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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헤라르드 피케
* 안녕하세요 피케 입니다 오늘은 피터 슈마이켈선수에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제 짧은 지식이지만 그 범위 안에서의 애기를 한번 그려보도록 할게요 ,
^^ 오타가 존재할수 있으니 너그러운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양해를 구하자면, 칼럼이란 게 경어체이어야 하지만,
어느정도 대화체도 들어갈수있다는점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또한, 맨유선수였던 사람의 관련 칼럼 이기 때문에, 맨유찬양글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 또한..
너그럽게 보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eter Schmeichel
본명 : Peter Schmeichel
생년월일 : 1963년 11월 18일
출생지 : 덴마크(Gladsaxe) 출생
신장 / 체중 : 194cm / 85kg
포지션 : 골키퍼(GK)
소속팀 : 은퇴
전 소속팀 : 브론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91~99), 스포르팅 리스본, 아스턴 빌라, 맨체스터 시티
주요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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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매치 통산 : 129게임(1골)
- 월드컵 출전 : 98프랑스월드컵
- 1998년 프랑스월드컵 8위
- 2000년 유럽선수권대회 출전
- 1996년 유럽선수권대회 출전
- 1992년 유럽선수권대회 우승
- 1988년 유럽선수권대회 출전
- 1993년 IFFHS 최고의 골키퍼 선정
- 1992년 IFFHS 최고의 골키퍼 선정
- 프리미어 리그 우승 : 5회(93, 94, 96, 97, 99)
- FA 컵 우승 : 3회(94, 96, 99)
- 챔피언스 리그 우승 : 1회(99)
(1골 허용에 걸리는 시간 : 약 1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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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리그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골키퍼였던 피터 슈마이켈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골대 사이를 지킨 거목이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세기의 영입’이라 칭했던 슈마이켈은
맨유가 1990년대에 거둔 성공의 주춧돌과 같은 선수였다.
1991년 맨유는 덴마크의 브뢴비로부터 슈마이켈을 영입했다. 이적료는 55만 파운드였다. 그러나 슈마이켈은 맨유가 5번의 프리미어리그, 3번의 FA컵 그리고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하는데 공헌함으로써 자신의 이적료보다 훨씬 더 커다란 돈을 클럽에 가져다 주었다.
맨유에 영입되기 전만해도 슈마이켈은 잉글랜드 축구계에 덜 알려졌던 선수였다. 그러나 맨유로의 이적이 결정되었을 당시, 이미 그는 완성된 수준의 국제적 골키퍼였다.
슈마이켈은 영입되자마자 많은 찬사를 받았고 리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골키퍼로 성장했다. 리즈에게 우승을 내준 슈마이켈의 첫 번째 시즌은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프리미어리그의 첫 해에는 여러 번의 무실점 경기들을 기록하며 맨유의 우승에 큰 공헌을 했다.
맨유는 3-0으로 경기를 리드하다가 무승부를 거두었고, 경기 후 화가 난 퍼거슨은 슈마이켈을 내쫓겠다고까지 위협했다. 슈마이켈이 퍼거슨의 말에 대꾸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실점들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꽤 좋은 경기를 했었다. 그러나 감독은 경기가 끝나자 마자 내게 다가와서 따졌다. 내가 찬 골킥들은 경기장 중간으로 날아갔고, 상대 팀의 닐 러독이 그 공들을 헤딩으로 따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감독의 처사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정말 엄청난 말싸움을 벌이고 말았다. 많은 말들이 오고 갔고, 끝에 가서는 나도 매우 우울해졌다. 말을 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었다.”
“나는 분명히 도를 지나친 행동을 했고, 논쟁이 끝난 후 샤워를 하러 갔다. 그러나 다음날 퍼거슨이 자신의 사무실에 있지 않아 무척 화가 났다. 결국 나는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했고 팀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
“다음날 나는 감독의 사무실로 불려갔고 감독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잘 들어라. 나는 너를 팀에서 내보낼 수 밖에 없다. 나는 선수가 내게 그 따위로 말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 그것은 내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나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좋아요. 그게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이라고 말해버렸다. 그러나 내가 너무 심했다는 깨달았고 결국 사과를 했다. 퍼거슨은 자신에게 보다는 팀 동료들에게 사과하라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사무실을 나설 때, 감독은 이번 일은 그냥 지나치겠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그러나 나는 감독이 여전히 속상해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라커룸에서 선수들에게 사과를 했다. 그러나 나는 감독이 내 사과를 귀담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불화가 치유되고 나자 슈마이켈은 맨유의 타이틀 수성에 도움을 줬다. 맨유는 1996, 1997, 1999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을 안게 되었다. 1999년은 슈마이켈이 맨유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이었다. 그리고 전례가 없던 트레블을 달성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해내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출장정지를 받은 로이 킨을 대신해 주장완장을 차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슈마이켈과 맨유는 바이에른 뮌헨에게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이는 슈마이켈이 맨유선수로서 보여준 마지막 모습이 됐다. 슈마이켈은 삶의 변화를 위해 포르투갈의 스포르팅 리스본으로 이적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슈마이켈은 잉글랜드 축구의 고된 일정에 지쳐있었다. 그러나 스포르팅 리스본에서 2년을 보낸 그는 아스톤빌라에게 프리미어리그 컴백을 제의 받았다.
슈마이켈은 아스톤빌라에서 단 한 시즌을 보냈으나 과거의 기량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2001년 10월에 벌어진 에버튼전에서 골을 터뜨리며 프리미어리그에서 득점한 첫 골키퍼가 되기도 했다. 슈마이켈은 그 이전인 1995년에도 볼로그라드와의 UEFA컵 경기에서 골을 넣은 적이 있었다.
슈마이켈은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맨유의 영원한 라이벌 맨체스터 시티에서 보냈지만 그의 이적에 대한 커다란 논란은 없었다.
슈마이켈이 예전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함에 따라, 맨유의 팬들은 그의 이적을 용서하는 분위기를 보여줬다. 사실 맨시티의 리그 성적은 맨유에게 그다지 위협적이 되지 못했다.
↑1999년은 슈마이켈이 맨유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이었다. 그리고 전례가 없던 트레블을 달성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해내었다.
그러나 슈마이켈은 맨시티에서도 맨체스터 더비에서는 패하지 않던 기록을 이어나갔다. 그 해 맨시티는 맨유를 홈에서 3-1로 꺾었다.
피터 슈마이켈은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이었고, 요즘에도 그의 능력을 본받으려는 노력들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 볼만 하다.
슈마이켈이 바꿔놓은 골키퍼의 개념 중 가장 커다란 것은 공격을 이어나가는 엄청난 스로인 능력일 것이다. 맨유는 수비에서 공격으로 재빨리 전환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는데, 이 때 슈마이켈은 양 사이드로 달려가는 베컴과 긱스에게 긴 스로인을 연결해주었다.
이러한 모습은 최근에 벌어진 맨유와 레딩의 FA컵 경기에서도 재현됐다. 맨유의 쿠슈차크는 거의 하프라인 근처까지 공을 던져 박지성에게 공을 연결했고, 박지성은 다시 영리한 침투패스로 호날두에게 찬스를 만들어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호날두는 너무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슈마이켈은 아주 훌륭한 보컬 골키퍼(vocal goalkeeper)이기도 했다. 그는 스티브 브루스나 개리 팔리스터 같은 중앙수비수들에게 불만 사항을 재빨리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러한 자세는 골키퍼에게 무척 중요하다. 수비수들은 자신들의 뒤에서 지시를 내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슈마이켈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지휘관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훌륭한 골키퍼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는 상대의 슈팅을 막아내는 재능이다. 아마 슈마이켈은 잠을 자면서도 선방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슈마이켈은 월드 클래스급의 선방들을 매 시즌 보여줬고 맨유를 패배의 수렁에서 구해낸 적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팬들의 기억에 가장 깊게 남아있는 장면은 1996년의 맨유-뉴캐슬전의 모습일 것이다. 맨유는 리그 우승을 다투던 뉴캐슬에게 끌려가고 있었고 그 경기를 패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슈마이켈은 계속된 선방을 펼치며 뉴캐슬의 득점을 저지했고, 맨유는 에릭 칸토나의 결승골로 경기를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승리로 인해 맨유는 리그 우승에 한발 짝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프리미어리그의 창설 이후 슈마이켈만큼 인상적인 골키퍼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물론 그보다 더 나은 기량을 가진 선수가 없었음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charisma (카리스마 ) 라는 말은 본래 '신의 권능을 위임받은 사제의 위엄'이란 뜻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뜻으로보다는 '좌중을 휘어잡는 강한 리더쉽'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그럼 그 카리스마가 가장 돋보이는 선수는 누구일까. 독일의 마테우스나 브라질의 둥가도
'한 카리스마' 하지만, 덴마크의 철벽 수문장 페테르 슈마이헬의 카리스마도
결코 그들에 뒤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만히 한 번 생각을 해 보자. 우리가 스트라이커가 되어서
(개인의 취향에 따라 호나우도같은 타입이라도 좋겠고 라울같은 타입이라도 무방하겠다)
공을 몰고 상대방 진영으로 드리블을 해 들어가고 있다고 말이다.
거의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수비수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겨우 골문앞까지 다다랐는데,
골문 앞에 키가 193cm에 체중이 94Kg이나 되는 거인(!)이 턱하니 버티고 서서
' 넣을 재주 있으면 한 번 넣어봐라 ' 는 듯이 미동도 안하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면?
순간 숨이 '헉'하고 멎으면서 약간의 공포감마저 느껴질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수비수(그것도 스위퍼같은 최종 수비수) 라면 어떨까.
상대방 스트라이커가 워낙에 빠르고 발재간이 좋아서 아무리 달라붙어도 도무지 막을 수가 없다면,
그래서 번번히 수비가 뚫려 버리기 일쑤라면 일종의 절망감마저 들지 않을까.
그러나 뒤쪽에 세계 최고의 골키퍼가 골문을 지키고 서 있고,
그래서 가끔 뒤돌아 그를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놓인다면 그 골키퍼의 존재는
팀 전체의 분위기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이 덴마크 팀 &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피터 슈마이겔 의 존재였다.
어떤 사람에게서 '그는 마치 다른 선수들의 아버지 같은 느낌을 준다'는 평을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
이 말은 그의 카리스마를 정확하게 집어낸 표현이다.
'지금까지 존재했었던 모든 선수들 중에서 드림 팀을 만든다면
그 팀의 골키퍼는 야신
(구 소련의 전설적인 골키퍼. 골키퍼에게 주어지는 가장 영광스러운 상인 '야신 상'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검은 유니폼을 즐겨 입어서 '흑곰'ㅡ무슨 조폭같지만ㅡ이란 별명을 갖고 있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요즘도 골키퍼들은 검은 색이나 그 비슷한 계통의 짙은 색 유니폼들을 즐겨입는다)이 될 것이고,
그에 맞설 팀을 만든다면 그 팀의 골키퍼는 슈마이겔이 될 것이다'라는 찬사를 듣는 슈마이겔은
1963년 11월 18일 덴마크 Gladsaxe에서 태어났다.
(브라질의 옛주장 둥가하고 동갑이다.
아울러 두 사람은 메이저급 스포츠 메이커인 Reebok의 모델이기도 했다)
여타의 다른 선수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그 또한 아주 어렸을 적부터 동네 꼬마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면서 자랐는데 이 때부터도 골키퍼는 늘 그의 몫이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물론 그의 키가 큰 탓도 있었지만 다름이 아니라
' 드리블을 잘 하지 못했기 때문 ????
(그의 말을 빌리자면...... 하기야 그러고 보니 별로 드리블 잘 하게 생기지는 않았다. ^^)에
친구들이 다른 포지션을 시켜주지 않아서'였다는데, 지금으로선 좀 상상이 안 된다.
ㅡ어린 슈마이엘이 골대 앞에 서서 조금은 부루퉁한 얼굴로
(자기도 스트라이커 하고 싶은데 안 시켜주니까) 골키퍼를 서고 있는 모습 말이다.
(당시에도 또래들보다 키는 훨씬 컸을테니 더 그렇다)
물론 그의 말마따나 상황은 이제 바뀌었고,
이젠 감히 그 누구도 그의 드리블 실력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할 수는 없게끔 되었지만.
그는 25세가 되던 1987년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Newcastle팀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는다.
축구에서의 골키퍼라는 포지션은 그야말로 '대기만성'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 포지션이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축구계에서는
30이 넘지 않은 골키퍼에 대해서는 감히 잘한다 못한다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골키퍼에게는 재능보다는 경륜이 더욱 중요하다는 얘기다. 보통 30넘은 스트라이커는 심한 말로 퇴물 취급을 받지만 골키퍼는 나이가 들수록 그 가치가 높아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5세라는 나이는 골키퍼로서는 거의 햇병아리나 다름없는 나이였는데도
눈 날카롭기로 소문난 영국 프로축구의 스카우터들이 그를 지목했다는 것으로 봐서도 그의 재능을 짐작할 수 있겠다.
1년 후 그는 약관 26세의 나이로(골키퍼로서는 정말 '약관'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덴마크 대표팀에 뽑힌다.
이때부터 그의 'Brilliant saver'로서의 능력은 그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1988년 European Championship 결승전에서의 선방으로 그 존재를 알리기 시작하더니,
4년 후 열린 1992년 European Championship에서는
네덜란드와의 준결승전과 독일과의 결승전에서 특유의
'든든한(정말 그에게 이 이상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방어로 조국 덴마크를 우승시키며 그 해의 World Best Goalkeeper로 선정되었다. 1996년, FA cup과 Premireship
동반 우승으로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낸다
그리고 1998년, 그는 나이지리아를 꺾고 8강에 올라 최강 브라질을 쩔쩔매게 만든 덴마크의 소위
'붉은 폭풍'의 숨은 주역으로서, 다시 한 번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그라운드에서의 슈마이헬. 그는 골키퍼가 아니라 거의 감독이다.
그는 90분 내도록 목이 쉬도록 고함을 지르며 선수들을 독려하고(하긴 대부분의 골키퍼들이 다 그렇게 하지만 슈마이헬의 경우는 어떨 땐 정말 무섭기까지 하다) 수비진이 허물어져 슈팅을 허용했을 때는 직접 그 슈팅을 막아낸다.
이 월드컵에서도 그는 세계에서 제일 빠른 공을 찬다는 카를로스의 슈팅을 아주 침착하게 펀칭해냈고(카를로스가 골문앞까지 공을 몰고 들어오면 대부분의 골키퍼들은 거의 사색이 된다.
하기야 시속 170Km짜리 캐논포를 명치같은 데라도 맞았다간 바로 즉사할 지경이니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나이지리아와의 8강전에서는 호나우도 못지 않은 천재라는 누완코 카누와의 1 : 1 상황에서 거의 눈 하나 깜짝 않고 그에게서 공을 빼앗아 버렸다. 이럴 때의 슈마이헬은 심한 말로 정말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인다.
피터 슈마이켈은 1970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의 전설적 골키퍼 고든 뱅크스가 펠레의 예술적인 슛을 믿을 수 없는 반사 작용과 활처럼 휘는 탄력으로써 막아낸 기적같은 장면을 기억한다.
그렇다. 그것은 실제로 기적이었다. 슈마이켈은 지금도 그 장면이야말로 한 사람의 골키퍼가 해낼 수 있는 최선의 플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피터 슈마이켈은 어느 순간 그토록 존경해 마지 않는 고든 뱅크스의 플레이와 닮은 것을 해낸 자신을 깨닫게 된다.
때는 고든 뱅크스와 펠레의 대결로부터 26년이 지난 1996년,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오스트리아의 명문 래피드 비엔나를 상대하고 있었다. 비엔나 팀의 르네 와그너는 자신의 헤딩 슛이 골대 안으로 쏜살같이 빨려 들어간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슈마이켈은 믿을 수 없는 반사 동작으로 오른쪽으로 다이빙, 볼에 도달했고 그것은 눈깜짝할 새도 안되는 찰나에 이루어졌다. 더욱 놀랍게도 슈마이켈은 단지 그 볼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크로스바 너머로 떠넘기는 데에 성공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 순간 26년전의 고든 뱅크스를 떠올렸다.
이 기적의 방어로부터 일년이 지난 후, 피터 슈마이켈은 어린 시절의 우상 고든 뱅크스를 만나 대화할 기회를 갖게 된다. 슈마이켈은 고든을 만났던 일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대단한 순간의 하나라고 말한다.
당시 고든 뱅크스는 슈마이켈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의 방어가 더 좋았어!" 슈마이켈은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나는 고든의 말이 예의바른 칭찬에 불과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 느낌은 전율할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슈마이켈의 마술이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진 것은 1992년 스웨덴에서 벌어진 "유럽 축구 선수권"에서였다. 그는 조국 덴마크가 제재 중인 유고 대신 출전한 그 대회에서 무수한 선방들을 기록했다.
슈마이켈은 네덜란드와의 준결승 전 승부차기에서 마르코 반 바스텐의 페널티킥을 막아낸 후, 독일과의 결승전에서는 더욱 놀라운 여러 개의 방어들을 보여준다. 그 순간 이후 그는 골키퍼의 교과서라 불리웠고 아직도 많은 전문가들은 우수한 골키퍼 한 명이 팀을 우승시킬 수도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케이스로 피터 슈마이켈을 꼽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피터 슈마이켈은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황금기의 중심에 있었고, 그 팀에게도 세계 챔피언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그 위대한 골키퍼의 방어들 없이 맨체스터의 시대가 가능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리고 맨체스터가 모든 것을 성취했을 때, 놀랍게도 슈마이켈은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많은 팬들에겐 충격이었지만 슈마이켈은 그 문제에 관해 오래도록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이를 느끼고 있었고, 더 이상 잉글랜드에서의 수많은 경기 일정을 소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자신이 느려지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경기와 경기 사이에 보다 많은 휴식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은퇴를 선언한 피터 슈마이켈 .........
우리는 이제 그 위대한 골키퍼를 적어도 그라운드에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축구가 지속되는 한, 우리가 그의 이름을 위대한 선배들인 레프 야신, 고든 뱅크스, 셉 마이어, 디노 조프 등과 함께 계속 역사 속에서 접할 것임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모든전문가들이 역대 최고의 골리를 뽑는 부분에서
레프 야신 고든 뱅크스 디노 조프와 함께 피터를 뽑는이유는
아마 , 그를 정확하게 아는사람만이 평가할수있듯이
전성기때 제2의 야신 이라고도 불리기도 하였으며,
그 에대한 코멘트는 대부분 공포에 가까웠습니다
칸에 대하면 " 대단하다.. 정말 대단하다 하지만"
슈마이켈은 보통 "두렵다 , 무섭다 " 고까지 표현을하였다.
그가 있으면 골대가 작아보인다는 말도 있을정도로 얼마나 강인한 사람이였는지 알수있었을것입니다
역대 금세기를 빛낸 골리 50인에서
8위를 랭크하며 그의 위대함을 알게해주었으며 ,
60, 70년대는 야신과 뱅크스
70, 80년대는 디노조프 와 짱가
90년대에는 슈마이겔그리고 칠라베르트가 위대한계보를 이어나갔습니다
그이후의 00년대를 칸이나 부폰이 이어나가게 됩니다
또한 무려 10년정도 0점대 방어율을 자랑했던 그는
분명 모든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위대한 골리의 한 자리를 차지한건 명백한 사실이기때문...
그는, 덴마크를 엄청난 재능으로 유럽선수권에서 우승을 시켰으며
98년 월드컵에서는 8강을 이끌었고
리버풀의 사건으로인하여 출전 금지까지받았던 ,
잉글랜드리그 클럽팀들의 침체기 시절 부흥기를 일으켰던 맨유라는 클럽에서
맨유의 창립 역사상 전성기 ( 물론 버스비경 시절이나 도허티 같은 시절도 경이로웠죠 )를
이끌었던 위대한 골리,
그리고 빅클럽 최초의 트레블까지 달성을 한 선수이기도합니다
월드컵 트로피만 빼놓고는 모든걸 다 이루었던 선수였으며
골리 최초로 MVP까지 받기도했으며,
골리임에도 불구하고 팀의 간판이였으며 , 신이라고 칭송을 받기도했습니다
아스날에서 왜 베르캄프가 페널트킥을 차지않았던 그 이유
바로 피터때문이기도했죠
그 유명한 긱스의 '매직드리볼'이 펼쳐졌던 FA컵 경기에서 아스날이
페널트킥을 얻어냈습니다. 키커는 베르캄프였죠.
베르캄프는 오른쪽으로 슛을 때리지만 슈마이헬은 막아냈습니다.
베르캄프가 말하기를,
"난 슈마이헬의 움직임을 보고 분명 반대로 찼다.
하지만 그는 내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움직임으로 슛을 막아냈다고.
두려웠다고" 말을하였으며
그 후로 베르캄프는 페널트킥을 차지않았습니다.
베르캄프의 페널트킥공포증은 그의 비행기공포증과 함께 유명하지요
유로92에서는 신들린 활약으로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덴마크 축구사의 가장 화려한 페이지에서 라우드럽 형제와 함께 누구보다
큰 획을 그은선수입니다.
1988년부터 1998년까지는 (10년동안)
전세계 축구전문가들 모두가 만장일치로
지목한 부동의 세계최고 골키퍼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만이 그의 전부는 아닌 부분도 존재하였다는사실은 누가 쉽게 예상할까요 ....
' 골키퍼로서 당신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그는 '체격이 좋다는 것 빼고는 없다'라고 대답한다.
(물론 본인 말고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라운드에서는 카리스마와 냉철함으로 똘똘 뭉친 팀의 기둥이지만
사생활로 돌아오면 가족들과 함께 여행다니기를 좋아하고
(특히 따뜻한 곳으로) 클래식 피아노곡를 즐겨 연주하는
'부드러운 남자'이기도 하다.
P.S: 그는 기록 하나만으로 평가할수있는 선수가 절대아니였으며,
기록도 기록이지만
그것을 뛰어넘는것들이 그에겐 존재했습니다
그라운드 위에 또 하나의 감독 겸임을 맡았던 ....
그것이 바로 위대한 칭송을 얻고있는 피터이죠
아스날 웽거 교수님 曰 : " 피터는 승점 15점을 가진채 리그를 시작하는 것과 같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좋은글 읽고 갑니다.
당시 최대의 라이벌 아스날의 교수님과 베르기옹이 이런말했으면 뭐 ㄷㄷㄷㄷㄷㄷ
예전에 써서 올린건데 >_<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근데 공격수에게있어 더 위협적인 카리스마를 풍겼던건 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공 차기전에 움찔;;
본문에도 나와있지만 칸보다 보통 더 두렵다고표현한게 슈마이겔이였습니다 ^^;; 전문가들이 역대 최고의골리들중 야신,뱅크스,디노조프,슈마이겔을 이 네명4인방을 주로꼽죠
아 전 외모얘기했어요 ㅎ 늑대인간 칸.. 무서워요 ㅎㅎ
아 외모 ㅋㅋㅋㅋㅋㅋ 외모는 칸이 위죠 험악해서 ...;;;;
흠.....그런데 이글은 많이 본글인데..ㅋ
^^제가 예전에 올렸다가 여기에 다시올린거에요 생각나서 >_<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