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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민국 박사모 (박사모) 원문보기 글쓴이: 자유평화
[인터뷰] 장준하(張俊河) 실족사(失足死)의 유일한 목격자
전직(前職) 고등학교 교감 김용환(金龍煥)씨
장준하(張俊河)는 타살당하지 않았다!
"선생님을 있지도 않았던 의문사로 몰아붙이는 일은 그분을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월간조선 /2004년 8월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활동기한 연장을 위해 張俊河 선생님 사건을 이용하고 있다. 자신들의「밥통」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내 인권을 짓밟고 있다』
『張俊河 선생님은 정권에 의해 타살되지 않았더라도, 살아 생전에 남긴 업적으로 충분히 위대한 분입니다. 선생님을 있지도 않았던 의문사로 몰아붙이는 일은 그분을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ksdhan@chosun.com)
그가 인터뷰에 응한 이유
지난 6월28일 오후, 月刊朝鮮 편집부로 한 노인이 찾아왔다. 젊었을 때는 대단히 호남형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노인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파여 있었다. 그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委)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이날, 의문사委의 주선으로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소재 약사봉 등반길에 사망한 故 張俊河(장준하)씨의 미망인인 金熙叔(김희숙·79)씨를 만날 예정이었다고 한다.
『김희숙씨가 몸이 불편해 나올 수 없다』는 의문사委의 연락이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문사委에 갔다가 헛걸음하고 집(충남 당진)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의문사委는 「張俊河 사망사건」을 의문사로 규정, 조사를 벌였으나 1기·2기 의문사委 모두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張俊河 사망사건」이 거론될 때마다 언론에 「金모씨」로 등장하는, 당시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가 바로 이 노인 金龍煥(김용환·69)씨다. 운명의 그날 金씨는 선생님으로 따르던 張俊河씨와 약사봉을 등반했다.
『張俊河씨의 죽음에 국가 공권력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金씨가 중앙정보부의 사설 정보원이거나, 죽음을 목격하고도 국가 공권력이 두려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張俊河 타살」을 입증하는 의문사委의 2년에 걸친 조사와 자료수집, 사고현장에서의 추락 시뮬레이션은 「목격자 金龍煥」이라는 벽에 번번이 부딪혔다.
金씨는 1967년 7代 국회의원 선거에 옥중 출마한 張俊河씨를 도우면서 인연을 맺었다. 張씨의 지구당(동대문乙구) 간사직을 맡는 등 최측근 중 한 명으로 일하다가 1975년 초에 낙향했다.
기자는 약사봉 현장의 헬기 촬영 등 1기 의문사委의 「張俊河 사망사건」 조사가 한창이던 2001년 7월 金龍煥씨 인터뷰를 위해 충남 당진에 있는 그의 집을 무작정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는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했고, 대신 하룻밤 묵고 가라고 했다. 밤이 깊도록 그는 하소연을 했다.
『누가 뭐래도 진실은 하나다』
그의 하소연 가운데 몇 번이고 되풀이 되는 말이 있었다.
『아무리 누가 뭐래도 진실은 하나다. 張俊河 선생님은 약사봉 등반 중에 실족하셔서 추락하셨고, 그래서 돌아가셨다. 그걸 내가 현장에서 봤다. 무얼 더 얘기하라는 것인가』
金씨는 다음날 아침 집을 나서는 기자에게 『속에 있는 얘기를 털어놨더니 어쨌든 후련하다』고 했다. 기자가 그에게 한 말은 『그러시다가 홧병 나시겠습니다』였다.
金龍煥씨를 다시 만난 것은 1기 의문사委의 활동이 마무리되던 무렵인 2002년 여름이었다. 그는 손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의문사委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격분, 책상을 내리쳤는데 손에 금이 갔다는 것이다.
그와 차를 마시며 『이번에는 인터뷰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그 사건을 자꾸 거론하는 것은 지하에 계신 張俊河 선생님도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累(누)를 끼치는 일이 된다』는 이유였다.
金龍煥씨는 月刊朝鮮 1993년 6월호에 실린 「죽음으로의 下山, 그 뒤」 題下(제하) 手記(수기)에서 심정을 다 밝혔고, 그 이상 새로 나올 이야기가 없다고 했다.
(月刊朝鮮 1993년 5월호에는 張俊河씨의 국가기관에 의한 타살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한 SBS의 방송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의 誤報(오보)를 지적한 기사가 실렸었다─편집자 注)
그러던 그가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 응하기로 한 것은 의문사委의 조사를 받으면서 느꼈던 울분과 함께 「張俊河씨 사망사건」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정부기관 및 일부 인사들의 행태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月刊朝鮮 1993년 5월호에 실린 金龍煥씨의 手記에는
다음과 같은 「편집자 注」가 실려 있다.
<월간조선은 金龍煥씨의 수기를 게재하면서 그의 사진을 함께 실으려 했다. 이미 그의 이름과 직업이 공개됐기 때문에 그의 얼굴도 공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金씨는 사진이 공개되는 것은 결코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이번에도 金씨는 사진 게재를 한사코 거부했다. 사건 발생 18년 후나 29년 여가 지난 지금이나 그의 주변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그가 더 늙었고, 세상의 의혹에 대응할 기력이 점점 약해진다는 것뿐이다.
『張俊河 선생님 사건은 1분, 아니 몇 초만 이야기하면 끝나요』
지난 7월8일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가 가져온 검은색 가방에는 각종 자료들이 수북했는데 자신에 대한 잡지 및 신문 기사와 法典(법전), 그리고 약봉지가 담겨 있었다.
―法典은 왜 갖고 다니십니까.
『틈틈이 법에 대해 공부하려구요. 의문사委라는 게 초헌법적 기구거든요. 그 문제점을 공부하고 있어요』
―어디가 편찮으셔서 약을 먹는 겁니까.
『1기·2기 의문사委 합쳐서 한 30번은 제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의문사委에서 출두 통지서가 오면 출두할 때까지 1주일이건 보름이건 계속 신경이 쓰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살겠어요? 죽을 지경이죠. 혈압도 있는데다가 요즘은 손이 저려서 약을 먹고 있어요』
―30회 이상 조사를 받아야 할 만큼 진술할 내용이 많습니까.
『그 사건이 복잡한 것도 아니고 단 1분, 아니 몇 초만 이야기하면 끝나는 거예요. 내 생각에는 10분이면 조사가 끝나요. 그렇게 길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반복에 반복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의문사委에 자꾸 출두를 하십니까.
『자꾸 출두를 요구하니까. 그리고 나는 떳떳하니까. 내가 숨기는 게 없으니까. 조사를 받으면서 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사관들은 내가 거짓말을 안 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하다 하다 더 조사할 게 없으니까 내 뒷조사를 다 했어요. 가족 사항, 친구 관계, 軍생활까지. 도대체 내 가족 사항과 張선생님 사망 사건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의문사委가 金선생님에게 자꾸 출두 요구를 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들의 조직 수명 연장을 위해서예요. 공명심도 있겠죠. 張선생님 사건 만큼 의문사委의 수명을 연장해 주는 데 더 좋은 사건이 어디 있겠어요? 의문사委의 사무실에 가 보세요. 1기 때보다 2기 때 인원이 훨씬 더 늘었어요』
3기 의문사委가 출발해도 사건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3기 의문사委의 출범이 확실시되고 있는데요.
『그게 문젭니다. 그런다고 張俊河 선생님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이 안 나오리라는 것은 의문사委 관계자들이 더 잘 알 거예요. 또 판정불능이 나올 거고, 그러면 또 張俊河 선생 팔아서 4기 하자고 그럴 건가…』
―3기가 출범하면 국정원, 기무사 등에 자료제출 명령권이 부여되는 등 의문사委의 권한이 강화될 것 같던데요.
『권한이 강화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 사건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데. 난 차라리 국정원이 張俊河 선생님과 관련된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면, 다 공개했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사실도 없겠지만 나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내 인생은 모두 정지됐어요. 떠나가시면서 나를 꼭 붙들고 가신 거예요. 이렇게 30여 년을…』
金龍煥씨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눈물을 글썽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올해 만으로 예순아홉입니다. 張선생님 사건으로 철든 후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인 30여 년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는 슬하에 4녀1남을 두고 있다.
―가족들은 어떻습니까.
『가족들의 심적 고통이야 말하나 마나죠. 다만 나는 가족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안 해요. 아는 척도 하지 말라고 하죠. 그런데 우리 애들은 관련 기사가 나오면 신문을 스크랩해서 주고 그러죠. 그 속이 편할 리야 없겠지요』
金龍煥씨는 張俊河 사망사건이 발생한 해인 1975년 초에 고향인 당진으로 내려가 당진중학교 강사로 교직생활을 시작, 1999년 3월에 호서고등학교에서 교감으로 정년퇴직했다. 그가 담당했던 과목은 「윤리」·「사회문화」·「정치경제」 등 주로 사회 과목이었다고 한다.
―제자들은 金선생님이 처한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까.
『제가 이런 상태였는데 제자들도 대충은 알고 있었겠죠. 제가 수업 시간에 張俊河 선생님의 사상 이야기도 해주고 그랬는데 그게 잘한 일인지 가끔 후회될 때도 있어요. 사회에 나갔을 때 그런 영향을 받아서 희생이 될지, 출세를 할 때 저해가 된 사람은 없는지 걱정이 돼요』
―張俊河 선생의 사상은 어떤 겁니까.
『「無저항, 非타협」 간디의 사상이죠. 물론 張선생님은 도시 게릴라戰도 생각하는 등 간디의 사상과 다른 점도 있었지만 간디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던 것만은 확실해요』
―1기 때와 2기 때의 의문사委 조사 내용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크게 다른 건 없어요. 사건이 워낙 간단하니까. 2기 때 달라진 건 제 주변을 많이 조사하더라구요. 사건 당시 나를 조사했던 당시 검사와 경찰 등과 대질 신문도 있었구요. 그런데 분명한 건 시간을 끈다는 인상이었어요. 물은 것 묻고, 또 묻고. 말꼬투리나 잡고』
―말꼬투리를 어떻게 잡았는데요.
『진술을 하다 보면 표현 방법에 따라 단어가 다르게 나올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먼저는 이런 말을 해놓고 이번에는 왜 이렇게 표현하느냐고 따지는 거예요.
예를 들어 張선생님이 추락하실 때 나는 앞서 갔기 때문에 떨어지는 장면은 못 보고 소리 같은 느낌만 있었던 것 아니에요? 그걸 표현할 때 「휙」 하는 소리라고도 할 수 있고, 나무 소리 같다고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때는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등 내가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소리들이 있었을 테니까. 진실은 張선생님이 실족했다는 것, 그것 하나인데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를 갖고 물고 늘어지는 식이에요』
조사 중 자일에 매달려 바위에 부딪히기도
―무리한 요구나 조사도 있었나요.
『1기 때였는데 아마 그때가 2002년 5월31일이었을 겁니다. 약사봉 현장 조사를 가서 선생님이 떨어진 장소를 찾는데, 나는 의문사委가 떨어진 곳이라고 얘기하는 곳이 내가 보기에는 아니었어요. 나는 다른 쪽을 가리켰더니 그곳으로 내려가라는 거예요. 내 나이도 있고 혈압 때문에 건강도 안 좋다는 걸 잘 알면서도 자일을 타고 내려가라는 거예요.
산악회 회원 4~5명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산악회 회원 한 명과 함께 자일에 매달렸는데 흔들리면서 그 사람은 팔을 다치고 나는 바위에 부딪혔어요. 거기서 죽을 뻔한 거죠. 내가 다른 쪽이라고 소리를 쳐도 의문사委 사람들은 절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그 지역을 찾느라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모릅니다. 그날 등산화 끈이 다 끊어졌어요. 집에 돌아와서 탈진했어요』
―가족들은 왜 조사를 받았습니까.
『제 남동생하고 경기도 안산에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작은 아버지하고 그렇게 받았어요. 우리 집사람도 조사를 하려고 했는데 제가 못 하게 했어요. 도대체 우리 가족과 이 사건이 무슨 관련이 있느냔 말입니까. 나 하나만 시달리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왜 가족까지 끌어들이냔 말입니까.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으니까 내 사생활을 들쑤시는데, 야비해요. 국가기관이라는 곳이 너무 야비합니다』
―의문사委 1기가 끝날 무렵 깁스를 하고 오셨는데요.
金龍煥씨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화를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결국 그의 언성은 높아졌다.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한 조사관이 있었는데, 그는 「이전의 조사관들은 잘 몰라서 봐주었지만 나한테는 안 통한다」면서 「뱃속에 있는 창자까지 꺼내서 밝히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왔는데 1기 끝날 무렵 그 사람하고 한 네 번은 싸웠어요. 중앙정보부원의 이름을 대면서 계속 「너는 그 사람을 아느냐」, 「너는 정보부원이다」, 「네가 선생님을 죽이지 않았냐」해 서로 격해졌는데, 내가 약이 오르니까 책상을 쳤다가 뼈에 금이 간 거죠. 나는 맹세코 정보부의 끄나풀도 아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정보부에는 아는 사람조차 없어요. 나는 張선생님이라면 하늘과 같이 모신 사람이에요.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상으로 나는 張선생님을 아꼈고 사랑했어요』
―당시 중앙정보부에는 정말 단 한 명도 아는 사람이 없었나요.
『거듭 이야기하지만 나는 정보부에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어요. 2기 의문사委 조사 때 한번은 조사관이 조그만 종이에 적힌 문건을 보여 주더군요. 「당신이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정보부에 보고한 문건이다」고 해, 「나는 그런 적 없다」고 했어요. 그런 일이 없으니까. 설사 내가 정보부 끄나풀이라고 할지라도 당시 그 현장에서 어떻게 보고를 합니까. 핸드폰이 있습니까, 주변 가까운데 전화가 있습니까.
「그 문건이 사실이라고 믿으면 당신들이 확인해라,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느냐」 그랬더니 그 문건을 보여 주더군요. 내가 張선생님의 죽음을 보고한 걸로 돼 있더라구요. 문건을 보여 주면서 하는 말이 「그러면 국정원을 고발하라」는 것이었어요. 국가기관이 국가기관 고발을 부추기는 거죠』
―국가인권委에 의문사委를 고발할 생각은 안 해 봤습니까.
『그런 생각도 해 봤죠. 그런데 내가 가서 국가인권委에 얘기한들 무엇을 얼마만큼 얻을 수 있겠어요. 의문사委나 국가인권委나 나한테는 별로 달라보이지 않아요』
언론이 소설을 쓰면서 의문 만들어져
―의문사委의 주장에 따르면 1975년 초 당진으로 낙향할 때 張俊河 선생님 주변에다가는 아무 연락 없이 낙향하셨다면서요.
『당시 아버님이 병환 중이셨고, 나는 장남으로서 고향으로 안 가면 안 될 입장이었어요. 내가 취직하러 내려간다고 할 수도 없고, 張선생님의 정치적 상황도 안 좋은 상태였고…. 하여간 내가 한 모든 일은 의문스럽게 보는 거예요』
―고향으로 내려간 후에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가 사건 발생 전날인 8월16일에 서울에 올라온 것도 의심을 받고 있는데요.
『그것도 말이 안 돼요. 내가 교직에 있으면서 농사일도 있고, 가축도 기르고 해서 바빴어요. 그래서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인 8월16일에 올라와 張선생님과 자주 등반을 하는 호림산악회를 찾아간 거죠. 마침 호림산악회 회장이자 張선생님의 지구당 상임위원회 의장직도 맡았던 金容德(김용덕)씨를 찾아가 張선생님 댁에 함께 가자고 했더니, 다음날 張선생님과 함께 산행을 하기로 했다고 해서 그때 인사를 드리기로 했던 거예요. 金容德씨는 지금도 가끔 만나는 사이입니다』
―사건 발생 당일 張俊河 선생이 몸이 아파서 못 간다고 하는 걸 金선생님께서 억지로 모시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그러니까 언론들이나 진상조사단이다, 뭐다 하는 사람들이 소설을 쓴다는 거죠. 그 당시 제 위치가 싫다는 선생님을 억지로 모시고 갈 수 있는 위치입니까. 오히려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산에 가신다고 하면 말려야 할 처지죠. 그리고 내가 마치 강제로 버스에 선생님을 태운 것처럼 당시 상황을 보지도 못한 재야인사들 몇몇이 이야기하는데 내가 선생님을 만난 것은 그날 버스 안에서였어요』
―張俊河 선생이 사망한 직후 金선생님의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의문도 있는데요.
『무슨 얘기인지 아는데, 나는 사건 당일 날 포천경찰서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에는 의정부 지청으로 가서 조사를 받았어요. 그때 내가 사는 집이 서울 이문동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이문동 집에서 하루 자고 의정부 지청으로 갔다고 하더군요. 당시 언론들이 그렇게 소설들을 썼어요. 소설이 소설을 낳는 식으로 그렇게 의문이 만들어진 겁니다』
―張선생의 시신이 너무 깨끗했다는 것도 항상 제기되는 의문인데요.
金씨는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 보세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10층 아파트에서 떨어진 사람이 멀쩡하게 사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합니까. 과학적으로는 10층 아파트에서 떨어지면 죽어야 하잖아요?』
金龍煥씨는 張俊河씨의 의문사를 제기하는 측에서 제시하는 의문들에 대한 답변은 더 이상 하기 싫다고 했다. 月刊朝鮮 1993년 5월호만 보면 다 알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의문사委에서 지금까지 한 진술만으로도 족하다고 했다. 양해를 구하고 하나만 더 물어보았다.
―張俊河 선생 사망 사건 후 재산은 늘었습니까.
『늘긴요, 줄었죠. 동생들 분가도 시키고 하다 보니까 오히려 줄었죠』
『일부 정치인, 재야인사들은 나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
―당시 張俊河 선생은 朴正熙 정권을 뒤집어엎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죠.
『그런 이야기는 더러 하셨어요. 도시 게릴라戰이라든가,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왜 그런 걸 안 하려고들 하나」 하는 말씀을 간혹 하셨죠』
―朴대통령이 張俊河 선생을 죽이고 싶은 라이벌로 생각할 만큼 당시 張선생의 정치적·사회적 위상이 높았다고 보십니까.
『보기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朴정권을 반드시 타도해야 한다는 張선생님의 입장은 분명했어요』
―사건 발생 다음날인 8월18일 저녁 張俊河 선생 댁을 찾아가 사고 상황을 전할 때 咸錫憲(함석헌), 桂勳梯(계훈제)씨 등의 재야인사들이 있었죠.
『계셨어요. 그분들한테 저는 많이 서운해요. 그분들은 제가 결백하다는 걸 다 아는 분들이에요. 그래도 끝내 침묵을 지키시다가 돌아가셨어요. 개인적으로 저는 그분들에게 서운합니다. 물론 그분들뿐만 아니라 張선생님 곁에 있던 분들은 제가 결백하다는 거 다 알 겁니다』
―다 아는데 왜 의문사라는 주장을 한다고 보십니까.
『정보기관하고 나하고 둘을 놓고서 장난을 친다는 거죠. 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니라고 하면 정보기관의 개입과 의문이 없어지는 거고, 정보기관의 부도덕성을 계속 주장하기 위해서는 내가 계속 혐의자로 남아 있어야 되고, 그러니까 나를 희생양으로 삼는 거죠』
―단순히 정보기관의 부도덕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만이라는 겁니까.
『또 있죠. 선생님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주변에는 있죠. 張선생님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면 그 자체로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이미지도 확보하고 매스컴도 타고 그러는 거니까.
張俊河 선생님을 우상화하면 할수록 자신들에게는 좋은 거죠. 하지만 그것은 선생님을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의문사가 아니더라도 張선생님이 살아 생전에 남긴 업적은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겁니다. 나는 그런 진정성마저 훼손되는 것은 아닌가 해서 안타깝습니다』
『나도 이제부터는 움직일 것』
―그래도 張선생님에 대한 존경에는 변함이 없으시죠.
『그럼요. 선생님이 무슨 잘못이 있어요. 그 밑의 사람들이 잘못이죠』
―그동안 인터뷰를 극구 사양한 이유는 뭡니까.
『앞서도 말했지만 張선생님한테 累가 될까 봐서요. 그냥 나는 내 이런 처지를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조용히 가슴에 안고 삭이며 남은 生을 마감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심해지는군요.
이제는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공개 청문회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나도 이제는 그동안 웅크리고 있었지만 움직이려고 합니다. 의문사라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을 찾아가서 만나 토론도 하고 그럴 생각입니다』
4시간 여에 걸친 인터뷰가 끝난 후 金龍煥씨는 3년 전 기자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와 똑같은 말을 했다.
『이야기를 들어 주시니까 어쨌든 속은 후련합니다』●
[ 2007-07-12, 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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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출처: http://blog.daum.net/kimhm40/13739044
시간이 걸리겠지만 꼭 읽어 보십시요.
核물리학자 이휘소 박사와 朴正熙 이휘소 박사의 한국 核개발 참여 과정 세계적인 핵물리학자 이휘소박사... 10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게 되는 계기에 새삼 이휘소박사를 다시 생각해 보면서, 너무 아까운 인재에 가슴이 아리기도 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 이 휘소박사는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교 2학년 재학중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수석 합격 화공과 2학년 재학중 도미, 마이야미대학 물리과로 편입, 피츠퍽대학 석사, 펜실바니아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27세에 프린스톤연구소 위원, 그 당시 미국에서 10명에 꼽히는 물리학자가 되었고, 28세에 뉴욕주립대학 정교수, 30세에 시카고대학 교수겸 페르미연구소 물리부장으로 취임 명실공히 세계 핵물리학자중 1인자로 부상했다 74년에 방한, 서울대에 AID 차관에 의한 과학연구소를 설립해 주었으며, 77년 주한미군 철수가 시간문제로 대두되자 조국에 장거리 유도탄과 핵무기개발원리를 제공하고 같은 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1962년 국제 고에너지회의에 미국대표로 참석할 정도의 이휘소박사는 미국을 대표하는 핵 과학자 10명속에 끼이게 되었다 외국인으로 거기에 든 예는 과거에 없었고, 아직 국적이 "한국인"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낀 것은 특별한 예외에 속한 것이었다 국제 고에너지회의는 이탈리아의 프리에스트에서 7월 15일부터 45일간 계속되었는데 미국의 핵 과학자 10명이 거의 행사를 주도하였다 특히 이휘소가 프리스톤 연구소에서 발표한 논문 4개가 회의의 중심 과제가 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백 여명의 학자중 이휘소가 가장 젊었다 당시 이휘소는 핵의 이론과 소립자의 단위와 그들의 생명의 기간 그리고 그 생명이 다른 것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강연을 했고, 세계석학전원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박수가 끝나자 이휘소는... "저는 미국 국민이 아직 아닙니다 저는 한국이라는 가난하고 분단된 국가에서 태어나 미국에 유학중인 사람입니다 제가 국적을 언제인가 옮길 줄은 모릅니다만, 핵을 만들고 핵을 이용하는 것은 일부 강대국의 전유물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핵을 저개발국가의 복지에도 혜택을 주어야 합니다 핵을 전쟁무기로 생각하는 인식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휘소의 이 말에 모두 또 감격했다 회의에 참석한 전원이 기립박수를 하였다 기립박수를 받은 사람은 젊은 이휘소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 국내신문에도 이휘소가 국제물리회의에 미국대표로 참석한 기사가 일제히 나왔었다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보는 박사학위 시험결과도 전체 평균 93점이었고, 차점 합격자의 평균 71점인 것을 계산한다면 엄청난 차이이다 펜실베니아대학 역사 이래 처음있는 일이었고, 더구나 물리과 지망생 중 미국 전대학 역사에도 없는 점수라고 말한다 고아인쉬타인박사가 일하던 곳의 프리스톤 고등연구소의 프레이즈 박사가 찾아와 대담을 요청할 정도였다 귀하의 성적은 펜실베니아대학뿐만 아니라, 전 미국의 물리과 박사학위 지망생 중에서 역사 이래 가장 뛰어난 성적이라는 게 저희 연구소가 검토한 결과입니다 특히 귀하의 시험지를 검토한 결과 새로운 이론의 전개나 학설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본 연구소의 검토결론입니다 더구나 한국에서 유학온 학생으로서 이런 성적을 올릴 수 있는 비결이라도 있는가고 묻는 이휘소와의 대담은 생략하고... 프레이즈박사는 정중히 이휘소를 연구소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초빙을 하면서, 귀하를 만난 것이 영광입니다 더구나 저희 연구소에 오시게 된 것도 환영합니다 귀하가 미국에 있는 것도 참으로 다행인 것 같습니다 이휘소는 1960년 1월 프리스톤의 정연구원으로 들어갔다 특히 이휘소의 담당교수인 크라인교수가 기뻐해 주었다 세계 석학의 집결지인 프리스톤연구소에 30세도 안된 사람이 정회원(당시 25세)이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박대통령과 이휘소... 핵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 꼭 필요했던 이 휘소박사, 박대통령이 보낸 편지... < 이휘소박사님, 안녕하십니까? 박사님을 뵈온 지 벌써 4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동안 박사님의 소식은 이 곳에서도 자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님께서 본인이 선포한 유신에 반대한 것 때문에 저대로 많은 고민도 했습니다 본인은 언제까지 대통령직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본인이 대통령직을 그만 두느냐 계속하느냐 하는 것은, 모든 것은 국방에 달렸다고 사료됩니다 지금 나라는 어지렵고, 국방은 허술하고 언제 공산화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내놓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박사도 아시다시피 우리 정부에는 한 마디의 상의도 없이 이미 미군철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미사일부대는 이미 철수를 끝낸단계이고, 지상군 17000명이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월남에서와 같이 한국이 공산화되어도 좋다는 전제의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제 얼마후면 한국에 남아있는 핵도 철수할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본인도 미국정부측에 몇 번 자제를 호소하고, 부탁도 하여 보았지만, 더 이상 구걸하는 것도 추한 꼴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도 무엇하지만, 그래도 애원해서 들어줄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본인은 어떠한 일이라도 할 각오입니다 이박사님도 아시다시피 본인이나 한국정부가 요구해서 들어줄 단계도 이미 지났습니다 가능성도 없는 구걸 행각으로 국가의 이미지만 손상을 보는 추한 모습을 또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언제인가는 이런 때가 오리라는 생각으로 박사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독자적으로 유도탄 개발과 핵무기개발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재미과학자들을 본국에 초청한 것이나 귀국시킨 것도 이런 저의 뜻을 일부입니다 이박사님을 초대하거나 모시지 못한 것은 박사님을 초대한다는 것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결과나 마찬가지라는 중론에 못이기어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인은 사실 박사님의 능력을 추앙하고 박사님이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에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그러나 조국은 위태로와 졌고 사정은 급박하여 졌습니다 이미 카터와의 싸움은 시작이 되었고, 여기서 비굴하지 않고도 우리는 승리해야 할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비굴한 기운만 보이면 깔고 뭉게는 묘한 도덕정치를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의존하던 시대에 종막을 고할 때라고 사료됩니다 우리자체가 독자적으로 미사일개발, 핵무기개발, 인공위성개발까지 해서 감히 누구도 우리를 넘볼 수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다시는 6.25의 쓰라린 경험 같은 것을 맛보지 않게, 우리 백성들이 전쟁으로 살상되는 비극이 다시는 없도록 이박사께서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이휘소박사님, 조국을 건져 주십시오. 74년엔가 박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 저는 "이박사를 보호하기 위하여는 60만 대군이라도 동원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진심입니다 우리 민족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는 지금 이박사의 마음에 달리어 있습니다 그 동안 재미물리학자들의 협력을 얻어 미사일개발부터 서둘렸고, 또 시험도 해 보았지만, 하나같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이박사님의 힘이 필요할 때입니다 박사님의 처한 위치가 어떠한 지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사님께서도 조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눈뜨고 보고만 계시지만은 아니할 것입니다 이박사님께서 조국을 위해, 한 번 일어서 주십시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같은 상황 앞에서,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절대 위기의 상황에서 감히 이렇게 박사님께 애원합니다 박사님의 건강과 가운이 길이 빛나기를 엎드려 비옵니다.> 1977년 3월 18일 대한민국 대통령 박 정 희 배상 편지는 이렇게 끝나 있었다 이휘소는 편지를 읽으면서 참담한 심경 속에 사로 잡히었다 암담한 기분이었다 이휘소는 그날 (1977.3.20) 일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박정희 대통령께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조국이 나를 필요로 할 때라는 절박한 내용이었다 내가 핵을 공부하고 연구한 것은 처음에는 적성에 맞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나의 목적은 핵연료를 이용한 인류의 구원이었다 핵에너지를 이용한 자원의 개발, 자원의 새로운 창조는 무한히 열리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여기에 내 생애를 바치었다 또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 그러나 조국이 공산화되거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처할 위험에 처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아니, 지금 조국이 내가 겪은 6.25나 그보다 더한 비극의 문턱에 있다고 판단되었을때, 내가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미국은 월남에서 손을 떼었고, 또 한국에서도 손을 떼고 있다 명백한 사실은 조국이 위험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미군철수...조국의 공산화...이런 것을 보면서 핵을 자원의 개발에만 목적을 두었던 나의 신념이 흔들린다면...그것은 잘못된 판단일까?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조국에게 내가 할 수 있는 핵개발의 원리를 제공한다면...그것이 조국을 지키게 하는 힘이 된다면... 비록 박대통령이 유신을 철폐하지 않을 경우라도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 조국의 현실을 내가 배반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도 모르지만...죽는다... 내가 죽음으로 조국을 살릴 수 있다... 정말 그렇게 해야 하는 걸까?... 내가 죽어 조국이 조국으로 남고,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제, 친구들을 구할 수 있다면...나는 그 길을 택해야 되는 것일까? 하늘은 나에게 마지막으로 너만이 지금 너의 조국을 구할 수 있다는 명으로 나를 이 자리에 서게 한 것일까? 조국은 나에게 너는 너의 능력을 이때에 쓰지 않으면 너는 평생을 후회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살신성인...견위치명...멸사봉공...진인사대천명...나의 운명... 어머니...아내, 아이들, 그리고 형제들...하늘이여...무엇이 참다운 삶이고 내가 지금 어떤 행동을 하여야 하는가를 안내하여 주소서...> 이 책을 읽으면서 박대통령과 이휘소박사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 박대통령의 두번째 편지... < 이휘소박사님, 안녕하십니까? 지난 번 편지를 받으셨을 것 입니다 무례한 것 여러가지 용서하십시요 제가 박사님께 편지를 띄운 후 이십 여일 동안 미국은 저나 한국정부에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미사일부대 완전철수에 이어 지상군 17000여명을 철수했습니다 주한미군은 해체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박사님께서 지금이라도 귀국하여 주십시오 박사님이 한국에 계시다면, 미국은 그렇게 함부로 하지는 못합니다 박사님의 귀국만이 조국을 구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시간은 절박하고 상황은 급박하여 졌습니다 다시는 미국측에 비굴할 수도 없고, 비굴하지도 않겠습니다 박사님, 다시 청하오니, 귀국하여 주십시요.> 1977년 4월 8일 대한민국대통령 박 정 희 배상 이휘소는 하얗게 밤을 새웠다 그리고 스케줄을 더듬어 보았다 4월 8일 하바드대학특강. 5월 20일 동경제대학술회의 참가등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완성단계에 있는 "히고스입자에 미치는 강작용의 영향"이란 방대한 논문도 며칠내로 마쳐야 한다 이휘소는 광적으로 논문에 매달렸다 이 논문은 특히 Dimuon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Quigg Thacker와의 관계를 명쾌하게 논리적으로 전개한 논문이다 4월 25일 탈고를 끝낸 이휘소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하버드대학에서의 특강을 끝내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한 마음으로 5월의 동경대학에서 있을 학술회의를 기다렸다 1977년 5월 15일, 이휘소는 시카고 변두리에서 외과의 개업을 하고 있는 김박사를 찾아갔다 이휘소는 김박사에게... "사실은...의논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휘소는 김박사에게 솔직히 그 동안의 상황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조국의 현실과 북한이 가지고 있는 미사일의 성능까지 설명했다 북한은 소련에서 수입한 사정거리 50Km가 되는 미사일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50Km라면 휴전선에서 서울은 물론 수원 인천까지 미치는 거리다 휴전선에서 한강다리 전부를 파괴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분이다 그럴 경우 무기가 없거나 상대에 못 미치는 무기를 가지고 덤빈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를 이미 시작했고 다시 미국에 사정하고 애걸하는 것은 한국정부에서도 할 일이 아니며, 그런 꼴을 이휘소도 보고 싶지 않다 74년에 귀국했다가 박대통령의 부탁으로 당시 미국내에 있는 과학자들에게 주한미군철수정책을 시정하여 달라고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고 찾아다니기도 한 나로서도 다시 그럴 수는 없다 이휘소는 대강 이런 설명을 하고 투명용지에 쓴 서류를 내밀었다 가로 10여센티 세로 4센티 정도로 밀봉이 되어 있는 문서였다 그것은 이휘소가 따로 정리한 것을 다시 50분의 1로 축소하여 만든 정밀하고 치밀한 계산서였다 "이것을 다리의 뼈 속에 넣어 주십시오." "건강에나 몸에는 지장이 없겠지요 " "얼마 동안은 지장이 없겠습니다만..." "박사님이 완벽하게 처리하여 주십시오." 김박사는 침통하게 이휘소를 바라보았다. 김박사가 만류한다고 이휘소가 자기의 결심을 포기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자기를 찾아온 것도 평소부터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이휘소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항상 교포사이에는 긍지와 자랑이었다 김박사는 다른 의사와 간호부까지 출입을 금지시킨 가운데, 이휘소의 다리에 마취주사를 꽂았다 살이 베어지고...소독이 된 서류를 안치하고... 수술은 생각보다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휘소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휘소가 발표한"히고스입자에 미치는 강작용의 영향"은 물리학계에 또 다른 파문을 일으키었다 살람교수(78년 노벨상수상)는 물리학에 새로운 경지의 논문리라고 극찬했고, 세계의 핵과학자들은 다투어 이휘소의 논문을 구하려고 하였다 1977년 5월 19일 동경에 도착한 이휘소... 다음 날 발표할 학술논문을 정리하고는 한국 청와대에 전문을 쳤다 "5월 21일 PM11시 정각 나리다공항 대기" 나리다공항 KAL 안내소에는 몇 명의 안내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휘소가 비행기에 오르자, 바로 출발하였다 한 시간이 좀 지난 후 김포공항에 내리자 바로 대기하고 있던 헬리콥터에 올랐다 헬기는 청와대정원에 내려 앉았다 박대통령이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소, 이박사"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었다 바로 지하실로 내려간 이휘소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사 두 사람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되었다.수술은 간단히 끝났다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다리 속에서 빼어낸 곁에는 피가 번진 문서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 "이박사...고맙소...이박사" 박대통령은 그 피가 뭍어있는 밀봉된 문서를 얼굴에 갖다대고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휘소는 바로 헬기를 탔고, 또 지체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다음 날 이휘소는 동경제대에서 아무 일이 없었던 듯이 강의를 했다 ==== 1977년 5월 27일, 미국에 돌아온 이휘소는 매사에 더 적극성을 보였다 연구소에서의 역할도 더욱 활발했고, 대학에서의 강의도 가장 충실한 교수로서, 그는 미국과학계에서 가장 능력있고 존경받는 인물로 공인되어 있었다 가정에서도 그는 더욱 철저하게 아내 마르안느(중국계 말레이지아 태생인 미국인), 아들 천, 딸 안에게 정성을 다 했다 1977년 6월16일 콜로라도주에 있는 국립과학연구소에서 초청강의가 있었다 가족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아내와 아들, 딸을 뒤에 앉히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페르미연구소에는 이휘소에 딸린 전문기사가 있지만 휀만한 일에는 이휘소가 직접 차를 몰았다 시카고교외를 지나 일이노이주에 진입하였을때, 앞에서 오는 트럭이 별안간 중앙선을 넘어 이휘소의 차 정면으로 돌진하였다 운전대에는 어떤 흑인이 타고 있었고, 이휘소는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휘소의 차는 주행선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선을 넘어 오더라도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트럭은 100m나 되는데서부터 정면으로 이휘소의 차를 향하여 돌진하였다 차의 앞머리가 부서지고 이휘소는 쓰러지고... 마르안느, 천이 안이는 삽시간에 일어난 사건에 정신을 잃었다 마리안느는 직갑적으로 아~소리를 지르며 상대방 흑인의 운전솜씨가 의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휘소의 차를 받은 차는 쏜살같이 도망쳐 버리었다 차가 정지하고 경찰이 오고...이휘소를 차에서 끌어내고... 페르미연구소에 비상벨이 을리었다 이휘소의 차에 설치된 긴급벨이었다 FBI, CIA에서 페르미연구소장에게 긴급전화가 걸려왔다 "이휘소 교통사고로 사망...상대는 50대 후반의 흑인...도주했음" 미국무장관실에도 비상벨이 울리었다 '이휘소 사망..." FBI, CIA 요원이 삽시간에 주위 400km의 도로를 감쌌다 그러나 어찌된 것인지 범인에 대한 소식은 전연 발표하지도 않았다 아니 어떻게 부딪쳤으며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어 죽었는지 조차 발표하여 주지 않았다 "이휘소 사망..." UPI, AP, 로이터 통신으로 세계 언론계와 각국 대사관으로 속속 전달되었다 밤 11시 30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 있는 긴급 벨이 울리었다 "이휘소 사망..." 박대통령은 전화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전화통을 창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박대통령은 지난 번 밤 1시에 청와대에서 잠시 이휘소를 만났을 때 이미 죽음까지도 각오한 그의 눈빛을 읽었었다 아! 죽음을 각오하고 말없이 다리 속에 숨겨온 피투성이의 메모지를 넘겨 주던 이휘소... 박대통령은 비서실장에게 당장에 미국과의 단교를 선언해, 그리고 국내에 있는 미국놈들을 전원 ?아 버려..." 무슨 일이거나 그렇게 해...OOO들... "이휘소가 죽었습니까? 각하..." "죽은게 아냐 죽였지" "누가 죽였습니까?" "미국이 그랬지, 그 새끼들 청와대를 24시간 도청하지를 않나?" "이휘소는 미국 CIA에서만 24시간 감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련에서도 인공위성으로 이휘소를 24시간 감시한다고 들었습니다 북한에서도 이휘소 때문에 신경을 쓴다는 정보도 있고..." "어쨋거나...이휘소는 미국에서 죽였어...아니, 설령 미국에서 죽이지 않았더라도 보호를 해야지, OOO들...도덕정치를 한다는 놈들이... 그리고 눈앞에 있는 범인도 안 잡았다는 거야..." "미국대사께서 온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쫓아버려...쌍놈의 새끼들... 그리고 내일 아침 내가 직접 미국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겠네" 이튼날 박대통령은 직접 나타나 미국 대사를 불러 항의하고, 내외기자를 불러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미국은 한국의 청와대를 24시간 도청하며, 마치 한국을 식민지시하고 있다 주권국가로 한국을 대접하는 것도 아니고 전정한 우방으로 대우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다시 미국에 애걸하지도 않겠거니와 미국과 국방까지도 협상하지 않겠다" 국방까지도 협상하지 않겠다는 박대통령의 발언은 비상한 충격을 주었다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미 미사일부대 완전 철수, 지상군 2만여명 철수...연말까지 전 미국 철수 예정... 이렇게 하는 국가를 믿고 국방을 의논할 수는 없다 미군이나 소련이 가진 무기를 우리도 가지면 된다."라고 청와대국무회의에서 공공연히 말하곤 했다 이휘소의 장례식이 끝나고, 물리학자들은 일 년만 더 있다 죽었어도 노벨상을 타고 죽는건데... 이휘소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두 달 후에 박대통령은 보국훈장을 수여했다 수상식에는 이휘소를 대신하여 이휘소의 어머니가 받았다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히며 "참 훌륭한 분이었는데...너무 훌륭한 분이었는데...너무 아까운 분이었는데..." 라고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이휘소가 박대통령에기 유도탄 및 핵제조개발원리를 넘겨주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를 전후하여 미국의 원자력정책은 급전환했다 핵관리의 엄격한 체제구축, 우방국에 대하여 한국과의 핵협정 파기 등을 강력히 요구했을 뿐 아니라 카-터는 한 술 더 떠서 "한국은 인권탄압을 중지하고, 긴급조치를 즉각 해제하고, 독자적인 핵개발추진을 바로 중지하라"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박대통령은 이러한 카-터의 요구에 "청와대를 24시간 도청하며,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주한미군을 데려가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 카-터는 근본적으로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으로서 도덕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라고 응수했다 한국과 미국은 상호의 신뢰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거기다가 박대통령은 감정적인 발언마저 서슴없이 해 버렸다 "국가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그리고 핵확산금지조약도 자기들은 다 만들어 놓고 남의 나라 보고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패권주의 사상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 박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은 카-터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카-터는 그런 박대통령에게 "박대통령은 반체제 인사를 즉각 석방하라, 그리고 핵무기개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2억9천2백만달러의 미수출입은행 차관약정을 파기하겠다."라고 응수했다 이러한 한미간의 대립은 박 대통령에게 유도탄개발과 핵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했다 박대통령이 하도 야단이니까 한 측근이 핵공장을 비밀리에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자 "내가 다 알아서 하고 있어, 관여하지 말게, 곧 돼, 그것만 되면 대통령직을 그만 두고 영남대학에나 내려가 있겠어"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한국국방과학연구소>에서 합동으로 제작하는 유도탄개발과 핵개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직접 전화로 확인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예고없이 들리어 연구원들과 종사자들을 격려했다 박대통령의 집념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박대통령은 집무실에 앉아 한가할 때면 먼 하늘을 바라보며 이휘소으 영상을 더듬었다 다리를 베고, 뼈 속에서 메모지를 내 주던 모습...그 피투성이의 메모지를 받아 들고 감격하였던 대통령 자신의 모습...이휘소가 차에 깔려 죽는 영상... 지금까지도 의문의 죽음에 한 마디 변명도 없는 미국... 박대통은 이제 이휘소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이휘소가 내어 준 메모지대로는 다 실험을 거쳐야 할 책임을 느끼었다 유도탄개발과 핵무기개발은 외국의 지원없이 독자적인 기술과 자원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박대통령의 열성에 감격한 과학자들과 600여명 직원의 협조에 의하여 해결되곤 하였다 어려움이 산재하여 있었지만... 핵분열물질의 생산과 핵탄두의 운반체 개발 등이 문제였다 미국은 물론 다른 나라들도 한국과 핵협정을 맺으려 하지 않았고 맺었던 핵원료협정도 미국의 압력에 의하여 중단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막막한 며칠이 지나면서, 다시 이휘소의 메모를 펼쳐 보았다 <실험용> 원자로를 대체해도 좋다는 메모를 보는 순간, 연구실의 분위기는 벼란간 달라졌다고 한다 이러한 어려움은 몇 번씩 반복되었지만 그 때마다 이휘소의 치밀성에 감탄했다 이휘소는 천만 분의 일도 실수할 수 없도록 치밀하고 정확한 계산법과, 만약의 경우를 우려한 모든 준비물을 메모지에 준비하여 놓고 있었다 1978년 8월 26일 @@기지에서 한국국방과학연구소와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공동제작한 중장거리 유도탄발사 실험이 있었다 과거에 몇 번씩 실패한 경험이 있는 박대통령의 심정이나 과기처장관, 또는 거기 모인 사람들은 초조와 기대섞인 착잡한 심정이었다 첫 번째 대전차로켓 (3.3인치 로켓을 다시 개발) 실험은 성공이었다 두 번째 다연발로켓 (28연발 사정거리 20km) 실험도 성공이었다 세 번째 중거리로켓 (사정거리 50km) 실험발사도 성공이었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소련제 미사일의 사정거리와 같은 수준이었다 이것을 우리의 기술만으로 개발한 것이다 마지막 관심의 촛점이었던 장거리유도탄발사실험도 성공이었다 사정거리 150km, 유효사거리 350km로 북한 전역은 물론 소련과 중공의 일부지역까지 영향권이 미치는 것이었다 이 성능은 미국이 개발한 최신 장거리유도탄 나이키미사일보다 성능이 우수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외국의 도움없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의 유도탄 보유국이 된 것이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장거리유도탄을 순수한 우리의 기술로 개발한 것이다 박대통령은 마지막 장거리유도탄발사 실험마저 성공하자 너무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너무 감격하고 있는 박대통령을 바라보던 과기처장관, 국방장관, 관계 과학자들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박대통령은 임원들의 노고를 일일히 치하하고 차에 올라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박대통령의 머리 속에는 다시 이휘소의 순수하고 맑은 눈동자의 영상과 어울려 그의 죽음을 생각했다 이휘소의 희생과 박대통령의 눈물겨운 나라사랑을 새삼 알게 되면서, 그 두분이 살아있다면...경제나 모든 것에 미국에 이끌려다니지 않는,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대한민국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다 === 다음날 미국을 제외한 소련, 중국, 일본, 프랑스, 영국, 서독은 물론 홍콩, 상가포르등 전세계 신문의 일면 톱기사는 하나같이 <한국 정거리미사일 발사 성공-한국에서 핵무기개발은 시간문제>라고 다루기 시작했다 특히 소련의 <적성>지에서는 전면 톱기사로 다루고 사설까지 동원해 염려스런 사태라고 논평하였다 중국, 일본, 홍콩, 프랑스에서도 해설과 우려를 표명하였다 세계가 경악과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인 것이다 다만 미국만이 침묵했다 침묵한 것이 아니다.미국정부의 훈령을 받은 미국대사'스나이더'는 과기처장관을 자주 방문했고, 박대통령에게 강력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은 아예 미국대사와의 면담마저 저절했다 분위기는 냉냉함을 넘어 험악해 지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은 집무실에 앉아 몇 번이고 독백을 다짐했다 "이제, 이휘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도 중단할 수 없다. 지금 의존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휘소도 남에게 의존만 하면 눈치만 보는 조국을 볼 수 없어 죽을으로써 자립의 기틀을 우리에게 남긴 것이다." 박대통령은 이휘소를 생각할 때마다 새로운 용기와 결의를 다짐했다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영상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카-터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상황에 강렬한 쐐기를 박기 위하여 1970년 한국을 방문했다 일본에서 있었던 선진7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온 것이다 2박3일의 예정으로 방문한 카-터는 의전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도착성명도 없이 밤8시 56분에 트랙에서 내리자 헬기로 동두천에 있는 주한미군사단병영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다음 날 그는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는 걸맞지 않게 팬티바람으로 미군사병들과 조깅을 했다 이것은 박대통령이나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무시한 행동으로 보였다 6월 30일 청와대를 방문한 카-터는 인권탄압완화, 긴급조치해제, 한국의 핵개발 추진 중단을 요구했다 박대통령은 이러한 카-터의 요구를 즉각 거절, 일축해 버리었다 양국관계는 파국에 직면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살벌했다 "한국의 독자적인 핵무기개발은 세계 핵확산금지법에도 저촉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의 국가, 미국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우리 한국이 핵무기를 만드는데 못 만들게 하는 것은 패권주의 발상이 아닌가?" 박대통령과 회담을 끝내고 미대사관에 도착한 카-터는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15분 이상이나 차 속에서 보좌관들과 회담을 했다 극비의 긴박한 지시를 내리는 분위기다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주한미국철수도 일시 중단되었다 표적인 이유는 북한의 전쟁도발억제, 소련의 태평양군사력증강 등을 들었으나, 한국의 독자적 핵개발추진을 포기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같은 해, 19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청와대별실 궁정동 지하에서 죽었다 김재규는 정말 미국 CIA요원이였을까? 한국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 미국은 김재규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일까? 당시 건설부장관은 ... "박대통령이 핵개발에 대한 집념은 무서웠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집념 때문에 불의의 죽음을 당하지 않았나 싶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휘소의 죽음과 박대통령의 죽음이 다 미궁 속에 빠진 채, 누가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역사의 격류 속에 묻혀져 갔다 1980년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원자력연구소와 핵개발공단은 <에너지 연구소>로 과학원과 과학기술연구소는 <과학기술연구원>으로 통합되었다 새로 부임한 전두환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에 새로 당선된 레이건을 찾아가 한국핵무기개발중단을 약속하고 댓가로 주한미군의 계속적 주둔을 약속 받고 돌아왔다 그리고 핵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준비한 모든 것은 폐기처분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이휘소의 이름도 역사의 무덤 속에 파묻혀 버리었다 글을 마치면서... 제가 이휘소박사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지극히 우연한 계기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저와는 별 관계가 없는 분(전공이 다른 면에서_이라고 생각하였다가 한두 사람에게서 반복하여 듣는 동안 점점 흥미를 느끼었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 미국을 방문하고, 이휘소박사의 어머님을 10여차례 방문하고, 국립도서실로, 서울대학교도서실로 자료를 찾아 쏘다니며 일년여를 지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저는 어떤 책임감을 느끼었습니다 누구라도 이휘소박사의 기록을 역사에 남겨 놓아야 한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그것은 최소한의 의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휘소박사에 대하여 쓴다고 생각하니, 우선 물리나 핵, 원자력 등에 대하여 완전한 문외한이라는 것에 죄책감을 느꼇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을 쓰다가 몇 번 중단했었습니다 어떤 월간지에 연재하다가 중단한 이유도 그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전공적인 것은 핵을 전공한 분들이 어느 때인가 정리한다 할지라도 이박사의 생활에 주로 착안한 글은 일단 역사에 기록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임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문필생활을 30여년이나 하면서 이처럼 책임감을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비한 능력이나마 정리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휘소박사는 말할 것도 없이 20세기가 낳은 세계적인 천재요, 누구도 감히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의심스로울 만큼 철저한 애국자요. 그러기 때문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분입니다 지금까지 왜 이휘소박사가 죽었는가? 누가 죽이었는가? 항의 한 마디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라고 생각됩니다 이휘소박사는 말로 애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묵묵히 실천했습니다 이휘소박사는 이론만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험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그는 실천하지 않는 것도 없었고, 성공하지 않은 실험도 없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몇 번이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몇 번이나 애국이란 무엇인가를,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되새겨 보았는지 모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으로 몇 번이나 흥분도 했었고, 몇 번은 비애도 느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앞으로 좀더 치밀한 조사로 보충할 것을 약속 드리며, 내용이 미비한 것이나 미숙한 점은 보완해 나가겠습니다 덧붙여 이 책의 인세 전액은 이휘소박사추모기념장학재단을 설립하여, 그 기금으로 쓸 것임을 약속 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적극적 호응을 부탁합니다 편저자 공 석 하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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