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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다왕문경 Questions of King Milinda
화일 첨부
b 밀린다왕문경 Questions of King Milinda.doc
b Milindapanha Oxf 1890, 441P.pdf
eng 925P pdf
http://www.shanyoma.org/yoma/Questions-of-King-Milinda.pdf
eng 441P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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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다 왕문경 Questions of King Milinda 은
아함 nykaya 중, 우리나라에 없는 소부 Khuddaka Nikaya 에 있다
Khuddaka Nikaya = the Collection of Little Texts
http://www.accesstoinsight.org/tipitaka/kn/index.html
소부 많은 경전 중에, ‘밀린다 왕문경’은 일부 한개에 해당 한다.
Contents of the Milindapañha :
I. Background History
II. Questions on Distinguishing Characteristics (excerpts)
- Characteristics of Attention and Wisdom (Miln II.1.8; Miln 32-33)
- Characteristic of Wisdom (Miln II.1.14; Miln 39)
- Characteristic of Contact (Miln II.3.8; Miln 60)
- Characteristic of Feeling (Miln II.3.9; Miln 60)
- Characteristic of Perception (Miln II.3.10; Miln 61)
- Characteristic of Volition (Miln II.3.11; Miln 61)
- Characteristic of Consciousness (Miln II.3.12; Miln 62)
- Characteristic of Applied Thought (Miln II.3.13; Miln 62)
- Characteristic of Sustained Thought (Miln II.3.14; Miln 62)
III. Questions for the Cutting Off of Perplexity (excerpts)
- Transmigration and Rebirth (Miln III.5.5; Miln 71)
- Soul (Miln III.5.6; Miln 71)
- Non-Release From Evil Deeds (Miln III.5.7; Miln 72)
- Simultaneous Arising in Different Places (Miln III.7.5; Miln 82-83)
- Doing Evil Knowingly and Unknowingly (Miln III.7.8; Miln 84)
IV. Questions on Dilemmas
V. A Question Solved By Inference
VI. The Special Qualities of Asceticism
VII. Questions on Talk of Simi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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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승려 와 그리이스왕 과의 대화
1) 밀린다왕문경 이란
밀린다왕문경의 원명은 Milindapanha, 또는 Milin-dapanhp이다.
(전자는 단수 여성형, 후자는 단수 남성형)
실론에서는 후자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전자가 본래의 제명(題名)일 것이다.
이 경전은 서기전 BCE 2세기 후반에
서북인도를 지배한 그리이스인 밀린다왕이
불교 승려 ‘나아가세나’ 와 대담, 불교 교리에 관해 질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는 대화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석존(釋尊)에 기탁하여 서술된 것이 아니므로 불설(佛說)이라 표방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실론 불교에서는 삼장 밖에 두어 경전으로 취급하지 않으며,
반대로 버마불교는 삼장 속에 넣어 경전으로서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한다.
그러나, 실론이나 버마의 불교 승려 중에는 밀린다왕문경은 불교의 정통설(正統說)을 어지럽힌다고 비난하는 이도 있으며,
이러한 비난에 대하여 이 경전을 옹호하는 이도 있어, 양쪽 입장에서 많은 저서가 나왔다 한다.
출판본에, 트렝크너의 비평적 교정출판본이 있다(로마자로 바꿔 출판했다.)
이 책은 장(章)과 절(節)의 구별을 명시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절판되어 있다가 1928년 사진판으로 색인(索引)을 붙여, 런던 Royal Asiatic Society에서 재판을 냈다.
이 밖에 실론, 버마, 샴에서 각기 자국의 문자로 출판한 것이 있다. 샴본에서는 후대에 부가한 데가 많은 것 같다.
2) 나선비구경
팔리어 밀린다왕문경에 해당하는 것에 한역(漢譯) 나선비구경이 있다.
‘나선’은 밀린다왕의 질문에 대답한 불교승려 ‘나아가세나 ’를 음역한 것이다.
여기에 두권으로 된 것과 세권으로 된 것이 있으며,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제32권에는 A본과 B본으로 나누어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샴본 132 페이지, 로마자본(트렝크너본) 89페이지까지 해당한다.
두 역본이 모두 동진(東晉)시대 번역인데, 역자 이름은 모른다.
A본에는 거의 한권 분량의 탈락이 있고, 또 있어야 할 곳에 긴 문장이 빠지지 않고 다른 곳에 들어 있는 수도 있다.
한편, B 본에는 원전에는 없을 듯한 귀절도 있다.
이 두 역본 외에, 송(宋)의 구나발다라(求那跋陀羅)역인 한권과 역자 불명의 나선비유경(那先譬喩經) 네권이 있 었다고 전해져 오지만,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다.
송대의 역본은 동진 역본과 다른 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역 나선비구경의 원본(原本)은 아마 산스크리트나 혼합 산스크리트어로 된 범어본이고 팔리어는 아닌 것 같다.
3) 원전의 비판
팔리어 밀린다왕문경의 처음부분과 한역 나선비구경은 대체로 일치하므로,
아마 이 일치하는 부분이 원형(原形)이오, 팔리어본의 기타 부분은 후세 부가된 것이 아닌가 한다.
기타 부분은 후세 실론에서 찬술되었다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으나, 그렇게 단정할 만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팔리어본 중 샴본에나 트렝크너본에 없는 설명이나 문답이 들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부분은 아마 후세 남방아시아 어느 사원에서 추가되었다고 추리한다.
팔리어본과 한역본이 일치하는 부분을 비교하여 보면, 한역이 간단하고 고형(古形)을 보존하고 있는 듯 하다.
한역은 원문을 간결하게 줄여서 번역했기 때문에 간단하게 표현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도 없는데가 있다.
팔리어본에는, 나아가세나와 밀린다왕이 회견한 첫날
밀린다 왕은 오백명의 그리스인에 둘러싸여 최상의 수레를 타고 대군(大軍)까지 거느리고 나아가세나를 만나러 갔다고 했다.
그러나, 한역은 나아가세나가 왕을 찾아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역은 첫날 대화를 마치고 “왕은 나선(那先)에게 예의를 베풀고 말에 올라 궁정으로 돌아갔다” 고도 했다.
이는 앞뒤가 일치하지 않으며, 또 이튿날 이후 서술과도 다르다.
아마 “왕은 나아가세나 곁을 떠나 말을 타고 왕궁으로 돌아갔다”는 반복 귀절이 어느 정도 고형을 유지한 표현인 듯 하다.
그러므로 조리가 맞게 되려면,
처음 부분은 “왕은 말을 타고 나아가세나를 찾아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뒷날 이같이 소박한 표현은 생략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나선비구경에는 아아윳파아라가 있는 곳으로, 왕이 오백명 기병을 데리고 갔다고 있으므로,
그와 대조시키기 위하여, 나아가세나는 제자들을 이끌고 왕을 찾아갔다는 서술로 바뀌었으며,
또 파알리어본에서는 “밀린다왕은 오백명의 요나카인에게 둘러싸여
훌륭한 수레를 타고 대군과 함께 상케이야 승방으로 나아가세나 존자를 찾아갔다”로 표현이 발전했을 것이다.
왕이 말을 타고 나아가세나를 찾아갔다는 것이 원형(原型)이오, 이것이 현존하는 두가지 양식으로 확장 또는 변형되었을 것이다.
또 나아가세나 장로와 밀린다 왕이 회견하는 이튿날 서술을 보면,
한역은 나아가세나가 아아윳파아라 등 “80명의 사문(沙門)과” 함께 왕을 찾아갔다고 했는데,
팔리어본은 “八만명의 비구”와 함께 찾아갔다고 했다.
거대한 수로 표현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팔리어본에는 후세 사람의 손질이 많이간 것으로 추리된다.
이같은 차이에서 미루어 생각하면 고대 인도에서는 제왕이 고승을 찾아가는 것이 예의였다.
또, 팔리어본의 서장(序章)에서는, 아자아타삿두왕이 육사(六師)를 방문했다는 전설을 모방하여,
밀린다왕이 철인 푸우라나와 고살라를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추가했다.
왕이 ‘나아가세나’를 찾아갔다는 서두(序頭)도 이같이 하여 형성 된 것이다.
이 점에서도 인도의 제왕과 헬레니즘시대의 여러 왕과는 태도가 전혀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동양제왕이 전제군주(專制君主)이고, 종교에 대해서도 강압적이었다는 일반통념은 이 사실에 비추어 정정되어져야 한다.
대체로, 헬레니즘시대의 여러 제왕은 제왕의 위엄으로 종교에 대하여 강압적이었지만,
인도의 여러 제왕은 도리어 겸허했다.
이를 증명하는 객관적 증거로, 다시 고고학적유품(考古學的遺品)인 화폐를 들어볼까 한다.
그리이스 민족이 침입하기 이전 인도 화폐에는,
화폐를 발행한 나라, 지방, 길드의 상징은 표시되어 있지만,
제왕의 초상이 새겨진 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마우리아왕조의 제왕도 자기의 초상을 화폐에 새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리이스계 제왕과 그리이스문화의 영향을 받은 외래민족의 제왕은 대부분 화폐에 자기의 초상이나 얼굴을 선명하게 새겨 놓았다.
반면에 인도의 여러 제왕은 바퀴(輪)나 불교의 스투우파, 보리수 같은 종교적 상징이나 동식물을 도면으로 표시했다.
인도민족 사이에서 국왕이 자기 초상을 화폐에 새긴 일은 안드라 왕조에서 시작하여 굽타 왕조에 이르러 뚜렸해졌다.
이 같은 현상은 인도역사에서 제왕이 신성시되어가는 시대적 단계와 꼭 대응하고 있다.
여하튼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과거 동양에서는 전제 정치가 행해졌고, 자유로운 생활은 그리스적 세계에서만 나타났다고 하는,
재래식 문화사관(文化史觀)의 속단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또 서장(序章)부분도 팔리어본과 한역본은 현저히 다르다.
한역에 의하면, 옛적 산중에 두 바라문이 수행하고 있었다.
한 바라문은 “나는 까까머리에 가사를 입고, 나한 이원도(泥洹道)를 추구하고 싶다”는 발원을 하여, 뒷날 ‘나아가세나’로 태어났다.
또 한 바라문은 “나는 국왕이 되어 마음대로 천하의 인민을 내 교령(敎令) 에 따르게 하고 싶다”고 발원했으므로,
뒷날 밀린다왕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나아가세나는 구부루한(舅父樓漢=로하나)를 따라 출가했다고 한다.
자리, 팔리어본에 의하면, 케투마티이란 천궁(天宮)에 있던 마하아세나란 천자(天子)가 천계(天界)를 떠나 바라문 여인에게 입태(入胎)되어 태어난 것이 나아가세나이며, 그는 로하나 장로를 따라 출가했다고 한다.
또 한편, 과거세(過去世)에 한 사미(沙彌)가 있어 탑묘(塔廟)를 청소하다가 한 비구에게 빗자루로 얻어맞았다.
그뒤 그는 위력과 변재(辯才)를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발원을 하여,
뒷날 이 세상에 태어나 밀린다왕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같은 차이는 서화 부분이 후세에 추가된 것임을 나타내어준다.
특히, 밀린다 왕이 수레를 타고 철인 푸우라나와 고사알라에게 가르침을 청하러 갔다는 팔리어본의 서술은 역사적 사실과는 관련 없는 일이고, 후세에 추가된 부분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한역의 대본이 된 원본이 이 경전의 원형(原型)이라고 속단 할 수도 없다.
한역에도 교의(敎義)나 술어에 관한 설명적 귀절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원본에 없는 것을 역자 중국 학승이 추가한 것인지, 아니면 인도 원본에 이미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최초의 원형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팔리어본과 한역본이 대체로 일치하는 부분이 이 경전의 원형에 가깝다고 추리한다면 큰 잘못은 없을 줄 안다.
그렇다면, 이 밀린다왕문경의 최초 원형이 언제 성립되었는가 하는 연대문제가 대두된다.
메난드로스왕이 죽은 뒤 그리이스계 여러 왕의 세력은 급격하게 쇠퇴해졌다.
그 후 연대는 잘 알 수 없지만, 서북 인도에는 서북방으로부터 사카인 등이 침입해 왔다.
사카인은 그리이스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고 하나,
사카인의 통치하에서 그리이스인 제왕을 주제로 한 대화편(對話篇)을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밀린다 왕이 죽은 뒤, 곧 그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기 전,
그의 세력이 미치고 있던 서부 인도나 서부 인도에서 그 원형이 만들어 졌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면 원형의 성립은 BCE1 ~ CE1, 서기전 1세기에서 후 1세기 사이 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다음, 원형 텍스트에 어느 언어가 사용되었는가 하는 것도 문제된다.
팔리어 밀린다왕문경 속에는 보통 팔리문에서 용인할 수 없는 용어법(用語法)이 나타나 있으므로,
최초 원형은 팔리어가 아니고 다른 언어로 기술된 것 같다.
산스크리트어였으리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지만, 서북 인도에서는 푸라아크릿트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고,
또 당시 전통적 보수파 불교는 설일체유부 (說一切有部) 외에는 푸라아크릿트어나 혼합 산스크리트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이 경전의 원형도 아마 혼합 산스크리트어로 기술되었을 것이다.
이제 이 경전의 한역에 대해 고찰하기로 하자.
나선비구경을 최초에 든 것은 양(梁)나라 승우(僧祐)의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인데,
실역(失譯, 즉 번역자 불명의 번역)이라 기술되어 있다.
그 뒤 여러 경록(經錄)에는 한 권 또는 두 권으로 기록되어 있고, 송대 중엽에 비로소 세권 본이 나타났다.
승우가 나선비유경(那先譬喩經) 네권을 전하고 있는데, 지금의 세권 본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역된 시대는 불명, 후대 중국의 경록에서는
내전록(內典錄)이래 동진(東晉)시대(CE 317 ~ 420)의 실역이라고 전해 오고 있지만, 믿을 수 없다.
번역된 시대는 동진보다 이전이오, 아마 후한(後漢)시대로 볼 것이며, 늦어도 삼국시대 이후로 내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로, 역어(譯語)가 아주 고어이고, 게송(偈頌)이 산문형으로 번역되고, 그리이스령(領)을 대진(大秦)이라 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 경전은 불교가 활발히 유행되지 않은 변방에서 번역되어, 오랫동안 중앙 불교계에는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현존한 세권 본, 두권본은 원래 동일역이었다.
세권본이 완본(完本)인데 대해, 두권본은 중앙 부분이 빠지고 문맥이 혼란 되어 있기도 하나,
두권본이 오히려 번역후 가필(加筆)이나 변개(變改)가 적어 원형(原形)에 가깝다.
세권 본은 읽기 쉽게 주석되고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그 정리나 주석이 잘못 되어서 도리어 해득할 수 없게 만들어 진 경우도 있다.
‘나아가세나’와 밀린다 왕의 대담(對談)내용 일부가 현장(玄獎)이 번역한 구사론(俱舍論) 제 30권(眞諦역으로는 제 22권)에 소개되어 있으며, 또 나선비구경의 줄거리와 그 내용 일부가
잡보장경(雜寶藏經) (CE 472년역) 제9권, 9-111,
난타왕 King Menandros 여나가사나공론연(難陀王 與那伽斯那共論緣) [나가사나 那伽斯那 Nagasena] 에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는 ‘나선비구경’이나 팔리어 밀린다왕문경에 서술되어 있지 않은 것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이 같은 단편들이 있기 전에 나선비구경이나 팔리어 밀린다왕문경과 다른 교정본(校訂本)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잡보장경의 성립 연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CE 2 이후 / 2세기 후반 이후임에는 이이 없다.
잡보장경에 인용되어 있는 문답은 이 경이 민간에 유포되고 있을 때 완성되었고, 그 속에는 흥미본위의 재치문답도 있다.
구사론은 바수반두(世親) 초기의 저작이므로 4세기 중엽에 해당된다.
그런데, 한역 나선비구경은 비교적 원형(原型)에 가까와 증보(增補)가 적다고 생각되므로,
그 원본의 성립은 구사론 보다 적어도 백년은 앞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성립 연대는 CE 250, 서기 250년경이 된다.
그 뒤에도 약간의 증보가 행해져 허다한 이본(異本)이 성립되었는데,
그 중 현존 팔리어본만이 오늘까지 전해진 것이다.
팔리어 현존본은 다음 세 가지가 있다.
(1) 시일론본 (동방성서에 수록된 밀린다왕문경을 영역한 리스데이비스가 사용한 것)
(2) 트렝크너의 로마자본.
(3) 샴 황실 출판본.
이 세가지 중, 전체적으로는 샴본이 가장 방대하다.
다른 두 가지에 없는 것과 항목은 다른 두 가지에도 있으나 길이가 몇곱 늘어났다.
그리고, 로마자본과 실론본은 대체로 일치하며 근소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경전들의 근본 텍스트가 어느 때 만들어졌느냐 하면,
밀린다왕문경에 있는 여러 귀절이 남방불교 대주석가 붓다고사(Buddhaghosa)의 저작 속에,
대목 그대로 또는 약간 다르게 언급 인용되어 있다.
그는 밀린다왕문경에 거의 정상 경전과 비등한 권위를 주고 있다.
그리고 인용되어 있는 부분은, 리스데이비스 의 장절(章節)구분에 의하면, 제2, 제3편이 제일 많고 제4, 제7편 속에도 약간 있다.
그러므로, 중간 제5, 제6편도 이미 성립되어 있었을 것이다.
붓다고사는 서기 약 403년경 여러 주석서를 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면, 그때까지 밀린다왕문경은 대부분 완성되어 있었고, 남방불교 최대의 학자에 의하여 그 권위가 인정되어 있었다.
그는 이 경전에 경의를 표했을 뿐 아니라, 삼장과 고주(古註) 이외에 그가 언급하고 있는 유일 한 경전이다.
그러나, 그 팔리어본도 일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역에 대응하는 부분이 먼저 이루어지고, 나머지 부분은 뒤늦게 이루어졌음이 틀림없다.
팔리어본의 나머지 부분이 후대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다음 여러 가지 이유가 단정을 낳게 한다.
① 나머지 부분에 해당하는 한역이 없다.
한역에 있는 부분은 모두가 고형(古形)이라고 단정할 수는없으나, 일반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다.
② 한역에 해당하는 부분은 정리된 한 저작이라 인정 할 수 있다.
즉, 그 부분은 밀린다왕과 나아가세나가 회견한 유래부터 시작하여 대담을 마친 다음 두 사람이 다 기뻐했다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③ 두 부분은 현저히 내용과 색조(色調)를 달리 한다.
나머지 부분에는 교의학적(敎義學的) 요소가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불교성전 문구에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만 의의 있고 흥미 있는 것이다.
성전 말씀은 성스러운 부처님 말씀으로 이해되고 무조건 진실한 것으로 간주된다.
자아타카속에 나오는 보살의 행위에 결함이나 부덕(不德)이 있으면, 그것을 변호하고 정당화하려고 한다.
아름다운 예술적 작품으로는 원형(原型) 부분에 미치지 못한다.
④ 나머지 부분에서는 밀린다 왕이 교의학이나 경전 구절의 차이 등에 대하여 질문을 하는데,
그리이스인인 밀린다왕이 불교 교의학에 대하여 그처럼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그리이스인도 출가하여 불교의 출가수행승이 된 사람도 있었다고 하지만,
분망한 세속생활을 하고 있던 이국(異國)출신의 밀린다왕이, 불교 교의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이에 반해 한역과 일치하는 부분에 나온 밀린다왕의 세속적 질문은 무리가 없다.
가령 역사적 인물인 밀린다왕에게 돌린다 해도 조금도 이상스런 느낌을 주지 않는다.
대화의 내용도 퍽 온건하다.
이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한역에 대응한 부분만이 우선 먼저 이루어졌으며, 이 경전이 아주 유명해지고 세인의 주목을 끌게 되었을 때,
후세 학자들이 교의학상 문제되는 사항에 대한 논의를 밀린다왕과의 문답 형식으로 서술하여, 추가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한역과 팔리어본에 공통된 부분의 원형(原形)은 팔리어본 전체의 원형보다 훨씬 먼저 완성되어 BCE 1 / 서기전 1세기 중엽 이전으로 추산한다.
그리하여, 최초의 원형(原形)은 서북인도지방에서 성립되어졌고, 팔리어로 고쳐져서 증가된 것은 동부 마가다지방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제4편 이하가 인도에서 이루어졌는지 실론에서 이루어졌는지 문제된다.
그런데 제4편 이하에서도 서북인도 지명이 자주 나오고 간지스강 이남 지방에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역시 서북 인도에서 완성되었다고 봄이 온당할 것이다.
다시 한역과 팔리어본이 일치하는 부분을 최고층(最古層)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도 검토의 여지는 있다.
이 부분도 일시에 성립된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성립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는 리스데이비스가 분절(分節)한 제3편은 내용이 빈약하고 단편적이며 질문 내용도 저속하며,
제2편 중의 대화와 중복되는 것도 약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제3편은 제2편에 대한 추보(追補)로, 메난드로스왕과 나아가세나의 대화 중 제2편에 누락된 것을 모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한역과 팔리어본이 일치하는 부분을 전거(典據)가 있다고 인정하여 주관적 판단을 피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상에 고찰한 결과를 종합하여 텍스트의 성립과정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4) 팔리본과 한역본이 일치하는 부분의 사상적 의의
이 원형이라 믿어지는 부분에 그리이스적 사유(思惟)와 인도적 사유의 대결이 가장 생생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는 것 같다.
이에 반해 뒷부분은 후세에 부가된 것이므로 역사적 인물인 밀린다 왕의 사상에서 약간 멀다.
여기에도 그리이스적 사유의 영향을 고려할 수 있지만, 이미 인도적 사유의 울안에 든 사유로 취급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부분은 구분되어야 할 줄 안다.
이 대화편 주역(主役)의 한 사람인 메난드로스왕(밀린다왕)은 철학적인 여러 문제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사아가라란 도시가 있었다. 거기를 밀린다 왕은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형이상학적 논의를 가지고 질문하며 비구승단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러한 지성인인 왕이 불교교리의 어떤 점을 찔렀는가 하는 것은 흥미 있는 연구 과제일 것이다.
나아가세나 장로에 대해서도 밀린다왕문경은 최고의 찬사를 올리고 있는데,
설령 단순한 찬사였더라도 왕과 대담하기 위하여 비구승단서 뽑힌 승려라면, 당시 최고의 불교학자였음은 틀림 없다.
실재했던 세속왕과 불교 승려와의 대담이 서적 형태로 후세에 남겨진 것은 이것이 유일한 것임을 생각 할 때,
후세 불교학자들이 이 대담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대화 서술의 형식도 아주 교묘하여,
리스데이비스는 이 책을 평하여 “교의(敎義)에 관한 논 쟁서의 스타일이란 점에서는,
당시 저술된 어느 나라 책 보다 우월한 것이오, 인도 산문의 걸작이다”고 격찬했다.
이 견해를 따른다면 우리는 아래서 그리이스인 인 메난드로스왕의 발언 속에서 그리이스적 사유의 특징을 찾아내고
또 나아가세나 장로의 응답 속에서 인도적이며 불교 적인 사색의 특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5) 나아가세나 장로
메난드로스왕과 대담하여 그를 불교에 귀의하게 했다고 하는 나아가세나(Nagasena)에 관해서,
팔리어 밀린다왕문경과 한역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 외에는 자료가 없다.
팔리어본에 의하면, 그는 히말라야산 중턱에 있는 카잔가라란 바라문 마을에서
소눗타란란 바라문출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곱살에 부모의 명에 따라 바라문스승에게 三베다를 배웠다.
그리고 많은 학예에 익숙하고 정통했으나, 이들 학예는 공허하고 의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로하나존자를 따라 출가했다.
처음에 아비담마를 배워 팔리어로 현존하는 논장 七론 의 정수를 터득했다.
이어 로하나존자의 권고에 따라 앗 사굿타존자에게로 가 수행하고,
다시 앗사굿타존자의 지 시에 따라 담마랏키타존자 밑에서 三장을 연구하여 그 오의(奧義)에 통달했다 한다.
한역 나선비구경에 의하면, 그는 천축(天竺)에서 태어나 자(字)를 타엽(陀獵)이라 했다.
그 집 코키리(naga)와 한 날에 태어났으므로, 나선(Nagasena)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나이 열다섯 여섯에 외삼촌인 루한(樓漢, 이미 출가한 자)를 따라 출가하여 사미가 되었다.
스무살에 대사문(大沙門)의 경계(經戒)를 받았다.
한때 가유왈(加維曰)이란 스승에게 갔으나 거기서 추방 된 다음 깊은 산에 들어가 나무 밑에 앉아 수행하여 나한(羅漢)이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명성이 사방에 퍼지게 되었다 한다.
나아가세나의 사상은 앞에 든 두 가지 자료에 의해 보는 한, 전통적 보수적 불교(이른바 소승)이다.
대승불교(大乘佛敎) 사상에 언급하지 않았다.
왕생(往生)사상의 싹이라 생각되는 것을 가지고 있다.
대승불교 사상가로 나아가세나란 인물이 있었다고 중국 불교 전적에 전해져 있는데, 아마 딴 사람일 것이다.
인도에는 나아가세나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몇 사람 있든 관계 없을 것이다.
귀경게 歸敬偈
그 행한 바가 모든 세간에
이익을 주는 위대한 성자,
부사의한 힘을 지닌
최상의 도사에게 귀의합니다.
그 행이 구족하면서도
출가하여 무상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가 공경하는
최상의 법에 귀의합니다.
계율행의 공덕을 갖추고
네 가지 과위(果位)에 이르며
무상의 복전이 되는
성스러운 승가에 귀의합니다.
이 세 가지 보배에
귀의하므로 복이 생기고
그 위력에 의하여 모든 내 장애는
끊어졌습니다.
밀린다경은
물음과 대답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경은 (그대들에게) 복을 주리니
이 오묘한 불음에 귀를 기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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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한테도 민족사가 출판한 <밀린다왕문경2>이 있습니다
일본의 평범사<밀린다왕의 물음>을 저본으로 했다고 합니다
그리이스왕과 불교에 대한 물음이라 흥미가 있고 그 내용도 아주 심오합니다
그리고 팔리어로 쓰여지고 미얀마의 소승불교는 이책을 아주 소중히한답니다
저는 영어는 잘 못하지만 이 경의 영어번역판을 보니 비교적 쉬운 영어입니다
영어판을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