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기
→2013년 9월 27일 교리교육에 관한 국제 학술 대회 참석자들에게 하신 말씀
이제 예전에 예수회 회원들이 했던 것처럼 '첫째, 둘째, 셋째...' 하는 식으로 세 가지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1. 먼저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나눈다는 것, 예수님과 친교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사랑의 가장 위대한 선물인 십자가 희생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이 점을 매우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를 비유로 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꼭 붙어있어라'(요 한 15,1-11).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있으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친교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 누면서 그분께, 그분 안에, 그분과 함께 꼭 붙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제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스승과 함께 머물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이고 일생 동안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제가 처음 담당했던 교구에서 사목 하는 동안, 교리교사들이 교육과정을 마치고 나갈 때마다 “교리교사 자격증을 땄어!” 하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격증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이제 막 작은 여정을 마쳤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교리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자격증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머물고자 하는 마음과 태도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 머물고, 그분이 여러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묻겠습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 머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이 주님께 나아갈 때, 감실을 바라볼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나요? 아무런 말 없이 침묵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저는 말하고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묵상하고 느끼면서 머뭅니다. 다 좋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시도록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맡기나요? 어떤 방식으로 주님의 현존 앞에 머무르나요? 감실을 바라보고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실 수 있도록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그렇게 있다 보면,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고 졸리기도 합니다. 졸리면 그냥 졸면 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시니 아무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나 그분이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것이나 모두 같은 일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이것은 교리교사 자격증보다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교리교사의 삶의 한 부분입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주님과의 우정이 불타오르게 됩니다. 또한 그분이 정말로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시며 여러분 가까이 계시고 여러분을 사랑하 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언젠가 제가 여기 로마의 어느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나오는데, 한 젊은이가 다가와 말했습니다. “신부님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 저는 신앙의 선물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젊은이는 신앙이 선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무슨 말씀을 해줄 수 있으신지요?”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실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당신을 바라보실 수 있도록 자신을 주님께 내맡기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실 수 있도록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내맡기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에게는 그리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결혼하고 자녀를 키우는 분은 고요한 시간을 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성소가 있고 영성도 여러 가지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 저마다 자신에게 알맞은 방식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능한 일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삶에 적합한 방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쯤 해서 여러분은 저마다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지' 묻고 싶을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대표해서 묻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 예수님 안에 머물기 위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침묵 중에 주님의 현존 앞에 머물면서 그분이 나를 바라보시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내맡기는 시간을 가지는가? 그분의 불길이 내 마음을 뜨겁게 하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내맡기는가? 하느님의 따뜻함과 사랑과 부드러움을 마음에 품고 있지 않다면, 우리 가난한 죄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덥혀줄 수 있겠는가?'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2. 둘째 요점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을 그분께 배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소 역설적이지만 매우 아름다운 체험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신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과 일치하면 할수록, 그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중심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에게서 나가도록 이끄시는 동시에 여러분이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향해 자신을 열게 만드십니다. 이것은 참된 사랑의 역동적 흐름이며, 하느님이 직접 주도하시는 움직임입니다. 하느님은 중심이시지만 언제나 당신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고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주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사랑의 역동적 흐름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을 누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리교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교리교사는 사랑을 위해, 예수님을 증거하고 이야기하고 예수님에 대해 선포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주도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우리 자신 밖으로 나가도록 밀어붙이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교리교사의 마음, 그 심장은 언제나 '수축과 이완' 운동을 계속해야 합니다. 여기서 수축은 예수님과의 일치를, 이완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필요한 것은 이 두 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일치하고 다른 사람과 만나기 위해 나가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움직임 가운데 어느 한쪽이 부족하면, 심장이 멈추어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교리교사의 마음은 케리그마(Kerygma '선포', '설교', '외침'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케뤼그마kerygma'에서 나온 말로,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나 그 내용을 가리킨다-옮긴이.)를 선물로 받고, 자신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전합니다.
‘선물'이라는 이 작은 한마디에 주목해 봅시다. 교리교사는 자신이 선물, 곧 신앙의 선물을 받았고 그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무엇 하나 자신을 위해 취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줍니다! 이것은 상거래가 아닙니다! 사업이 아닙니다! 온전히 순수한 선물입니다. 받은 선물이자 전해주는 선물입니다. 교리교사는 바로 거기, 선물이 교환되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케리그마의 본질 자체도 그러합니다. 케리그마는 파견되어 나가게 하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뛰어넘게 부추기는 선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여기서‘우리를 다그칩니다.'라는 표현은 ‘우리를 소유합니다.'라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여러분을 끌어당기고 파견하며, 여러분을 취하고 다른 사람에게 선물합니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그리스도인, 특히 교리교사의 심장이 박동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자기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교리교사인 나의 심장은 그렇게 뛰고 있는가?
그리스도와의 일치,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라는 수축과 이완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성장하고 있는가? 나의 성장은 그분을 다른 사람에게 선포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 자신 만을 위한 것인가?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교리교사가 어떻게 그러한 움직임 없이 제자리만을 지킬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3. 셋째 요점은 이것입니다. 첫째나 둘째와 동일한 맥락에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변두리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요나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요나는 특히나 변화가 많고 불확실한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요나는 신심이 깊고 차분했으며 질서 잡힌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면에서 분명하고 정확한 틀을 갖추고 있었고, 다른 사람과 주변의 모든 것을 자신의 틀 안에서 단호하게 판단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분명하고 확실해야 했고 그것이 곧 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요나는 매우 경직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성격 때문에 주님께서 이교도의 거대한 도시 니네베로 가서 설교하라고 부르셨을 때, 그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니네베로 가라고요? 모든 진리가 여기에 있는데, 왜 그곳에 가야 합니까?” 요나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니네베는 그의 틀을 벗어난 곳이었고 세상의 변두리였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도망쳤습니다. 스페인으로 도망치기 위해 그곳으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여러분, 요나서를 다시 읽어보십시오! 짧은 책이지만, 특히 교회에 속해있는 우리에게 매우 교육적인 비유를 담고 있습니다.
요나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요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뛰어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하느님은 두려움을 모르는 분이시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분은 두려움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모든 틀을 뛰어넘어 계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변두리를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그곳에 가면 그분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충실하고 창의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니 창의적이지 않은 교리교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창의력은 교리교사의 실존을 지탱해 주는 기둥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창의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폐쇄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절대로 경직된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경직된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환대하고 만나러 오며 이해해 주십니다.
믿음직하고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변화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뀔 줄 알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변화되어야 할까요?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의 환경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갈 줄 알아야 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에 빠지는 교리교사는 겁쟁이입니다. 침묵하는 교리교사는 박물관에 세워진 조각상이나 다름없습니다. 조각상은 많이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여러분은 제발 박물관의 조각상처럼 되지 마십시오!
몸과 마음이 경직된 교리교사는 결국 메말라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처럼 되고 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겁쟁이가 되거나 박물관의 조각상처럼 되거나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처럼 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단 한 사람도 없나요? 정말인가요? 좋습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다른 곳에서도 여러 차례 이야기한 것입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우리의 모임, 활동, 본당, 우리 삶의 테두리 안에만 갇혀있다면, 우리는 갇힌 상태로 머물고 갇힌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됩니다. 방문이 계속 닫혀있으면, 방에는 습기가 차고 곰팡이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방에 갇혀 있다면 병들고 말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속한 모임이나 본당, 거기서 이루어지는 활동 안에만 갇혀있다면 그 역시 병이 들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거리로, 변두리로 나간다면 길을 걷는 사람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이 그리스도인에게도 닥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길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수도 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저는 병든 교회보다 길거리에서 사고를 당한 교회가 수만 배 더 좋습니다! 연구에 몰두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늘 갇혀있는 교리교사나 교회보다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용기를 지닌 교리교사와 교회가 훨씬 더 좋습니다! 갇혀있는 교리교사는 병든 사람입니다. 대부분 머리에 병이 든 사람입니다.
하지만 주의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밖으로 나가서 적당히 타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다!” 이 말씀은 우리 에게 힘을 주며 우리의 발걸음을 아름답게 해줍니다. 우리가 길을 나선다면, 곧 우리가 사랑과 사도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담대하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면, 그분은 우리와 함께 걸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앞서계실 것입니다. 스페인어로 표현하자면 그분은 우리보다 ‘프리메레아’하십니다. 곧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프리메레아'하십니다!
( 프리메레아primerea 스페인어 동사로 '첫째가다', '가장 앞서다' 등을 뜻한다. 이 동사의 명사형은 '프리메로primero'로 '선두'를 뜻한다-옮긴이.)
여러분은 이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눈치챘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주님은 '아몬드나무(편도나무) 의 꽃과 같으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몬드나무의 꽃은 봄에 가장 먼저 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프리메로’이십니다. 그분이 첫째이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본질적인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앞서계십니다! 우리가 먼 곳을 향해, 이 세상 끝을 향해 떠날 생각을 하며 겁내고 있을 때, 하느님은 이미 그곳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세 상의 변두리와 끝에 있는 형제의 마음에서, 상처 난 몸 속에서, 억압받는 삶에서, 신앙 없는 영혼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세상 끝 가운데 하나이며 제 마음을 몹시 아프게 만든 지역을 알고 있나요? 제가 전에 사목하던 교구에서 목격한 현실입니다. 그곳에는 성호경을 그을 줄 모르는 아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성호경도 그을 줄 모르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곳이 세상 끝입니다. 여러분은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계시며, 여러분이 그곳에 와서 아이들에게 성호경 긋는 법을 가르쳐 주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앞서계십니다.
사랑하는 교리교사 여러분, 세 가지 요점에 대한 설명이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여러분, 언제나 그리스도에게서 다시 시작하십시오! 저는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순례 중인 하느님 백성, 곧 교회의 일원인 하느님 백성과 함께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머뭅시다. 그리고 언제나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워 실천하고 인간을 만나러 오신 그분의 본보기를 따릅시다. 모든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갑시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나서도록 용기를 가집시다.
-교황 프란치스코 자비의 교회(교황 즉위 후 첫 강론집)/ 바오로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