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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1 이에 그들이 올라가서 땅을 정탐하되 신 광야에서부터 하맛 어귀 르홉에 이르렀고
13:22 또 네겝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애굽 소안보다 칠 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13:23 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따니라
13:24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포도를 베었으므로 그 곳을 에스골 골짜기라 불렀더라
13:25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13:26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13:27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13:28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13: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13: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13: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13: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 주 해
12명의 정탐꾼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어떻게 차지할지를 알기 위하여 보내졌다.
1) 모세는 정탐꾼들에게 2가지를 명하며 보낸다.
2) 하나는 “그 땅을 탐지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담대하라”는 것이었다.
3) 여호수아와 갈렙은 담대한 믿음으로 그 땅을 정탐하였다.
- 그러나 10명의 정탐꾼은 약속의 땅을 잘 탐지했지만, 담대한 믿음으로 정탐하지 않았다.
2. 가나안의 최남단에서부터 땅을 정탐하던 이들이 처음 도착한 도시는 “헤브론”이었다.
1) 헤브론은 애굽의 소안보다 7년 먼저 세워진 도시이며, 그곳에는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거주하고 있었다.
2) 애굽의 소안은 나일 강 북동쪽에 위치한 성읍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살이 할 때 거주하던 곳이기도 하다(시 78:12).
3) 헤브론이 소안보다 먼저 세워졌다는 것은 헤브론이 아주 태고 시대로부터 있었으며, 역사적인 성읍임을 의미한다,
- 헤브론의 성읍은 견고하고, 아낙자손인 거인족이 있었으므로, 정탐꾼으로서는 헤브론이 강한 성읍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3. 오늘 본문에는 정탐의 내용만이 있다.
1) 그런데 헤브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말 의미 있는 성읍이다.
2) 헤브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가기 전에 그들의 조상들이 거주했던 성읍이다(창 13:14-18; 14;13; 23:2; 25:9;35:27-29).
3) 특별히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매장지를 산 곳이며,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과 레아와 야곱, 즉 믿음의 족장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4) 정탐꾼들이 믿음의 눈으로 헤브론을 보았다면 족장들의 믿음과 그들의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헤브론이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4. 그러나 정탐꾼들의 눈에는 오래되고 견고한 성읍과 아낙 자손만이 보였다.
1) 아낙 자손은 고대시대 용사로 칭하는 네피림의 후손들이다(창 6:4, 13:33).
5. 정탐꾼들은 헤브론 주변에 있는 에스골(송이, 다발) 골짜기에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석류와 무화과도 딴다(23절).
1) 가나안 땅은 약속한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한 땅임을 확인한다.
6. 정탐꾼들은 40일 동안 땅을 정탐한 후 바란 광야 가데스로 돌아왔다.
1) 그들은 모세와 아론과 온 이스라엘의 회중에게 그 땅에서 가져온 포도송이와 석류, 무화과를 보여주고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였다.
2) 그런데 그 후에 “그러나”라는 말을 덧붙인다
-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다른 내용, 반대적인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3) 가나안 땅의 주민들은 강하고 견고한 성읍에 있으며, 특별히 아낙 자손이 있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가나안 주민들은 남방에서부터 산지와 해변과 요단 가에도 가득하다는 것이다.
4) 이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겁을 먹고 소란해지기 시작하였다(30절; 갈렙이 백성을 조용히 시키고).
7. 그러자 정탐을 다녀왔던 갈렙이 백성들의 소란을 진정시키고 반론을 전개하였다.
“우리는 올라가서 점령할 수 있다. 분명히 그 땅을 점령할 수 있다”
1) 그러나 그와 함께 갔다 온 사람들은 “가나안 족속들이 우리보다 강하다”면서 도저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2) 더 나아가 자기들이 가서 정탐한 땅은 우리가 살지 못할 땅이라면서 악평하였다.
“우리가 정탐하고 온 땅에 들어가 살려다가는 그 땅이 우리를 도리어 잡아 먹을 것이다. 거기에는 키가 큰 장대 같은 사람들이 있더라. 우리들은 거기서 거인들(아낙 자손)을 보았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는 메뚜기 같았지만 그 사람들 보기에도 그랬을 것이다”
8. 믿음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점령한 갈렙은 그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14:6; 여호수아도 동참함).
1) 그러나 다른 정탐꾼들은 그 땅의 풍요로움을 인정하면서도 위험성을 크게 부각시킨다.
2) 10명의 정탐꾼의 총평은 약속의 땅에 대한 “악평”이다.
3) 그 악평은 객관적인 사실까지 왜곡시킨다.
4) 그 땅에는 네피림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말한 것은 고의적으로 두려움을 증폭시키기 위한 말이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메뚜기로 표현한 것은 그들의 불신앙이 낳은 왜곡이다.
9. 불신앙은 불신의 눈으로 상황을 파악한 후에 악평한다. 그리고 그 악평은 더욱 나쁜 상황으로 현실을 파악하게 한다.
1) 10정탐꾼의 처음 보고는 사실 그대로였다. 가나안은 강하고 성읍이 견고하고 아낙 자손을 보았다.
2) 그러나 하나님은 최대 강국인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으며 황량한 광야에서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면서 “하나님의 군대”로 훈련시켜 왔다.
3) 게다가 출애굽의 목적, 광야 훈련의 목적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기 위함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햇불 언약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8).
10. 10명의 정탐꾼들에게는 “출애굽과 광야의 인도, 아브라함과의 언약 등”은 마음에 전혀 없다. 그들은 육신으로 보는 현실밖에 보지 못한다.
1) 자신들은 세상적인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정규군이 아니며, 가나안 족속들은 강하고, 성읍 안에 있으니, 그 땅을 점령할 군사력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2) 그리고 언약의 하나님도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긴다.
11. 하나님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니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이” 보였다.
1) 그리고 가나안 백성들도 메뚜기처럼 볼 것이라고 예측한다.
2) 이것도 거짓이다. 38년이 지난 후에 여리고를 공격할 때, 여리고 사람들은 출애굽의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간담이 녹았고,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였다.
- 가나안 족속이 보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는 강한 민족으로 보였다. 그리고 애굽을 이기고 나온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였다.
3) 고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으로 여겼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의 신을 이겼으므로, 여호와를 가장 강한 신으로 여겼으므로, 이스라엘은 강한 군대로 여겨졌다.
4)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메뚜기”로 여기며 약속의 땅을 악평하고 포기한다.
12.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하나님 나라를 예시한다.
1) 오늘날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갈렙과 같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는지, 10명의 정탐꾼처럼 현실을 크게 확대하여 악평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2) 오직 복음을 통하여 가나안 땅(하나님 나라)을 차지한다.
3) 그런데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나같이 연약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풍성함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 그 불가능한 현실로 인하여 악평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은 더욱 불가능해 보인다.
4) 스스로 보기에도 사단 앞에서, 세상 앞에서 “메뚜기”같이 여기며, 세상이 보기에도 자신을 “메뚜기”같이 볼 것이라고 여기며 위축되고, 악평하고, 포기하게 된다.
13. 죄인된 우리를 십자가의 은혜로 구속함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악평’은 사실일 수 있다.
1) 그러나 부활로 사망을 이기시고, 십자가로 마귀의 일을 멸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두려워할 것은 사단이며 세상이다.
2) 우리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정탐할 뿐 아니라, 믿음으로 담대하게 정탐해야 한다.
3) 현실을 직시하되,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현실을 보고, 갈렙처럼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취해야 한다.
-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에 복종하는 자, 침노하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4) 악평하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로 현실을 보아야 한다.
5) 주 안에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은 없다.
14.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여셨다.
1)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된 자는 새 생명을 얻으며 하나님 나라를 현재에서 누린다.
2)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언약 안에 거할 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번성하듯이, 새언약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풍성히 누린다.
3) 우리가 새 언약 안에 거하는 것은 아들의 구속의 은총을 힘입어 아버지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4)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구속의 은총을 힘입어 아들 안에 거하는 자는 아버지 품속에 거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누린다.
5) 자신이 메뚜기임을 발견하였다면 즉시 구속의 은총으로 나아가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아 예복을 입은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풍성히 누린다.
◈ 나의 묵상
1. 회개: 성령의 검이 드러낸 비참한 존재
주해를 하기는 쉽다. 그러나 나 또한 불신앙의 10명의 정탐꾼들처럼 나 자신을 메뚜기로 여긴다. 한국교회의 서구화, 점점 돌밭이 되어가는 한국사회와 성도들, 그리고 나의 마음을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 척박한 현실, 사단은 네피림의 후손들처럼 강하고, 세상문화는 강하다. 다음세대는 하나님을 떠나고, 기성세대도 예전 같지 않다. 그리고 나 또한 가난한 마음을 잃었다. 과연 부흥은 다시 올 것인가? 과연 하나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을까?를 의심한다. 불안과 의심, 부정적인 현실해석은 나에게 습관이 되었다. 실패할 때, 덜 충격을 받기 위하여 항상 안될 때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습관이 불신이 된다. 미래를 삶으로 불안해하고 불신한다. 그러나 믿음은 현재를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현재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라는 단어가 마음을 찌른다. 젖과 꿀이 흐른다. “그러나..” 나도 하나님이 지금까지 은총을 베풀었지만 그러나..라고 한다. 하나님이 은혜가 크지만 “그러나..”라고 한다. “그러나”가 사라지고 오직 믿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지 못한다. 뿌리 깊게 심겨진 “그러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리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악평한 죄를 회개한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2. 복음이 생명을 조명하다(구속의 은총으로 존귀하게 되어 아버지 품에)
나는 메뚜기 같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날마다 순간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 전신갑주를 취한다.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으로 행하지 않으면 세상을 이길 수 없고, 자아를 이길 수 없다. 그들은 나보다 강하다. 그래서 갈렙과 여호수아가 의지했던 하나님을 의지한다.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여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신 말씀으로 달려간다. 말씀을 따라가야만 가나안은 정복된다. 믿음으로만 가나안은 취해진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복음을 통하여 내 안에 예수생명 있음을 확증한다. 내 안에 사시는 이는 그리스도다. 내가 묵상하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가 묵상한다. 내가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을 준비하시고 선포하게 하신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시고, 목자이시며, 나는 무익한 종일 뿐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고 목양한 죄를 회개한다. 주님의 긍휼을 구하며 십자가로 나아간다. 메뚜기 같은 나를 부르사 가나안을 차지하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찬양한다. 주께서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 연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특기이다. 나보다 강한 가나안과 싸우도록 부르신 대장되신 주님 안에 거한다. 아들 안에서 승리를 주시는 주님을 기대한다. 그래서 더욱 복음을 통하여 아들 안에 거하고, 나를 영접하신 부활의 몸 안에서 아버지 안에 거한다.
◈ 묵상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는 참으로 메뚜기와 같은 자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약한 자를 부르시고, 아무것도 아닌 모세를 불렀습니다. 죄인중의 괴수인 바울을 불렀고, 갈릴리 촌놈들을 불렀습니다. 주님의 전능하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주님, 저의 약함을 더욱 알아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그리스도로 옷입게 하옵소서. 주님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주님을 항상 인식하며 인정하게 하옵소서. 묵상과 설교만이 아니라 걸을 때도, 말할 때도, 일상에도 주님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연약한 모습 이대로 주님께 드리오니 받아주시옵소서.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주시고, 복음을 통하여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옵소서. 주님, 모든 성도들에게 강한 믿음을 주옵소서. 모험할 수 있는 믿음,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주사,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저의 마음을 만지시고, 제 마음의 주인이 되어 사십시오. 저의 생명과 담대함과 지혜가 되어 주시옵소서. 한밤의 기도회가 있습니다. 생명의 교제가 풍성해지게 하소서. 임직식과 요르단이집트 복생에 함께하여 주옵소서. 대안학교를 위하여 보나쿰 공동체 목사님을 만나는 것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