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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양산문(曦陽山門) 봉암사(鳳巖寺)의 빗장이 열리던 날(7/끝)
- 창건주와 중창주를 기리고 산문을 돌아서며 -
대웅보전과 조사당 사이에는 한창 보수공사 중인 봉암사 창건주 지증대사적조탑과 비가 서 있다.
출입을 금지하는 테이프를 둘러 놓았건만 잠입한 철없는 어른을 보고 이곳 스님의 애가 다탔다.
아무리 수행처라 한들 저런 모습에 잘 한다고 할 수행승은 없다.
-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비로, 귀부 및 이수, 비좌의 조각이
뛰어나서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었다. 비신의 높이는 273cm, 너비 164cm, 두께 23cm이다.
탑비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
지증대사(824∼882)는 17세에 부석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
산파를 창시하였다. 지증대사(智證大師)는 진골출신으로 속성이 김씨이고, 법호는 도헌(道憲)
이며 헌강왕 8년(882)에 입적하자, 왕은 ‘지증’이란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은 ‘적조’라 하였다.
헌강왕은 885년에 왕명으로 최치원(崔致遠)에게 지증대사의 비문을 짓게 하였다. 893년(진성
여왕 7년)무렵에 최치원이 비문을 완성하였고,탑비는 그 보다 훨씬 늦은 924년(경애왕 1)에
분황사의 혜공(慧江)스님이 나이 83세에 글씨를 쓰고 아울러 글자를 새겼다.
글씨는 왕희지체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꾸밈이 없고 우아하다
거북모양의 비받침은 머리는 용의 형상이고 몸은 거북 모양이며, 등 위에는 비를 끼워두는 비좌
(碑座)를 갖추고 있다.
비몸 위로 올려진 머릿돌에는 연꽃무늬와 함께 서로 다투듯 얽혀 있는 8마리 용이 장식되어
생동감이 느껴진다.
비문에는 지증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린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데, 비문의 내용은 신라
선종사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 토지소유관계 등을 연구할
때에도 기초자료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비문의 내용 중 "종이에게 붓을 핥도록 한다"는 재미있는 표현도 있다.
왕명으로 지은 비문에 최치원은 몸을 낮추는 겸손을 잊지 않았다.
"썪은 선비의 도로 대사의 정상(情狀)을 들추기가 부끄럽도다. 발자취가 보당처럼 빛나니 이름을
새길 만한데, 나의 재주가 금송(錦頌)을 감당하지 못하여 글을 짓기 어렵도다.
시끄럽고 번거로운 창자로 선열의 공양에 배부르고자, 산중으로 와서 전각을 살펴보노라."
또한 지증대사의 행적을 적게 된 것에 긍지를 가지기도 했다.
"(대사의)옳은 일로 글을 지은 것에 부끄러움이 없고 용력(勇力)을 과시하기에 여유가 있다"
그리고 겸손으로 끝을 맺는다...
"일은 꽃을 따서 모은 것과 같은데, 글은 초고 없애는 것을 어렵게 하였다. 그 결과 가시나무를
쳐내지 않는 것과 같게 되었으니, 쭉정이와 겨가 앞에 있음이 부끄럽다."
-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 -
지증대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로 보물 제1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基壇部)를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다.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면 모양은 8각이다. 밑 단에는 각 면마다 사자를 도드라지게 조각
하였으며, 윗단을 괴는 테두리 부분을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 두툼하게 하였다.
윗단은 각 모서리 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조각을 세우고, 사이 사이에 극락조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는데 그 모습이 우아하다.
지붕돌 역시 8각이며, 아래에는 서까래가 두 겹으로 표현되어 겹처마집을 보고 있는 듯하다.
처마는 살짝 들려 있으며, 낙수면의 각 모서리선은 굵직하고 끝에 꽃장식이 알맞게 돌출되어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연꽃받침 위로 머리장식이 차례로 얹혀 있다.
지붕돌의 일부분이 부서져 있으나 각 부분의 꾸밈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품격이 느껴진다
이 부도는 전체적인 비례가 잘 어우러져 있으며, 지붕돌이 조금 넓어 보이기는 하지만 안정감이
있다.
가운데 받침돌의 각 면에는 여러 형태의 조각을 새겨 넣었는데,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다.
윗받침돌은 윗면에 탑신을 괴기 위한 굄대를 두었으며, 모서리마다 작고 둥근 기둥 조각을 세워 입체감 있는
난간을 표현하였다.
탑신은 8각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고, 앞뒤 2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짝 모양
(사리탑)을 조각하였다. 그 양 옆으로는 불교의 법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나머지 두 면에는 보살의 모습
을 돋을새김 하였다.
선열당(禪悅堂)
2006년에 준공된 선열당(禪悅堂)은 법회와 공양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해회당(海會堂)
해회당(海會堂)은 원주실,행자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객(客)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산문을 떠나면서 원주실에 들러 봉암사 달력 한 권을 얻어왔다. 원주실 입구의 저 분들도 아마 그리하려고
서 있을 것이다.
선열당 앞 천막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열성으로 일 하시는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인근의 불자들은 물론, 전국에서 스스로 자원해서 오신 분들이라 한다.
곧 점심공양에 들어갈 예정이라 한다.
봉암사 절밥을 맛보고 싶었으나 혼잡을 피해 하산하기로 했다.
중천으로 솟은 해는 짙은 그림자를 수직으로 드리운다. 그 그림자 속으로 떠나는 이들의 모습이
숨었다 나타나기를 되풀이 한다.
극심한 가뭄에도 양산천 계곡의 물소리는 단절됨이 없다.
흐르다 고인 물은 흔히 쓰는 표현으로 명경지수(明鏡止水) 그대로다.
잡념과 가식과 헛된 욕심이 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라는 부처의 가르침이다.
돌아가는 길...
돌아간다는 것, 돌아갈 수 있다는 것,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生의 여유로움이다.
우리네 인생 또한 그러하듯이, 어차피 여행은 돌아감을 전제로 출발했던 것이다.....
점점 입구가 가까와 온다. 산문의 입구격인 이름모를 다리 왼쪽 보호각 아래에 서 있는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보물 제172호로 지정된 봉암사의 중창조 정진대사의 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다.
정진대사 긍양[靜眞大師 兢讓(878∼956)]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로, 효공왕 4년(900)
당나라에 들어가 25년간 유학하고 경애왕 1년(924)에 돌아와 신라 경명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고려 태조 18년(935)에는 봉암사를 크게 중창하고, 불교의 중흥에 이바지 하였다.
특히 고려 전기의 태조·혜종·정종을 선문(禪門)에 들게 한 장본인으로,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광종은 ‘정진
(靜眞)’이라는 시호와 ‘원오(圓悟)’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이몽유(李夢游)가 글을 짓고, 명필 장단열(長端說)이 비면에 정간(井間)을 치고 구양순
체의 해서(楷書)로 써고, 섬율(暹律)스님이 이를 새겨 대사가 입적한 지 9년만인 965년(광종 16년)에 세웠다
비는 세로 273cm, 가로 139cm, 두께 26cm로 지증대사적조탑비와 크기가 비슷하며 귀부와 이수,
비신을 갖춘 양식으로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글자 한 자의 크기는 1.4cm 로 총 53행에 1행 103자의 구조로서 5,459칸의 정간(井間)이 쳐진 큰
비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리돌을 올린 모습으로, 거북의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이 두드러지게 커 보인다.
꼭대기에는 불꽃무늬에 휩싸인 보주(寶珠: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또렷하게 조각되어 우뚝
솟아 있다.
비문의 내용은 정진대사가 태어나 출가하고 양부(楊孚)선사에게서 수학한 후 중국에 가서 도연
(道緣)을 만나고 귀국한 후, 백암사와 봉암사에서 활동하며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스스로
개경에 가서 만나고, 혜종·정종으로부터 대우를 받으며, 광종은 궁중에 초청하여 재를 베풀고
호를 내렸고, 이후 대사가 봉암사에 물러나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청석을 물갈이하여 표면은 매끄럽다. 비문은 섬세하게 정간(井間)을 치고, 가는 붓으로 해서(楷書)
를 정갈하게 써내려갔다. 가장자리에는 연잎을 가늘게 새겨 멋과 운치를 더하였다.
왕명에 의해 지증대사적조비문을 지은 최치원도 그러했지만 정진대사원오탑비를 지은 이몽유도
그의 겸손함을 잊지않고 비문에 다음 같은 글을 적었다.
"대사의 생존시에 기상(奇祥)과 비설(秘說)을 죽간(竹簡)에 기록하되, 남산(南山)의 돌을 벼루로
삼아 먹을 갈아 마멸하고, 동해(東海)의 바닷물을 먹물로 하여 그 물이 말라 다하더라도 어찌
이를 다 기록할 수 있으랴!
신(臣) 몽유(夢游)는 학문이 계창(雞牕)에 미치지 못하는데도 자못 폐하의 명을 받들어 비문을
지을 능력이 없다고 고사(固辭)하였지만, 끝내 면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붓을 잡고 스님의 위대한 도덕을 나타내고자 문득 직필(直筆)로써 사실대로 적었
으나, 이는 마치 달팽이 껍질로 바닷물을 헤아리는 것과 같아서 헛된 수고만 할 뿐이며, 대롱 구멍
으로 하늘을 쳐다보나 별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다.
말은 한선(寒蟬) 과 같고 행(行)은 절름발이 거북과 같다 하겠다.
실로 비문 짓는 일을 맡았으나, 상수(傷手)함을 초래할까 근심하는 바이다."
비문의 일부가 결락되었으나 대체로 양호한 편이며 사진은 오른쪽 중간쯤되는 부분이다.
첫째 행은 이몽유(李夢游)는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장단열(張端說)은 비문(碑文)과
전액(篆額)을 썼음을 적었다.
사진에 보이는 두번 째 행은 붓다가 사체법륜(四諦法輪)을 굴리며 삼승법을 설하고, 45년 동안의
교화(敎化)를 마치고 열반직전에 이르러 가섭(迦葉)에게 이르시되...로 되는 행이다.
세번 째 행은 선풍(禪風)을 전하되 심인(心印)을 보호하여 끊어짐이 없게 하고, 신의(信衣)를 전해
주어 단절되지 않도록 하였다는 내용이다.
네째 행은 띄어쓴 행인 듯 글자가 보이지 않고, 다섯 째 행은 정진대사의 고조와 증조부 때부터
모두 군읍(郡邑)의 토호로서 집집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내용이다.
[참고자료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
오늘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내려 놓았는가, 아니면 내려 놓는 것 조차 잊고 돌아서는 것은 아닌가...
빨리 가야한다는 조급함으로 오를 때는 눈여겨 바라보지 못했던 한아름 느티나무의
풍성한 자태는, 창백하게 야윈 마음에 파랗게 물이 들도록 청정한 푸르름을 가득 채워준다.
걸어서 내려오는 동안 듬성듬성 차가 빠져나간 빈자리가 눈에 뜨이고 사찰로 진입하는 도로는 차량의 통행이
한산하다.
참배객이 이제 올만큼 다 왔나보다 하고 차로 내려가는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참배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게 열지어 있었다. 봉암사로 왕복하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라 한다.
봉암사 진입도로와 가은방향의 922번 지방도,괴산 방향의 517번 지방도가 만나는 삼거리의 양쪽방향으로
수 km에 달하는 차량들이 좌우로 주차되어 있다.
이곳에 차를 주차한 후 다시 셔틀버스가 운행되는 곳까지 도보로 수 km를 이동하는 것이다.
이 깊은 고봉준령의 산골짜기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상상이나 했었던가.
참으로 신심이 깊고 불심이 강한 불자들이다...
멀어져 가는 희양산이 못내 아쉬워 발길을 멈춘다.
잿빛 하늘아래 우뚝 서 있는 희양산, 그곳에는 한국불교의 정신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 밉지 않은 고집불통
봉암사(鳳巖寺)가 있다.
닫힌 산문 원망하지 말아 달라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멀리서 마음으로 보아 달라는
눈 푸른 납자들은
속세와 아득히 떨어져
아름다운 마음 속 산사에서
헤아릴 수 없는 세월과 윤회를 붙잡고
한국 불교의 활기를 불어 넣고 있다.
이룩하고 싶은 소망하나
간직한 삶이 아름답듯
가보고 싶은 곳 하나로 간직하면
마음 편한 절 봉암사가 좋을 듯 싶다.
-선묵 혜자스님-
나는 오늘 이룩하고 싶은 소망 하나를 이루었다......
해회당(海會堂)의 원주실에서 얻은 달력을 집안에서 잘 보이는 곳에 걸었다.
그림은 일장스님의 보현행원 선화도(普賢行願 禪畵圖)를 실었다.
펼친 5월의 달력에는 연등 아래에서 천 주(千 珠)를 세며 간절히 절을 올리는 불자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밑 작은 공간에는 보현보살의 10대원(十大願)중 하나인 탐욕과 질투,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인해 자신이 지은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참제업장가(懺除業障歌)가 다음 같이 적혀 있다.
뒤바뀜이여, 보리(菩提)로 향할 마음 어지러히 쌓은 죄업이 법계에 가득 차고도 남나이다.
모진 버릇에 떨어진 삼업(三業)을 오로지 정계(淨戒)로서 건지고자 하오니
오늘 우리들의 은중한 참회를 시방(十方)의 부처님은 굽어 살펴 주소서.
아아, 중생계(衆生界)가 다하고 나의 참회(懺悔)도 다하여 오는 세상에선 다시 악업(惡業)
에 빠지지 않으리...
※ 불교에 관한 지식이 얕은 내가 생업에 종사하면서 틈틈히 글을 올리긴 하지만
봉암사에 관한 것은 힘이 들었다. 내 스스로가 처음 가 본 곳이기 때문에
이미 다녀오신 불자님들의 시각과 차이가 날 수 있음에 저으기 염려되는 바가 컸다.
좁고 작은 내 안목으로 인하여 잘 못 소개되지 않을까하는 염려를 덜어보고자
관련 자료들을 많이 찾아보았다. 내 허물을 조금이라도 덮어 보고자하는 얄팍함에서다....
그동안 부족하고 재미없는 글 읽어주신 불자님들께 감사드리고,
댓글로 격려를 해주신 분들께 앞앞이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결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의 가피가 님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항상 함께하시길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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