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본문: 시 43편
- 제목 : 침묵의 하나님께 감사
◆ 기도
후회가 아닌 참회를 하고 싶습니다. 포기하고 저지르는 반복된 행위는 절망에 찬 후회를 주나, 소망으로 나아가는 반복된 행위는 참된 회개 위에 딛고 선 두 발과도 같게 느껴집니다. 오늘도 두 발바닥에 힘을 주고 말씀 위에 딛고 섭니다. 하루를 주 안에 살도록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 본문살핌
43편은 마치 42편의 부록처럼 짧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하나님 앞에 판단(재판) 받기를 바란다. 하나님과의 채무나 범죄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재판장 역할이시고 시인과 그를 대적하는 자 사이에서 공의를 가려달라는 요청이다(43:1). 분명 자신이 알기로는 하나님께서 내 편이신데 어찌하여 하나님은 나의 신원을 더디하시며 계속 슬픔에 잠기게 놔 두시는지 호소한다(43:2). 시인이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빛과 진리(생명과 진리)를 보내서 자기를 인도하사 주님의 성산, 나아가 성소에 당도하는 것이다(43:3). 주의 성소, 그 제단에 이르면 그는 하나님을 만난 기쁨으로 크게 기쁠 것이며 힘껏, 마음껏 찬양하게 될 것이다(43:4). 그리고 변하지 않은 오늘의 현실 앞에 다시 42편과 동일한 후렴구가 반복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 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3:5).
◆ 묵상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때, 원수의 공격과 부당한 압제나 미움을 당할 때, 그런 참혹하고 수치스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내 생각만큼 빨리 해결해 주시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무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이다. 아직 해결할 때가 아니시거나, 그 일이 있어야 다음의 어떤 것들이 진행될 것이기에 밟는 수순이거나 하실 때 신자는 그분의 침묵을 경험하게 되는 듯 하다. 침묵의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요점은 그 시간이 결코 견디기 녹록한 세월은 아니리라는 것이다.
오늘 시인이 원하는 결론적인 삶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회복되는 것이다. 주께서 빛과 진리를 보내어 나를 당신 계신 곳으로 인도해 달라는 것이다(43:3). 요한복음의 관점에서 보자면 빛(생명)은 태초부터 계신 로고스, 성자 예수시다(요1:1-10). 또한 진리는 성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다(요17:17).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신자가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 그 안에 들어와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참된 교제를 말한다(요17:3,8,20-21). 이렇게 하나님과의 사귐, 만남, 예배, 혹 다른 어떤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그 시간이 다시 회복될 때 신자(시인)는 비로소 큰 기쁨의 하나님을 조우하고 함께 그 기쁨을 누리고 찬송을 힘차게 올려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은 아직 주를 앙망하는 중에 처한 현실에서 마무리된다. 아직 그가 바라는 결론적 상황은 주어지지 않았다. 문제도 그대로고 하나님도 멀리 계신 듯한 시간이 계속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가나안에 들어와 살도록 하신 과거를 상기하며 그분을 의지하고 기도하듯, 오늘 시인의 후렴구처럼 신자도 자기 인생을 지금까지 먹이고 입히며 보호하실 뿐 아니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실수를 참아주시고 심지어 수습해 주신 그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기다리는게 현명하리라.
나는 그 어둠, 그 침묵, 그 무덤을 견디지 못하고 몹시 몸부림을 쳤었다. 피고름만 더 나오더라. 죽은 내 존재의 실체만 더 처참히 드러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잠잠히 다시 말씀을 붙드는 오늘을 마주 하지 못했을 것 같다. 모든 게 주님의 은혜다. 그 침묵이 아니었다면 도달할 수 없었을 오늘이다. 나도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그 침묵의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게 되었다.
내 인생에 좋은 날을 주셔서 감사, 내 인생이 오늘 좋은 날임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 감사로 받으면 모든 날이 좋은 날임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 고통의 시간이 아팠지만 참으로 필요했음을 깨치게 해 주심도 감사하다.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여전히 나의 열정은 타인에게로만 향하고, 나의 소망은 외적 사역으로만 치닫고, 나의 내면과 내 영혼의 깊은 곳에 자아의 성을 허무시고 작은 벽돌을 하나씩 쌓아 성소를 지으시려는 성령의 뜻을 계속 저지하듯 내달렸을 것이다.
성령께서 내 마음 깊은 곳에 주의 말씀으로 한 조각 한 조각 새로운 벽돌을 쌓듯 새롭게 지어가시기를 얼마나 원하셨을까. 내게 임한 심판은 참되고 의로웠다.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여전히 내 사역의 성, 나만의 성과, 내가 올린 제사들에 천착하며 외적으로 의로운 자라 칭찬받다가 멸망했을 것이다. 참회를 넘어서 감사의 눈물이 난다. 그 은혜가 내게 왠 말인가! 왜 그런 은혜가, 그런 복잡하고도 치밀한 계획이, 그런 세심한 사랑과 신경을 왜 나같은 자에게 쏟으신단 말인가! 그 사랑에 놀라고 압도당해 또 눈물이 난다.
형벌로 끝날 고통이 아니라 생명주기 위한 수술이었다. 버려져 핍절했던 게 아니라 수술을 위한 금식이었다. 수술을 하기 위해, 무덤에 들어가기 위해 홀로 있어야 했던 것이지 나를 외롭게 말려 죽이시려 함이 아니었다. 나란 존재는 어찌나 얄팍한지... 돌아보니, 이해하니, 깨닫고 나니, 회복되고 나니 이제사 감사하게 된다. 역시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인간에 불과하다. 이제야, 좋아지고 나서야, 빛과 생명을 쥐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고 감사한다. 이 어리석고 미욱한 자를 왜 사랑하신 걸까. 이유는 여전히 이해할수 없지만 감사와 기쁨으로 그 사랑을 다만 받아들인다. 그가 사랑하겠다는데! 이럼에도 불구하고 그리하겠다는데! 그런 그분의 고귀한 사랑, 그리스도의 복음에 감사하고, 그것이 진리임을 고백한다.
◆ 기도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새삼 주의 은혜, 그 끝없는 섭리에 대해 감사합니다. 저의 고통마저도, 당신의 침묵 마저도 결국 은혜였고 사랑이었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 사랑 좀 아팠지만, 꼭 필요했고 새로운 지어짐이 시작되었으니 무한감사 드립니다. 원망과 읍소의 시간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날마다 말씀을 벽돌삼아 제 안에 성전을 지어나가겠습니다. 성령님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지어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