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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7일 주일 [(녹) 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한국 교회는 해마다 1월 마지막 주일을 ‘해외 원조 주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03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해외 원조 사업에 대한 올바른 홍보와 신자들의 의식 강화를 도모하고자 ‘해외 원조 주일’을 정하였다. 오늘 특별 헌금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지의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원조에 쓰인다.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3주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임금이며 예언자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울려 퍼지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우리가 한마음 한 몸이 되어, 해방과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에즈라 사제가 나무 단 위에 올라 백성 앞에서 율법서를 펴자, 레위인들이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준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시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신다(복음). <레위인들은 율법서를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 느헤미야기의 말씀입니다. 8,2-4ㄱ.5-6.8-10 그 무렵 2 에즈라 사제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로 이루어진 회중 앞에 율법서를 가져왔다. 때는 일곱째 달 초하룻날이었다. 3 그는 ‘물 문’ 앞 광장에서,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4 율법 학자 에즈라는 이 일에 쓰려고 만든 나무 단 위에 섰다. 5 에즈라는 온 백성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폈다. 그가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섰다. 6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그런 다음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레위인들은 8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9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 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 10 에즈라가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12-30 형제 여러분,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6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7 온몸이 눈이라면 듣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온몸이 듣는 것뿐이면 냄새 맡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18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19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20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21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할 수도 없습니다. 22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23 우리는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쌉니다. 또 우리의 점잖지 못한 지체들이 아주 점잖게 다루어집니다. 24 그러나 우리의 점잖은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람 몸을 짜 맞추셨습니다. 25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28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9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30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1,1-4; 4,14-21 1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2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3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때에 4,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기름부음받은이’를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시며, 주님께서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당신을 파견하셨다고 선포하십니다. ‘기름’은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도 성령을 받아 파견된 사람이기에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거저 주어지지 않고 ‘일(사명)’과 함께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 성령을 부어 주시며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하셨습니다. 부모가 아기에게 사랑을 부어 주면, 아기는 부모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는 이들도 그 성령을 주시는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몸의 여러 기관들의 기능을 통하여 인간이 살 수 있는 것처럼, 교회도 성령의 여러 능력을 통하여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라고 말하듯, 성령께서는 주님 뜻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기쁨의 힘이십니다. 기쁨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갈라 5,22 참조).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기쁘게 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으셨기에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또한 베드로와 요한 사도도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성령을 받았다면 반드시 복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복음을 증언하되 기쁘게 증언해야 합니다. 복음 자체가 기쁜 소식이고, 그 기쁨을 전하는 이가 기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슬픈 그리스도는 없습니다.(전삼용 요셉 신부) |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교회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합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치르는 다양한 행사들, 오십 주년, 백 주년 기념식, 금경축, 은경축 행사, 결혼식, 장례식 등등, 실속도 없으면서, 외양만 거창하고 화려하길 꿈꾸는 우리에게,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행보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결말은 너무나 초라하고 졸속적인 우리들, 언제나 용두사미격인 우리들에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큽니다. 거창한 우리들의 시작과는 달리 예수님의 출발은 너무나 소박하고 단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 제일 잘 나가던 도시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장 변방이요 초라했던 지역,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나자렛은 전체 인구 400여명밖에 안되던 작은 촌락이었습니다. 기본 인구만 해도 4만 5천여명에 축제 기간에는 수십 만명의 순례객들이 왕래하던 수도 이스라엘과는 게임이 전혀 안되는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변방에서 시작해서 중심으로! ‘변두리 중심주의’ ‘외곽 중심중의’가 예수님의 기본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눈여겨봐야할 대목이 있습니다. 가장 변방에서 더없이 소박하게 시작하셨지만, 가장 실속있고 충실하게 시작하셨습니다. 나자렛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가 적힌 두루마리를 장엄하게 낭독하시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성령께서 함께 동반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복음 1장 18~19절)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이 성공리에 마칠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성령의 충만한 현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성령은 마치 신선한 한줄기 바람 같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미성숙과 어줍잖은 권위주의로 혼탁해진 교회 공기를 말끔히 환기시켜줍니다. 성령의 신선한 바람 없이 우리 교회는 앞으로 나아가기 참으로 힘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도록 자극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나도록 안내하십니다.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당신 입김을 불어 넣어주지 않으시면, 우리 교회는 자신의 좁은 울타리 안에 갇힌 폐쇄된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교회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등을 떠밀어 변방을 향해, 세상 끝으로 파견되도록 등을 떠미십니다. 복음을 선포하라고,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전달하라고 외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주시도록 우리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좀 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이끌어가시도록 성령의 바람에 우리를 온전히 맡겨드리면 좋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현존하실때, 그분께서 우리 공동체 안에 활발히 역사하실 때, 마치도 순풍에 돛단듯이 순조롭게 항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나의 행복이다>
1780년 청나라 건륭황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에서 파견된 사절단 가운데 박지원이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비록 벼슬은 없었어도 성리학에 빠져 있던 다른 사절단들과는 사뭇 다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명나라의 성리학을 숭상하던 양반들은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 만주족 사람들을 오랑캐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절단임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사람들은 물론 자신들을 맞아들이는 만주족 한인들에게까지도 무시하는 행동을 자주 하여 미움을 샀습니다. 공부에 대한 맛을 잃고 과거시험을 포기한 박지원은 오히려 청나라를 여행하며 놀라움과 기쁨에 ‘열하일기’라는 책을 씁니다. 당시 건륭황제가 열하라고 하는 곳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하까지 가기 위해 청나라를 여행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쓴 기행문입니다.
우선 청나라에 들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집을 짓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크기의 벽돌과 기왓장을 구워 빈틈없이 집을 지었습니다. 튼튼한 것은 당연하고 조선의 가옥처럼 뱀과 쥐가 드나드는 구멍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선 짚과 섞은 진흙으로 벽과 지붕을 만들어 비가 오면 무너지기 쉬웠고 갈라짐이 심해 쥐와 뱀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청나라식의 집짓기를 조선에도 들여야 한다고 열하일기에 썼지만 조선 양반들은 무식한 되놈들의 집짓기를 양반의 나라가 왜 따라야하느냐고 다들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가 또 놀랐던 것은 ‘길’이었습니다. 청나라는 길이 매우 잘 닦여있었고 마차의 사용이 매우 편하게 되어 있어서 문물의 이동이 원활하였습니다. 그러니 각자가 원하는 것들을 어느 지역에서나 어렵지 않게 싸게 팔 수 있었습니다.
반면 조선은 길이 거의 닦이지 않아 각 지역의 특산품은 거의 그 지역에서 소비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그것들을 다른 지역에서 사려면 엄청난 가격을 지불해야했습니다. 그러니 국경지대에 사는 청나라 상인들은 조선의 안 좋은 도로사정을 이용해 자신들 나라의 물건들을 싼 값에 사서 조선에서 비싸게 팔며 큰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박지원은 빨리 조선도 길을 닦아 문물교환이 쉬워져야 돈이 청나라로 빠져나가지 않고 국고도 튼튼해질 수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길을 내면 외적의 침입만 용이하게 만들뿐 다 소용없다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문체가 너무 천박하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하여 사람들이 읽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참조: ‘금서가 된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써에이스쇼, 유튜브]
청나라에서 함께 다닐 때 박지원과 그가 동행한 양반이나 학자들과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박지원은 청나라의 문명에 놀랐고 더 많은 것들을 보기 원했습니다. 사절단이 청나라를 깔보는 행위에 건륭황제가 화가 나서 이들을 귀향 보내려 했을 때 박지원은 오히려 더 많은 청나라 문물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 내심 기뻐했다고 합니다. 더 머물고 싶었다면 행복했다는 말입니다.
반면 양반들은 아예 청나라를 깔보면서 빨리 빠져나오는 것만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거만한 자세로 당시 조선에 비할 바가 안 되는 엄청난 부와 문물을 소유했던 청나라 사람들을 깔보며 자신들을 들여 높이려 하였습니다. 기분이 나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조선에 돌아와서는 야만적인 만주족들이 세운 청나라에서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누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일까요? 바로 기쁜 소식을 접하고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기뻐야 전하고 싶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전합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기쁘면 기쁜 소식을 전하게 돼 있고, 내가 우울하면 우울한 이야기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먼저 그 복음이 나의 것이 되어야합니다. 짜증난 표정으로 복음을 전해봐야 짜증을 전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이는 반드시 기뻐야합니다. 누구를 만나도 기뻐야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기뻐야 그 안에 기쁜 소식을 품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며 일부러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더 아픈 사람입니다. 내가 아프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낄 수 없어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면서도 알아차리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아픈데 더 아플까봐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기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빨리 그 기쁨을 전해주기 위해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행복하면 “나는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족이 함께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하다면 “저는 여기 누군가 때문에 행복하지 못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이웃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는 사람인지 알아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괜히 불안하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편안하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불안하고 어떤 사람은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바로 나의 행복입니다.
이를 위해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과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것입니다. 나의 행복이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면 주위 사람들이 나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혼자 있어도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이란 바로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 있는 기술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기도의 능력’인 것입니다. 기도할 줄 알면 성령으로 행복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이기 때문입니다(갈라 5,22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가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가 기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이는 마치 빵장사를 하는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하여 허기진 것과 같습니다. 누가 그 빵을 믿고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우리 마음 안에 기쁨이 솟구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나의 행복입니다. 이웃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성령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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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녀 안젤라 메리치(Angela Merici)
신분 : 동정녀, 3회원, 설립자
활동지역 : 브레시아(Brescia)
활동연도 : 1470/1474-1540년
같은이름 : 앤젤라, 엔젤라
성녀 안젤라 메리치는 이탈리아 북부의 가르다(Garda) 호수 남쪽 데센자노(Desenzano)에서 태어나 경건한 신앙인으로 교육받았다. 어려서부터 성인전을 즐겨 읽었고, 성인들의 금욕 생활에 감명을 받아 금욕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13세 때 첫영성체를 한 후 평생 동안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는데, 쌍둥이같이 자라던 15세의 언니와 브레시아 시민이라는 귀족 작위와 넓은 땅을 가진 영주였던 아버지 조반니(Giovanni Merici)와 어머니를 연달아 여의고 외삼촌의 보살핌을 받으며 5년간 휴양지로 유명한 살로(Salo)에서 살게 되었다.
그 후 성녀 안젤라는 작은 형제회 재속회(3회)에 입회하여 기도와 가난, 극기의 생활을 철저히 실천하며 자신을 이웃을 위한 속죄의 제물로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부모처럼 돌보아주던 외삼촌의 사망 후 고향 데센자노로 돌아온 성녀 안젤라는 이웃에게 봉사하며 살았는데, 특히 주위의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기도와 신앙생활을 지도하였다. 1516년 안젤라는 두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브레시아의 귀족 파텐골라(Patengola) 가족을 위로하러 브레시아에 갔다가 그들의 청으로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이곳에서 성녀 안젤라는 죄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속죄와 금욕생활을 하는 한편 고향에서와 같이 청소년들에게 종교 교육을 실시하였다.
1524년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다음 해 로마를 순례한 뒤 그녀는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에게 동정녀들의 모임을 시작하고자 하는 뜻이 있음을 밝히고 허가를 받아 브레시아로 돌아왔다. 카알 5세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1528년 브레시아가 점령당하자 크레모나(Cremona)로 피난을 간 그녀는 그곳에서 심한 병을 앓다가 다시 건강을 회복하였다.
1530년 전쟁이 끝나 브레시아로 돌아온 성녀 안젤라는 뜻을 같이 하는 12명의 동정녀들과 함께 이듬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리고 1535년 11월 25일 28명의 동정녀들은 브레시아의 성 아프라(Afra) 성당에서 영성체를 하고 성녀 안젤라가 만든 규칙에 따라 청빈, 정결, 순명을 지키는 회원이 될 것을 서명함으로써 '우르술라회'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1537년 성녀 안젤라가 초대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들은 특히 소녀들의 교육에 투신하고자 하였다. 가톨릭 여성 교육을 표방한 수녀회는 우르술라회가 첫 번째이다. 초기에 그들은 가족을 떠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수도복이 아닌 단순한 복장으로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방문하여 그들에게 봉사하였다. 성녀 안젤라는 1540년 1월 27일 사망하여 성 아프라 성당에 묻혔고, 1768년 교황 클레멘스 8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시성되었다.