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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뉴스와 공부 글 ~ ~ ~ ~ ~ ~ ~ ~ ~ ~ 스크랩 육조혜능의 계송을 살펴보다.(혜능과 세간)
향인 의현 추천 0 조회 289 19.08.24 04: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불교티비에서 육조단경을 무심스님이 강론하시는 것을 보고 육조혜능에 대해서

살펴보다가 ....

...이전에는 그냥 치나쳤었는데..짚어보고 싶은 부분이 생겨서  살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능은 6대조사이다.신수는 혜능과 같이 5대조사의  제자였으나 혜능이 조사(법통)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신수의 계송>

身是菩提樹   몸은깨달은 나무

心如明鏡臺   마음은 밝은 거울

時時勤拂拭   언제나 털고 닦아

勿使惹塵埃   먼지 묻지 않도록 하리


(혜능의 계송>

菩提本無樹    깨달음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    밝은 거울 또한 틀에 얽매이지 않은 것

本來無一物    본래에 한 물건도 없거늘

何處惹塵埃    어느 곳에 먼지가 일어나리요?

 

 

------------

신수의 계송은 아직 존재,몸이라는 것,몸과 마음에 대한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며...

몸이 지혜를 증득하는 필수불가결한 도구임을 알고있고 몸을 통해서 깨달음을 구할 수 있지만

몸의 쓰임과 오온의 인연화합은  보았으되 오온의 해체에 대한 내용은 없다.

무상과 무아를 이해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존재하는 기간동안의 몸에 대한 설명을 한 것이고 깨달음에 관한 내용이라면

보고난 후에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한 계송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혜능의 계송은 존재는 무아임을 알고 그것이 진리임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오온의 화합)이 지혜를 증득하게 하고 깨달음으로 이끌 수 있는 존재임은 맞지만

몸음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고 오온의 실체는 무아라는 것을 꿰뚫고 있으며

오온은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변화하기에 나라고 집착할 대상이 없음을 말하는 것 같다.

진리 자체는 인식하거나 인식되지 않더라도 늘 그렇게 거대한 흐름으로 계속한다라는 것...

몸을 통해서 깨달음을 구하나 깨달음을 구하고 보니  몸도 변화하는 무상함으로 무아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

본래 존재는 오온의 인연화합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오온은 언제고 흩어지게 되어 있으니

집착하여 머물것이 없다.라는 의미인것 같다.

신수는 깨달음의 과정에 있고 혜능은 깨달음을 구하였으니...신수가 틀렸다라고 할 수는 없으나

존재와 세상의 이치를 본 사람은 혜능이라는 말이 성립이되는 것인가 보다.

혹은 깨달음의 관점을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서로 계송을 읊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5대조사는 혜능에게 조사의 자리를 물려 주었다.

그것은 불교의 핵심은 연기, 무상과 무아를 보는 것이고 공하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함으로

몸을 긍정하고 몸의 변화(지혜의 상태)를 긍정하고 다시 몸을 배제하고 지혜를 배제하고 중도에 입각한다.

그것은 이미 있다 없다의 판단을 떠나서 존재하는 완전함이다.(연기=공)

그러한 조건이 성립이 되는 계송은 혜능의 계송이라 5대조사는 생각하였는가 보다.

 

 

----------------------------------------------------------- 

 

무상송(無相頌) /육조혜능(六祖慧能)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소리나 빛깔도 없고 그 없다는 생각도 없어서)



 /육조혜능(六祖慧能)

1.
說通及心通(설통급심통)  말도 통하고 마음도 통하니,
如日處虛空(여일처허공)  마치 태양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다.

2.
唯傳見性法(유전견성법)  오직 견성법(見性法)만을 전하여,
出世破邪宗(출세파사종)  세간에 나와 삿된 가르침을 부순다.

3.
法卽無頓漸(법즉무돈점)  법(法)에는 돈(頓)과 점(漸)이 없는데,
迷悟有遲疾(미오유지질)  어리석음과 깨달음에는 느림과 빠름이 있구나.

4.
只此見性門(지차견성문)  단지 이 견성(見性)의 문 하나를,
愚人不可悉(우인불가실)  어리석은 사람은 잘 알지 못한다.

5.
說卽雖萬般(설즉수만반)  말로 분별 하면 수만 가지가 있지만,
合理還歸一(합리환귀일)  도리(道理)에 계합하면 하나로 돌아간다.

6.
煩惱暗宅中(번뇌암택중)  번뇌의 어두운 집 속에는,
常須生慧日(상수생혜일)  늘 지혜의 태양을 밝혀야 한다.

7.
邪來煩惱至(사래번뇌지)  삿됨이 오면 번뇌도 오지만,
正來煩惱除(정래번뇌제)  바름이 오면 번뇌는 사라진다.

8.
邪正俱不用(사정구불용)  삿됨과 바름을 모두 쓰지 않으면,
淸淨至無餘(청정지무여)  깨끗함이 지극하여 남김이 없다.

9.
菩提本自性(보리본자성)  깨달음이 본래 스스로의 본성인데,
起心卽是妄(기심즉시망)  마음을 일으키니 바로 허망하다.

10.
淨心在妄中(정심재망중)  깨끗한 마음은 허망함 속에 있으니,
但正無三障(단정무삼장)  단지 바르기만 하면 세 가지 장애가 없다.

11.
世人若修道(세인약수도)  세간의 사람이 만약 도를 닦으면,
一切盡不妨(일체진불방)  일체가 조금도 방해되지 않는다.

12.
常自見己過(상자견기과)  늘 스스로 자기의 허물을 보면,
與道卽相當(여도즉상당)  도(道)와 서로 만나게 되리라.

13.
色類自有道(색류자유도)  중생들에게 본래 도(道)가 있으니,
各不相妨惱(각불상방뇌)  각자는 번뇌를 거리끼지 말라.

14.
離道別覓道(리도별멱도)  도를 떠나 따로 도를 찾으면,
終身不見道(종신불견도)  죽도록 도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15.
波波度一生(파파도일생)  바쁘게 허둥되며 일생을 보내지만,
到頭還自懊(도두환자오)  마침내 스스로 한탄하게 된다.

16.
欲得見眞道(욕득견진도)  참된 도(道)를 만나고자 하는가?
行正卽是道(행정즉시도)  행함이 바르면 곧 도(道)이다.

17.
自若無道心(자약무도심)  스스로 만약 도를 향한 마음이 없다면,
闇行不見道(암행불견도)  어둡게 행동하여 도를 만나지 못한다.

18.
若眞修道人(약진수도인)  만약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不見世間過(불견세간과)  세간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

19.
若見他人罪(약견타인죄)  만약 타인의 잘못을 본다면,
自罪却是左(자죄각시좌)  자기의 잘못이 도리어 증거(證據)이다.

20.
他罪我不罪(타죄아불죄)  타인은 잘못하고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我非自有過(아비자유과)  나에게 스스로 허물이 있음을 비난하는 것이다.

21.
但自却非心(단자각비심)  다만 돌이켜 스스로를 비난하는 마음이 되면,
打除煩惱破(타제번뇌파)  번뇌를 제거하여 없앨 것이다.

22.
憎愛不關心(증애불관심)  싫어하고 좋아함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長伸兩脚臥(장신양각와)  두 다리 쭉 뻗고 누울 수 있다.

23.
欲擬化他人(욕의화타인)  타인을 교화하고자 한다면,
自須有方便(자수유방편)  자기에게 방편이 있어야 한다.

24.
勿令彼有疑(물령피유의)  그가 의심을 가지도록 하지 않는다면,
卽是自性現(즉시자성현)  바로 자기의 본성이 드러날 것이다.

25.
佛法在世間(불법재세간)  불법(佛法)은 세간에 있으니,
不離世間覺(불리세간각)  세간을 떠나지 않아야 깨친다.

26.
離世覓菩提(리세멱보리)  세간을 떠나서 깨달음을 찾는다면,
恰如求兎角(흡여구토각)  마치 토끼에게서 뿔을 찾는 것과 같다.

27.
正見名出世(정견명출세)  바른 견해를 일러 출세간이라 하고,
邪見是世間(사견시세간)  삿된 견해를 일러 세간이라 한다.

28.
邪正盡打却(사정진타각)  삿됨과 바름을 모두 물리쳐 버리면,
菩提性完然(보리성완연)  깨달음의 본성은 완전하여 흠이 없다.

29.
此頌是頓敎(차송시돈교)  이 게송은 돈교(頓敎)이며,
亦名大法船(역명대법선)  또 큰 진리의 배라 부른다.

30.
迷聞經累劫(미문경누겁)  어리석게 들으면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悟卽刹那間(오즉찰나간)  깨달으면 찰나 사이일 뿐이다.

 

 

 

--------------------------------------------------------------------------------------

 

............

"불법(佛法)은 세간에 있으니,
세간을 떠나지 않아야 깨친다.


세간을 떠나서 깨달음을 찾는다면,

마치 토끼에게서 뿔을 찾는 것과 같다."

..........

 

여기에서 세간이란 표현을 하였는데...세간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전>

'범어 loka의 번역으로서 축약해서 세[世]라 하며, 로가[路迦]라 음역한다. 세[世]는 변화해 가는 것[遷流], 간[間]은 가운데 즉 안이란 의미다. 보통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현상세계를 말한다. 현상세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도 세간이라 한다. 이런 경우는 세속. 범속[凡俗]이란 뜻이다. 세상의 사물과 번뇌에 얽매여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존재의 모든 현상을 지칭한다. 세[世]에는 부정해서 없애 버려야만 하는 것[對治], 끊임없이 변화는 것[不靜住], 진리에 어긋난 헛소리[虛妄]의 세 가지 의미가 있다.[불성론 권2] 세간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유정세간: 생명체들이 사는 세간으로 중생세간. 유정계라고도 한다. [2] 기세간: 유정들이 살 수 있게 하는 산하대지 등을 말한다. 물기세간. 기세계. 기계[器界]. 기[器]라고도 한다. 이상의 두 가지로 나누고 (1)중생세간[유정세간] (2)국토세간[기세간] (3)오음세간 (1) (2)의 세간을 구성하는 오온을 말함. 오중세간. 오온세간이라고도 한다.] 의 삼세간설은 천태종의 주장이다. 권3에선 [1]중생세간 [2]기세간 [3] 지정각세간 [1] [2]는 부처님의 교화대상이기 때문에 이들을 교화하는 佛身을 말한다.]의 삼종세간을 주장한다. 유정세간. 기세간의 분류는 정보[正報]. 의보[依報]의 분류와 같은데 세간 이라고 할 때는 미혹의 세계에만 통하고 보[報]라고 할 때는 미오[迷悟]의 두 세계에 통한다. 세간을 뛰어넘어 있는 것을 출세간[出世間]이라 하고, 보살의 계위나 지혜 선정 등에 세간과 출세간의 구별을 세운다. 예컨데 일반적으로는 미계[迷界]의 인과 [고. 집의 二諦]는 세간이며, 오계 [悟界]의 인과[멸. 도의 二諦]는 출세간이라 한다. 이 밖에 화엄종에선 일반적인 출세간[삼승교의 출세간]을 초월해 있다는 의미에서 출출세[出出世] 즉 출출세간을 주장한다.

 

 

사전에 설명된 세간에 대한 설명과 같이

세간은 아직 깨닫지 못한 세속 혹은 범속,오온을 지칭하기도 하는 의미인가 보다.

혜능의 '무상송'을 보면

'...

불법(佛法)은 세간에 있으니,
세간을 떠나지 않아야 깨친다.'

 

이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진리는 세속,오온에 있다는 말이 된다.

오온의 화합으로 몸이 구성되고 몸의 구성인 존재는 세속,세상속에서 살고 있다.

더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 자체만 - 그리고 더 간단하게 자기자신만을 놓고 본다면

자기자신이라고 불리는 나는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디(색수상행식).

오온을 해부해보면 색수상행식이다.

이 오온의 화합이 나이다.곧 존재다.

이 오온의 작용을 통하여 ..더 구체적으로 색에서 분화된 6근<감각기관>=(안이비설신의)을 통해서

 대상 6경(색성향미촉법)을 보고,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식이 생겨난다.6식=(안식,이식,비식,설신,신식,의식)

이것(근.경.식)이 세간이다.곧 6근과 그 대상,6식의 화합이 세간이다.(일체는12처,6식을 더하여 18계라고도 한다)

붓다가 말한 '일체는 12처'라는 말이 곧 존재를 의미함이고,18계는 곧 존재의 인식 세계이다.

단지 표현한 말이 교학적으로 설명한 언어와 문학적인 표현법을 쓴 언어의 차이점이 있을뿐이다.

 

세간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몸을 떠나서 법을 구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다시 살펴보면 오온을 떠나서는 깨달음을 구할 수 없다.

오온의 6근과 수상행식의 도움 없이는 깨닮을 구할 수 없다.

이렇게 무명의 탈피와 절단,어리섞음으로 부터의 해방은 식의 변화로만이 이룰 수 있다.

어리섞음에서 지혜로움으로 바뀌는 것은

무엇인가를 찾아내서,뭔가 숨겨진 무엇인가(물질)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사람은 생각이 늘 변한다.그 변화하는 특성때문에 어리섞음에서 지혜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바른 변화와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감관들이 바르고 맑아야 한다.

6근을 청정하게 해야한다는 것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하는 것에 사견이나 집착,망상이 개입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하여도 그것에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아야 되며,그러한 것은 곧 마음의 평상심을 유지한다.라고도 표현할 것이다.

지혜로움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을 뜻할 것이다.

 

곧 세간은 나의 몸이니(육체와 정신) 그것을 떠나서 진리를 구한다면 찾을 수 없다는 뜻을 의미하고 진정으로 자기의 깨달음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세간은 위의 설명을 모두 압축하여 놓은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

세간을 떠나서 깨달음을 찾는다면,

마치 토끼에게서 뿔을 찾는 것과 같다.'

 

자기 몸을 떠나서 구하는 진리는 진짜로 법을 구할 수 없고 깨달음으로 갈 수 없으니...

토끼뿔과 같다고 했다... 말짱황이라는 말일 것이다.쓸모없는 것,시간낭비,어리섞은 짓....

 

 

법은 이렇게 구하되....

출세간이라는 말이 있다.

 

'....

바른 견해를 일러 출세간이라 하고,
삿된 견해를 일러 세간이라 한다.'

 

세간에서 법을 구하여야 한다.라는 말과 삿된 견해를 세간이라.한다.에서 다른점은 무엇일까...? 

 

여기서 세간은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인 것 같다.견해의 입장에서 세간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바른 견해(정견)는 존재는 연기되고 연기되는 것은 늘 변화하므로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의 실체는 무아이다.

세간에서 법을 구하여야 한다.라는 말이 바른 견해이고 세간을 떠나서 구한다면 그것은 바른 견해가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삿된 견해의 세간, 집착하여 그것에만 머무르고 법을 구하고도 집착을 놓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세간에서 법을 구하니 그것이 최고다.라고 생각하는 견해....

또한 세간을 떠나서 딴 데서 법을 구하려는 것과 같은 것을 세간적 견해,삿된 견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럼 출세간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세간의 반대,부정적인 의미로 쓰인 것 같지만..사실은 아니라고 본다.

출이라는 의미는 ...

낳다 나가다 떠나다, 헤어지다 드러내다, 나타내다 내놓다 내쫓다, 추방하다(追放--) 돌려보내다 내어주다, (셈을)치르다 버리다 게우다 샘솟다, 뛰어나다 이루다 ... 등의 의미가 있다.

 

출세간에서 사용되는 출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낳다,드러내다,버리다,뛰어나다,이루다..등의 의미로 정의될 수 있다고 본다.

출이라는 것은 드러내다의 의미가 가장 크다고 본다...

어떻게 드러내지게 되는다....예로),,,물론 연못에 황금이 떨어져 있어서 못의 물이 다 빠지고 보니 황금이 드러나 보이는 것도 드러나는 것이고 황금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출세간에서 의미하는 드러난다.라는 것은 어리섞음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바른  법을 따라감을 의미한다고 본다.

출세간은 세간과 뚝 떨어져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세간이 변화하여 출세간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몸(오온)을 통하여 4성제와 팔정도에 입각하여 연기,무상고(공)무아를 아는것이 출세간적 견해라고 생각된다.

세간과 출세간의 차이점은 어리섞은 상태에 있느냐 아니면 진리를 알고,지혜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것을 언어로 구분하여 놓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니까..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것은 마음안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마음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상태를 언어로 표현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보통 마음의 상태는 실체가 없음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마음의 변화를 확인하는 것은 "행"으로 확인을 하게 된다.

그래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말로,글로 설명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고

잘못하면 군더더기, 혹은 전달 받는자가 자신의 감정 및 생각과 결합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스스로가 얻은 깨달음을 설명하기는 쉽지않고 전달하기도 쉽지않고 전달 받는 것도 쉽지는 않다.

그래서,늘 강조하는 6근 청정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같은 상태,비슷한 상태가 되면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가 쉬울 것이므로...

자연의 원리외 진리의 모습을 보는 것은 삿된 감정 없이,욕망 없이,집착한 없이 보아야 제대로 보고 알고 깨닫고 자유로을 수 있기에 그러한 것이 아닐까 한다.

 

진리를 보고 깨달음을 구하는 길은 출세간이고 진리를 보지 못하고 깨달음을 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세간=삿된견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세간과 출세간이라는 이분법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구조가 그러하무로...

  

'....

삿됨과 바름을 모두 물리쳐 버리면,

깨달음의 본성은 완전하여 흠이 없다.'


삿됨과 바름을 모두 물리친다.....라...

옳은 견해와 옳지 않는 견해 또한 물리친다.배제한다....곧 중도적 입각이 아닐까 한다.

세간에서 법을 구하되 구한 법과 깨달음 또한 배제한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이라는 생각또한 버려야한다.

중도에 입각한 견해...

깨달음은 깨닫고 나서 보니  깨닫지 않았던,깨달았던 이미 그 자체는 이미 완전하다.

어리섞음 상태의 몸과 지혜의 상태의 몸 모두 변화하고 그 성질은 무아이다.

그러므로...보고 안 보고의 차이는  클 것이나

연기되는  세상 - 세상은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하다.

도도한 원칙과 흐름으로 진리는 늘 그곳에 있고,오고가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

 

깨달음의 본성은 완전하여 흠이 없다.'

 

진리의 실상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우리는 자기몸(색수상행식)을 통해서만이 진리를 보고 지혜를 얻을 수 있고,지혜자체로 변화할 수 있다.

그리고 간단히 말해서 그 변화는 의식(식)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진리는 찾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다.

어리섞음에서 지혜의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몸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나 이렇게 지혜로움으로 변화하는 몸도 그 실체는 무이아다.

변화하여 흩어진다.존재,나라고 딱 부러지게 말 할 수 있는 실체를 찾아볼 수가 없다.

변화하는 것은 무상한 것이다.변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무상하다고 하는 것이다.

무상함이 허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무엇인가를 알고나면 허무와 허탈함을 경험한다.

여기서부터가 진짜로 뭔가를 결정하거나 바뀌는 것이 아닐까...

삶이 바뀌는 지점...

아마도 우리는 이 시점부터 많은 얘기들이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뭔가를 알고,혹은 깨달았다고 해서..거기서 멈추어 지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혜능은 - 존재는 변화하여 무상함으로 무아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완전하다.라는 것을 계송과 무상송을 통해서 나태내고 있다.

'깨달음의 본성은 완전하여 흠이없다.' 이러한 것을 보는 방법으로 '돈교" = 직관의 수행임을 밝히고 있다.

따지고보면 모든 철학이나 수행은 교학의 영향을 받고 기본을 세우기도 하지만

그 교학을 이해하는 것도 사실은 직관의 도움을 받는 것 같다.

이해하고 그 이해가 깨달음의 탄성과 환희가 되기에는 직관의 도움은 필수적이라고 생각된다.

 

계송은 대부분의 시(詩)가 그러하듯이 장대한 것들,말로 풀어내면 엄청나게 많은 것들,원리를 풀어내면 많은 양이 되는 것,

진리를 얘기하고자 하다보면 증명하고, 반복해야 하고,설명해야 하는 것처럼..많은양을 하나로 압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계송으로 압축한 진리를 다시 풀어보면 많은 설명과 많은 설명들이 필요해진다.

계송으로 압축할 수 있으려면 그정도의 양을 알고 있어야 되는 것이고,혹은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깨달음을 얻었거나,그 깨달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바른 계송이 나올 수 있을 수 것이다.

또한 계송을 설명으로 풀어내려면 압축된 것을 풀어서 해석할 수 있으려면 또 그만큼의 이해와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따지고 보면....계송은 장대한 양을 하나로 압축한 것이기에 교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압축한 것을 풀어서 설명해줄려면 그정도의 지식과 이해와 깨달음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선(禪)을 선으로 풀거나 이해하거나 전달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선을 교학으로 다시 푸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교학적인 체계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선으로 바로 전달할 수도 있고,바로 볼 수도 있으나 ...

그것을 설명해주어야 하고 그것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한 인과를 밝혀야 할 때는 교학의 이해와  설명 방식이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된다면 불교 -

초기불경과 선불교가 분리된 듯한,

이질적인 듯한 느낌을 많이 지워내고 서로 맞물리고 흘러가는 원의 관계의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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