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그곳이다..
호남의 중앙에 위치한 백양사는 동으로 월출산, 남으로 무등산, 북으로 마의산과 접하고 주봉우리 및 백학봉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여한선사가 개창했을 당시는 백암산 백암사라 했으나 환양선사가 산이름과 절이름을 백양사로 바꾸었다. 환양선사께서 약사암에 있을 때 일이다.
조사는 매일같이 송경을 하였다. 하루는 흰양 한 마리가 주봉에서 내려와 환양스님 백연경을 읽는 소리를 다 듣고 매일 왔다 돌아갔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구암사 고개에서 백양의 왕래가 많아졌다. 전혀 백양이 나타날 수 없는 곳에 갑자기 백양이 나타나 기이하게 여겼다.
이 일이 있은 후 백양산으로 산이름을 백양산으로 바꾸고 사찰도 백양사로 고쳤다. 그리고 조사께서도 환양이라고 공칭되었다.
또 이곳은 진묵스님이 주석하시며 많은 기행 이적을 보인곳이기도 하다. 진묵스님은 백학봉에 있는 운문암에 객스님처럼 머물고 있었다.
마침 불사가 있어서 스님은 높은 법력을 지니신 분으로서 대중에게 숨기고 불사중에 차를 끓여 내는 다각의 일을 맡아했다. 진묵대사는 조금도 나태함이 없이 다각일을 계속했다.
진묵대사는 신중단에도 차를 올렸다. 하루는 대중들이 모두 꿈을 꿨다. 대중들의 꿈속에 신중들이 나타나 다각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달라고 현몽을 했다. 그 까닭은 자기들은 호법신인데 부처님의 예의를 받기가 몹시 민망하니 다각을 바꾸어 달라는 현몽이었다. 대중들은 똑같은 꿈을 꾸고 나서 모두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그 현몽이 있은 후 사하촌에 사는 한 촌부가 절에 올라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산 밑에서 전날 낮에 풀을 베고 있을 때 어떤 남녀가 희희락락하며 운문암으로 올라가더니 돌아가는 길에는 대성통곡을 하며 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자기들이 영원히 안주할 곳을 정하려고 찾아 갔더니 일옥(진묵대사)이라는 스님이 맹화(뜨거운 불길)로 지저줌으로 견딜 수가 없어 쫓겨 내려온다는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대중들은 일전에 현몽이 있었던 터에 또 촌부의 말이 있고 보니 진묵대사님에 대한 생각을 달리했다. 진묵스님은 분명히 부처님의 화신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화광삼매로 마중(토지신)을 추방함이 틀림없었다. 대중들은 늦게야 깨닫고 당장 진묵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셨다.
불사가 끝난 후 진묵스님은 대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남겼다. 내가 다시와서 불사를 하기 전에는 부처님 몸에다 손을 대지 말라고 하였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불상에 도금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문자그대로 흰학같은 백학봉에는 옛 조사들의 족적이 남아 오늘 우리의 가슴에 큰 가르침과 불심을 일으켜 준다. 그리고 그 족적과 남은 이야기는 역사가 계속 되는 날까지 큰 빛으로 우리 마음을 연이어 나갈것이다. -김인수의 글에서-
*진묵대사가 어머니 제사때 올린 글..
진묵스님은 모친 제문에서 운수납자를 '표주박 하나 차고 다니는 행걸일승'이란 재미있는 표현을 썼다. 다음은 진묵스님의 모친 제문이다.
태중 10달 동안의 은혜를 어떻게 갚으며
슬하에서 3년 동안 길러 주심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만 세를 사시고 또다시 만 세를 사셔도
자식의 마음은 오히려 싫거늘,
백 세도 못 채우셨으니
어머님의 수명이 어찌 이다지도 짧습니까.
단표 노상에 행걸 일승은 이미 그러려니와
비녀 꽂은 규중의 시집 안 간 누이동생은 애처롭지 않습니까.
상단의 불공이 끝나고 하단의 시식도 끝나니
중들은 각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앞산은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데
혼은 어디로 갔습니까, 오호 애재로다!
진묵스님은 제문의 한 구절인 "앞산과 뒷산은 첩첩한데 혼은 어디로 갔는가. 오호 애재로다!"에서 부모의 은공을 다 갚고 있다. -석성우의 글에서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감사합니다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