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 잘 지내셨는지.
오늘 엄마 품속 같은 고성을 다녀왔다.
흔히 말하는 '품속'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두팔을 벌려 안는 것과 같이 할 때 생기는 공간' 이다.
그래서 고향이란, 엄마의 품속 같은 곳이란 걸 느끼는 하루였다.
마음이 포근하고, 아련하고, 같이 놀던 친구들 생각나고,
그러다 심쿵해서 눈물까지 핑 돌고,
결국 마음이 짜안해지고 마는.....
에휴!
각설하고,
들뜬 추석 연휴 기분 가라앉히고 차분해지자는 뜻으로,
워낙 유명해서 우리가 다 아는 〈유안진 시인〉의 수필 한 수 올린다.
좀 길지만, 카페 들어오시는 친구님들 모두 읽으시고
잊고 지내던 친구들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아니면, 심심풀이 진해콩으로 삼아도
좋을 듯해서.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 유안진 -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열어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할 수 있으랴. 영원히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도 없고, 순수한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론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를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나는 여러 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하였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 많은 구경 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한두 곳 한두 가지만 제대로 감상했더라면,
두고두고 되새겨질 자신이 되었을걸.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管飽之交)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도 도를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 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자리서 탄로 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바랄 뿐이다.
나는 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먹고 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 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 것이다.
때로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 눈 속 참대 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 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 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 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되, 미친 듯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도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 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 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며, 그도 그럴 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처럼 품위 있게,
군밤은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 때는 백작부인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두 사람을 사랑한다 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 글을 못 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의 꽃을 사서 그에게 들려줘도
그는 날 주책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 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 게다.
나 또한 그의 눈에 눈곱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 해도,
그의 숙녀 됨이나 신사다움을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 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니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에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유안진 시인의 수필. 『지란지교를 꿈꾸며』 전문〉 -
- 끝 -
또 봐요.
안녕!
첫댓글 읽을수록 좋은 글입니다.
추석은 잘 보냈겠지요?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ㅎ
참좋은 말인데 내는 그렇게하지 못하고 남은 그렇게해 주기를 바라는 이른마음은 무슨심보일고 아
내자신이 슬픈일이네요
지난(至難)한 얘기네요.
내가 그렇게 될 자신이 없거늘 누가 그러기를 바라겠는가.
아무튼 공부할 값어치가 있는 경지인 건 틀림없을듯.
읽을 때는 고개가 주억거려 지는데 지금 댓글 쓰는 이 순간에 벌써 까먹었으니...
분명 마음에 와 닿는 글귀였었는데...에이,그냥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