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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서시
시편 1:1-6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주현 후 여섯째 주일이다. 대보름이 지났으니 어느 새 겨울과 봄이 임무 교대를 할 간절기가 점점 다가온다. 어김없이 봄은 올 것이다.
겨울은 ‘겨우 산다’고 해서 겨울이다. 봄은 무슨 뜻일까? 봄은 ‘새로 본다’고 해서 봄이다. 그런 새로운 마음으로 봄을 잘 맞으시길 바란다.
오늘은 윤동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꼭 80년이 되는 날이다. 10여 년 전, 출생 100년 즈음에 개봉한 영화 ‘동주’는 윤동주의 죽임을 다루었다. 일제가 저지른 국가 폭력과 잔학상은 너무 무거웠다. 윤동주는 그 희생자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윤동주의 시는 별, 사랑, 어머니를 연상하게 한다. 낭만적이면서, 비장감이 배어있다. 윤동주는 유난히 별을 사랑한 시인이었다. 그의 유고 시집의 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그 가운데 ‘별 헤는 밤’에 나오는 대목이다.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윤동주의 고향은 북간도 명동촌이었다. 시인이 지금껏 사랑받는 이유는 우리와 공감할 수 있는 따듯한 시어와 정서를 갖기 때문이다. 별을 헤는 마음이랄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읽으면서 누구라도 잠시 시인이 될 뻔했을 것이다.
1)
시편의 챕터를 나눌 때 1장이라고 하지 않고, 1편이라고 부른다. 산문이 아니라, 운문이기 때문이다. 시편 1편은 150편 전체를 이끌어 가기 때문에 첫 시편을 가리켜 ‘서시’라고 부른다. 아마 윤동주의 서시도 같은 의미처럼 보인다.
시편 1편은 모든 시편의 방향을 제시하고, 전체 시편의 결론을 압축하고 있다. 머리말로서 시편이라는 커다란 숲에 들어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이정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길과 뜻을 안내한다.
시편이 가르쳐주는 진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1편은 이를 간단히 요약하고 있다. 이런 말로 시작한다.
“복 있는 사람은... 형통하리로다”(1-3).
시편은 바로 복 있는 사람의 삶을 제시한다. 행복한 사람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복 있는 사람으로 살도록 말씀하시는 것이다. 복있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이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결론을 미리 알려주고 있다. 결론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이 얻는 행복은 어떤 일에 대한 보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열매를 맺는 푸른 올리브나무처럼 행복한 인생 그 자체를 뜻한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향해 말하고 있다. 흔히 사람은 묻는다. “사람이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시편 1편이 제시한다. 가장 사람다운 삶은 복 있는 사람의 삶이다.
‘복 있는 사람’, ‘의인의 길’이야말로 가장 사람답게 사는 것이며, 행복한 삶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누구인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2).
그가 즐거워하는 그 율법은 무엇인가? 본래 율법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친절하게 베푸신 가르침’을 뜻한다. 만약 그 가르침과 상관없이,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듣지도, 묵상하지도 않고, 닮으려고도, 실천도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존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이라는 표준설교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은 성경을 찾으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할 때, 하나님은 당신과 대화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시고 또 은총이 전달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신다.
2)
우리 모두는 의인의 길을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 길을 따라가 보자.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삶을 대조한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은 서로 겹치지 않는다. 1절 처음은 ‘복 복’(福)으로 시작하고, 6절 끝은 ‘망할 망’(亡)으로 마무리 짓는다.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의인의 삶이고, 멸망을 부르는 것은 악인의 삶이다. 두 단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섞이지 않고, 병행한다.
의인은 비타협적이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동행하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그래서 의인의 길은 수월하지 않다. 의로운 자는 종종 ‘홀로’ 서 있는 존재다. 그러기에 의인의 푸르름은 자주 위협을 받는다. 악은 선보다 분위기에 휩쓸리기 쉽다. 따라서 선한 영향력보다 악한 영향력이 힘이 세다.
복 있는 사람의 결과를 보라.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번창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르지 않는 물줄기와 같이 그의 삶에 생기를 공급해 준다. 그 믿음의 터 위에 심겨져, 밤낮으로 영양을 공급받는다. 여기에 기쁨이 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
흔히 생각하길 물가에 있는 나무들은 영양분을 빨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산에 있는 나무보다 뿌리를 얕게 뻗고 말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라고 한다. 물가에 서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산에 있는 나무보다 더 깊고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자기 몸을 지탱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악인의 인생의 결과는 의인의 열매와 전혀 다르다. 그는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 겨와 같다. 악인의 번성을 부러워 말라. 한 방에 ‘훅’ 간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4).
작은 바람에도 악인의 삶은 뿌리가 뽑힐 것이고, 알맹이가 없기에 껍데기처럼 날아가 버릴 것이다.
의인과 악인은 서로 섞일 수 없다. 뚜렷이 구분되는 두 부류의 인생이다. 서로 목적지가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의인의 길을 아시고, 의인의 삶을 살려고 애쓰는 그 수고를 다 알아주신다. 그러나 악인은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기 때문에 악인의 길은 망하게 마련이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6).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밤낮 읊조리며, 묵상하는 사람이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2). 그는 말씀을 사랑하며 즐거워한다. 의인이 튼튼하게 뿌리 내리고, 견고하게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 덕분이다.
시편 1편은 의인과 악의 출발점의 차이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 묵상이란 말의 히브리어 원어는 ‘하가’이다. 하가의 본래 뜻은 ‘먹이를 입에 넣은 짐승의 으르렁거림’이다.
소는 네 차례나 새김질을 하는 초식동물이다. 묵상은 마치 소가 반복하여 되새김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우리 성경은 ‘묵상’에 대해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라고 설명하였다.
한때 한국교회에 성경 큐티(QT) 바람이 불었다. 큐티는 내가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한다. 적용을 강조하다보니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적용도 깊이 있는 고민과 묵상 없이 제 생각대로, 제 경험대로 한다. 그러니 적용도 어렵고, 실천은 더욱 난감해 열매를 맺기가 쉽지 않다.
그런 낭패감은 큐티가 ‘나 주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상’(읊조림)은 ‘하나님 주도적’이다.
나는 말씀을 사모하면서 읊조리고, 주님은 그런 나를 만져주신다. 우리는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에 점점 친밀해지고 또 만족한다. 실천의 열매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과 교제하는 가운데 기쁨과 힘을 얻음으로써 나타난다.
큐티는 ‘Quiet Time’ 말 그대로 조용한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묵상은 일상생활 속에서 언제 어디서든 한다. 시도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는다. 일상의 영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색동교회가 말씀을 사랑하는 교회이길 바란다. 여기 강대상은 창립 5주년을 맞아 제작한 것이다. 그때 강대상에 이름을 붙였다. ‘톨레레게 강대상’이다.
강대상 앞에 ‘빛 십자가’와 좌우의 올리브(감람)나무를 새기고, 그렸다. 빛이신 말씀과 그로 인한 푸르름과 열매를 강조한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시편은 우리 영혼의 해부학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만큼 시편은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 일상의 기쁨과 고통을 두루 다룬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고대한다.
인디언은 말을 타고 가다가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기가 달려온 쪽을 한참 바라보면서 가끔씩 쉰다고 한다. 혹시 너무 빨리 달려서 미처 자기의 영혼이 뒤따라오지 못했을까봐, 영혼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렇듯 말씀 생활과 기도 생활의 결합이 바로 묵상이다. 묵상은 내 속에서 하나님을 충만하게 하는 일이다.
3)
토머스 프리드먼이 쓴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라는 책에는 베두인 민화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한 노인이 천막 근처에서 칠면조를 키웠다. 어느 날 누군가 칠면조를 훔쳐갔다. 노인은 아들들을 불러 칠면조를 찾으라고 했다. 하지만 아들들은 “칠면조 한 마리가 그렇게 중요하냐”며 무시하였다. 몇 주 뒤에는 낙타를 도둑맞았다. 아들들이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노인은 “칠면조를 찾으라”고 했다. 몇 주 뒤 이번에는 말이 없어졌다. 이번에도 노인은 “칠면조를 찾으라”고 하였다.
몇 주 뒤 노인의 딸이 성폭행을 당했다. 노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것이 칠면조 때문이다. 놈들이 칠면조를 빼앗아 가도 괜찮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령함과 신실함은 바로 베두윈의 칠면조와 같이 우리 신앙의 기본이다. 베두윈의 노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본을 강조한 것이다. 기본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오늘은 윤동주의 80주년 기일이다. 그의 대표작 ‘서시’(序詩)는 우리 민족이 겪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 자신이 겪는 아픔, 흔들리는 마음, 결심을 고백한다. 요약하면 별을 헤아리는 마음을 지키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기본기를 지키려는 마음처럼 순수하고, 한결같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누구나 자기 인생의 길과 목적, 꿈과 자유가 있다. 과연 내 인생의 서시(序詩)는 무엇인가? 내 삶을 이끌어가는, 내 꿈을 노래하는, 그런 말씀을 찾아보라.
사실 인생은 참으로 어렵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딱 부러지는 해답이 없다. 그러나 원칙은 있다. 그리스 정교회 넥타리우스 성인은 “사랑은 작은 교리적 차이로 절대 희생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차이점보다 공통점을 지향하기 때문에 그래서 공동체이다.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다. 피아노 연주자들은 모리스 라벨의 피아노 모음곡 ‘밤의 가스파르’가 연주자들을 괴롭히는 어려운 곡이라고 한다. 특히 큰 소리로 치는 것보다 작은 소리를 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그렇구나. 큰소리보다 작은 소리, 높은 소리보다 낮은 소리가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작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사실 사람은 큰소리와 작은 소리처럼 의인과 악인 두 가지 경우로 똑 부러지게 나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두 가지 소리가 혼재한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공존한다. 그래서 누구나 곤고한 삶을 산다.
시편 1편에서 한 사람의 의인으로 거듭난 그 사람의 고백을 듣는다. 과연 나에게 ‘내 인생의 서시’는 무엇인가? 그 마음 때문에 고난 중에도 마음을 다 잡고, 흔들리는 내 인생을 추수리고, 별을 헤아리듯 하나님음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는 그 말씀은 무엇인가?
시편은 말한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늘 마음을 살펴 하나님의 법을 따르라는 것이다. 인생의 길에서 하늘의 복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을 취하라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말씀을 묵상하고, 읊조리며, 그 말씀을 사랑하며, 은총 가운데 살라!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할 때, 주님과 대화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시고, 또 은총이 전달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신다.
그런 행복 영향력을 사람에게 나누고 전파하라. 내 삶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뿌리 내리고, 충만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늘 의인의 길, 복 있는 사람의 삶을 허락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