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공대 공릉동 캠퍼스를 기억하며
서울공대지 2018 Spring No. 108
전효택
자원 25회 에너지자원공학과
명예교수, 수필가
서울공대 1995-97 편집장 산문집,“아쉬운
순간들
고마운
사람들”(2016)
불암제는 서울대 공대에서 매년 5월 하순 일주일간 개최되던 축제이다. 이 축제는 학생회 주최로 1961년 5월부터 시작되었고 공대가 종합화계획에 따라 관악 종합캠퍼스로 통합되던 1979년까지 계속되었다. 공대는 현재의 노원구 공릉로(전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에 소재하고 있었다. 공대 뒤 동편에 있는 불암산(해발 508m)에서 행사 이름을 따왔다 하였다. 행사 기간 주중에는 각 학과 대항 축구, 배구, 농구 등 구기 종목 경기와 막걸리 주당대회, 씨름대회, 가장행렬 행사, 불암산 정상까지 왕복하는 건보 대회가 있었다.
행사 마지막 날인 토요일은 카니발이어서 여성 파트너를 동반하여야 하였다. 내가 재학하던 1970년 전후에는 공대에 이천여 명의 학부생이 있었는데, 여학생은 한두 명이고 모두 남학생이었다. 파트너를 초대하기 위해 E여대 앞에서 단체미팅도 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졸업하던 이전에는 창경원에서 단체미팅으로 파트너를 만나는 행사도 하였다는데, 그 넓은 곳에서 어떻게 파트너와 연결되었는지 전설적인 후일담도 있다. 나는 신입생 시절 소개받은 파트너와 이 축제에 4년간 네 번 계속 참가한 행운이 있다. 이 축제에서는 빙고게임, 사교댄스, 가수초청 음악회가 있었다. 당시 고려대 학생 가수 김상희 씨가 초대되어 ‘대머리 총각’을 열창하던 모습과 공대생으로 구성된 남성밴드 그룹 ‘에코스(메아리)’의 연주가 기억에 생생하다.
구 서울대 공대 정문 위치와 정문 앞에 서쪽 방향으로 신설된 2차선 도로.
필자 재학시절 이 도로는 없었고 이 장소에 중국집과 당구장이 있었음.
축제가 시작되면 신입생들은 교양필수 과목인 체육의 교과 과정으로 공대- 한독약품- 중량교 다리까지를 왕복하는 10 km 단축 마라톤을 완주하여야 했다. 신입생들은 입학 전까지 공부만하고 체력이 약해진 때여서 달리기와 걸어가기를 반복하며 기진맥진한 채 완주하곤 하였다. 아직도 당시 마라톤을 하며 도로변 먹골 배 밭의 하얀 배꽃 향기를 기억한다.
신입생 시절이 이미 오십 년 전인데 당시 등교하는 교통편은 동대문에서 출발하는 운행 간격 30분 정도의 시영버스였다. 또는 성북역에서 춘천으로 향하는 기차를 이용하여 공릉역에 닿곤 하였다. 버스를 탈 수 없거나 버스가 오지 않을 때는 대학에서 중량교까지 십 리 이상을 걷기도 하였다. 공대에 진학하던 학생들은 고등학교 재학 중에 이과반의 최고의 수재들 그룹이어서 쉽게 가정교사를 구할 수 있었고 방학 중에 한 달간 두 그룹을 가르치면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기억해 보면 1960년대 후반 한 달에 한 그룹을 가르치면 일만 원을 벌 수 있었는데 한 학기 등록금은 이만 원 이내였다.
1호관(1942년 건립된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본관 건물임). 1호관 시계탑 뒤로 불암산이 보임.
5호관 건물. 필자는 이 건물에서 학사과정과 대학원과정을 이수함(1967- 1979).
작년 9월 하순 공릉동 캠퍼스를 찾았다. 1979년 초에 이사하였으니 거의 40여 년 만이었다. 정문과 그 앞 공간은 그대로 보였으나 정문 앞 서편의 중국집과 당구장이 있던 곳은 포장도로가 뚫리면서 없어졌고, 캠퍼스 공간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로 바뀌어 있었다. 공대의 본관 건물인 1호관(과거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본관 건물이며 1942년 건립, 등록문화재 제12호)은 3층으로 ‘ㅁ’자 건물 그대로였고, 외부만 리모델링되어 있었으며 2호관도 그대로였다. 내가 공부하던 5호관(과거 경성광산전문학교 건물로 1943년 건립, 등록문화재 제369호)의 시계탑과 본관 건물 양 날개로 달린 실험실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이 건물에서 나는 학사과정과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이수했다. 캠퍼스 내에 새로이 신축된 고층 건물로 인해 5호관 건물은 잘 보이지도 않고 단지 시계탑 부분만 보일 뿐이었다. 5호관 앞의 작은 후문은 없어지고 그 주변의 밭들은 모두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있었다.
정문에서 남쪽 방향으로 화랑대 입구를 연결하던 옛길 2차선 도로는 인도가 첨가되어 있었고 거리 한편으로 여러 종류의 식당과 일용품점, 카페 등이 즐비하였다. 먹골(먹골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이곳에서 먹을 갈았다는 데서 유래한 순 우리말 지명. 인근의 봉화산 소나무 참숯으로 만든 먹은 품질이 좋아 궁중에 진상되었다 함.) 배 밭 지역은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있어 과거 지점을 찾기도 어려웠다. 재학시절 가을 수확기가 되면 먹골 배 밭 과수원으로 친구들을 초대하여 신선한 배 맛을 즐기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식성이 좋아도 큰 배 한 개를 먹고 나면 더 이상의 배를 먹지 못하곤 하였다. 이 도로와 이어진 묵동 삼거리에서 남북 방향으로 상계동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4차선 포장도로가 뻗어 있어 교통이 매우 좋아져 있었고 주위는 모두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있었다.
공대 신입생이던 50여 년 전 시절 그대로 남아 있는 기억은 정문 앞의 2차선 도로, 1호관과 2호관, 5호관 등이었다. 새로이 종합대학교가 들어서며 신축 건물과 도로가 형성되었고, 캠퍼스 주변의 많은 아파트 단지와 가게들, 식당 카페들은 모두 생소하였다. 캠퍼스 주변 환경이 너무 바뀌어 있어서 지하철역(먹골역, 태릉입구, 공릉역) 이름이 아니면 길을 찾기도 만만치 않았다.
고작 수십 년 전의 풍경이 이리도 변할진대 앞으로 이곳은 또 어떻게 바뀌어 갈까 하는 추억 어린 감상이 들었다. 그 동안 분망하게 살아오다 보니 옛 캠퍼스를 너무도 늦게 찾아왔다는 가벼운 반성도 하며 옛길을 더듬어 걸어보는 낭만이 모처럼의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는 즐거움을 주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