부연해서 설명 안 하면 뭔 소린지 못 알아듣겠죠?
요즘은 또 거기다가 비파사나까지 들어와 가지고
미얀마 수련원까지 차려 놓고
안 그래도 간화선도 지금 복잡하고 어려운데
그거까지 들어와 가지고는 그게 좋다고 거기 또 껌벅 넘어간다 그냥.
전부 이게 지동획서하고 호청호우하는 짓이지 별 거 아녜요.
그러니까 우리 프로들은 아주 철저히 알 필요까진 없어요.
대강만 알아가지고도 다 이렇게 전체를 관망하는,
내려다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 가지고 신도들이 이런 사람도 오고 저런 사람도 오는데
그런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그 근기와 그 수준에 맞게 잘 인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견신견귀하고 지동획서하고 호청호우하는 그런 상황이 돼 있거든요.
그런데 정말 올곧은 선불교의 정신 입장에 있어서는,
‘如是之流(여시지류)는 盡須抵債(진수저채)하야’,
이와 같은 종류는 전부 다 뭐라고?
전부 빚을 짊어져 가지고서,
‘向閻老前(향염노전)하야’, 염라대왕 앞에 가 가지고서는,
‘呑熱鐵丸有日(탄열철환유일)이니라’, 뜨거운 철환, 뜨거운 철방울,
철 덩어리를 삼키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괴상망측하게 사람들이 돼 가지고는
나중에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해 놓으니까
염라대왕 앞에 가 가지고 지옥 고통을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好人家男女(호인가남녀)가’, 멀쩡한 남녀가,
‘被這一般野狐精魅所着(피자일반야호정매소착)하야’,
여긴 신도들도 그런 경우가 많고
수행자라 하더라도 어찌 보면 어디 한 곳에 치우친 사람들은,
치우쳐 있는 사람들은 사실 그래요.
野狐精魅所着(야호정매소착)이라, 여우 귀신을 뒤집어 쓴 게 되는 거죠.
여우 귀신을 뒤집어 쓴 것이 돼서.
‘便卽捏怪 (변즉날괴)하니’, 그거 우습지도 않죠.
전체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어디 한 곳에 치우쳐 가지고
거기에 목을 매는 사람들, 정말 그건 우습지도 않아요.
사실 보면요 여우의 귀신에 뒤집어 씌어 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또 신심은 있어 가지고는 하~ 열의는 대단하거든요.
그래 남의 말이 귀에 들어가지도 않고, 그런 수가 있습니다.
사람을 정상으로 만들어 주는 게 급한 일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을 만들어 줘야 돼.
아주 상식적인 사람을 만들어 줘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변즉날괴라, 날은 누를 捏자 괴이할 怪자 잖아요.
아주 괴상망측하게 돼 가지고
사람이 정상이 아니고 정신이 괴상망측하게 되나니.
‘瞎屢生(할루생)이여’, 눈 먼 이들이여,
‘索飯錢有日在(색반전유일재)로다’, 밥값을 찾을 날이 있을 것이다.
밥값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이여.
아주 법문이 참 시원시원하고
그러면서 오늘날의 어수선한 우리의 불교의 전반을
확 그냥 추리고 깨끗하게 정리하는 그런 입장입니다.
프로들은 이런 입장을 알고 있어야 돼요.
또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 방편이 또 있으니까
방편에 걸려 있는 사람들을 딴 길로 빠지지 않도록,
또 불교를 믿어 가지고 도리어 이상하게 되지 않도록,
정신 이상이 되지 않도록 바로 잡아 주는 거,
이게 참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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